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의 유념유상
올해는 몇 년인가
2017년이다. ‘몇 년’이냐고 물으면 그렇게 대답한다. 올해가 ‘무슨’ 해인가. 질문을 달리하면 대답도 정유년이라거나 닭띠해라고 달리 돌아온다.
이탈리아 친구에게 올해가 몇 년이라고 물으면 2017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올해가 무슨 해냐고 달리 물으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질문이 뭐 그러냐고 되묻거나 어쩌면 그들 나름의 대답을 할지도 모른다. 그들 나름의 대답을 한다면 질문한 내가 오히려 못 알아들을지도.
지금이 몇 월이냐고 그가 물어오면 1월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이 무슨 달이냐고 그가 달리 물어오면 질문이 뭐 그러냐고 나는 따지듯 되묻거나 어쩌면 신축삭이라고 대답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양력 2017년 1월의 월건이 신축이니까. 집안 제사의 축문을 담당하는 나에게는 월건표라는 게 있어서 그달 그달에 해당하는 월건의 간지를 알고 있다. 어떤 가톨릭 성인의 이름을 기대하며 물었을 그는 내 대답이 뭔 소린지 알아들지 못할 것이다.
그들과는 2017년이나 1월 같은 아라비아 표기법의 서력기원만을 공유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서력기원을 법률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언제였던가. 5.16 군사 정변 후인 1962년 1월 1일부터 채택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전에는 단기와 서기를 혼용했거나 단기만을 썼거나 고종의 연호를 사용했거나 육십갑자로 다음과 같이 연월일을 적었을 것이다. 정묘년 임인삭 초여드레 을미.
서구에서는 해와 달과 날에 황제와 천사와 성인의 이름들을 촘촘히 적어 축월과 축일로 기억했고, 우리는 해와 달과 날과 시에 정확히 두 글자씩의 간지를 적어 시간의 흐름과 순환을 헤아려 왔다. 갑자 을축 병인 정묘 이렇게. 이때부터 해와 달과 날이라는 것은 시간을 분절하는 단위로서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과 인간의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 구성하는 원리와 명칭이 나라마다 민족마다 종교마다 다르므로 당연히 특정한 국가와 민족 구성원이 상상하거나 믿는 세계는 기타 다른 국가와 민족 구성원이 상상하거나 믿는 세계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운명이라는 말을 운수나 운세라는 말과 가깝게 쓰면서 때로는 팔자라는 말로도 바꾸어 쓴다. 최근에 한국어 번역을 꿈꾸는 젊은 외국인들과 팔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팔자라는 말이 ‘여덟 개의 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재밌고 놀라워했다. 그때까지 번역 초심자인 그들에게 팔자란 [palza]라는 음성기호이고 fate나 destiny로 곧바로 환치되는 알파벳일 뿐이었다.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네 기둥으로 삼아 하나의 기둥에 각각 두 글자씩 간지를 붙여 4×2=8을 만드는데, 이 여덟 개의 글자에 그 사람이 평생 겪을 운명의 비밀이 들어 있다고 했으니 호기심이 폭발할 밖에.
네 기둥을 사주라 하고 여덟 글자를 팔자라 하여 사주팔자라 부른다는 데까지는 호기롭게 설명했으나 10간 12지를 말하고 그것들의 최소공배수로 60갑자를 만든다는 설명에서는, 간지라는 것의 기원에 관한 것에서부터 나의 지식이 달리기 시작했다. 12지에다 쥐, 소, 호랑이, 토끼, 닭 등 12종류의 동물을 배치한다거나 60갑자에 목화토금수 오행을 부여해서 각각의 성질이 상생하거나 상극하는 원리를 살피는 거라고 말할 때는 나도 그들도 몽롱할 지경이었다.
간지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에 음양과 오행론이 흡수되어 들어오는 역사적 과정과 배경이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하여튼 해가 바뀌면 병신년에서 정유년이 되고 원숭이해에서 닭의 해로 넘어갔다고 매스컴에서 크게 떠드는 게 우리에겐 자연스러우며, 결혼을 할 때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장 먼저 보내는 것이 신랑의 생년월일이 적힌 사주단자라는 말로 내 발언의 순서를 끝낸 적이 있다.
맞고 안 맞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이런 명리학의 일부가 한 나라의 정신문화에 흘러들고, 거꾸로 한 나라의 문화가 명리학 등의 추명학문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은 듯하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이러한 작용들로 인해 우리는 이제 단기 4350년이 아닌 서기 2017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정유년 닭띠해라고 말하는 것에도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의 문화적 환경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경이라는 말을 풍경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해 보면 어떨까. 이 문제를 ‘풍경은 기원을 은폐한다.’라는 명제에 빗대보기 위함인데, 이 말은 문화적 환경이라는 것이 일단 풍경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우리들은 그 풍경의 기원을 따지지 않고 매우 자명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이 듣기에 따라서는, 현재를 반성하거나 환기하려는 노력 없이 그동안 안주해 왔던 풍경 내적인 논리 위에서 자신의 삶을 반복해 정당화하려는 태도를 질책하는 소리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해 첫 달에 질책이란 말은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다. 올해가 몇 년인지, 다만 그것을 나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을 뿐이다. 세상의 인구가 너나없이 2017년을 연호로 쓰고, 그래서 그것이 결코 어색하지 않은 세계적 풍경이 되었다고는 해도 모든 인구가 다 그러는 것은 아닐 테니까. 우리만 해도 공식적인 2017년이 있는가 하면 공식이 아닌 정유년 닭띠해라는 명칭이 있으며, 종교공동체 연호로서 단기와 불기와 원기 같은 기원들이 병용되기도 한다. 한때 국가 연호로 사용되었던 단기로는 올해가 5035년이다.
조선시대 때까지 우리도 그러했듯이 서기가 쓰이기 전에 중국에서는 한무제 이후로 군주가 반포한 일세일원의 연호를 사용했다. 정관 19년, 광서 16년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로 별도의 연호 없이 서력기원을 쓰지만 아직도 그들의 일상 안에는 적으나마 황제기년과 공자기년 같은 연호를 적고 있다. 황제기년으로는 올해가 4715년이고 공자기년으로는 2568년이라고 한다.
몽고에는 공대, 베트남에는 의왕내제라는 연호가 있었거나 있고, 아랍에는 우리로선 복잡하게 여겨지는 이슬람력 연호가 있다고 들었다. 같은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이란/파키스탄력에는 또 다른 연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북한에서는 서기와 더불어 단기가 아직 사용되고 올해를 주체106년이라고도 부른다. 대만은 올해를 민국 혹은 중화민국106년이라고 한다. 일본은 아마 헤이세이 29년일 것이다. 그 밖에도, 다는 알 수 없으나 해를 나누고 부르는 이름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각각의 연호는 나름의 정신과 문화라는 풍경이 얼비친 하나의 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세계와 우주를 비추어내는 창. 그리하여, 올해는 몇 년인가? 하고 새삼 묻는 일은 이웃 나라의 창을 노크하고 인사를 건네려는 노력일 것이다. 나를 밝히고 상대의 안부를 물으며 그들의 세계와 삶의 속살을 이해하려는 손길.
새해 벽두니까 한번쯤 환기하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다른 사람들은 다른 풍경 안에 살고 있을 거라는 것. ‘다 같은 사람인데.’라는 말에는 인권평등의 숭고한 이념도 물론 깃들어 있으나, 모두가 나와 똑같을 것이라고 간주해 버리는 타자 배제의 위험 또한 도사리고 있는 것 아닐까.
같은 오늘을 살지만 은행나무와 강아지풀은 다른 속도 다른 시간을 산다. 거북이와 하루살이도 각각 그들만의 속도와 시간을 산다. 같은 2017년을 함께 맞았지만 나라마다 민족마다, 혹은 사물마다 개인마다 서로 다른 속도와 시간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지구의 생태계가 다양하면서도 영원하게 유지되는 비밀일지도 모른다.*
첫댓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거라고 예언한 미국의 어느 예언가 목사님은 "2017년 올해가 대한민국Korea가 전 세계의 정신적 지주 내지 빛이 될 거"라고 예언했는데 우린 벌써 촛불시위를 통해 평화롭게 새로운 '문재인 대통령'을 뽑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