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선생창의전말(勉庵先生倡義顚末)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병오(1906년) 4월1일부터 6월26일까지의 면암선생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선생의 행적을 적은 일기입니다.
짧은 기간이라고는 하나 한꺼번에 올리면 읽지 않고 지나치는 분이 많을 것 같아서
조금씩 나누어 올리려 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던 까닭을 엿볼 수 있읍니다.
몇 명의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사실보다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닌 그 정신인 것 같습니다.
정말 훌륭한 선조님을 발견한 것 같아 마음이 설레는 군요..^^
-------------------------------------------------------------------------------------------------------
면암선생창의전말(勉庵先生倡義顚末)
- 최제학(崔濟學)
병오 2월 무오일. 면암(勉庵) 최선생이 가묘(家廟)에 나아가 하직을 고하고 집안사람과 영결(永訣)한 다음 호남으로 떠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였다.
작년 겨울 국가의 변란이 있은 이래로 선생은 이미 왜적에게 박해를 입어 서울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윽고 연재송공(淵齋宋公)이 순절(殉節)했다는 보도가 들리자 선생은 설위(設位)하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제공(諸公)들이 죽음으로써 인간의 기강을 붙잡은 것은 진실로 국가의 빛이 되지만, 그러나 사람마다 죽기만 하면 누가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겠는가. 아직 죽지 않은 자는 정히 마음과 힘을 합하여 급급히 서둘되, 마치 불에 타는 것을 끌어내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 내듯이 해야 하며, 한 시각이라도 잠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는 없다.”
고 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마침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결정하고 편지를 판서(判書) 이용원(李容元), 판서(判書) 김학진(金鶴鎭), 관찰사(觀察使) 이도재(李道宰), 참판(叅判) 이성렬(李聖烈), 참판(叅判) 이남규(李南珪),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보내서 함께 국가의 난을 해결해 나가자고 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선생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함께 일을 계획할 사람이 없으니 인심이 이와 같을진대 참으로 이른바 ‘나는 사방을 둘러 봐도 좁고 좁아서 달릴 곳이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고석진(高石鎭)이 고하기를
“태인(泰仁) 사람 임병찬(林炳瓚)이 이미 갑오년부터 비적(匪賊)을 토벌한 공이 있으니 그의 충의는 믿을 만합니다. 이 사람과 함께 모사하는 것이 어떻겠읍니까.”하니
선생은 즉시 제자 최제학(崔濟學)에게 편지를 써 주어 뜻을 전달하게 하였다.
그래서 임병찬은 편지를 올려 종군하기를 원했다.
호서(湖西) 선비 임병찬(林炳瓚)이 와서 고하기를
“호남 선비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는데 모두 선생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를 삼고자 하오니 곧 그 곳으로 가셔야겠읍니다.”
하였다.
이윽고 선생은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이미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행차를 중지하며 말하기를
“이미 주장한 이가 있으니 내가 반드시 가야 할 것은 없다. 지금 우리는 군사가 훈련되지 못했고 무기도 이롭지 못하니 반드시 각 도, 각 군과 성세를 합쳐야만 일이 이뤄질 것이니, 나는 마땅히 남으로 내려가서 영(嶺)·호(湖)를 일깨워 일으켜 호서와 함께 서로 성원이 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마침 곽한일(郭漢一), 남규진(南圭振)이 함께 칼을 짚고 와 뵈니 선생은 한일에게 이르기를
“호서의 일은 내가 그대에게 의탁하는 것이니 그대는 남규진과 함께 대중을 격려하여 하루 속히 군사를 일으켜 영·호와 더불어 기각(犄角)의 형세를 만들고, 만약 뜻과 같지 않으면 바로 남으로 내려와 나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드디어 성명을 도장에 새겨 주어 사방에 호소하고 군중에 명령할 때에 쓰게 하였다.
그리고 또 격문과 존양(尊攘) 토복(討復)의 기호를 곽한일·남규진에게 주어 스스로 가서 거사하게 하였다.
- 후에 한일은 참판 민종식과 홍주에서 합세하여 적을 잡은 공로가 있었다.
홍주에서 패하자 한일은 선생을 따르고자 했으나, 선생도 역시 패하였으므로 달아나서 다시 거사하려다 못하고
민 참판과 함께 합치게 되어 지도(智島)로 귀양갔다.
그리고 남규진(南圭振)은 대마도(對馬島)에 구금되었다가 뒤에 모두 석방되었다.-
이에 선생은 또 편지를 제자 이재윤(李載允)에게 보내어 북쪽에 들어가 구원을 청하게 하고,
또 편지를 제자 오재열(吳在烈)에게 보내어 군사와 무기를 수습하여 운봉(雲峰)을 지키면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고,
드디어 최제학을 데리고 출발하여 임천(林川) 남당진(南塘津)을 건너, 태인(泰仁) 종석산관(鍾石山館) 임병찬의 집에 도착했다.
이 때에 병찬은 어머니 복(服)을 입고 상려(喪廬)에 거처하고 있으므로 선생은 병찬에게 상복을 벗고 종군할 것을 명하여,
무릇 군사 모집과 군량 저축과 군사 훈련에 관한 일을 모두 위임하였다.
어떤 이는 묻되
“선생의 이 번 거사가 과연 성공할 수 있겠읍니까.”하자
선생은 말하기를
“나 역시 성공하기 어려운 것을 안다. 그러나 국가에서 5백 년 동안 선비를 길렀는데 한 사람도 자기 힘을 다하여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 없다면 그 역시 수치스럽지 않은가. 내 비록 나이 80세에 가까왔으나 신하된 직분을 다할 따름이요, 죽고 삶은 깊이 생각할 바 아니다.”하였다.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이 그 문인 이정규(李正奎)를 보내어 선생께 편지를 올려 처신할 방법을 물으니,
선생은 남북이 서로 호응하여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뜻으로 회답을 했다.
문인 조재학(曺在學), 이양호(李養浩)가 영남으로부터 와 뵈이니
선생은 그들에게 “모두 영남으로 돌아가서 유지들을 격려하여 서로 응원하게 하라.”고 명령하고
또 영우(嶺右) 각처에 편지를 띄웠다.
이 때에 선생은 진안(鎭安) 촌가(村家)에 머물고 있는데 거처하는 집 지붕에서 흰 무지개가 하늘에 뻗치기를 2차례나 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