친일문인열전(스크롤 압박, 정치색 없음)
글쓴이 : 에뜨랑제
글머리에,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은
민족반역자를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① 조선을 일본제국주의에 매도한 매국노와 그 관계자 ② 유작자(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중추원 고문, 중추원 참의, 관선 도道부部평의원 ③ 일본제국주의 통치 시대의 고관(총독부 국장, 지사 등) ④ 경찰,
헌병의 고급관리(경시, 사관급) ⑤ 군사, 고등정치경찰의 악질분자(경시, 사관급 이하라도 인민의 원한의 표적인 자) ⑥ 군사,
고등정치경찰의 비밀탐정 책임자 ⑦ 행정, 사법경찰을 통하여 극히 악질분자로서 인민의 원한의 표적인 자 ⑧ 황민화 운동, 내선융화
운동, 지원병, 학병, 징용, 창씨 등의 문제에 관한 이론적, 정치적 지도자 ⑨ 군수산업의 책임자 ⑩ 전쟁협조를 목적으로 하는,
또는 파쇼적 성질을 가진 단체(일의당, 일심회, 록기연맹, 일진회, 국민협회, 총력연맹, 대화동맹 등)의 주요 책임 간부
이
규정을 찬찬히 살펴보면 대단히 구체적입니다. 아울러 '억울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세세하게 그 범위를 밝혀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지 일본제국주의 기관에 종사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친일민족반역자'라 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징병으로 끌려갔던 분들은 분명히 제국주의의 침략행위에 복무했지만, 그것은 결코 그 자신의 의사능력으로 이루어진 행위가 아닌, '피착취'의 한
형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친일민족반역자'라 함은 그 자신의 자발적 의사로 일본제국주의 침탈 행위에 복무한 자들을 지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 중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또 이들 중 몇이나 우리의 교과서에서 '민족지사'로 탈바꿈해 있을까요? 이 글은 그러한 의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되풀이 되는 일본의 망언 또한 이 글을 쓰게 만든 중요한 추동요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전의 글에서 밝혔듯이 저는 시를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글쟁이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쓰고자 하는 내용은 다름
아닌 40여명의 대표적 친일작가들과 그들의 친일작품에 관한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작품을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음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글은 그들의 대표적 친일매국주의 작품의 제목만을 소개하기에도 벅찰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부분은 강호에
암약하고 계시는 여러 고수님들께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이 글에서 인용하는 작품들은, 제목과 몸말 '모두' 친일매국적인 내용임을 미리 밝혀
드립니다.
네 얼굴에 침을 뱉으마, 친일매국노들아.
그러면 한 명씩
얘기할렵니다. 그 숫자가 너무 많은 관계로 절반(20여명)씩 나누어 쓰는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1. 친일문학의 영원한 '오야붕', 이광수.
너무나 유명한 자이기에 소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씨개명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식 이름을 일본식으로 억지로 고치라는 건데, 당시 이광수는 1940년 1월 15일자 ≪매일신보≫에
『선시고심담』이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내용을 한 번 볼까요?
"지금으로부터
2천 6백년 전 신부천황께옵서 어(御)즉위를 하신 곳이 가시와라(原)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가구야마(香久山)입니다. 뜻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아 '香山'이라 한 것인데, 그 밑에다 '光洙'의 '光'자를 붙이고, '洙'자는 내지식(內地式)의 '郞'으로 고치어, '香山光郞'이라 한
것입니다."
아부도 이쯤되면 가히 예술의 수준에 이른 것이지요. 그는 ≪녹기≫
1943년 1월호에는 詩 『전망』을, ≪매일신보≫ 1943년 11눨 4일자에는 시 『조선의학도여』를, 1944년 1월 1일자에는 시 『새해』를,
1945년 1월 18일자에는 시 『모든 것을 바치리』를, 1941년 9월 3일에서 5일까지 평론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1940년 9월
5일에서 12일까지 소설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를 발표했고, 잡지 ≪신시대≫ 1941년 1월호에서 3월호까지 소설 『그들의 사랑』을
연재했으며, 잡지 ≪삼천리≫ 1940년 7월호에 수필 『성전 3주년』을, 같은 호에 수필 『母妹妻에게』를, 1940년 5월호에 수필 『지원병
훈련소 방문기』를 기고했고, 또 ≪동아일보≫에 1924년 1월 2일에서 6일까지 수필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중 시 『모든 것을
바치리』의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황은지극(皇恩至極)하옵시니/피로써 나라를
지키라고 말씀하옵신 지 얼마 안되어 이제 또/정치력으로 황철(皇澈)을 익찬(翼贊)하여 받들라고 하옵신다./조선의 아들들이 총을 들고 전선에서
싸우는 것과 같이 충성스런/경륜을 안고 의정단상(議政壇上)에 나서리./병역의 엄숙한 의무이며 존귀한 황민(皇民)의 특권이었듯이 국정/참여는
공민(公民)의 특권인 동시에 극히 엄숙한 의무이니라./황국은 앞서 삼천만의 폐하의 고굉을 더하였음과 같이 황국은/이제 또 삼천만의 보필(輔弼)의
신(臣)을 더하였다./일억일체(一億一體)로 황국을 지키사 일억일체로 황모(皇謨)를/익찬하자. 이제 피(被)와 차(此)가 없다. 오직 하나니라./
2. 천재의 붓에서 역사왜곡의 팔방미인으로, 최남선.
일제시기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던 자들이 있습니다. 이광수, 최남선, 홍명희가 그들인데요, 이들 셋 중 홍명희를
제외한 둘이 '친일'로 변절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글재주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서 가장 높이 평가를 받던 자가 바로 최남선이었습니다. 최초의
신체시라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작자와 기미독립선언문의 초안자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그는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후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거쳐 만주건국대학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어 우리 고대사를 축소, 왜곡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뛰어난 문장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주구 노릇을
하느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최남선은 ≪매일신보≫ 1943년 1월 11일자에 수필 『아세아의 밤』을, 1943년 11월 20일자에 논설
『가라! 청년학도여』을 발표하였고, 잡지 ≪신시대≫ 1944년 2월호에 『성전의 선물』을 발표하였습니다. 물론 친일매국의 냄새가 진동을 하는
글이지요. 아래는 『가라! 청년학도여』의 일부분입니다.
"청년학도 제군! 역사
있은 이래의 성전인 금번의 대동아전쟁은 지금 바야흐로 결전단계에 들어가서 마침내 우리 청년학도들의 출진을 요망하게 된 것이다. 청년다운 정열과
학도로서의 예지를 쏟아서 우리들이 독특한 공헌을 이 세기적 성업에 이바지하게 됨은 실로 남자로서 태어난 보람이 있는 감격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중략)...제군! 대동아의 성전은 이름 비록 동아(東亞)이지마는 이는 실로 신시대, 신문화의 창조운동이며 세계 역사의 개조이다.
바라건대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발휘하여 부여된 광영의 이 기회에 분발, 용약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3. 대표적 가짜 민족지사, 박종화.
한
켠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민족작가라 주장하는 자입니다. 일제 말기에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문인보국대(文人報國隊)에도 참가하지 않았으며,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명월관(明月館)에 초대했을 때는 보국대에 참가한 문인들과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 그 근거인데요. 술 먹고
싸움질 한 것으로 민족작가가 결정된다면, 아마 일제시대의 거의 모든 문인들이 포함될 겁니다.
그가 친일반역자라는 것은 그의 글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증거를 대도록 하지요. 박종화는 ≪매일신보≫ 1944년 8월 27일에서 9월 2일에 걸쳐 연재된 수필 『동양은 동양사람의 것』 中, 『입영의 아침』에서 반도청년들의
황군입영을 노골적으로 찬양, 강요하였습니다. 그래도 민족작가라고요?
4. 외세에 빌붙은 자의
썩은 낭만, 주요한.
주요한은 초등학교 졸업 후 도일,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등부와 도쿄 제1고등학교를 거쳐 3 ·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후장대학을 졸업하였고, 귀국 후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일제 말기에는 실업계에 투신하여 화신상회 중역으로
있었습니다.
8 ·15 광복 후에는 흥사단에 관계하는 한편 언론계에 진출하는 약삭빠른 변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국회의원을 거쳐
4 ·19 시민혁명 후 장면 내각 때는 부흥부장관, 상공부장관을 역임했고, 5 ·16 쿠테타 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습니다. 한마디로 양지만을 좆아 일생을 보낸 전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시대≫ 1941년 3월호에 시 『첫
피』를, 1942년 1월호에 시 『명기하라. 12월 8일(진주만 기습일)』을, 1944년 10월호에 시 『적 미국의 사상모략』, 1942년
1월호에 시 『루즈벨트여 답하라』를 발표했고, ≪국민문학≫ 1941년 11월호에 日文 『손에 손을』과 『댕기』를, 1943년 6월호에 평론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를 기고했으며, ≪매일신보≫ 1942년 12월 8일자에 시 『성전찬가』를 발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한은
민족주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시 『첫 피』의 全文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민족주의 시입니까.
나는 간다,/만세를 부르고/천황폐하 만세를/목껏 부르고/대륙의 풀밭에/피를 부리고/너보다 앞서서/나는 간다.//피는
뿜어서/누런 흙 우에/검게 엉기인다./형아! 아우야!/이 피는/너들의 피다./너들의 뜨거운 피가,/2천 3백만 너들의 피가/내 몸을
통해서/흐르는 것이다./역사가 생긴 이래/처음으로/뿌려지는 피다./반도의 무리가/님께 바친/처음의 피다.//.........../나는 내
피에/고개를 숙이어/절한다./그것은/너들의 피기 까닭에,/장차 내 뒤를 따라올/백과 천과 만의/너들의/뜨거운 피기
때문에./아아/간다,/나는/너보다 앞서서/한자욱 앞서서,/만세, 만세
5.
예술지상주의자의 자발적 친일, 김동인.
≪창조≫의 발간인이기도 한 김동인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순문학자,
그야말로 결벽증에 가까운 예술지상주의자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문학 이외의 경력이나 이력 같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오직 소설의 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것이라는 말인데요. 그러나 이러한 점은 사실 특정 시기 김동인의 문학적 삶에 해당할 뿐, 1930년대 후반기 이후의 문학적 삶은 오히려
이를 정면으로 뒤집은 형국입니다. 훼절의 길로 접어들자 김동인의 정신적 파탄은 차츰 도를 더해 갔습니다.
이와 상관관계가 깊은
병마까지 항상 그를 에워싸니 그의 삶은 곧잘 상식을 벗어나 비정상적인 양태까지 노출하고 만 것이지요. 그는 놀랍게도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자진해서
일제에 협력하고자 총독부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김동인의 행적을 한 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는 ≪매일신보≫ 1944년 1월
1일에서 4일까지 『총동원 태세로』를, 1944년 1월 20일에는『일장기의 물결』을, 1944년 1월 18일에서 28일까지는 『반도민중의
황민화』를 발표했습니다. 문단에서는 그의 행적을 두고 비극적 천재라는 말로 안타까워하기도 하는데요, 그의 마지막이 너무도 비참했던 까닭입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정확히 언제이지도 모르게 홀로 고독히 죽어갔으니까요. ≪매일신보≫에 실린 그의 또다른 글을 읽어 보도록 하지요.
신병으로 붓대를 놓은 지 만 2년, 행여 좀 차도가 있을까 하여 반 년나마를
기다리다가 종래 차도를 보지 못하고 '정필편'의 일문(一文)을 초한 뒤에 아주 붓을 던진 지 어언간 1년 반이 되었다. 한때는 절망상태였다.
다시 붓을 잡을 가망이 없었다. 재재작년(1938년) 겨울에 중환을 앓았다. 때는 마침 일지사변(日支事變)이 최고조에 달하여 한커우(漢口),
광둥(廣東) 모두 우리 손에 들어오고 국민의 애국세(愛國勢)는 그칠 바 모르게 올라가서 황군(皇軍)에게 대한 감사의 염(念)과 격려의 성(聲)이
격우격(激又激)한 때였다. 초동(初動)할 수 없는 중병에 누워서 매일 신문을 보면서 여기 미조(微助)도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이 여기고 자탄해
마지 않았다.
더욱이 각 단체 각방이 앞을 다투면서 위문이라 헌금이라 할 때 문사층에서 잠자코 있는 것이 부끄럽기 한량없다.
...(중략)... 11월 중순(1938년)에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게끔 되었다. 즉시 택시로 총독부를 달려갔다. 학무국의 문을 두드렸다.
당국의 내락만 있으면 문사 가운데서 대표 몇 사람을 뽑아서 현지에 보내서 황군노고와 충용의 실정을 조사하여 조선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다.
국어(일본어)를 모르는 대다수 민중은 간단한 신문 이상의 실정은 모르는 바니, 이 불철저를 해소하고 싶다.
이렇게 원하였더니
당국에서는 대답이, 지금 위문이라 시찰이라 너무 많이 가므로 현지군에서도 매우 귀찮게 알고 또 그 보호의 폐가 하도 군 행동에 방해가 되어
가급적 막는 형편이다.……하니 우리로서도 찬성하기 힘들다. 가미시바이(그림연극) 창작에나 어디 유의하여 보자 하는 것이었다. 너무 머리의
생각과는 어긋나는 대답이므로 그냥 물러 나오고 말았다.(≪매일신보≫ 1941. 3.23∼29)
6. 제자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김안서(김억)
김억은 오산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를 중퇴한 후, 모교인 오산중학과 평양 숭덕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동아일보≫와 경성방송국에서도 근무하였습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등을 지낸 자입니다.
8.15 광복 후에는
출판사 "수선사"의 주간을 지내던 중,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 의하여 출판사 교정원(1952), 신병으로 요양소에 입소(1954.4), 그
후 북한의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강제 임명 되었으나 (1956.7), 곧 평북 철산 지방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1958). 그 후의 그의 생사는 알 길이 없습니다. 참으로 친일파에게 어울리는 최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민족시인 김소월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는 김억은, ≪매일신보≫ 1942년 1월 23일자에
시 『신년송』을, 1944년 12월 7일자에는 『님따라 나서자』를 발표하였습니다. 제자의 삶과
비교한다면 창피하기 짝이 없는 삶을 걸어간 그가, 저승에서 김소월을 만난다면 무어라 변명할지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7.
얻은 것은 변절이요 잃은 것은 양심이다, 박영희.
그 시작은 낭만주의적인 탐미적 시인이었으나, 그 끝은 민족반역자인
자입니다. 그는 1925년에 ≪개벽≫지에 단편소설 『사냥개』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속하게 되어, 이 해에 김기진과 함께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를 조직,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가담하여 그 지도적인 인물로서 좌파적 평론을
썼습니다.
그러나 1929년 이후 카프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기 시작, 1933년에 카프를 탈퇴하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궤변을 남기고 다시 예술주의로 복귀했습니다. 1939년에는 조선문인협희 간사가 된 후 일본 북지파견군(北支派遣軍)에
종군하고 요시무라(芳村香道)라고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총무국장으로 친일문학 운동에 종사했습니다.
1950년에 납북된 이후 소식불명랍니다. 그 변화무쌍함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인물이지요. 박영희는 ≪매일신보≫에 1941년 9월
11일에서 16일까지 평론 『문학의 새로운 과제』를 발표하였으며, ≪국민문학≫ 1941년 11월호에는 日文 평론『임전체제하의 문학과 문학의
임전체제』를, 1939년 ≪동양지광≫에 황군위문작가단으로 북지(北支)를 다녀온 후 쓴 기행문 『전선기행』을 발표하였습니다.
8. 친일작가 100명을 능가하는 황국신민의 서사, 김대우.
이 자는 작가는 아닙니다만, 그가 남긴
짧은 글 하나가 웬만한 친일작가 100명의 글보다 더 큰 악취를 풍기고 있는 연유로 소개합니다. 어찌 보면 진짜 '대문호'라 할 수 있지요.
그가 남긴 글(?)은 단 하나입니다. 황국신민의 서사. 이것이 그의 작품입니다.
총독부 사회교육과장, 전남, 경남 참여관,
전북,경북지사를 지낸 당대 최고위직의 친일매국노답게, 그의 글에는 일본을 향한 충성의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런 자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는 게 믿겨 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황국신민의 서사를 읽으신 후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동용과 성인용 모두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단, 읽으시고 난 후의 사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아동용)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성인용)
9. 조선민족을 발전적으로 해소하라, 김문집.
오에 류노스케(大江龍之介)라는 창씨명으로 더 유명했던 평론가입니다.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지내며 친일비평을
하다가,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8 ·15 광복 후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한 '진짜' 일본인입니다.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촉탁이자,
'조선문인협회'의 간사이기도 했던 이 자는 ≪조광≫지 1939년 9월호에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서설』이라는 글을 "민족 최후의 길은
황국신민으로서의 재생뿐" 이라 주장함으로써,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습니다.
10. 고쿠코(國語)
문예총독상 수상에 빛나는 비범한 청년, 김용제.
갓 스무살의 유학생으로 일본 프롤레타리아 시인회 간사와 사무국장을 지낸
'비범한 청년'. 카프 도쿄 지부장. 감옥생활 3년 뒤 40년대 극단적 친일.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6.25 뒤 흥사단 이사. 80년대,
신군부 전두환체제 아래 평통자문위원. 좌익 저항시집과 친일시집, 그리고 결코 역작이 아닌 『김삿갓 전기』. 이것이 김용제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입니다.
1943년 제 1회 '고쿠코(國語) 문예총독상' 을 수상하기도 한 그리 알려진 편이 아닌 친일매국노인 김용제는
≪동양지광≫ 1939년 4월호에 日文평론 『민족적감정의 내적 청산으로』를 발표했으며, 1939년 7월 日文시집인 『아세아 시집』을 출간하기도
합니다. 아울러 ≪매일신보≫ 1943년 8월 3일자엔 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를, ≪녹기≫ 1943년 2월호에는 日文 서사시
『어동정御東征』을 발표하는데요, 이 서사시는 일본 건국의 시조라는 '천황'이 일본 서남부 가고시마에서 동쪽으로 정벌해 나가는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 1943년에는 『보도시첩』이라는 시집을 통하여, 보도반원으로 전선에 나가 '황민화 운동'의 선두에 서서 조선청년들에게
황군에 입영할 것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 외에 ≪국민문학≫ 1942년 2월호에 日文 소설 『장정』을 발표하였습니다. 참으로 다재다능한 작가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시 『학병의 꽃』을 옮겨 놓습니다.
앞장서 지원한 그대에 이어/그리운 학모(學帽)를 바람에 버리고/새로운 군모(軍帽)의 별을 받들어/붓을 검(劍)으로,
서책(書冊)을 지도로 대신할 때/몇 만(萬)의 발자국은 청운(靑雲)을/소용돌이쳤다
11. 당신의 국경은 어디인가, 김동환.
자칭 타칭 최초의 서사시, 『국경의 밤』은 문학사에서
하나의 '기념비'와도 같은 위치에 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들이 누구냐구요? 당연히 관제 문학자들이지요. 저는 이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서사시는 1960년대 민족시인 신동엽의 『금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호흡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국정교과서는 우리에게, 친일매국노 김동환의 작품을 찬양하고 고무시켜 왔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더 이상 가짜가
진짜를 가리지 않도록 말이지요. 김동환의 친일행적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잡지 ≪삼천리≫의 경영자이기도 했던 그는 이 잡지를 ≪대동아≫로
이름을 바꿔 발행하면서 본격적인 친일의 붓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매일신보≫ 1940년 11월 19일자에 『신윤리의 수립』이라는 글을,
1942년 1월 13일에는 시 『米英 장송곡』을, 1943년 11월 6일엔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1944년 1월 6일에는 시 『적국
항복 받고지고』를 발표합니다.
또 자신이 발행하던 ≪삼천리≫ 1940년 7월호에 시평 『탄환과 펜의 인연』을, 1941년
11월호에는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하여』라는 글을 싣기도 합니다. 이런 자들이 평가받는 나라는 아마도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닐 터입니다. 그가 쓴
친일 시 중, "특별지원병에게 보내는 한 시인의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권군 취천명(勸君 就天命)』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대 안 나가면 어떻게 되나-/변호사를 하겠지, 교사나 중역이 되겠지./그러나
한편 남대문과 종로에 폭탄이 떨어지고/그대의 처자는 미영병(米英兵)에 모욕을 당하면 어떻게 하리./이 일은 파리 대학생과 이태리 학도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지 않았는가./'조국을 나아가 막지 않는 자엔 천벌이 내리느니라!'/또 그대가 안 나가고 이불을 쓰고 드러누울 수는
있겠나./명춘(明春)엔 동생되는 중학생 수만이 징병으로 나서고/보국대로 좌우 친화(左右親和)가 괭이 들고 자꾸 나서고/소년들까지 징용공으로
공장에 나갈 적에/양심 있고 의리 있는 그대, 나가지 말란들 그리 될까./어서 하루 급히 나서라, 벗이여, 학우여!/(≪매일신보≫,
1943.11.6)
12.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반환하라, 김소운.
고등학교적 교과서에 이 자의 수필이 실려 있었습니다.『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작품이었지요. 그 작품을 읽고 꽤나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허나 그 역시 민족의 혼을 외세에 팔아먹은 자라는 걸 알기까지는 불과 몇 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참담하고 또
슬펐습니다. 지금껏 제가 배운 것이 몽땅 거짓말의 문학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때 한동안 술을 많이 마셨었습니다.
이 땅에서
과연 제가 글을 쓰는 일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을 지, 저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국어교과서를 만든 자들을 찾아 말 그대로 '죽이고'
싶었습니다. 자, 그만 참고 김소운의 친일 행적이나 까발겨야겠습니다.
그는 ≪매일신보≫ 1943년 6월 8일자에 日文 시
『야마모토 원수의 국장일』과 『제장』을, 1943년 11월 21일자에는 수필 『부조(父祖)의 오명을 일소』를 발표합니다. 야마모토 원수는 당시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이었습니다. 이후 김소운은 198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銀冠)을 받았습니다. 친일매국노에게 문화훈장을 주는 희대의
학살자라, 썩 어울리는 한 쌍이군요.
13. '3.1 문화상'을 받은 민족반역자, 백철.
백철의 일생은
우리 현대사의 본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62년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대한민국예술원상, 국민훈장 모란장, 서울특별시문화상, 3·1
문화상 등 수상, 중앙대 대학원장 역임. 그의 이력 후반부에 보이는 꼬리표입니다.
단 한 번도 '주류'에서 벗어난 적 없는 그의
일생은, 그러므로 치욕이 되고 있습니다. 해방 이전부터 지금까지 한 세기가 넘도록 민족의 운명을 좌지우지해 온 그 주류들의 또다른 모습을 백철의
삶은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제시기 그는 이른바 '국민문학론'을 주장하는데요, 그는 자신의 국민문학론에서 "일본적인 것을 체내에 받아들여
충분히 씹고 소화하여 문학 속의 살아있는 생명의 흐름으로까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임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동양지광≫ 1939년 4월호에 『시국과 문화문제의 행방』을, ≪국민문학≫ 1942년 1월호에 평론 『낡음과 새로움』을,
1942년 11월호에 평론 『결의의 시대』발표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르포 『천황폐하 어친열 특별관함식
배관근기』라는 작품입니다. 제목이 좀 길지요. 해설을 덧붙이자면 "천황폐하께옵서 친히 열람하시는 특별관함식을 엎드려 구경한
기록"입니다.
느낌이 팍 오지요? 백철은 또한 눈치가 빠른 자였습니다. 1943년 봄에 그는 매일신보 베이징 지사장 겸 특파원
자격으로 베이징으로 향합니다. 그는 이것을 '도피행'이라고 자서전에서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지요. 그가 베이징에 도착하여 활동하고
있을 때, 그곳은 조선과는 달리 연안 지방의 독립 활동가들이 드나들 수 있었던 상황이라 조선내에서 느끼지 못하는 긴박감을 차츰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고, 세계의 현실이 그 동안 자신이 인식했던 것처럼 진행되고 있지만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특히 그는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한 쪽으로 진행되는 것을 알아차리자, 숨죽이며 더이상의 문필활동을 하지 않는 기회주의를 보여 주었습니다. 일제 패망 후 친일파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을 무렵, 그는 1945년 8월 16일에 열렸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예비모임 석상에서 자신은 ≪매일신보≫ 베이징
지사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 조직의 서기장 자리를 맡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한 사과나 반성는 단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발언은 후일 그 자신에 의해 반민족적행위에 대한 반성으로 선전됩니다. 그의 궤변을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이 과연 반성인지, 아닌지, 그 판단은 여러분께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해방 직후의 큰 난맥상의 하나는, 어제까지의 허물은 감쪽같이 숨기고 너나 할 것 없이 하루 아침에 애국자들로
변신을 한 사실들이다. 그런 가운데서 공석에서 자기 반성의 신상발언을 하고 명예스러운 직책을 사퇴한 예는 나의 경우밖에 없었다고 기억한다."
14. 친일 '국민연극'에서 친미 '반공연극'으로, 유치진.
'극예술연구회'라는 단체를 아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일제시기 우리연극의 지평을 열었다고 말들하는 단체입니다. 이 단체의
주요 구성원들을 보면 유치진, 이헌구, 이하윤이 있습니다. 이 세 명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친일부역배라는 겁니다. 유치진은 그 중심인물이고요.
그럼 그는 어떻게 친일행각을 했을까요?
그는 ≪신시대≫ 1941년 10월호에서 1942년 1월호까지, 친일희곡 『대추나무』를,
≪매일신보≫ 1941년 1월 3일자에 평론 『국민연극 수립에 관한 제언』을, ≪국민문학≫ 1943년 6월호에 日文 수필 『싸우는 국민의 자세』를
발표합니다. 또한 1941년 희곡 『흑룡강』을, 1942년에는 희곡 『북진대』를 발표합니다. 해방 후에는 우리 연극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고요. 그런 그에게 남은 몫은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고 침묵하는 것이 아닌, '반공연극'의 굴레였습니다.
후일 그는 일제시기와
해방 후의 행적에 관해 '후회'를 합니다만, 그것은 결코 반성과 속죄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글 중 『싸우는 국민의 자세』 일부분을 공개합니다.
"조선문인 보국회는 강령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조선에 있어서의 문학자의
총력을 대동아 전쟁의 목적으로 결집시키기 위해 조직된 단체다. 따라서 이 회에 참가하고 있는 우리들의 활동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대동아 전쟁의
완수에 있는 것이다. 적을 무찔러 마지 아니하는 정신으로 조서(詔書)에서 말씀하신 정전(征戰)의 목적을 관철하고, 대동아 10억의 민족을 적국
미영(米英)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며, 그리하여 아세아 민족의 아세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다...(중략)...
불타오르는 이상과
높은 이 해 밑에, 10억의 아세아 민족이 모두 우러러보게 되는 작품을 작가는 생산할 수 없겠느냐? 그와 같은 작가가 태어나야만 아세아는 정말
한덩어리로 뭉칠 수 있는 정신적 거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비로소 팔굉일우(八宏一宇)의 이상이 이루어진다."
15. 동요비에 새겨진 훼절의 역사, 정인섭.
'색동회'를
아시나요? 모르신다구요. 그럼 소파 방정환은 아시겠지요. 어린이날을 만들고 식민지 시대의 어린 새싹들을 위해 평생을 살다 가신 그 분을 모르는
분이 계신다면 아마 초등학교를 우리나라에서 나온 분이 아니겠지요. 그 색동회의 창단멤버 중에 정인섭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냐구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시국과 조선문학의 장래』, 『총후문학과 개척문학』 등의 주옥같은 친일글을 발표하신 분이지요.
그
뿐이 아니랍니다. ≪매일신보≫ 1940년 12월 14일자에는 '문예통신강연반'의 명의로 『서신』을 싣기도 했던 분이지요. 이런 분이 왜 색동회의
발기인이냐구요? 반도 어린이들에게 천황폐하의 크신 은덕과 대동아전쟁의 '가미가제'정신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 본받아야 할 것인지를 알려 주려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야 반도 어린이들이 모두 천황폐하의 사랑스런 적자가 되어, 미영귀축(米英鬼畜)의 전함을 향해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돌진할테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하지요. 그 반도의 어린이들은 이미 정인섭 할아버지가 겨레의 얼을 쪽발이들에게 팔아넘긴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으니 말이에요. 정말 어쩌지요? 정인섭 할아버지. 동요비가 부끄럽지 않으신가요?
16. 당신을 키운 건 팔할이
'친일'이다, 서정주.
이 분 역시 소개가 불필요한 작가라 생각합니다. '한국시의 태산북두', '우리말의 연금술사',
'질곡의 시인', 대한민국 문학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5·16민족상, 자유문학상, 금관문화훈장 수상, 그 화려한 삶을 적어 내려가려면 하룻밤을
새워도 오히려 부족하겠지요. 삶이 화려한 만큼 그의 '친일'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맞다, 아니다의 문제로요. 미당 자신은 한
번도 그 문제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문학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큰 탓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가
아무리 시를 잘쓰는 시인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오욕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그는 그저 '시만 잘쓰는 시인'일 뿐입니다. 언젠가 미당은 자신의
친일에 대해 회고 비슷한 말을 합니다. "나는 그때 일본이 200년은 갈 줄 알았다"고. 주류문학자들은 이 말을 두고 '진솔한 자기고백'이니,
'그 땐 다 그렇게 생각했'느니 하는 말로 서둘러 치부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시기의 민중들이 겪은 그 무수한 가난과 빼앗김을, 목숨을 차압당하고
性마저 공출된 그 처참을, 초근목피와 풍찬노숙의 독립투쟁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에게 미당의 말은 한 끼 밥의 눈물도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당은 이 땅의 작가들에게 영원한 '멍에'입니다. 시로도 모자라, 소설과 평론과 수필과 르포 등 문학의
거의 전 장르에 걸쳐 있는 그의 '민족반역사'는 그의 재능만큼 뚜렷한 상처입니다. 차분히 그의 행적 중 몇을 적어 봅니다. 서정주는 ≪매일신보≫
1942년 7월 13일에서 17일까지 평론 『시의 이야기』를, 1943년 9월 1일에서 8일까지 『인보정신』을, 1944년 12월 9일엔 시
『송정오장송가(松井五長送歌)』를 발표합니다. 또 ≪국민문학≫ 1943년 10월호에는 日文 『항공일』을, ≪조광≫ 1943년 11월호에 소설
『최제부의 군속지망』을, 1943년 10월호에 수필 『스무살 된 벗에게』를, 1943년 12월에는 르포 『보도행』을 발표합니다. 아무도 미당에게
그 작품들을 강요한 적 없습니다.
그 스스로가 감성에 겨워 노래하고 외친 것입니다. 대표작 『국화 옆에서』 또한 친일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미당은 알고 있을런지요. 서정주의 결고운 우리말 시만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그가 일제시기에 쓴 시 한 편과 광주시민들의
목숨값으로 집권한 전두환의 생일에 바친 축시를 소개합니다.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언덕도/산도/뵈이지 않는/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몇천 길의 바다런가//아아 레이테만은/여기서 몇만 리련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아득한 파도소리.../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띠우고/'갔다가 오겠습니다' ../웃으며 가드니/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마쓰이
히데오!/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인씨(印氏)의 둘째/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조용히 조용히/돌아왔느니/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정성껏 만들어보낸 비행기 한 채에/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내리는 곳/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수백 척의 비행기와/대포와
폭발탄과/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그대/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우리의 육군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몇천 길의 바다런가//귀 기울이면/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아득한
파도소리.../레이테만의 파도소리...(『송정오장 송가(松井五長 送歌)』)
처음으로/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86 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또 88 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쥐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전두환 생일 축시』, 1987.1.)
17. 천인침의
눈물을 아는가, 노천명.
'천인침(千人針)'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전장으로 나가는 아들이나 남편에게 부인
혹은 어머니가 선물하던 것이지요. 이름 그대로 천사람이 바늘 한 땀씩을 떠 만드는 일종의 부적인데, 그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총알이 비켜
간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일본인들의 고유한 풍습이지만, 징병으로 끌려가는 반도의 청년들이 급증하면서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성행하게
됩니다.
다른 민족의 전쟁에 나가는 아들과 그 아들을 위해 온종일 길거리에서 천인침을 떠 줄 사람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 아마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절박한 심정을 헤아릴 수 없을 테지요. 『사슴』의 시인 노천명 또한 알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녀는 학병으로,
징병으로 끌려가는 남자들을 부러워 했으니까요. 노천명은 ≪매일신보≫ 1942년 2월 19일자에 시 『싱가폴 함락』을, 1942년 3월 4일에는
시 『부인근로대』를, 1943년 8월 5일엔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발표합니다.
그 작품들에서 노천명은 대동아전쟁의
성전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음을 소리 높여 외칩니다. 아마 그녀는 그 시대엔 찾아보기 힘든 '페미니스트'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시,『부인근로대』일부분)
18.
종군위안부는 네가 나가라, 모윤숙.
모윤숙은 초기 일제하에서 '나름대로' 민족적 색채가 강한 시를 발표하고, 창씨개명에도
반대하는 등, 반항적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녀 또한 일신의 영달을 위해 친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광복 후 UN 한국 대표, 한국펜클럽 회장 등을 역임하는 또 한 번의 변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영원한 '정신적 창녀'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남습니다.
모윤숙은 ≪매일신보≫ 1942년 2월 21일 시 『호산나.소남도』를 발표하고, ≪신시대≫
1942년 1월에 시 『동방의 여인들』을, 1943년 12월호에는 시 『어린 날개』를 발표합니다. 특히 시 『동방의 여인들』은 정신대와
종군위안부 참여를 강요한 시로 여성단체들의 집중 성토을 받은 작품입니다. 일전에 하남시 문화원이 6·25 발발 50주년 상기를 위해 모윤숙
시비건립을 추진했었거든요. 믿거나 말거나 말이지요.
비단 치마 모르고/연지분도
다 버린 채/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온갖 꾸밈에서/행복을 사려던 지난 날에서/풀렸습니다/벗어났습니다/들어보세요/저 날카로운 바람
새에서/미래를 창조하는/우렁찬 고함과/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산 발자욱 소리를/우리는 새날의 딸/동방의 여인입니다
19. '반독재 투쟁'은 친일의 면죄부가 아니다, 김팔봉.
학도병의 확보는 전력에 차질이 생긴 일제의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이에 부일 문인들은 조선 학도들에게 전쟁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기 위한 시를 쓰는데, 김팔봉 시는 그 대표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공부보다 더 급한 것이 전쟁에 이기는 것이라는 논리에서
출발하여 우리 민족의 유교적 의식에 호소하며, 가문의 명예와 나라에 충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인의 민족적 생광(生光)이라는 논리를
내세우지요.
이러한 징병 강요는 김팔봉의 문학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반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징병제가 시행된
첫 날인 1943년 8월 1일,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매일신보≫에 발표하여, 친일부역분자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또
1943년 11월 15일에는 시 『가라, 군기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를 통해 다시 한 번 자발적인 황군입영을 촉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1944년 1월 5일에서 7일까지 수필 『탄환과 충언』을, 1944년 1월 19일에는 수필 『신전의 맹세』를 지면에
올립니다. 김팔봉의 매국행각은 1944년 8월 17일 부민관에서 열린 "적국 항복문인 대강연회"에서 이광수, 유진오, 주요한 등과 함께 행한
『문화인에게 격(擊)함』이라는 연설을 통해 그 절정을 이룹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6.25를 거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변모합니다.
자유당정권을 향한 투쟁이 그것입니다. 김팔봉은 한 번도 명시적으로 자신의 친일매국행위를 참회하지는 않습니다만, 친일부역지주들의
'친목계'인 자유당과 그 계주인 이승만을 상대로 반독재투쟁을 전개 하는 것으로, 자신의 행각에 대한 참회와 반성의 몸짓을 보여주려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답은 그만이 알고 있겠지요.
그러나 그가 아무리 강고하게 반독재투쟁을 했다 하더라도, 일제시기 그의 행위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반독재'는 자유당 시기 이 땅에 사는 모두에게 당연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의
일부분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이 한 사람의 삶을 규정지을 수 있는지도 곰곰히 따져 보시기를 희망합니다.
....(상략).../반도의 아우야, 아들아 나오라!/님께서 부르신다, 동아
백만의 천배의/용감한 전위의 한 부대로 너를 부르신다/이마에 별 붙이고, 빛나는 별 붙이고 나가자/...(중략).../님이 나아가라 하시거든 불
속에라도, 물 속에라도,/은날개 펼치고 나는 새보다 더 빨리/님이 머무르라 하시거든 밀운(密雲)과 격류 가운데서도/움직이지 않는 태산과 같이,
삼림과 같이...(이하 생략)
20. 친일과 법정신, 유진오.
한국 문학사에서 유진오만큼 폭넓은 의미로 떠오르는 작가는 드뭅니다. 그는 세상이 다 알다시피 소설가요, 법학자요,
정치인이었고, 또한 교육자였습니다. 유진오는 해방 직후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약하여 초대 헌법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였으며, 또한 한일 회담의
한국측 수석 대표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고려대학교 총장직을 임기 만료로 사임한 후인 1966년, 회갑년에는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고, 곧이어 신민당 대표위원으로서 야당 세력을 이끄는 정치인으로서의 정상에도 올랐습니다. 4.19 시민혁명 당시 그가
총장으로 있던 고려대 학생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그는 분명 우리 교육사에 길이 남을 교육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 그가 일제 시기에 그 어떤 친일부역문인 못지 않은 글들을 썼다면, 믿지 않을 분들도 상당수 존재하리라 봅니다. 해방 전과
후의 그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는 자신의 친일행위를 감춘 적도 없지만, 동시에 그것을 고백하고 참회한 적도 없습니다. '세월이
약'이라 믿었던 것은 아닐까요. 유진오는 일제시기 소설가로 문명(文名)을 날렸습니다.
대표작인 『김강사와 T교수』는 흔히 '노련한
출세주의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양심과 순수를 잃지 않으려는 젊은 지식인의 모습을 잘 묘사한 작품'으로 소개가 되곤 하지요. 그러나 그 젊은
지식인의 내면엔 '친일부역문인'이라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신보≫에 1943년 1월 9일에서 13일에 걸쳐 연재된 『동양과
서양』이라는 글을 빌어 대동아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국민문학≫ 1942년 3월호에 평론 『지식인의 표정』을, 1942년 11월호에는 日文
『국민문학이라는 것은』을 발표했으며, ≪삼천리≫ 1940년 7월호에 日文 『소감』을, ≪신시대≫ 1944년 9월호에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리라』를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 역시 해방 후의 업적이 일제시기의 오욕으로 하여 빛이 바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우리가 그의 공(功)을 부인하지 않듯, 그의 과(過) 역시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진실입니다. 역사에서는 그 결과의 형식만큼 과정의 내용
또한 중요한 법이니까요. 그의 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리라』의 부분을 옮겨 놓습니다.
"대동아전은 이미 최후에 돌입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이 이미 3년, 지나사변(支那事變) 이래 자(自)에 7년,
아니 미영(米英)이 동아의 침략을 시작하여, 이미 수세기에 걸친 장구한 전쟁의 최후의 막이 이제 바야흐로 닫혀지려고 하는, 실로 역사적인
숨막히는 순간입니다. 그리하여 전쟁의 귀추(歸趨)는 이미 명백한 것입니다. 침략자와 자기 방어자의, 不正者와 正義者의, 세계 제패의 야망을
붙들린 자와 인류 상애(相愛)의 이상에 불타는 자의, 일언이폐지하면 악마와 신의 싸움인 것입니다. 정의는 太陽과 같고, 사악은 黑雲과 같아서
구름은 마침내 태양의 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의이며 정의자 일어설 때 그 승리는 명백한 것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를 끝마치며, 또 아직 스무명이 넘게 남은 친일부역문인들을 생각하며,
밤을 새며 가슴에 맴돌던 말들을 한자한자 서툰 키보드질로 옮기는 동안, 그들에 대한 분노보다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책이 꿈틀대고
있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왜 우리는, 저는 진작에 친일민족반역자들의 글을 교과서에서 몰아내지 못했는지, 자꾸만 역사책을 뒤적이게 됩니다.
바다 건너 섬나라의 충동질이 있어야만 묵은 책들을 들추어보는 우리네의 '냄비근성' 또한 저에게 뼈아픈 반성을 요구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바로 그 일을 해야하는 최선의 시기'라는 평범한 경구처럼, 이제부터라도 악착같이 싸우면 되는
것입니다. 섬나라에 가미가제가 있다면 우리에겐 그 어떤 민족도 흉내낼 수 없는 '붉은 악마'의 헝그리정신이 있습니다.
다시
들머리에,
이종형(李鐘滎)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일제시기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 높았던 밀정이었다가, 해방 후 《대한일보》의 경영자가 되는 '입지전적 민족반역자'인 그는
당시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려 하자 극렬히 저항합니다.
그 자신이 운영자로 있던
《대한일보》의 사설을 동원하여 "소급법을 만들어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은 공산당을 즐겁게 하려는 처사"라면서 친일 및 극우단체들을 동원하여
서울운동장에서 법제정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1949년 8월 27일에는, 반민특위법을 심의중이던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회에서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라고 쓴 삐라를 뿌리고, 그것도 모자라 특별법안을 제안한 국회의원들에게
협박장을 발송하기도 합니다. 그 삐라의 내용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一.
대통령(이승만)은 민족의 신성이다. 절대 순응하라. 一. 민족을 분열하는 반민특위법안을 철회하라. 一.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 一. 인민은 여기에 속지 말고, 가면 위원을 타도하라. 一. 민의를 이반하는 의원은 자멸이다.
한민(韓民)은 지금에 뭉쳐야 한다.
이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귀에 익숙한
주장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 '친일역사 청산'이라는 민족적 요구가 나올 때마다, 친일파들이 되풀이 해 온 주장이니까요. 물론 그
자들이 50년 넘도록 자신들의 범죄를 반성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주류로 살아온 이면에는, 친일파였거나 혹은 친일파의 후예인 자들을 지도자로
뽑아온 우리 자신의 잘못도 상당부문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지금의 지배층 역시 마찬가지라는 혐의점에서
비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늙어죽기만을 바라고 있는 외교부의 엘리트들과, 고대사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를 축소, 왜곡한 진단학회의 잔당들이 진을 치고 있는 국사학계, 친일부역문인들의 글을 민족작가의 글이라 속이며 버젓이 교과서에 실어 놓은
국어교과서 편찬자들, 일제시기 '무적황군'의 하수인들을 국립 현충원에 묻어놓은 국방부의 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친일진상규명법》의 제정을
거부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의 국회의원들... 이런 자들의 세상은 이제 끝장내야 합니다.
듣자하니
<참여연대>에서 총선 낙선, 낙천 후보를 발표한다고 하던데, 민족적 양심을 거부하는 정치인들이야말로 그 첫머리에 올려져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 기념관' 대신 '친일역사관'을 건립하라.
지난 번에 소개한 20명의 친일부역문인들에 이어, 다시 열 여섯 명의 친일문인들을
소개할까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동안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슬픔'은 고스란히, 《친일진상규명법》을 거부하는 자들을 향해 주시기 바랍니다.
21. 충군(忠君)사상의 '총폭탄정신', 조연현.
해방 후, 1978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
1979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80년 한양대학교 국학연구소장, 1981년 잡지협회장등을 역임하고, 3·1 문화상·예술원공로상·5월 문예상
등을 수상한 조연현은, 일제시기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친일매문(賣文) 행위를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명문사학이던 혜화전문(現 동국대학교)
시절부터 日文 평론을 쓰면서부터 친일매국의 길을 쉬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그는 1942년 친일잡지 《동양지광》이 주최한
<지상(誌上) 결전 웅변대회>에 『아세아 부흥론 서설』로 3등에 입상, 그 친일행각을 구체화하였습니다. 이 글은 《동양지광》
1942년 6월호에 수록되었습니다. 또 《동양지광》 1943년 1월호에 日文 『문학자의 입장』을, 《국민문학》 1943년 8월호에는 日文 평론
『자기의 문제로부터』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문제로부터』에서 "<내리는 눈이 백발이 되도록 천황을 섬기며 눈마저
고이 내리는구나>라고 다치니와(諸兄)가 노래했을 때, 그는 단지 흔히 말하는 충군사상(忠君思想)의 외피를 쓴 것만은 아니었으며, 자신의
길이 내면세계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그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허하게 부르짖는 충군사상과는 전혀 의미가 다른 것이다."라며, 천황에
대한 자신의 충군사상이 남다름을 과시하였습니다. 일제시기 그의 출세길을 열어 준 『아세아 부흥론 서설』의 핵심부분을 옮겨 봅니다.
"이 대동아 전쟁은, 일로 전쟁이 단순히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 아니라
러시아의 동양침략에 대한 일본의 결사적 전쟁이었듯이, 단순히 일본과 영미(英米)와의 전쟁이 아니라 영미가 아세아와의 대등한 관계를 무시하고
아세아 민족을 학살하고 세계정복을 꾀하려는 영미적 세계사에 대한 일본의 폭탄적인 방비전이며, 아세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선양하는 아세아의
자각전이기도 합니다...(중략)...
그 폭탄은 만세일계의 거룩한 옛정신을 지켜온,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녀온
일본제국의 아세아의 자율과 독립을 위한 통쾌한 정의의 폭탄이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이 폭탄은 동시에 전(全)아세아 민족의 폭탄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감격적인 대동아 전쟁에 의하여 우리 아세아의 전민족이 오랫동안 갈망하여 마지 아니했던, 아세아의 부흥의 새벽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22. 당신의 입으로 '순수문학'을 말하지 말라, 곽종원.
1941년 일본대학 문과를 졸업한 곽종원은, 해방 후 숙명여대 총장직무대리, 건국대 총장,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아시아자유문학상(1955년), 대통령표창(1968년), 국민훈장 모란장(1980년) 등을 수상한 거물급
친일부역문인이었습니다.
일제시기 그는 《국민문학》 1944년 4월호에 日文 평론 『결전문학의 이념』을, 《매일신보》 1944년
2월 16일자에서 2월 19일자까지 평론 『문학의 지향성』을, 《동양지광》 1944년 3월호에는 평론 『적극성의 추구』를 발표하였습니다. 물론
지극히 민족반역적이고, 친일적인 내용으로 겉과 속을 빈틈없이 채운 글들이지요. 그런 자에게 훈장을 수여한 자들은 또 어떤 자들이었을까요? 해방
후 이 땅을 지배해온 자들 아니었나요... 곽종원의 글 『결전문학의 이념』을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역사적 자각에 의해 국민적 자각이 생기고, 국민적 자각에 의해 종래의 과오인
개인주의적 세계관을 철저하게 타파하고, 전체주의적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확립을 희구해 마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수반되는 것들을
토대로 하는 새로운 문학관도 당연히 생겨나야 할 것이다...(중략)...
인간생활에서나 흥미를 갖게 하고, 기쁨을 나눠주고, 정신을
윤택케 해줄 방향을 풍긴다는 것도 커다란 역할임에는 틀림없겠으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다 긴급한 대(大)문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이것의 완수를 위해서라면, 문(文)이 총이 되고 검(劍)이 되어서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중략)...
싸우는 문학이 거쳐야 할 당연한 순서는, 종래의 해석에 의한 예술성의 방기이며, 낡은 의미의 시학적 궤범성을
탈피하여 문학의 자율성을 획득하고, 결전 국민생활의 계몽에 있다. 문학이라는 특성이 갖는 예술성을 구애받아 구태의연 하기를 고집하여 전쟁완수를
향한 중요한 기능을 회피해야만 한다고 할 자는 아무도 없다.
문학자는 문학이 정치에 통속화되었다고 탄식하지 말지어다. 이제 와서
문학과 정치를 이원적으로 대립시켜 둘 필료가 어디에 있겠는가. 비단 문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부문이 합목적으로 외길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
23. 사이판의 '만세절벽'을 아는가, 김해강(본명 김대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사이판에 가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있는 곳인, 그 사이판 한 구석에
조그맣게 울먹이며 서 있는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와 거대하게 서 있는 <일본인 희생자 위렵탑>의 차이를 말이지요.
김해강의 민족반역적인 행각은, 잡지 《조광》1942년 6월호에 시 『아름다운 태양』, 『호주여』와 함께 발표된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에서 잘드러나고 있습니다. <특별공격대의 위훈을 추모하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일본의 버마 침략과 함께 본격적으로
군위안부 강제동원이 시작되었던, 1942년 3월 7일 남태평양의 한 전투에서 가미가제 특공대로 죽어간 조선 청년들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일명 "옥쇄(玉碎)"라는 말로 남겨진 사이판 전투에서 최후까지 저항하던 일본군이 남김없이 몸을 던졌다던 그 '만세절벽' 아래에
전세계에서 유일한 "한국인출입금지 호텔"이 성업 중입니다. 그의 시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를 읽으며 충분히 분노하시기 바랍니다.
"3월 7일 /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여- / 특별공격대의 혁혁한 위훈이
발표되면 / 신문지에 박혀 나오는 출발 전의 절필(絶筆)!! / 그것은 죽음의 대임(大任)을 앞두고 / 화충(和忠)의 정신과 웅대한 기우를
찍어놓은 / 불퇴전의 결의가 아니었던가 / 받을어 읽는 마음 / 누구나 가슴이 뛰고 / 피가 끓어오르지 않았으랴 // 아름답고 위대한 죽음으로써
/ 오오 우리 해군의 빛나는 전통을 유감없이 발휘한 / 그리하여 대동아전쟁 벽두에 / 제국불패의 태세를 반석 위에 세워 놓은 / 대동아 건설의
거룩한 초석이여! / 소화(昭和)의 군신이여! / 태평양상에 힘차게 펄럭이는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깃발 아래 / 고요히 잠자는 아홉 장사의
영광이여! / 천고에 빛나는 불별의 무훈과 함께 / 황국만대에 영원한 영광을 가슴 높이 찬양하오니."
24. 당신의 창은 친일을 향해 열려 있다, 김상용.
우리에게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작품으로 너무나 잘알려져 있는 시인 김상용. 고등학교적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를 일기장에 적어놓고 암송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해
볼까요?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 밭이 한참갈이 // 괭이로
파고 / 호미론 김을 매지요 //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 강냉이가 익걸랑 / 함께 와 자셔도 좋소 //
왜 사냐건 / 웃지요... >
그가 창을 낸 남쪽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1등국민이 살았다는 일본을 향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김상용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1944년 8월 1일에서 8월 8일까지 주최한
<징병 축하 행사>에 참석, 김팔봉, 김용제, 노천명, 김종한, 김동환, 이하윤 등과 함께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라는 제목으로
시를 발표합니다. 그 중에, 김상용의 시는 1944년 8월 4일에 게재되었습니다. 그 시를 소개합니다. 그가 찾던 남쪽이 과연 어디인지...
"물결 깨어지는 절벽 이마 위 / 가슴 헤치고 서서, 해천(海天) 향해 휘파람
부는 듯 / 오랜 구원 이룬 이날의 기쁨이여! / 말 위에 칼을 들고 방가의 간성됨이 / 장부의 자랑이거늘, 이제 부름 받았으니 / 젊은이들아
너와 나의 더 큰 영광이 무어랴 // 나아가는 너희들 대오에 지축이 울리고 / 복락의 피안으로 깃발은 날린다 / 새 우짖고, 초목조차 환희를
속삭일 제, / 결의와 힘에 넘치는 너의 얼굴에 / 아침 태양은 더 정다이 미소하도다 //
감격의 대막 위에 점털된 섬과 섬 /
거기 10억 동포는 묶여 살았다 / 그 사슬 끊이고, 해방의 노래 높은 날 / 낙토 건설의 첫 개척을 우리 맡았도다 / 명실(名實) 함께 1억
선진의 일원이 됨이여 / 어서 저 무잡 베이고, / 여기 꽂을 꽃을 심자 // 촉선이 타, 일실에 빛은 넘치고 / 소아 멸해, 대아의 거듭남이
있다 / 충에 죽고 의에 살은 열사의 희원 / 피로 네 이름 저 창공에 새겨 / 그 꽃다움 천천만대에 전하여라."
25.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절창, 김종한.
이 자의 호는
을파소(乙巴素)입니다. 고구려 고국천왕 당시 헐벗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던 정치가의 이름과 한자까지 똑같은 그는, 스스로 1939년
《문장》지에 발표한 『나의 작시설계도(作詩設計圖)』에서 '최고의 순간'을 표현하는 단시(短詩)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한국 현대시사에 등장한
최초의 선시이론(禪詩理論)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러한 주장은 1940년 11월 《문장》지에 발표한 친일시 『살구꽃처럼』에서
그대로 시화(詩化)되었습니다. "전쟁은 살구꽃처럼 만발했소"에서 시작하여 "전쟁처럼 살구꽃이 만발했소"로 끝나는 이 시는 전쟁을 낙화(落花)로
미화한 '최고의 순간'의 미학적 표현으로 꼽힙니다. 그는 1942년 《국민문학》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친일문학자로 전향하였으며,
『시문학(詩文學)의 정도(正道)』라는 순수시론(純粹詩論)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순수시론은 해방 후 친일부역문인들의 자기방어논리
중의 하나였습니다.
문학은 정치나 사회, 그 어떤 것으로부터 동떨어진 순수한 것이라는 게 그 요지인데요, 천황을 향해 한 몸으로
죽자고 선동했던 자들이 외쳤던 순수문학은 그러나, 자신들의 과거를 덮어버리려는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작가는 당대를 살아가는
시대인이며, 그 작품에는 작가 자신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아파하지 않는 자는, 시대와 동떨어진 "별과 꽃과
이슬"만을 노래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김종한은 《국민문학》 1940년 4월호에 일어(日語)시 『합창에 대하여』를,
1942년 7월호에는 일어시 『유년』을, 1943년 8월호에는 일어시 『원정』을 발표함으로써, 그 자신이 주장한 순수시론을 송두리째 갈아엎어
버립니다. 아래의 시는 『합창에 대하여』 中 일부분입니다. 이것이 팔굉일우(八紘一宇 - 천황의 품 안에서 모든 민족이 하나 됨)을 노래한
'순수시'입니다.
"그대는 반도에서 왔다지 않았습니까? / 도리라서 좀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그런 불안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닙니다요 / 이봐 송화강 상류에서도 허둥지둥 / 남경 변두리에서도 와 있지
않은가? 수마트라에서도, 보르네오에서도, 이제는 / 중경의 방공호에서도 오겠지요 / 그럼 모두 나란히 서 주십시오- 오오 / 포구 같다 정렬한
ㅁ.ㅁ.ㅁ.ㅁ.ㅁ / 그것은 기다리고 있다 / 기다림에 지쳐 있다."
26.
인기 역사소설가의 "텐노헤이카 반자이", 정비석.
『삼국지』, 『초한지』등의 인기 역사소설과 문제작 『자유부인』의 작가
정비석. 대형서점에 가면 여전히 그의 코너가 있습니다. 역사소설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확한 인식이 뒷받침되어야 쓰는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비석의 소설은 가볍게 대할 수 있는 책으로 제법 인기가 있었습니다.
또 그의 소설 『자유부인』은 1950년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지요. 저도 소시적에 그의 소설을 밤새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삼국지』에서 '촉(蜀)'이 통일을 하지
못하고 망한 대목에서 비분강개하는 그의 목소리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남의 역사를 그토록 슬퍼하던 그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모국어를 습득하게 해준 우리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만큼은 몰염치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제시기 정비석의 친일부역 행각을 알려
드립니다.
그는 《국민문학》 1942년 2월호에 소설 『한월』을, 1943년 4월호에는 日文 수필 『국경』을, 1943년
7월호에는 日文 꽁트 『철면피』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중 수필 『국경』은 당대 최고의 친일문(文)으로 손꼽히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인기
역사소설가의 역사인식을 단박에 알 수 있게 해 주지요.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개개의 인간에게 이 지구상에서 단 하나의 낙원 밖에 없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이 조국 일본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이 일본을 지켜나가는 건 자기 자신이나 백대 천대까지 이어질 자기 자손을 지키게 된다. 이것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사업이지
결코 간단한 사업은 아니다. 피투성이의 전투인 것이다...(중략)...
우리들이 지금 국력을 기울인 성전의 와중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헛되이 어설픈 휴머니티 따윈 외치고 있을 수 없게 된다. 문화인이 휴머니티를 외치는 건 옳은 일임에 틀림없고,
그것 없이는 문화는 설 기반을 잃게 될지도 모르나, 일단 싸우기 시작했으면 무엇보다도 전쟁에 이겨야 한다. 전쟁의 의미는 승리에 있다. 오늘날
문화정책이 허용된다고 하면 그것은 승리를 위한 무기로서의 문화이지 않으면 안된다...(중략)...
나는 오랫동안 지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세계 구석구석까지를 탐색해 봤지만,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역시 자신을 최후까지 보호해 주는 이 나라 일본밖에 없다. 지도에 칠해진 붉은
색이 무한한 친밀감으로써 내 전신에 번져왔다."
27. 단 한 편의 친일시로
남은 사나이, 양영문.
수많은 친일부역문인들 중에서 양영문은 단 한 편의 친일시로 인해 그들과 똑같은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무멋을 했고, 또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는 자료를 구하기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한 편의 친일시를 썼든, 천 편의
친일시를 썼든 그가 친일민족반역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30년대 이후, 우익계열의 무장독립투쟁 세력이 만주에서 그 자취를 감춘 후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동북항일연군>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이들은 주로 좌파계열과 양심적우익세력의 연합체의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 동북항일연군 중 가장 전투력이 강했던 이들은 바로 조선인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을 50년 가량 통치했던 김일성 주석은
동북항일연군 제 6사(사단급 편제) 사장(사단장)이었습니다.
북한정권이 남한의 그것에 대해 종종 정신적우월감을 나타내는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그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근거지의 하나가 바로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절반 가까이가 중국으로 편입되고 말았지만,
일제시기 강고한 투쟁을 하던 독립전사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왜 백두산 얘기를 하냐구요? 그것은 이 양영문이라는 친일분자가 남긴 단 한
편의 시가 바로 일본인의 정신적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후지산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정신인 대화혼(大和魂)의 출발점으로
많은 일본 시인묵객들이 노래했던 그 산을, 양영문은 마치 우리 민족의 영산인 양 노래 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제목은 『후지산에 부쳐』이며,
1943년 2월 친일잡지 《국민문학》에 일본어로 발표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성스럽다는 것은 / 당신의 정상을 향해 오르며 / 이제야 알았습니다 /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노래불렀던 당신 / 일본 제일이라고 읊어졌던 당신
후지여 / 안개를 머금은 분화구를 하늘로 향해 여시고 / 하늘을 향해 뭔가를 선언하시는 그 자태 / 시시각각으로 변모하시는 당신의 자태 /
아아! 그지없는 초월의 힘을 지니신 당신 / 이제서 저는 당신을 감지합니다 / 이 대화국(大和國)에서 / 후지여, 만약 당신께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 저희들이 당신 대신에 / 그 무엇으로 긍지를 살았겠습니까?"
28.
당신의 만수무강에 묻는다, 조용만.
조용만이라는 이름은 일반인들에게는 의외로 생소합니다. 그러나 언론인으로, 작가로,
그리고 영문학자(고려대 영문학과)로서 많은 저서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9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했던 문단 원로라는 점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민문학》 1942년 7월호에 日文 소설 『배 안에서』를, 1944년 1월호에 日文 희곡『광산의
밤』을, 《신시대》 1944년 6월호에 『흑령탄갱의 감상』을 발표합니다. 그 중 희곡 『광산의 밤 鑛山の夜』은 단연 친일문학의 걸작이라 할
만합니다. 이 작품은 한 광산촌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가족간의 대화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광부로 열심히 일해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하면서도 동생 만돌이가 항공병이 될 수 있도록 힘써주는 길돌, 15세의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항공병에 지원하는 만돌, 일본 군수공장에서
전쟁을 위해 군수품을 만들어 내는 사윗감 기무라, 대의를 위해 만돌의 항공병 지원을 승낙하는 어머니. '이동위문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이
희곡은, 이상과 같은 등장인물들을 설정하여 개인의 이익과 신민(臣民)의 길 사이에서 단호하게 후자를 선택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시 이 작품은 친일문단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조용만의 문단적 위치도 격상시켜 주었습니다. 해방되던 순간까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이자 논설위원으로 영욕을 누린 그에 대해,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조용만의 작품, 『광산의 밤 鑛山の夜』은 그 무렵 당국에 의해서 예의 강조되던 응징사(應徵士)의 후원과 증산(增産) 문제, 그리고
지원병 동원 등을 취급한 희곡이었으며, 여기에 총후(銃後)의 어머니의 각오까지를 곁들여서 교양한, 소위 총후문학으로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었다.(《친일문학론》, 376∼377쪽)." 그의 글, 『흑룡탄갱의 감상』 중 일부분을 읽어보십시오.
"노무자는 대개 국민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다. 무식한 사람일수록 감정으로 움직인다.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어도
곧 감격하고, 또 그 대신 조금만 냉대하는 것 같으면 곧 배반한다...(중략)...비단 광산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직장에서 다 그렇다. 직접
노무자의 감독지도에 당하는 사람이 노무자에게 잘 굴어야 한다. 소기(小磯) 총독은 말단행정의 개선을 역설하였다. 행정부문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지 말단에서 직접 대중과 접하는 사람이 잘 굴지 못하면 위에서 암만 목소리가 쉬도록 악을 써도 별 효과가 없다. 소기 총독의 이
말을 모든 생산부문의 감독자는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29. 부부는 일심동체로
친일을 한다, 최정희.
해방 후, 1970년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고, 1972년 여류문인회 고문에 추대.
서울시문화상·여류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3·1 문화상 수상. 한편 조연현(趙演鉉) 문학상 운영위원, 한국소설가협회 대표위원으로 살아온 최정희는
그녀 자신의 문학작품 보다는 대표적 친일문인의 한 명인 김동환의 두 번째 아내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1934년 2차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검거시 투옥되기도 했던 그녀가 친일의 길로 접어드는 데는 커다란 전환점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녀의 소설
곳곳에 드러나 있는 속물의식이 그녀로 하여금 친일을 부추겼을 테니까요. 최정희는 《국민문학》 1942년 11월호에 소설 『야국초』를, 1942년
4월호에는 소설 『2월 15일의 밤』을 발표하여 친일문학인의 아내다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울러 최정희는 당대의 친일문사인
김종한, 이효석 등과 주고받은 불륜의 편지로도 유명합니다.
30. 민족반역자가 가르친 '민중의 지팡이', 함대훈.
황해도 송화(松禾) 출생가 그 출생지인 함대훈은, 1927년 김진섭(金晉燮) ·장기제(張起悌) ·이헌구(李軒求) 등과 함께
<해외문학> 동인이 되고, 1931년 일본 도쿄 외국어학교 러시아어과를 졸업, 그해 <극예술연구회> 조직에 참여하여 러시아
작품을 주로 번역 ·소개했습니다. 1935년을 전후하여 문단에 행동주의가 소개되고, 휴머니즘이 논의되자, 이헌구 ·홍효민(洪曉民)
·김문집(金文輯) 등의 친일문인들과 함께 이를 소개하고, 1935년 《조선일보》에 『지식계급의 불안과 조선문학의 장래』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지식인 연맹의 결성을 주장하였습니다.
1937년 장편소설 『순정해협(純情海峽)』을 《조광(朝光)》지에 연재하고, 이어
『무풍지대』, 『폭풍전야』 등을 발표했습니다. 8 ·15 광복 후 《한성일보》 편집국장, 미군정청 공안국장 ·공보국장 등을 지내고 1947년
국립경찰전문학교 교장이 되어 민족반역 정신을 주입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함대훈의 친일문(文)으로는 《조광》 1940년 12월호에
발표한 『우리들의 지원병』과 《매일신보》 1943년 8월 4일자에 실린 수필 『장정의 각오』가 있습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양심을 팔아먹은
자가 해방조국의 경찰들에게 가르친 것은 무었이었을지 궁금합니다. 하긴 그 당시의 경찰이라는 족속들도 대부분 일제시기의 '순사'들이었지만요.
아래에 소개해 드릴 글은 『장정의 각오』 중 일부분입니다.
"지금 반도청년에게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 그 전에는 조선인은 병역의무를 가지려고 하나 가질 수가 없었다. 지금 기억되거니와 소화 15년 겨울인가 문인시국강연회를
앞두고 육해군 간부들의 강연준비에 관한 말을 들었을 때 <조선인은 언제나 징역의 의무가 생기는가>고 질문했더니 지금은 모(某)
요직으로 간 야마노우치(山之內) 참모는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는 답변을 했었다.
<해군에서는 조선인 지원병을
채용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구로기(黑木) 대좌도 <아직 그런 생각은 하지고 않았다>고 답변함을 듣고 나는 강연을 떠나면서 한편
서운하였다. 그때 <조선의 청년아......육(陸)으로 바다로 가서 전정의 혼이 되라>고 외치고 싶은 심산이 다 틀린 때문이었다.
이제 육군이 징병제도가 되고 해군에 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된 오늘 물론 그분들은 그 당시 장래를 알고도 말하지 않았는지 몰라도 삼 년간의 세월이
그같이 조선동포에게 커다란 의무와 은전을 갖게한 것은 다만 만공의 감사가 있을 뿐이다. 태평양의 높은 파도가 그대들을 부르고 대륙의 넓은 들과
높은 산이 그대들의 함성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청년의 의기를 높이고 성은에 봉답할 길은 터졌다. 반도청년은 다시 잊지 못할 행복의 시기인 것을
더욱 깊이 자각해야 할 것이다."
31. 황군(皇軍)됨이 그리도 자랑스러운가,
홍효민.
'동반작가'라는 말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운동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으면서, 혁명운동에 동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문학경향을 가진 작가들을 가리키는 문학용어입니다. 한국에서는 유진오 ·이효석 ·이무영 ·채만식 ·조벽암 ·유치진 ·엄흥섭 ·홍효민
·박화성 ·안덕근 등을 들 수 있는데요, 불행하게도 이들 중 상당수가 친일부역문인으로 남습니다. 홍효민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일신보》 1940년 10월 15일자에서 10월 22일자에 『감격의 1일』을, 《조광》 1943년 9월호에
『미.영(米英)사상의 본질』을 발표합니다. 한 때 고통받는 인민을 위해 글을 쓰고자 했던 자가 쓴 대동아전쟁 찬양은 그래서 더욱 우리를 분노하게
합니다. 그의 글, 『감격의 1일』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조선인으로의
군대, 곧 지원병은 오늘의 시국 아래서 귀한 존재이고 또 우리의 자랑거리인 것은 두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허나 나는 지원병이 훈련을 받는
육군 지원병 훈련소(陸軍志願兵訓練所)를 거의 지척에 두고 한번도 견학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내가 지척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작년인가 청량리에서 교문리(橋門里)행 버스를 타고 왕숙교(王宿橋)까지 갔을 때 망우리 고개 밑에서 버스가 잠깐 정거를 한다. 웬일인가 하고
보니 그곳은 '육군 지원병 훈련소' 입구이었고, 먼 시골서 자질(子姪)을 보려고 그곳에서 내리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중략)...
오늘의 시국에 있어서 육군 지원병 훈련소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고 자랑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기실 그곳에서
우리의 귀한 정예의 군사가 어떻게, 무엇을 하고 자란다는 것은 너무나 모르는 곳, 어렴풋이 조선사람도 군인이 될 수 있다, 또는 나라를 위하여
전장에 나가 충혈(忠血)을 흘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막연한 인식이요, 또 마치 고향에 전장(田庄)이 있다는 일종 든든한
정도의 믿는 맘 밖에는 아무런 더깊고 높은 구체적인 것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중략)...
역시 지원병 훈련생들도
사람인만큼 장점도 있고 결점도 있을 것이다. 허나 장점은 좋은 일에 속하는 그것일 것이나, 단점만은 없어도 좋을 일이다. 지원병 훈련생들의
단점이라고 하는 바 딱딱한 것이라든지, 책임감이 박약하다든지, 의뢰심이 있다든지, 애타심이 부족한 것은 그들의 결점 뿐 아니다. 일반
조선사람들도 다소 그렇지 아니한가 생각되었다. 허나 이런 결점이 이 훈련소를 거쳐 나옴으로부터 교정된다면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이 훈련소는
다만 군사교육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웁게 되는 길에 있어서도 역시 없어서는 아니될 존재라고 느꼈다.(이하 생략)."
32. 농민의 눈물을 외면한 자, 이무영.
『제 1과 제
1장』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제시기 우리 농민들의 생활상을 잘 드러냈다고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작가 이무영은 1934년부터
1939년까지 동아일보에서 신문기자를 하다, 1939년 7월에 신문사를 그만두고 경기도 군포 부군인 궁촌에 내려갑니다. 그는 여기에서 10여년
간 살면서 농사를 지으며 창작을 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농민』, 『흙의 노예』 등은 여기에서 구상되고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모습은 《부산일보》에 발표한 장편소설 『청와의 집』으로 <제 4회 조선예술상 문학상>을 수상한 친일부역문인이었습니다.
물론 그 상은 조선총독부에서 준 상이지요.
이무영은 또한 《매일신보》 1942년 2월 19일자에 『가련한 처칠의 말로』를,
1945년 5월 13일자에는 만주지역의 일본군 부대를 다녀온 감상을 토로한 『시찰 보고담』과 『개척론을 보고』를 발표하였습니다. 초창기 그가
썼다는 '농민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린 소설'과는 전혀 다른 작품들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시중에 나도는 그의 소설들을 보면 하나같이 일제시기의
친일작품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33. 메밀꽃 흐드러진 식민지 조국을 아시는가, 이효석.
가산
이효석은, 1907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에서 태어나 경기제일고보와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교사와 작가로 활동하다, 36세인
1942년에 요절하였습니다. 그는 22세 때 처녀작 『도시와 유령』으로 등단하여 『노령근해』, 『북구점령』 등을 발표하여 '동반작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문학세계는 도덕이나 윤리 인간의 역사보다는 예술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본능만이 중요하다는 심미주의의
세계로 나갔"으며 "40년대 일제의 강압 속에서 이효석은 친일과 동떨어진 문학의 세계로 나갔다"고 봉평의 이효석 문학관에서 나누어준 팜플렛에는
쓰여 있었습니다.
인간 이효석과 그의 문학적 변모의 의미와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일방적인 미화는 맹목적인 비난만큼이나 지성적이지 못한 행위입니다.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한 이효석이 취직을 한지 보름이 안되었을 즈음
직장에서 광화문통으로 내려오는데 이갑기(李甲基)라는 청년을 만났다. 문학을 하는 청년이었다.
조금 안면이 있었다.
이(李)는 다짜고짜 험상궂은 얼굴을 하더니 <너도 개가 됐구나> 하고 내뱉었다. 대로상에서 봉변이었다......죄악감과
피해망상에서 피로해진 그의 신경은 감당치를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임종국, 『친일문학론』 중에서) 검열관이란 직책은
'잡지나 신문이나 할 것 없이 우리말로 쓴 글을 원고째 검열하여 출판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 작가와
지식인들은 이효석의 취직을 배반이나 변절로밖에 볼 수 없었'겠지요. 이효석같은 당대의 지식인이 검열관이란 직책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친일문학론을 지은 임종국 선생은 "동족의 원고를 검열한다는 것이 그토록 양심에 가책이 된다면 설령 생활난보다 더한 것을 당하더라도
취직을 안했어야 할 것 아닌가?...이효석은 검열계원으로 취직하면 동족의 환영을 받을 줄 알았단 말인가?"하고 이효석의 행위를 비판했습니다.
아뭏튼 이효석은 그렇게 나약한 심성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 이후 얼마 뒤 이효석은 총독부 검열관을 사직하였습니다. 임종국의 주장에
따르면, 봉평 이효석 문학관의 자료와는 달리, 그 뒤로도 이효석은 "오히려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자기로서는 진정한 국민문학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40년대에 일제와 일련의 친일작가들이 주동한 이른바 '국민문학'이란 무엇일까요? "국민문학은...단적으로
말한다면 구라파전통에 뿌리박은 소위 근대문학의 한 연장으로서가 아니라 일본정신에 의하여 통일된 동서문화의 종합을 지반으로 하고 새롭게 비약하려는
일본국민의 이상을 시험한 대표적 문학으로서 금후의 동양을 지도할 수 있는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다."(최재서, 1941년 11월 『국민문학』
창간호)
『국민문학』 42년 1월호의 앙케이트 "今後如何に書くべきか(금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에 이효석은 다음과 같은 답글을
썼습니다. "종래의 시민으로서의 생활이 국민으로서의 그것으로 앙양되어 있는 만큼, 스스로 정신적 태세의 상위(相違)는 없어야 할 것이다.
국민문학이라는 것을 매우 협애(狹隘)한 의미로 해석하여, 단순히 목전의 시국적인 것만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생각함은 무슨 까닭일까?"
그래서 자신은 '국민문학적'인 시정물이며 애정물을 주로 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선상에 있는 작품이 소위 내선일체를 두 젊은이의 고민과
애정을 통해서 묘사했다는 이효석의 소설 『아자미의 장(蘇の章)』입니다.
1942년 5월25일 갑작스럽게 죽기까지 이효석이 적극적인
친일을 했다는 기록은 없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가 발표한 몇몇의 작품으로 그가 친일이란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수는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때 그의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메밀꽃 필 무렵』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는 그의 취향을 대표하는
글입니다.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엣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낮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자욱해진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백화점 아래 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방 구석에는 올 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색전등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하고 계획도 해보곤 한다."
정갈한 단어만을 모아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써내려간 글이긴 합니다. 그러나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민족 전체가 굶주리던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쓰여지고 발표된
글이라 생각하면 너무 허황돼 보일뿐만 아니라 뻔뻔스럽기까지 합니다. 그처럼 '그의 개인적 삶은 민족 전체가 도탄에 빠져 있던 식민 통치하의
민중적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그리고 자신의 삶을 제약하는 상황에 의한 외적 강제에 저항하기보다는 무관심했'으며,
'오히려 상황 자체를 인정하고 그것을 심미적 탐닉에 이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대적 고뇌를 자신의
실존과 결부지어 받아들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취향대로 대상을 즐기면서 시대에 반응한 작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보듯
대단히 서구 문명적 취향의 사람이었습니다. "칠피단화에 나비형상의 장식을 붙인 멋쟁이 차림에, 경기고에 서울대에 영문과를 나온 엘리트 의식에,
커피는 모카와 퍼콜레이터를 찾아 마시고, 피아노는 쇼팽을 치고, 여자 좋아하기를 군것질하듯 하였으며 이국취향의 동경에서 모더니즘적 세련을
추구하던"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이효석은 당당하게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메주내 나는 문학이니 뻐터내 나는 문학이니 하고
시비함과 같이 주제넘고 무례한 것이 없다. 메주를 먹는 풍토 속에 살고 있으므로 메주내 나는 문학을 낳음이 당연하듯 한 편 서구적 공감 속에
호흡하고 있는 현대인의 취향으로서 뻐터내 나는 문학이 우러남도 이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 그가 『메밀꽃 필 무렵』 같은 향토성 짙은
글을 쓴 것은 거의 기적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써내린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가 우유와 커피를 선호했다고
하지만 그도 모르는 사이 가슴 깊숙이 흐르고 있을, 그러나 그가 배척했던, 어떤 '메주'의 잠재력이 그를 이끌었는지도 모르지요. '고향'을
말했을 때 비로소 그의 맑은 서정과 따뜻한 감상의 단어들은 비로소 제자리를 잡아 빛났습니다. '고향'은 그가 떠다닌 관념과 탐미와 순수와 서구의
바다보다 더 깊고 더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뿌리였던 것이니까요. 그의 사고와 행동과 삶이 무엇이었건 우리는 그것들을 밝은 가을 햇볕의 벌판으로
굴절없이 가져와 드러내야 합니다.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건, 그의 문학적 지향이 무엇이었 건 이미 『메밀꽃 필 무렵』의 성취와
감동을 깎아 내릴 수 없듯, 『메밀꽃 필 무렵』이 그의 모든 구차함과 왜소함을 덮을 수 있는 마술보자기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34.당신은 러시아문학을 헛배웠다, 이석훈.
이석훈은 일제 말기(1941∼1944)에
단편·평론·기행·수필 등 많은 친일적인 작품활동을 하였습니다. 8·15 광복 후에는 해군 정훈장교로 근무했고 제대 후 6·25 전쟁 때
납북되었습니다. 러시아문학에 조예가 깊었다는 이석훈은 《국민문학》 1941년 11월호에 소설 『고요한 폭풍』을, 《조광》 1942년 1월호에
『성지참배통신』을 발표하여 친일부역문학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일제시기나 해방 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그가 남긴 친일글 『성지참배통신』을 읽어 볼 수 밖에요.
"法隆寺驛앞에서
점심을 먹고 王寺로 되도라 나와 原神宮가는 電車를 바꿔 탔습니다. 비는 것고 晩秋의 해볕이 봄날처럼 따스한데 바람 한 점 불지 않어서 나는
靜かた秋( 고요한 가을)이라는 日本文學에 잘나타나는 한 場面을 처음으로 體驗하였습니다, 朝鮮서는 늦은 가을이면 의례 落葉한 나무가지들 흔드는
바람이 많이 붑니다. 고요한 가을을 느끼기는 到底히 어려운 일이며 그래서 日本文學에 잘나타나는 靜かた秋이라는 것을 다만 文學的인 誇張한 表現으로
밖게 解釋이 안되었는데 果然 이곳와서 靜かた秋이라는 말은 文學的인 誇張한 用語가 아니라 정말 그 말이 如實하다는 事實을 곰곰히 느꼈습니다.
이러한 조그만 事實도 참으로 日本文學을 理解하는데는 적지않은 「힌트」가 된다는것을
알려드립니다...(중략)...
原神宮驛은 聖地에 알맞을 만큼, 神宮形式의 그러한 氣品있는 建築物입니다. 지은 지 오래지 않어서 더욱
밝고 깨끗한 近代的이면서 日本의 傳統을 가진 古典的驛舍입니다. 여기서도 內地 사람의 外來文化를 곧 제것으로 消化해서 거기서 近代日本的인 獨特한
文化를 創造하는 놀라운 感受性을 느꼈습니다마는, 下關이나 或은 鐵道沿邊에서 보는 工場建築에서도 西歐의 文物을 그대로 直譯的으로 移植하지 않고
日本的으로 한번 消化해가지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져 있음을 느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機械文明은 西歐의 것이기 때문에
工場의「메카니즘」이 西歐그대로 日本의 自然속에 따로 동떨어져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日本의 自然에 調和되고 日本人의 精神이, 들어있는
日本的인「메카니즘」으로, 化하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感想을 나는 原神宮驛舍에서도 느낀 것입니다. 驛을 쓱나선 瞬間 그 밝고(明)도 깨끗한
느낌, 그것은 神都라는것이 決코 낡고 沈重하고 頹的이 아니라 恒常 뻗어나가는 國運을 象徵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밝고(明) 깨끗하고 希望에 넘치는
雰圍氣임을 알었습니다...(중략)...
事實, 告自하면 나는 지금까지 日本文學의 섬세한 神經은 쓸데없는 近代的인 煩主義의 나쁜
影響으로 밖게 解釋치 않고 西歐의 文學만을 그럴듯이 評價하였습니다마는, 이번 旅行에서 特히 奈良을보고 비로소 日本文學이 그렇게도 섬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理解하였습니다...(이하 생략)"
35. '국민문학'의 최고
이론가, 최재서.
월간 문예지 《국민문학》의 발행인이기도 했던 최재서는, 이른바 '국민문학(황국문학)'의 이론 정립에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 그는 《국민문학》 창간호에 발표한 『국민문학의 요건』과 1942년 8월호에 실린 『조선문학의 현단계』라는 평론을 통하여
황국문학의 이론을 천명하였으며, 《국민문학》 1943년 8월호에 『징병서원행』을 게재하여 황군입영을 독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문평론》
1941년 4월호에 발표한 『문학정신의 전환』에서는 개인주의적 생활작풍을 타파하는 것만이 성전에 매진하는 기초임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수 많은 평론으로 그는 마침내 친일부역평론의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그의 글, 『징병서원행』의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징병의 발표가 있은 날부터 나는 우리 상대인(上代人)을 늘 생각한다. 물이
흐르듯 담담한 기분으로 일본에 귀화한 상대의 사람들은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커다란 암시이며 고무이며 위안이 된다. 특히 성덕태자(聖德太子)에게
몸을 바쳐 순사(殉死)한 혜자법사(慧慈法師)의 일은 생각할 적마다 가슴을 때린다...(중략)...
일본의 매력이란 이것이다.
성천자(聖天子)의 어명이 그리워 조선이나 지나(支那)에서 학자·승려·기예인(技藝人)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대화(大和)의 조정은 이들
귀화인을 대접함에 있어서 적자(赤子)의 정으로 했고, 성씨와 전록(田祿)을 주어 그 자손들로 하여금 영원히 그 업에 안주토록 했다. 이 귀화인들
또한 역대의 천황에게 대친(大親)의 정으로 시중들었고 비록 혜자처럼 본국으로 돌아갔어도 여전히 그 감격을 잊지 못해 순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동양문화의 정수는 온통 일본에 모여 잘 보존되었으며, 더 나아가서 정련(精練)을 가하여 오늘의 빛나는 일본문화를 쌓아올린
것이다...(중략)...
만주를 보라. 지나(支那)를 보라. 나아가서 태국, 불인(佛印-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그리고 말레이,
필리핀, 버마를 보라. 적(敵) 미·영(美英)의 마수로부터 해방되어 도의(道義) 일본의 빛 밑에 산천초목 모두 소생하는 모습이 아니겠느냐? 이제
동도(東都, 동경)에는 이들 각 지역으로부터의 지도자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의 감회는 과연 어떠할까? <바다의 저편 대화의 나라에
위대한 지도자 성태자 계시다>라는 담징의 말을 그들도 역시 가슴 속에서 읊조렸을 터이다...(중략)...
우리는 지난 해 5월
징병제 실시의 발표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그 감격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중략)...
1,300년 전,
혜자는 외국인이지만 대화 성태자의 총우(寵遇)에 감격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던가? 이 고대인의 의기(意氣)는 또한 오늘의 우리들의 의기가
되어야 한다. 아니 우리는 지금 외국인으로서 성태자의 총우에 감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처럼 어버이처럼 받들어 모시고 있는 천황폐하
스스로가 '부탁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감격이라 할까 감분(感奮)이라 할까, 아무튼 우리는 신명을 바쳐 이 대어심(大御心)에 보답해야 한다고
마음속 깊이 맹세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서원(誓願)이다."
36. 민족을
배반한 언론인, 김성수.
이 자는 작가는 아닙니다만, 요즘 그가 세운 신문(동아일보)이 자꾸만 자신들의 과거를 망각하는
'치매증'에 걸린 것 같아 소개합니다. 너무도 유명한 사람이니 별다른 소개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의 후손들이 소유주로 있는 동아일보가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저는 "동아일보 특집"을 쓸 작정입니다.
아래 글은 인촌 김성수가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에 발표한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정신을 찬양하라』는 글입니다. 이 글을 읽고도 동아일보를 계속 구독하시는 분이
있다면, 자신의 가계도를 한 번쯤 의심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玆)에 조선
징병령 감사주간에 당하여 소감의 일단을 들어 삼 가 반도청년 제군의 일고(一考)를 촉(促)코자 한다.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포된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 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회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吾等) 반도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深切)하였던
바이다...(중략)...
그런데 이 징병제 실시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일방으로 전반도
청년의 영예인 동시에 반천년 문약의 분위기 중에서 신음하던, 상술한 바 모든 병근(病根)을 일거에 쾌치(快治)하고 거일(去日) 생산할 제2의
양질(養質)을 얻은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아니하며, 어찌 감격치 아니 하리오. 하고(何故)오하면 상술한 문약의 고질을 치료함에는 오직
상무(尙武)의 기풍을 조장함이 유일무이의 양약인 까닭이다...(중략)...
1. 아등(我等)은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報)하자, 이 조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생존목표를 달(達)하는 대관절(大 關節)이다. 특히 조선청년은 누구보다도 먼저 이 목표를
확정함으로써 제일 주장을 삼는 것이다. 이 목표가 확정됨으로부터 만상(萬象) 이 정시(正視)되고 군의(群疑)가 해소되는 것이다.
2. 아등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서 단결을 굳게 하자. 이 일절이야말로 종래 우리 조선인의 정문(頂門)의
일침이다. 우리 종래의 모든 결점이 오로지 상호 신애협력을 못하는 것과 그 결과로 10인(人) 10색(色). 100인(八) 100기(幾)로
단결이 되지 못하는 바 있던 것이다. 폐일언하고 인간은 일종의 집단동물이다. 집단의 위력을 발휘치 못한다면 그 실력이 저 봉의(峰蟻)에게도 멀리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집단이 즉 단결이요, 단결이 되려면 그 분자 분자가 상호 신애협력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신애협력을 지분절해(肢分節解)하여 설명하려면 기천 권 수신서(修身書)로써도 부족 할는지 모르나, 간명적절(簡明適切)히 말하라면 손쉬운 방법으로
우리 일상 경송(敬誦)하는 교육칙어(勅語)의 일절(一節)을 봉서(奉書)해 보자. '부모에게 효(孝)하고 형제에게 우(友)하고
부부상화(夫婦相和)하고 붕우상신(朋友相信)하라.' 이 일절 중에 소위 신애협력의 전부가 포함된 것이다.
여기에 특히 '충군'의
2자는 표시되지 아니하였으나 기실 효도, 충군의 일단이요, 우도 충군의 일단이요, 화신(和信)도 또한 그러하다. 신민(臣民)이 모두 상호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였다가 일단 완급(緩急)이 있으면 의용봉공(義勇奉公)하는 것이 충군(忠君)의 지상방법(至上方法)이며 우리 생활의
의미가 전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자(子)가 되어서는 자의 직(職)을 다하고 형제간에는 형재의 책(責)을 다하고 부부, 붕우가 각기 그
소처(所處)의 직책을 다하는 것이 곧 신애협력의 요체이다.
3. 아등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穀練)을 양(養)하여서 황도(皇道)를
선명(宣明)하자. 금은주옥(金錄珠玉)도 이를 단련 조탁치 아니하면 일개 토석(土石)에 불과하고 교목거재(喬木巨村)도 이를 승연부단(繩硏理斷)치
아니하고는 고루거각의 동량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위인성자의 소질이 있다 할지라도 인고단련이 없이
생지천성(生知天成)은 바라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일(一)도 인고단련이요, 이(二)도 인고단련이다. 저 금옥이 열화중에
용해되며 철석(鐵石)으로 조탁될 때에 그 고통이 여하하였으며, 저 동량(棟梁)이 작지단지(斫之斷之) 준지부지(準之斧之)할 때에 또한 얼마나
고통을 받았으랴. 그 온갖 고통을 인내하였으므로 만인이 경앙하는 동량이 되며 진중(珍重)하는 금옥이 되지 않는가.
인간도 또한
절대적이므로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인고단련을 쌓아 완전 위대한 신민이 되어서 황도를 양(揚)하는 것이 곧 오등의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상의 이론이야 누가 모르리요만 금후의 성과는 오직 이상 서사(誓詞)의 심송체행(心誦體行)에 달렸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자타의 경성(警醒)에 공(供)코자 한다."
그 외, 미처 쓰지 못한
친일부역문인들을 생각하며.
밤늦게야 시작한 글쓰기가 아침을 맞이합니다. 제목만 남아 있는 친일문학작품과 그 작성자들의 이름이 저를
노려봅니다. "이제와서 들추어 본들 무슨 소용 있겠느냐"고... 일전에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는 친일부역문인 42명의 명단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곳 강릉의 한 고등학교 문학회의 시화전을 구경했더랬습니다.
저를 비롯한 이땅의 모든 글쟁이들이 다
그러했듯이, 청춘의 무수한 불면의 나날을 적어내려간 그들의 시를 보면서 많은 것을 반성하고 또 배웠습니다. 순수하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으니까요. 순수하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에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프다 말하고, 기쁘면 기쁘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순수문학"인 것입니다.
배울만큼 배웠다는 자들이 쓰는 글들에 나타나는 허위와 가식은, 그러므로 그 자리에 끼여들 여지가 없는
것이지요. 국정교과서에 등장하는 많은 작가들 중 상당수는 자신에게, 민족에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당대의 역사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자들이라는
것을, 그날 제가 시로 만난 예비문인들은 알고 있을까요? 가끔씩 저에게 시가 무어냐고 물어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사실은 나도 잘모른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진짜 시는, 참된 문학은 밤하늘의 별밭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삶에 닿아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문학은 곧 인간학이요, 생태학이요, 역사학인 까닭입니다. 두 번에 걸쳐 제가
소개한 자들 이외에도 다시 그 숫자만큼의 친일부역문인들이 존재했음을 우리의 역사는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그들의 글이 제목만
남아 저에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참다운 역사의 복원을 위해 살다가는 이들이 있는 한, 그들의 행적 역시 낱낱이 밝혀질 것을 믿습니다.
많이 부족하고, 또 엉성하게 쓴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한암선사의 법어(法語)로 인사를 갈음할까 합니다.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으리라.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변방에서, 감자꽃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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