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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윤리]29 - 윤리신학자의 주보성인 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우리 신앙 후손들이 누리는 축복은 많습니다. 그 중에 우리보다 앞서 참 삶을 살아낸 많은 성인들의 지혜를 배워 따를 수 있는 일은 큰 복이리라 생각됩니다. 본을 보여주신 성인들 삶이 우리를 당겨주고 이끌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귀감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온 것을 다 사용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성인들이 남겨주신 족적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배려 깊은 교훈인 셈이지요. 성인을 기리는 일은 우리도 그들처럼 하느님 뜻을 성실하게 살기위해 배워 익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느님 앞에 지혜로운 삶을 살아낸 성인들을 추앙하고 기리는 이유도 그분들의 덕과 지혜를 본받기 위함이지요.
그런 뜻에서 조금 이른 듯하지만 오늘은 8월1일에 축일을 지내는 윤리신학자의 수호성인 알폰소(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 주교 학자의 삶을 되새기며 함께 배우고 싶습니다. 클레멘스 8세 교황에게서 "교구 전체를 다스리는 데 당신 그림자만으로도 충분합니다"라는 답신을 받았다는 사실을 미뤄보더라도 알폰소 성인은 이미 살아 있는 동안에 성인으로 추앙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71년 팔라첼리 교황에 의해 윤리신학자와 고해신부의 수호성인으로 공포된 성인은 1787년 8월1일 91살로 선종했습니다. 총명했던 어린 시절과 명망있는 변호사 시절 이야기는 지면 관계로 접습니다만, 성인이 하느님께 돌아선 계기가 잘 나가던 변호사 시절 경험하게 된 '쓴맛'이었다는 것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짓이 정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것을 경험한 1723년의 패소는 세상에서 젊고 유능했던 그를 세상보다 귀한 하느님께로 돌려세웠던 것입니다.
서른에 사제가 된 성인은 그 길을 원치 않은 아버지한테서 의절을 당하는 아픔도 겪지만 우연한 기회에 아들 강론을 들은 아버지가 회개의 눈물로써 아들과 화해하게 됐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앙과 삶이 분리돼 있는 현실을 너무나 안타까워했던 성인의 강론이 아버지를 변화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집필가이기도 했던 성인은 주로 사목적 경험을 책으로 전하면서, 교회의 엄격주의적 견해를 배격했습니다. 복음의 단호성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균형있는 감각을 심어주고자, 나약한 죄인을 벌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설파했고, 우리에게 성덕을 향해 나가도록 원하시고 도우시는 하느님 마음을, 양심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밝힌 선각자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항상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므로 겉으로만 혹은 습관적으로 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에 끊임없이 항구해야 한다고 성인은 독려했습니다. 명확한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이성과 양심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가까운 법이라고 밝힌 성인은 신학과 인간의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남을 통해 서로 돕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는 불운과 온갖 종류의 박해를 막론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 뜻으로 알아듣고 그것에 순응해야 한다는 설득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서 불명예스런 일을 당하고 나쁜 평판을 당할 경우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 행위를 가하는 사람조차도 죄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오로지 당신을 바라는 겸손함과 마음의 가난과 절제로써 살아가기를 바라신다고 성인은 가르쳤습니다. 또 어떤 일에서든지 하느님 뜻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표상 아래서 성장할 때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큰 시련에 빠졌을 때에 "주님, 저를 지옥으로 보내지 마십시오. 지옥은 사랑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라는 기도를 십자가 앞에서 끝없이 바치셨다는 성인은 시대의 불투명성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일은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성인의 고결한 기도가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갑시다. "그분이 나를 빗나가게 만드셨다고 말하지 말아라. 주님께 죄인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집회 15,12).
[평화신문, 제832호(2005-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