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말 어느 날 도천면 덕곡리의 주말농장에서 일하던 동서 내외로 부터 풋고추며 양대와 박 등 반찬거리를 가져가라는 전화를 받고 들렸다가 부곡온천에서 온천욕을 하고 오후시간이 여유로워서 아내와 함께 부곡면 온정리에 있는 장인.장모님의 묘소를 한번 둘러 보고 임해진을 지나 오다가 문득 아내에게 “모처럼 낙동강변에 왔는데 노리에 있는 ‘개로비’를 한번 보고 가면 어떨까?” 제안을 했었지요.
그래서 시작된 로정이 사진도 촬영하면서 강변의 확트인 풍광도 즐기고 목적한 바 대로 개로비까지 둘러 보게 되었습니다. 임해진에서 노리 마을 방면의 낙동강 하류 쪽으로 길을 따라 조금 가다 보면 전원주택마을(예전에 이곳은 옹기골이 있었다고 해서 ‘점촌’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이 나옵니다. 이곳에 가면 개로비가 있습니다. 옹기골이 사라지고 인가가 없던 이곳에 지금은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 되었습니다.
세월을 35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 보면 돌쇠가 처음 공무원으로 발령 받았던 1979년 5월 21일 창녕군 부곡면사무소가 떠 오릅니다. 부곡면사무소(사회계와 총무계)에서 5년여를 근무하며 개비리길을 처음 다닐때에는 이길이 절벽에 난 외길이라 사람이 걸어서 겨우 다닐 정도였습니다. 당시 돌쇠는 아버지께서 사 주신 90cc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에 출장을 주로 다녔었는데 흔히 직장상사였던 계장님이나 직장의 선.후배님을 뒷자리에 동승하여 갈때가 많았습니다.
그때는 이 낙동강변의 절벽길을 동승자 조력으로 2인승 오토바이에 1단 기어를 넣고 운전자는 벼랑의 언덕을 밟고 걸어서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사람이 다니는 길을 조력자가 오토바이 뒤쪽에서 붙잡고 사람이 탑승하지 않은채 약 300여m를 건너서 왔던 기억이 10여 차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발 아래로는 낙동강의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벼랑끝 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리에서 학포리와 구산리, 비봉리(당시는 비공리)를 지나 인교(지이다리)로 해서 면사무소로 오는 길이 비포장도로였지만 오토바이 운행에는 별 힘들이지 않고 올 수 있었는데에도 노리에서 임해진으로 오는 강변의 절벽길은 시간을 20여분이상 단축시켜주는 지름길 이었기에 위험부담은 안고 와야 하였는데에도나름대로 매력이 있었지요.
당시에는 예사로 지나 왔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인 개들을 기념해 만든 개비석이 여기에 있습니다. 비석 앞에는 안내판이 있는데 여기엔 개비에 얽힌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옛날 임해진과 노리 마을에 성(姓)이 다른 두 마리의 개가 살고 있었다. 두 마리의 개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정(情)을 잊지 못해 임해진에서 노리마을로 매일 같이 험한 절벽의 강변을 오고가며 정을 달랬다.
그러기를 여러번 왕래하다 보니 그 험하고 험한 산에 길이 생기고 말았다. 이 길이 있기 전에는 노리와 임해진을 오고가는 길이 없어 한없이 고생을 했는데 이들 개에 의해 산길이 만들어져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주었다.
개들이 뜻없이 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개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비를 세웠는데 이를 개비라 전해져 오고 있다. 이곳 비석을 탁본하였으나 노후하여 글자를 식별할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까우며 이후 이곳을 개비(犬碑) 또는 개로비(開路碑)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즉 양측마을에 살고 있던 후각이 예민한 암수의 개들이 발정기에 난 암내를 견디지 못하고 서로 왕래하며 정을 통하면서 소로(소리길)가 나게 된 것이지요.
죽은 개를 위해 비석을 세우는 사례는 이곳 노리의 개비석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주인이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주변에 불이 붙자 자신의 몸에 물을 적셔 불을 끄고 주인을 살린 얘기가 전하는 전북 고창 개비석, 전북 임실 오수개 비석 등등.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외국에도 있지요. 영화로도 제작돼 잘 알려진 일본의 하치코 이야기, 시부야역 앞에 개의 동상이 있다지요. 미국에서도 종종 충견의 묘비를 세우는 사례가 있습니다. 대개 주인을 위해 희생한 충견의 비석이 일반적인데 노리의 개비석은 개들이 서로 좋아해 만나면서 만든 길이 결국 사람에게도 이롭게 되었다고 해서 세워준 비석이라 특이합니다.
그 이후 부곡면에 사시던 몆몆 뜻있는 분들(지금은 작고 하셨지만 당시 동원장의 김대년씨와 아직까지 정정하신 대성장의 송병화씨 등등)이 12.12로 유명세를 떨쳤던 창녕출신 육군참모총장 박희도 장군께 건의하여 육군에서 개가 다니면서 만든 천애절벽 위의 소로길을 오토바이와 자전거는 물론 우마차와 소형농기계와 차량도 다닐 수 있는 길로 탈바꿈 하게 되었답니다.
부곡면 청암리와 학포리를 잇는 청학로. 이 길은 육군 39사단(1116 야전공병단)에서 1987년 만들었다는 비석도 길가에 서 있습니다.
후세의 혹자들은 이곳이 개비리로 그대로 존치했다면 더욱 좋은 자연풍광을 즐길 수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인근 주민들은 인교까지 둘러 오지 않고 면소재지까지 지금 이 길을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개비리길이 있었던 길을 따라 임해진으로 넘어 오면 예전에는 낙동강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민물회와 매운탕을 팔던 7여채의 가옥이 있었습니다만 4대강 사업과 또 그 이전의 낙동강 하천편입으로 하천부지에 지어져 있던 가옥들이 철거되고 지금은 그 위쪽에 소우정이라는 정자 1동이 남아 있습니다.
소우정은 조선 중기 학자인 소우헌(消憂軒) 이도일의 8세손 이승덕이 말년에 낙향해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도일은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습니다. 17세가 되던 해에 정유재란(1597년)이 일어났는데 이때 부친의 의병에 가담해 곽재우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또 1636년 병자호란 때엔 군량미를 내고 의병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이후 여러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했답니다. 소우(消憂), 근심을 깨끗이 씻어낸다는 말인데 참 적절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소우정에 서있으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광활한 경치가 마음 속의 근심을 모두 씻겨 주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부곡면 노리에서 청암리 임해진까지 개가 다니면서 만든 길(개로)을 군인들의 힘을 빌려서 우마차와 소형차량이 다니는 ‘청학로’(청암리와 학포리의 머릿글자를 따 온 이름)라는 길이 되었다가 이제는 2차선 아스팔트길(1022호 지방도)이 된 것입니다.
그 날은 낙동강변을 따라 길곡면의 낙동강 창녕함안보도 둘러 보고 마지막에는 국도5호선변의 화왕산휴게소에 있는 황포냉면 분점에서 시원한 냉면 한그릇을 먹고 왔습니다. 시원한 경치도 보고 또 시원한 냉면까지 먹어서 시원한 하루가 된 날 이었습니다.
그날 촬영한 사진으로 개로비와 개로를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개비에 관한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올려준 글을 보면서 임해진으로 이어지는 아스라한 추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대수를 보며 마음 녹이고 갑니다.
아스라한 추억이 맞습니다.
아마 지금의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을 바라 보노라면 이전의 청학로나 개비리는
이런 부연의 설명이 없으면 샐긴 유래를 잘 모르겠지요.
30여년전 아스라한 그 추억의 시절로 한번 되 돌아 가 보는 쏠쏠한 재미를 혼자 느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