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슬치터널을 지나 왼쪽으로 사선문이라는 곳이 보이고 관촌을 지나 예원대학교 가는 길이 보이고 "고추의 고장 임실", "전국 으뜸 맛, 향, 색깔, 임실고추", "복숭아의 고향 청정임실" 등 이런 홍보물이 많이 보이는군요.
이 부분은 약간 고지대로 철로가 있으며 옆으로 전주-남원간 국도가 보입니다.
임실역(역사가 상당히 예쁘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요?, 어떻게 보면 영동역과 비슷한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무엇인가 다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류역을 지나는 순간 약간은 신기한 것을 발견.
역무원 한 명이 수동 전철기로 조작을 하고 있으며 한명은 우리 열차에서 통표(제가 잘못 본 것은 아닌 것 같군요)를 전달 받는 중.
통표는 왜 하는지......
이유는 간단합니다.
통표 없이 그냥 하행 열차가 들어갔다가 만약 상행열차가 다음역을 통과해 진행하고 있었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죠?
단선 구간 1폐색 구간에 상행, 하행 두 열차가 같이 들어와 정면으로 부딛히는 일을 방지하고자......(단선인 선로에 1열차만 통과시키기......, 서로 반대방향의 2열차 통과시키면 바로 대형사고, 이제 됐죠?)
정확한 정의는 1폐색 구간에 1개 열차 이외의 다른 열차를 동시에 운전시키지 않기 위하여 시행하는 방법입니다.(이것은 통표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폐색구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통표를 가지고 한 열차가 1폐색 구간에 들어가서 다음역에 도착해서 통표를 전달해 주면 기다리고 있던 열차가 있으면 그 통표를 전달받아 들어가거나 통표를 전달받은 역에서 통표를 가지고 있다가 반대방향에서 오는 열차에 통표를 다시 주는......
즉, 통표는 1폐색에 하나만 있습니다.
지금은 시행하는 곳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라선도 복선화가 되면 없어지겠죠.
뭐 설명하자면 복잡할 거(폐색을 설명을 해야 하고, 상용폐색법, 대용폐색법, 폐색 준용법 같은 것까지 모두 설명해야 하므로)같고 운전 규정까지 이야기해야 할 것이고 이 여행기에 적당하지 않을 것 같아 과감히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옹정 임시 승강장을 지나 계속 , 그리고 오수(역시 통표, 이곳도 생각보다 이용객이 많은 곳입니다, 전라선 경유 무궁화호는 100% 정차하죠, 통일호는 당연하고요), 앗 여기서 길조의 까치가 날아다니는군요(보기 좋습니다, 정말 한적한 농촌의 모습을 보는......)
오수역을 지나 의견공원 조성공사(무엇인가 휴식처를 만드는 것 같은데), 서도(역시 통표, 기관사님하고 역에 근무하시는 분들 상당히 힘드실 듯), 드문드문 마을, 산, 밭 등이 보이고 지게를 진 할아버지, 밀짚모자를 쓰시고 모내기를 하시는 분들......(정말 농촌 그 자체의 모습입니다.)
산성(역시 통표, 이곳의 역 이름이 교룡산성이라는 곳이 있어서...... 육영민님이 제 홈페이지에 말씀하신 듯, 그런데 교룡산성은 어떻게 가는지 궁금하네요, 역에는 추억과 낭만이 있는 기차역->만인의 총길 이라는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의 판이 하나 보이는군요.)
슬슬 도시가 보이고 좌측으로 약간 큰 남원시청 건물이 멀리 보이더니 춘향이의 고향 남원역입니다.
이 곳에 잠시 정차하면서 곡성군수님 외에 노란색 옷을 입은 관광 도우미 등이 열차에 탑승.
곡성군수님은 각 객차를 돌아다니면서 인사를 한 후 오늘의 관광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 관광도우미들은 객차를 신청서를 들고 돌아 다니면서 그림 그리기와 자전거 대회 신청자를 받는군요.
곡성군수님의 안내방송 중 기억이 나는 것을 적어봅니다.
치포치포 섬진강 관광열차를 이용하여 우리 곡성군을 방문하시는...... 감사드리며......(맞나? 기억이 가물가물)
열차는 들판(경부선, 호남선)을 지나 익산부터는 전라선 전주, 임실, 남원을 경유하여 곡성군으로 가는데 전라선 열차는 여수까지 간다는......
전라선은 다른 노선과 달리 산골 사이로 가며 춘향골(남원)을 지나면 섬진강을 경계로 인구 4만의 곡성군(그러니까 섬진강을 경계로 곡성과 남원이 경계, 정확히 섬진강 철교를 건너면 곡성군으로 들어간다는 말씀......)
곡성은 대량 농산물은 없지만 다양한 농산물이 생산되는 곳이며, 사과의 주산단지이며, 배 수출 및 딸기, 메론 등의 질이 좋고, 느라리 버섯 등 다양한 농산물 생산하며, 품질은 좋으나 생산량이 적은편입니다.
특히 부각이라는 것이 특산품으로 유명합니다.
섬진강 36km, 보성강 18km(국가하천 54km)가 압록에서 합류하며 압록은 유명한 옥수라는 생수가 생산되는 물의 고장입니다, 이물을 행사장 본부에 비치한다는 말씀)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에서 발원하여 임실, 순천, 곡성(하부 호남 경계)를 지나 하동, 광양(경남, 전남 경계)을 지나 남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며 다른 강에 비해 오염이 안된 편임(섬진강 주위에 공장, 농토 등이 적어서 오염이 덜 된)
그리고 갈수기에 생활하수를 감당하므로 물의 양이 적은 편
심청의 고향인 곡성은 KBS 1TV 역사스페셜 역사 추적 심청의 바닷길에 나왔음(창건설화로 관음사와 관계)
춘향골은 남원, 심청골은 곡성(심청의 고장)이렇게 생각하시면......
그리고 서비스 수준에 대한 양해 말씀을 하시는군요.(곡성은 인구 4만에 1/4이 65세 이상 노인으로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하기는 어려우므로, 시골스럽다는 이미지로 이해해 달라는 말씀)
그 사이에 좌측으로 산중턱?에 놀이공원 비슷한 곳이 보이고 주생역을 지나 금지역을 통과하며 일시적으로 복선이 됩니다.
그리고 좌측에 철교가 보이고(철교 앞 뒤는 선로는 이미 철거된 상태), 아까 곡성군수님의 말씀대로 섬진강 철교를 건너갑니다.
계속 방송을 하십니다.
개평들(큰 들판)이 보이고 곡성에서 압록까지는 전라선 개량 1단계 공사가 끝나서 직선화(터널로......)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구전라선 철로는 남아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구전라선 철로는 14km정도 남아 있고, 이것은 원래대로 하면 철거했어야 했으나 곡성군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철도청과 협력하여 문화관광부에는 섬진강 기차마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추진이 되어 철로가 남아있다고 하는군요.
열차는 압록역에 정차하는 것이 아닌 송정 간이 승강장에 정차하는 것이며 승강장에서 우측을 보면 행사장이 보이고 행사장 근처에는 심청마을이 있는데 이 곳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곳, 이 곳에 살던 주민들은 모두 이주하여 지금은 비어있는 상태로 편의 시설(전화선, 전봇대......)이 없기 때문에 안내를 못하는 점을 양해해 달라는 말씀.
참고로 심청마을에 옛날 가랑지 논이 있고 철을 생산하던 야장터가 있으며, 돌은 푸르다.(산화철과 관련해서 설명을 해주셨는데 제가 화학을 잘 모르는 관계로)
또한 압록이라는 곳은 민물고기 등으로 인해 고기잡이 배도 많았으며 옛 지명은 압록진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추천해 드릴 만한 요리로 참게 매운탕을 들 수 있습니다.(이 곳이 참게 매운탕의 원조지역이라는 말씀)
가격은 25000-35000......(참고로 이곳은 1인분씩 파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먹을 수 있게 판매하므로 양해를......)
또한 행사장에서 태안사행 버스가 있습니다.
열차가 진행하는 곳은 곡성군 땅, 열차의 반대편(행사장 쪽)은 구례군 땅.
마지막으로 행사장에 대한 안내를 하였습니다.
생수가 본부에 있고 화장실은 곡성 학생의 집을 이용하시면 되고, 그늘이 없는 편이므로 근처 학교 안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시거나 마을 입구 정자나무에서 휴식을
우측으로 곡성역과 함께 구 전라선 철로가 보이면서 구 압록역사가 조그마하게 보이는군요.
지금의 곡성역을 보면 하얀색으로 벽돌을 쌓은 듯한 성모양으로 생겼습니다.(멋지고 특징이 있는 편입니다.)
터널을 지나면서 구 전라선 철로는 좌측으로 가면서 본격적으로 좌측으로 섬진강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구례구까지 펼쳐지는 섬진강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좌측으로 약간 구배가 있어 보이는 구 전라선 철로와 나란히 달리더니 드디어 압록역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승무원님의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뒤로 운전을 한다는 말씀과 함께 서울로 갈 때는 다시 17:00까지 임시 승강장으로 오실 것, 그리고 열차에 놓아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도록(열차는 순천으로 청소와 급수 때문에 들어가기 때문) 안내방송을......
여기서 다른 선로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관차를 우리 열차의 뒤로 붙입니다.
그리고 11:54분쯤 추진운전을 시작(쉽게 이야기해서 진행방향과 반대로 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15km 정도의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는군요.
분명히 표는 서울에서 압록까지 가는 것으로 발매되었지만 실제로는 압록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행사장 앞의 송정 임시 승강장까지 운행하는 것이죠.
압록에서 행사장까지의 운임은 공짜라고 보면 될 듯.
천천히 뒤로 가는데 신기하군요.(뒤로 가는 열차는 오래간만인 데다가 구 전라선 철로를 간다니 제가 못 가본 철로라 기대되고 신기할 뿐, 구 곡성역사까지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사람들은 좌측으로 와서 밖으로 보이는 섬진강가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좌측으로 지나가면서 오막살이 기차길 옆이라는 식당이 보이는데 이런 플랭카드가 보이더군요.
오픈햇시유!(정말 전라도 사투리)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한바탕 웃음을......
밖으로 보이는 도로에 압록리, 봉조리라는 초록색의 이정표도 보이고, 물가를 보니 생각보다 물이 별로 없네요.(가뭄에, 햇빛에......)
드디어 좌측 후방으로 천막으로 해 놓은 곳이 보이고 넓은 곳이 보이는군요.
단번에 행사장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송정 임시 승강장에 도착했습니다.
열차는 11분 정도 추진운전되어 12:03분 도착.
도착 홈이 작아서 내리기가 약간 힘들었습니다.(앞 칸으로 와서 내리고......)
내리니 심청골 곡성 방문을 환영합니다(곡성군)이라는 프래카드가 보이는군요.(맞는 말...... 왜냐하면 강을 건너지 않았으므로 곡성땅이 맞죠...... 흐흐)
내려서 앞을 보니 내려오는 계단에 빨간 조끼를 입은 행사요원?(알고 보니 어떤 산악회라고......)이 열차를 타고 방문하신 손님에게 손수 패치를 가슴에 달아주십니다.
패치는 초록색 바탕에 ... 곡성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곡성군이라는 글씨에 심청이 한자로 되어있고 압록유원지 사진과 심청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군요.
패치를 달고 나서 이번에는 볼펜을 주시는군요.
농구공 모양, 축구공 모양이 있는 2가지 볼펜이 있었지만 저는 축구를 좋아하므로 축구공 모양이 있는 볼펜을 받았습니다.
볼펜은 월드컵 코리아라고 영어로 적혀있고 축구공 모양 아래에 판매가격 1500원이라는 견출지가 붙여있군요......(집에 가서 1500원 주고 샀다고 할까나?)
아래에는 골짝나라곡성 심청골기념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일종의 기념 패치와 기념 볼펜이죠.(이것도 관광상품을 널리 알리는 좋은 방법입니다.)
패치를 달고 볼펜을 받고 환영을 받으며 한창 흥겨운 음악을 연주 중인 농악대와 함께 계단 아래로 내려와 차도를 건너 행사장 쪽으로 가는데 구름다리 가든이라고 적혀있는 임시건물 앞에서 조그마한 옥수수를 하나씩 나누어 주는군요.
간만에 옥수수를 맛있게 먹어봅니다.(아쉬운 점은 버릴 수 있도록 조그마한 비닐봉지를 주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강가와 함께 행사장이 보이기 시작하고 가는 세월교(이름이 재미있네요)라고 이름이 적혀 있는 다리를 건너갑니다.
계속되는 흥겨운 농악대의 소리마당......
그리고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기차에서도 보이던 파란색의 다리를 보았습니다.
두가교라는 다리로서 지금은 통행을 하지 못하게 막아 놓았으며 설명은 아래와 같이 되어 있군요.(가는 세월교를 지나 우측의 행사장으로 가면서 보입니다.)
두가마을은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곡성군과 구례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며, 앞에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어 주민과 학생들의 교통수단은 오로지 나룻배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지역으로서 여름에 큰 비만 오면 불어난 강물로 고민해야 했었다.
그러던 지난 1979년 6월 계속된 장마로 나룻배 밧줄이 낡아 사고가 있을까 염려하니 고 오규식씨를 비롯한 오정식, 김재만, 임용선, 최성문, 김재한씨 등이 새로 밧줄을 매던 도중 급류에 휩쓸려 6명 모두 실종하는 참사가 발생하였으나 볼행 중 다행으로 주민, 경찰, 행정이 합심하여 유해를 찾아 인장하였다.
이 딱한 사정을 접한 전라남도 지사의 특별 배려로 길이 169m, 폭 2.7m로 1981년 12월 20일 본 두가교가 준공되어 주민들이 편안하게 통행하여 왔으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더 이상 이용할 수가 없어, 바로 위쪽에 잠수교 형식의 새로운 다리를 1999년 2월에 준공하여 현재는 이곳으로 통행하고 있다.
본 두가교는 동생과 같은 효자이며 농촌지도자로서 사를 버리고 공을 취한 고 오규식씨 등의 영령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주민들과 마을 유지들의 뜻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앗 두가교에 대한 글을 다 적으니 농악대는 이미 사라지고 다른 분들도 모두 행사장으로 가 벼려서 졸지에 진짜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두가교에서 길을 따라 앞으로 가면서 보이는 행사장은 약간 복잡해 보입니다.
본부를 비롯 천막으로 해 놓은 많은 간이 시설이 보입니다.
여기서 식사를 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일단 자전거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섬진강가를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도 좋을 듯 해서.......
참고로 전 자전거 타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집에는 비록 자전거가 없지만)
자전거 빌리는 곳은 학교로 가는 길 우측 임시건물에 있습니다.
자전거는 시간은 무제한이고(참 마음에 드는 점, 그래도 결국 송정 임시 승강장 열차 출발 시각인 17:10분까지밖에 못타죠.) 1인용 3000원, 2인용 4000원(보고 또 보고에 나오는 그런 자전거-두 사람이 호흡이 맞아야 하는데 안그러면 한 사람이 고생합니다.), 어린이용(얼마더라?)에서 1인용을 빌렸습니다.
빌리는데 신분증과 대금을 지불 후 노란색 종이에 영수증을 써주시면서 반을 짤라 주시면서 이따가 가져와야 한다는 말씀을......
여기서 안내 팜플렛이 하나 보여서 잽싸게 챙겨왔습니다.(전 안내 팜플렛을 가져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집에도 상당히 쌓인 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대합니다!!
가족, 친구, 동료, 연인과 함께 할 수 있는...
환상의 섬진강변 자전거 하이킹
심청의 고향 전라남도 곡성군에서는 섬진강과 보성강의 맑고 깨끗한 강물과 수려한 자연 경관을 이용하여 공해에 찌든 도심생활에서 벗어나 대자연과 호흡하고 시골 황토길에서 힘찬 폐달을 밟으며 젊음과 건강을 함께 만끽할 수 있는 레져스포츠형 환상의 섬진강변 자전거 하이킹 코스를 개발 운영하고 있습니다.
섬진강변은 국도 17호선과 전라선 철도, 섬진강 등 3선이 진경을 이루어 일찍이 유홍준 교수가 추천한 대한민국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서 주변에는 3000여평의 잔디 광장과 원두막 8동, 디딜방아, 수차, 나룻배 등의 소담스럽고 잔잔한 볼거리가 많습니다.
주변 관광지로는 압록유원지와 불교 9산 선문종의 하나인 동리산 태안사가 있으며, 전국적인 별미로 인정받은 섬진강 민물 참게매운탕과 은어회 등을 드실 수 있습니다.
자전거 코스 및 대여 안내
보관장소 : 곡성군 고달면 가정리 창고
보관대수 : 300대(성인용 210대, 아동용 70대, 2인용 20대)
대여료 : 1일 1인당 3000원(2인용 4000원), 20인 이상 단체는 2500원(2인용 3000원)
대여문의 : 곡성군청 지역개발과 섬진강 기차마을 관광개발팀
문의 전화 : 061) 360-8265/팩스 : 061) 360-8587
자전거 하이킹 코스
제 1코스
소요시간 2시간/11.6km(포장 7.1, 비포장 4.5km)
가정리 - 두계리 - 뺑덕어멈고개 - 고리실나루터 - 호곡나루터
제 2코스
소요시간 4시간/25km(포장 25.0km, 비포장 0km)
가정리 - 압록유원지 - 유곡마을 -구례구역
제 3코스
소요시간 3시간/17.2km(포장 14.4km, 비포장 2.8km)
가정리 - 압록유원지 - 사슴목장 - 북소낚시터 - 국도 18호선
제 4코스
소요시간 5시간/34.4km(포장 29.0km, 비포장 5.4km)
가정리 - 압록유원지 - 사슴목장 - 국도 18호선 - 조태일문학관 - 태안사
환경 농업 1번지 골짝나라 곡성
싸인펜으로 아래의 전화번호가 적혀있군요.
문의 : 011-642-3882, (061) 362-3883
팜플렛을 빌린 후 자전거 대여......
안의 임시건물에서 노란색 영수증을 보여주니 어떤 꼬마?님이 자전거를 골라 주십니다.
자전거는 곡성군 1-197이라고 적혀있고 좋은 편(기아 바꾸는 것도 가능)입니다.(직접 빌려 보시면 아실 수 있을 듯)
자전거를 빌려서 길가로 내려오니 자전거 하이킹 코스에 대한 안내가 나와 있습니다.
위의 4가지 코스가 동일하게 나와 있더군요.(생략합니다.)
그 앞으로 액자로 잠자리를 전시해 놓았습니다.(꽤 많던데)
모두 살펴보고 자전거를 타고 어떤 코스를 갈까 고민했습니다.
일단 2, 3, 4코스는 시간상 안될 것 같고(뭐 엄청나게 달리면 모를까, 그러면 힘 다 빠지고 그 다음날 휴유증이 많을 듯)
1코스를 고려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문득 생각난 것이 자전거를 타고 압록역에 가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저다운 발상이었습니다.
역에 가보는 것이 취미라서.(여기까지 왔는데 압록역을 못 가본다는 것은 말이 안될 것 같군요)
압록역은 코스와 관계없이......(상관 없으려나?, 우려되는 것은 건너편(압록역이 위치해 있는 방향)은 차가 많은 편이라......)
에라 모르겠습니다.
출발해 봅니다.
다른 자전거 타신 분들은 다 2코스쪽이나 1코스쪽(별로 가는 사람 없었음)으로 가는데 저는 가는세월교를 건너 아까 왔던 승강장쪽으로 갑니다.
이번에는 철로가 아닌 도로를 따라 압록역 방향으로 쭈욱 내려갑니다.
정말 차가 많네요.
제 엄연히 알아서 비켜 갈 것인데 계속 빵빵 하시는 분.(짜증, 알아서 구석으로 타는데 왜 자꾸......)
17번 국도를 따라 천천히, 어쩔 때는 빨리 가봅니다.
멋진 섬진강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여유로움을 즐겨 보았습니다.(사실 제가 이럴 때가 아닌데)
압록역까지 지나가면서 본 것 등은 조금 있다가 언급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압록역에 도착했습니다.(하긴 열차가 15km로 가는 것을 계산하면)
아무리 해도 30분은 걸리지 않은 듯(제가 약간 자전거를 빨리 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압록역은 조그마해 보이는 건물에 조용(이제 슬슬 이용객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우측으로 보이는 벤치 아래에 자전거를 세우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난번 철도청 홈페이지에서 단말기가 설치된 역사를 살펴보다가 압록역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압록역에 갈 일이 있으면(치포치포 섬진강 관광열차가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습니다.) 꼭 표를 끊어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보면 여기서 약간 바보같은 짓을 생각해 봅니다.
서울역에서 왕복으로 끊었기 때문에 새로 끊을 필요는 없지만 수수료를 물어가면서 압록->서울을 압록역이 찍힌 승차권을 갖고 싶은 이유로 발매 받으려고 합니다.
승차권을 끊으려고 밖에 있는데 안으로 들어오시라는 말씀을.
안으로 들어오니 부역장님과 역무원 1분이 계셨습니다.
압록역은 하루 3명 근무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위의 상황을 이야기하니 약간은 황당해 하시는군요.
정말 단말기가 있는데 별로 사용하지 않은 듯.
게다가 신용카드로 표를 발매해 본 일이 없어서......
하여간 역무원님이 어떻게 어떻게 알아보고 하시더니 표를 발매해 주시고 마일리지를 누적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압록역 이석만이라고 찍힌 표를......(감격스러워라, 정말 이상한 취미죠?)
흑흑! 1400원이라는 수수료가 고스란히 철도청으로......
오늘 압록역에서 표를 발매받은 첫 손님이라고 하시더군요.
게다가 신용카드로 발매 받은 사람은 제가 처음이라고 하는군요.(영광......)
물어 본 것이 철도자료(이용객이 하루에 1명이 없는 경우도 많답니다, 정말......)
그래서 없다는 말씀 밖에......
그래서 기념이 될 만한 것을 찾다가(입장권도 없고) 통일호 에드몬슨식 승차권 압록->익산(노소)를 1500원에 구입했습니다.(1400원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볼펜으로 15000원이라고 수정 후, 날짜 6.17, 열차번호 1212를 볼펜으로 적으시고 날짜를 찍으신 후 건네 주시더군요.
번호가 00013 정말 마음에 드는 낮은 번호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의 번호를 보았는데 40번대, 30번대 등등 번호가 상당히 낮군요.(황재호님이 좋아할 만한 것입니다.)
관광 안내팜플렛이나 열차 시각표를 물어보았는데 처음에 열차 시간표를 열심히 찾으시다가 결국 압록역 열차 시간표를 프린터로 출력해 주시더군요.(감사)
큰 역은 조그마하게 포켓 형식으로 주시는 곳도 있었고 작은 곳은 프린트 해 놓은 것을 주시는 곳도 있었던 곳으로 기억됩니다.
압록에서 전주까지 표를 발매받은 손님(전주까지면 100km미만 기본 구간이죠, 한 장당 4700원씩)이 #472 열차를 타고 가신 후, 저는 커피를 마시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음식은 모두 맛있다는 듯.(특히 압록역 전방 압록유원지 근처 음식은 정말......, 추천을 해주시던데 특정한 음식점을 말씀하시지 않으신 듯)
그 외에 치포치포 섬진강 관광열차는 7월 이후에도 다닌 다는 말씀을 하신 듯.
역사 바깥에 보이는 열차 시각표와 운임 그리고 우측에 무엇인가 있어서 자세히 보려고 가보았더니 아래의 내용이었습니다.
김영애 소나무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탤런트 김영애는 빨치산 남편의 뼈를 지리산 자락에 뿌린 뒤 휘날리는 스카프만 남긴 채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열연했다.
참고로 김영애 소나무는 지금은 구례구 방향쪽의 어디론가 옮겨 심어졌습니다.
여기서 모래시계......(정말 저는 모래시계와 관련성이 많은 듯, 이번주에 강릉 단오제 가서 또 모래시계를 보아야 하므로)
그리고 왼쪽으로 보이는 것.
압록역 명칭 제정 유래
1. 역명 : 압록역
2. 역명칭 제정 유래 내용
약 900년전 섬진강과 보성강의 푸른 물이 합류하는 곳이라 하여 합록이라 부르다가 400여년 전 마을이 형성되면서 천어가 많이 생산하는 곳이라 오리과의 철새들이 날아 드는 것을 보고 합을 압으로 대치하여 압록이라 지명했으며 지역명을 따라 압록역이라 명함.
압록역장, 곡성군수
이제 압록역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부역장님, 역무원님) 인사를 드리고 압록역을 떠나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갑니다.
압록역 전방 아래를 보면 압록유원지로서 벌써 야영하시는 분들하고 물놀이 하시는 분들도 보이는군요.
저는 구례군쪽으로 놓여있는 예성교라는 다리를 건거면서 논곡, 구례 방향으로 향합니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구례, 화엄사 방향이 아닌 좌측 논곡(행사방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보이는 이정표는 <-1코스 4.2km 자전거 대여소, ->2코스 8.3km 구례 이렇게 적혀있군요.
그러니까 저는 1코스 방면으로 가야합니다.
천천히 좌측의 섬진강과 반대편으로 압록역을 바라보면서......
아까와는 달리 이쪽 차도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군요.
자전거 타긴 편안한 것 같습니다.(건너편의 도로와는 상이하게 차가 없는)
좌측을 보면 자동차를 세워두고 강가로 내려가신 분들도 많이 보이고, 천천히 강가를 따라 가다보니 어느새 행사장이군요.
행사장 대회본부로 가서 더운 날씨에 자전거를 타면서 흘린 땀, 목에 갈증이 나고 해서 아까 곡성군수님이 말씀하신 물 맛을 보았습니다.
옥수라는 생수입니다.
갈증이 나서 마시는 것이라 시원하고 맛있습니다.(실제로 맛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잠시 근처 벤치에 앉아 쉬는 동안(물론 자전거 앉아서 타지만 자전거 안장은 의자가 아니죠, 너무 아파요!)
본부에서 방송이 나오는군요.
나룻배 타고 싶으신 분은 본부 옆의 봉고차에 타시라고.
한번 나룻배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자전거는 어떻게 해야 하려나?
일단 자전거는 대회 본부 앞에 잘 보이는 곳에 맡기고? 봉고차를 타고 나룻배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봉고차 운전하시는 분도 노란색 조끼에...... 친절하시네요.
행사장 와서 느낀 것이지만 모두다 친절하신 듯.(친절이 몸에 익으신 듯한 느낌이 듭니다.)
차는 가는세월교를 건너 곡성 방향으로 길을 따라가니 우측 물가에 줄이 쳐져 있고 약간 커 보이는 배가 보이는군요.(행사장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다는데 맞는 듯)
앗! 저것이 나룻배!
봉고차에서 내려 나룻배를 탑니다.
신기하네요......(아직도 이런 것이)
분명히 건너편에 마을로 가는 길이 보이는데 주위를 보니 강을 건너갈 방법이 없군요.(주위에 다리가 하나도 없으니)
현재 건너편에는 3가구가 거주하는데 학생들이 통학, 마을사람들이 이동하는데 요긴하게 쓰인답니다.
여기 있는 나룻배는 노를 젓는 것이 아닌 양 사이드에 걸쳐 있는 줄을 잡아당겨 갑니다.
노란색 옷을 입은 관광 안내 도우미......(힘 좋아 보이는 남자 분)
천천히 줄을 당겨 반대편 사이드에 도착
여기서 탑승하시는 분이 있으신 듯해서 멈추었더니 우리가 강을 건너 갔다 오시면 타겠다고 흐흐......
그래서 다시 왔던 곳으로 가는데 어린 아이가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을 하는군요.
여기 수심이 얼마나 되는지.
여기서 아까 봉고차를 운전하신 도우미 아저씨가 나룻배 위의 긴 막대기를 쭈욱 물에 담그어 봅니다.
가뭄 등으로 물이 많이 빠진 편이지만 상당히 깊군요.(4m 정도 된다는데, 제가 길이에 대한 감각이 안 좋은 편이라 실제는 어느 정도 되는지 짐작을 못 하는군요.)
여기서 약간 재미있는 이야기.
다른 꼬마가 못보았다고 다시 막대기를 담그라는 이야기에 모두들 웃어 버렸습니다.
다시 한번 할테니 잘 봐봐.(전라도 사투리인데 글로써 표현하기가 힘들군요.)
라는 한마디와 함께 정말 다시 막대기를 담그는 도우미 아저씨.
봉고차가 있는 편에서 다시 반대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저보고 해보라는 말씀을.
순간적으로 약간 당황했지만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아서 해보았습니다.
천천히 철사줄 아래에 있는 밧줄?(밧줄이 아니라 무슨 줄이라고 하지?)을 천천히 잡아당기니 신기하게 배가 천천히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더군요.
아무래도 처음하다 보니 서투릅니다.(사람들의 약간의 우려?)
천천히 반대편으로 도착하기 전 독? 앞에서는 천천히 줄을 잡아당기라는 말씀......(그래서 천천히)
타이어가 붙여져 있었으면 부딛혀도 어느 정도 충격이 흡수될텐데.
아까 그 분을 태우고 다시 제가 또......(운전?)
이번에도 천천히......(하여간 가시면 직접 해보시기 바랍니다, 크게 힘드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어요, 이런 경험 하기 힘들걸요?)
반대편으로 건너가 손을 보니 밧줄로 인한 하얀색 지푸라기 비슷한 것이 손에 묻어 있고 손이 빨갛게......
흐흐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갑자기 이번에는 도우미 아저씨가 돌맹이를 줍더니 수레잡기 3번 튀기는......
그에 따라 저도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강가에 돌을 던져 봅니다.
흐흐 제가 가장 실력이 나았다는......(스승보다 제자가 낫다는 청출어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봉고차를 타고 행사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슬슬 올라가는데 이번에는 아까 건너편에 계셨던 분이 혼자 열심히 밧줄을 잡아 당기며 반대편으로 가는군요.(흐흐 정말 해보시고 싶었나 봅니다, 정말 단순하면서도 은근히 재미있습니다.)
봉고차를 타고 다시 행사장으로 돌아온 후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드리고 저는 배가 고픈 나머지(아침을 대강 롯데리아에서 해결했지만, 점심을 먹지 않았습니다.)
근처 나룻터 슈퍼 62-8481, 63-7940(옛날 전화번호군요.)에서 신라면(컵으로 된 것)-물까지 포함을 1000원에......
벤치에서 열심히 식사를......(흑 그런데 절 배부르게 하시려고 물을 너무 많이 넣어주신 나머지 맛이......, 전 국물이 적은 라면을 좋아하는데, 제가 물을 넣을 것을 그랬나요?)
아무튼 라면을 먹고 이번에는 행사장 주변을 자전거로 가봅니다.
주변에 원두막 비슷한 것이 보이고(사람들이 누워있거나 앉아서 휴식 중)
오희숙 전통 부각이라는 것이 쓰여진 곳, 투호를 하시는 분(생각보다 잘 안들어 가시죠?, 지난번 예비군 훈련 때 같은 것이지만 철근 콘크리트 조그마한 것을 넣으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군요, 이것 3번 모두 다 넣으면 오후 훈련 열외라는 말에 모두 열심히 했지만 하나를 넣은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설사 들어갔다 해도 튀겨져 나오는 등), 훌라후프를 하시는 분(다이어트에 좋은 운동 중 하나, 의외로 잘하시는 분이 많이 보입니다.), 두렁쇠 굴리기를 열심히 하시는 분(두렁쇠를 굴리는데 필요한 막대기는 대나무로 되어있는 듯, 생각보다 잘 굴러가네요.)
그 외에 대나무 물총을 열심히 쏘시는 분(재미있겠어요) 등 각양 각색입니다.
본부에서 어린이 싸이클 대회인가 방송을......
8명 정도 참가하는군요.(에구 자전거 시합하고 싶다, 자신있는데 말로만. 3등 안에만 들면...... 흐흐!)
아래로는 심봉사다리 앞 보트를 타는 곳이 있고요.(보트는 레프팅을 위한......, 영월 동강에 이런 것이 많이 있죠?)
DKK 레프트 캐인 광주라고 적힌 차가 보이는군요.(보트 레프팅을 위해 나오신 듯)
그리고 다시 벤치에 앉아 뒤를 보는데 닭장이 보이는군요.
어미 닭 하나에 병아리가 무려 18마리인데 어미닭 혼자 낳았다는 마을 주민의 말씀.(대단하군요.)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하면서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는데......(하나 같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번에는 오희숙 전통 부각이라는 곳에 가봅니다.(궁금한 것이 있어서)
부각과 당과가 있고 우측으로는 시원한 식혜와 콜라가 있습니다.
일단 날이 더운데다 뜨거운 라면을 먹은 관계로 1000원을 주고 시원한 식혜를 먹고 물어보았습니다.
부각은 백화점에서 25000원에 파는 것을 20000원, 12500원에 판매하는 것을 11500원에 판매하신다는 말씀과 함께 한번 앞의 것을 먹어보라고.
먹어 보았는데 맛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식물성이고......)
그런데 구입하기엔 돈이 약간 부담.....(저는 불효자인 듯)
부각과 당과가 있는데 제조한 방법은 서로 다르더군요.(자세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측으로 소달구지가 보이는군요.
정말 황소......(앞의 뿔이 약간 굽어져 있고), 달구지에는 어른 아이들이 탑승한 상태로 나이 드신 분은 소를 몰아 행사장 잔디 밭을 한바퀴 돕니다.(천천히 소가 끌고 가는데 이것도 재미있을 듯, 갑자기 저는 여기서 소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다시 앞으로 보이는 디딜방아 앞으로 갔습니다.
디딜방아에 대해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디딜방아(일명 딸각방아, 발방아, 돈방아, 손방아)
디딜방아는 땅에 절구활을 묻고 긴 나무체의 한 끝에 공이를 끼워 다른 한 끝(다리)을 눌렀다 놓았다 하면서 곡식을 빻거나 찧고 도구로서 공이는 나무나 쇠로 만든 것이 있으며, 공이 끝에 돌을 달기도 한다.
디딜 방아로는 성인 2명이 하루에 쌀 2가마를 찧을 수 있고 제분은 반가마를 빻을 수 있다.
이것을 보고 나서 천천히 발로 눌러보았습니다.
생각보다 힘이 드는군요.(에구 힘들어)
그리고 다시 제가 라면을 먹었던 벤치 우측으로 보이는 무자위에 가보았습니다.
이곳은 디딜방아와는 달리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무자위의 바퀴를 열심히 물을 끌어 올리는군요.
무자위(일명 수차, 답차, 자애, 자세, 무자세)
무자위는 큰 바퀴를 이용해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의 논밭으로 퍼올리는 농기구로서 한 개의 국내 주위에 여러 개의 나무판을 나선형으로 붙여 마치 날개 달린 바퀴처럼 보인다.
이 날개판을 두발로 번갈아 밟으면 바퀴가 돌면서 시간당 50-60톤 물을 퍼올려 붓도랑으로 흘러 들어가게 한다.
저도 해보고 싶었으나 워낙 많은 사람들의 호응에 힘입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소달구지를 타보려고 했는데 이것은 반대로 사람이 없어서 운휴?상태.
옆으로 보이는 급수대(먹는 물 아닙니다.)에서 잠시 세수를 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까 태안사에서 많은 손님을 태우고 행사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보았습니다.(엄청 많은 손님들이 다녀오신 듯)
그 곳의 물 맛이 특이하고 좋다고 말씀하시더군요.(한번 먹어보고 싶었으나 가져오신 양도 적고......)
옆으로 노래자랑이 시작......(앰프 틀고......)
그리고 왠 기차가 송정 임시 승강장에 들어오는 것이 보이는데(최남용님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3640 열차 영등포까지) 먼저 있었던 보이스카웃 일행이 타고 갈 열차입니다.
까페객차는 있는데 우리 열차와는 다른 그냥 무궁화호 일반객실이 있는 9량 편성입니다.
이번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까와는 반대의 코스로 자전거를 타는 것......
이번에는 아까의 코스와 같지만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는 생략하지 않고 중간에 보이는 건물이나 마을 이름 등을 적어봅니다.
천천히 학교 옆을 지나(학교 안의 큰 나무아래 쉬시는 분도 계시고) 논곡마을을 지나면서 우측 강가에는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려는 분들도 보이는군요.(실제로 고기를 잡으시는 분은 아니신 것 같고, 고기잡이 체험을 하시는 듯)
그리고 앞으로 가면 구례, 우측으로 가면 광주로 가는 17번 국도, 곡성으로 가는 18번 국도가 갈라지는 다리 앞으로 왔습니다.
다리를 건너면서 좌측을 보니 압록 유원지(아까와 같은 풍경입니다, 철교 아래 야영, 물놀이......)이고 다시 이정표는 직진하면 18번 국도 석곡, 호남고속도로, 좌측은 구례 17번 국도, 우측은 곡성 17번 국도 이런 식입니다.
예성교를 건너 우측으로 압록 보건 진료소 등을 지나면서 마을을 구경하고, 아까의 압록역을 지나갑니다.
압록역을 살짝 보았는데 아까 역무원이 일을 하시는 중(눈으로 인사를), 압록 제 2교라는 다리를 건너 아까 말씀드린 기차마을 오막살이 오픈햇시유!(아무리 봐도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플랭카드, 이정승강장, 이정교, 압록리, 봉조리 들어가는 길이 보입니다.
봉조입구라고 적혀있는 곳을 보면 현조마을 봉조 2구 2.5km, 서봉마을 봉조 1구 3.5km 이렇게 비석처럼 적혀있군요.(마침 보이는 버스에 내려서 마을로 가시는 분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봉조 정류장을 지나 가는데 앗 참새가 갑자기 달리는 차하고 부딛힌 듯.
애석하게도 생명을......(불쌍한 것)
아래를 보니 피묻은 참새가 보였습니다......(일단 다른 차에 밟힐 것 같아서 참새를 치우고......)
그리고 가정 정류소를 지나 우측 아까 두가교에 대한 설명이 보이는군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두가교 2번 교각이 기울어져 붕괴 위험이 있어 농어촌 도로 정비법 제 16조 규정에 의거 통행금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가난하고 연약한 소녀가 아니다.
천지 일월이 밝아 있고
사해 용왕이 성원하던 거룩한 효는
나의 정체성이다.
지난 시대의 그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 밝음과 입맞춤하는 새벽으로의 출구였고,
새 생명의 탄생으로 가는 시련의 통로였다.
인당수의 슬픈 사연도, 황후 된 감격과 환희도 뒤로한 채
이젠
빈궁에서 풍요를 낳고
죽음에서 새 생명 얻는 부활의 여신이 되어
나의 본향 곡성에서 포근히 쉴 자리를 찾는다.
내 부친의 개안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만인의 황후가 된
나는
'시대의 효'를 전하며
집단적 환상과 대동적 신명을 자아내는 주역으로
우리 모두가 일구어내는 희망의 화신이 된다.
돌아온 내 이름은 '맑은 마음(심청)'
그늘진 폭력과 상실하는 인간성을 뒤로하고
세기의 찬연한 무지개가 되고 싶다.
어두웠던 역사와 작별하는 민족 축제의 꽃비 되어
민족의 거대한 개안을 축하하고 싶다.
죽음마저 즐거움으로 맞으며 비극의 끝자락을 넘겼듯이
이제 나는
분당의 장벽을 허무는 '
시대의 효녀"로 역사 앞에 선다.
때묻은 마음
서해에 씻고, 태평양에 씻으며,
황후가 되던 바닷길 따라
'심청의 이름으로 새 천년의 등불이 된다.
관음사 사적기 전문
심청전의 근원설화 중 가장 대표적인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소재 관음사사적기에 관해서 일부문헌에서 부분적으로 소개하거나 인용된 사례는 있으나 전문을 소개한 경우는 조선사찰전서(권상로)등 두 세 권에 불구하다. 또한, 이들 문헌이 일제시대에 발간된 것이어서 연구자들 조차 접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일반인이 쉽게 이해하도록 한자로 된 판각본 원문을 영인하여 소개하고 한글번역본을 함께 싣는다. 또한 한국인의 정서와 심성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관음사 사적기를 영어와 일본어로 새로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이는 효녀 심청이야기가 세계화로 나아가는 우리 민족의 새 천년의 길잡이가 되기를 희망하는 연구자의 염원이 담겨있다. 심청은 한국인의 심성을 대변하는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한글 번역본
한글로 번역된 관음사사적기는 현재 6종류가 소개되고 있다. 전반적인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번역지나 찬지에 따라 상당한 변이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한글본은 원문에 충실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1. 성녀 원홍장의 효심
대흥이라는 고을에 홍장이라는 장님의 딸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원량은 소년에 그만 눈이 멀었다. 비록 눈이 멀었으나 양반의 후예로서 행실이 청렴 강직하고 기개가 고상하여 언어범절이 조금도 경솔하지 아니하니 인근의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는 바였으나 불행은 겹치는 것이라고 한다더니 성품이 현숙하고 민첩하여 바느질과 품팔이로 앞 못보는 자신을 봉양하던 부인이 그만 산고 끝에 먼저 세상을 뜨니 앞도 못보는 장님의 처지로 어린 딸을 드엥 업고 이집 저집 젖동냥으로 키운 딸이 홍장이었다. 홍장 또한 성장하면서 성품이 현숙하고 민첩하여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부축해 드렸으며 그의 봉양이 극진하여 모든 범절에 있어 비범한데가 있었다. 홍장의 효성이 이러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대효라 칭송해 마지 않았으며 나라안에는 소문이 자자했고 멀리 중국땅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님 원량은밖에 나갔다가 마침 홍법사 화주승 성공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성공 스님은 원봉사를 보더니 "당신과 함께 금강불사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부디 큰 시주가 되어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원봉사는 갑작스런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생각해보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므로 조용히 대답하기를 "나는 보시다시피 앞을 못보며 더구나 가난한 처지인데 어떻게 부처님을 위하는 시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화주승 성공대사는 다시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소승이 금강불사의 원을 세워 지성으로 백일기도를 봉행하여 마지막 회향하는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부처님께서 현몽하시기를 "내일 기도를 마치고 길을 나서면 반드시 장님을 만날 것이다. 그는 이번 불사에 대단월(큰 시주)이 될 것이니라 하셨으므로 이렇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원봉사는 말을 잊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겨우 입을 열어 "집에는 곡식 한줌없고 밖에 나와 봐야 내 땅 한 뼘없는 처지인데 무슨 수로 시주를 할 것입니다. 다만 나에게 딸린 것이 있다면 딸자식 하나가 있을 뿐인데 이 아이로써 금강같은 불법에 선근 인연이 되고 혹시 대작불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데리고 가서 좋은 도리를 생각해 보시오..."라고 하였다.
홍장의 나이 이 때 불과 열 여섯이었다. 이리하여 화주승 성공대사는 무한 감사의 예를 올리고 원봉사를 다라 그의 오두막으로 갔으며 아버지 원량은 성공대사와의 언약한 사연을 딸에게 말해 주었다. 홍장은 일생 아버지를 봉양할 생각이었으나 아버지와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어 애통하게 울었으며 원량 역시 기막힌 심정이 되었다.
실로 산천초목도 울고 일월도 빛을 잃은 듯 하였으며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 또한 슬피 울부짖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지극한 효심은 곧 불심으로 나타났음인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급기야는 아버지를 하직하고 화주스님을 따라 나섰다. 아버지인 장님과 딸 홍장의 작별을 가엾고 측은하게 여겨서 마을 사람들도 길을 메우며 옷깃을 적시었다. 홍장은 화주스님과 길을 나서며 뒤돌아 보이는 고향마을과 평생 모시려 하던 아버지도 이제는 영영 이별이라고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였다. 난생 처음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너무나 오래 걸은 탓으로 피로에 지쳐 바다가 보이는 소랑포에 이르러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홍장과 성공스님은 서쪽 바다를 향하여 쉬고 있었는데 바다 저 멀리 수평선 위에서 붉은 배 두 척이 나타나는가 하더니 질풍같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날으는 화살처럼 순식간에 나루에 다다른 배는 모두 진나라의 배였고 배에는 금관옥패와 수의를 입은 사자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언덕에 앉아 있는 홍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배에서 내려 홍장이 쉬고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 홍장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어 절을 하며 "참으로 우리 황후마마 이십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홍장은 물론 화주스님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홍장은 얼굴빛을 고치고 "여러분께서는 어디서 오신 어른이신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저희는 진나라 사람입니다. 영강 정해년 오월 신유일(267년)에 황후께서 붕거 하셨는데 이로부터 성상께서는 늘 슬픔을 가누지 못하시더니 하루는 꿈에 신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성상의 새 황후 되실 분이 이미 동국 백제에 탄생하여 장성하셨고 단정하기로는 전 황후보다 더 하시니 이미 가신 이를 생각하고 과히 슬퍼하지 마시오'하고 현명하시매 성상께서는 꿈에서 깨어 날이 밝자 곧 폐백 4만단과 금은진보 등을 갖추어 이 두 배에 싣게한 다음 상을 잘 보는 상사를 선발하여 사자로 삼아 신칙을 내리시되, 동국으로 달려가서 황후를 맞이하라 하시었으므로 소신 등이 외람되이 상명을 받자와 본국을 떠나온 이래 숙야(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로 근심 하옵더니 이제 다행히 성의를 여기서 뵈옵게 되었나이다.
사자의 긴 사연을 듣고 난 홍장은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 한 몸이야 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오, 그런데 갖고 오신 폐백이 얼마나 되옵니까?" "예 저기 두 배에 가득 실은 것이 모두 값진 보물이옵니다." 홍장이 미소를 띠며 말하였다.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옵고 아버님을 위하여 선근종자를 심어 드리기 위하여 부처님께 바쳐진 몸입니다. 그러하오니 저 두 배에 싣고 오신 폐백을 소녀 대신 이 화주스님께 드리시면 기꺼이 따라 가오리다"하였다.
예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이 때 화주승 성공대사는 참으로 부처님의 가호라고 기뻐하면서 "홍장 아가씨! 아버님의 일은 염려마시고 가십시오. 소승이 잘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싣고 온 보물을 모두 홍법사로 가져가가 하고 홍장은 중국 진나라 사신을 따라 진나라로 가게 되었다.
2. 홍장의 신심과 원력
홍장이 진나라에 당도하여 궁안으로 들어가 진나라 황제를 배알하였으니 그녀는 둥근 달 같은 얼굴 모습에 별빛같은 두 눈이 반짝였으며 덕과 지혜를 갖춘 모습이 진실로 황후의 기상이었다.
바다 한 모퉁이에 있는 동국 백제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더란 말인가. 진나라 황제는 찬탄해마지 않았다. 궁중에서는 새 황후를 모시는 큰 잔치가 베풀어지고 황후가 된 홍장은 단아하고 자애로운 위의를 갖추었으므로 황제의 총애가 날로 더해갔으며 홍장 황후는 항상 정업을 닦고 행하기에 힘쓰니 나라가 편안하며 가난한 자와 병든 자가 줄어들어 온 나라 백성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내 비록 타국의 보위에 오른 몸이지만 어찌 조국을 잊을 수가 있으리오" 그리하여 그는 오십삼불과 오백성중 십육나한을 조성하도록 한 다음, 세척의 석선에 실어 본국에 보내니 그 배는 감로사 앞 포구에 닿았으며 이를 감로사에 봉안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에 대한 신심도 너무나 훌륭하였다.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황태자로 하여금 탑을 조성하게 하여 금강사에 모셨으며 또 풍덕현(현재 경기도 개풍군) 경천사에도 모셨다.(이 탑은 일제시대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다시 찾아와서 현재에는 경복궁에 국보 제 86호로 지정되어 모셔져 있음. 감로사, 금강사와 경천사의 연기설화가 이러하였지만, 그 사적이 지금은 모두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는 아쉽움이 있다. 주)
이렇게 본국을 위하여 공덕을 쌓는 한편 황후 자신의 원불로서 관음성상을 조성하여 조석으로 발원하여 모시다가 고향 백제를 그리는 사무친 마음으로 석선에 실어 동국 백제로 띄워 보내면서 서원하기를 "관세음보살님이시여! 인연따라 제 고향 백제로 가셔서 그들에게 자비와 지혜를 주시고 정업을 닦아 소원을 성취케 하여 주소서..."하는 원력을 세워 배를 띄웠다.
그 배는 바다에 표류하기를 한 돌만에 홀연히 바람을 따라 낙안 땅 단교곁에 정박하게 되었다. 얼마 안되어 이 땅을 지키던 수비병들이 수상한 배로 의심하여 추격하여 붙잡으려 하였으나 관음성상을 실은 석선이 스스로 움직여 바다 멀리 가 버렸다.
3. 두 번째 성녀 성덕과 관음사
이 때 옥과(현 곡성군 옥과면)에 사는 성덕이라는 아가씨가 우연히 집에서 나와 해변에 이르렀는데 저 멀리 해운중에서 한 척의 석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이쪽에서 끌어당기는 것처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배를 바라보고 있던 성덕은 깜짝 놀랐다. 그 돌배 안에는 관음금상이 번쩍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덕은 문득 공경스러운 마음이 일어나고 어디로든 좋은 자리를 찾아 모셔야 할 것 같아서 먼저 몸을 단정히 하여 예배를 드리고서 관음상을 등에 업으니 가볍기가 홍모(아주 가벼운 것, 기러기의 털)와도 같았다. 성덕은 관음상을 업고 낙안을 출발하여 고향인 옥과 땅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열 두 개의 정자를 만나 쉬어갔다.
처음 쉰 정자는 그 이름조차 알 수 없고, 두 번째 정자는 대취정이요, 세 번째 쉬어간 정자는 샘정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미타정, 다섯 번째는 율목정, 여섯 번째 정자는 불휴정이라 하는데 이곳은 조그만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곱 번째 쉰 정자는 흥복정, 여럽번째는 현정, 아홉 번째는 삽정, 열 번째는 아흐레 동안 머물렀다 해서 구일정이니 여기서 생각하기를 화순(옥과의 동쪽) 땅의 백아산으로 갈까, 아니면 담양(옥과의 서쪽) 땅의 추월산으로 갈까, 또는 옥과현의 설산으로 갈까 하고 망설여졌다.
구일정은 성덕 아가씨의 고향이므로 일단 고향까지는 왔으나 막상 관음성상을 모실 곳을 물색하려 하니 얼른 떠오르는 곳이 없으므로 9일간이나 머물면서 원근의 명산들을 생각하면서 어느 곳으로 갈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9일 동안을 심사숙고한 끝에 화순 땅의 백아산으로 갈 것을 정하고 다시 관음상을 업고 구일정을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열 한번째 쉰 곳이 운교라는 동리 앞의 정자였다. 운교정을 떠난 성덕은 가파른 고개를 넘게 되었으니 이 고개는 하늘에 맞닿았다 하여 하늘재라 하였다.
관음금상을 업고 이와 같은 가파른 고개를 오르는 데에도 그 무게를 의식하지 못하리만큼 가벼웠는데 이 하늘재를 올라서니 이상하게도 관음성상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여 마치 태산처럼 무거움을 느꼈다. 성덕은 관음보살님을 모실 인연처가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니 산의 형상이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좌청룡 우백호가 벌려져 있고 집을 지을 만한 터전이 넓지도 좁지도 않은 체 적당한 지라 마음으로 흡족히 여겨 그곳에 터를 잡아 관음성상을 모시니 이곳이 곧 지금은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오산면은 예전에는 옥과현 화면이었음) 성덕산 관음사이다.
성덕은 나무를 꺾어 움막을 만들어 관세음 보살님을 모시고 관음사를 창건을 발원하는 기도를 조석으로 봉행하였다.
그런지 얼마 후 산 아래에 사는 촌가의 사람들이 나무하러 산에 와서는 이 광경을 보고 자기들도 관세음 보살님께 예배하며 마음속의 소원을 빌면 모두가 성취되는 기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하나같이 이루어지므로 관세음 보살님의 영험스러움이 전국 방방곡곡에 전파되니 찾아와서 예불 기원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 마치 구름 같았다.
이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주산을 성덕아가씨의 이름을 따서 성덕산이라 하였으며 성덕보살은 관음사의 개산조가 되고 또한 창건주가 되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기니 성덕산은 백제 이래로 수 천년 동안 내륙에 있어서는 유일한 관음영지로 이어져 내려와 정유재란 전까지만 하여도 80여 동 건물을 자랑하였던 곳이며, 지금도 우리 나라의 관음신앙을 서민적 염원속에서 통불교적으로 널리 홍포해 오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한편 홍장의 아버지 원량은 딸과의 이별의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홀연히 눈을 떴다.
중생이 때때로 곤액을 입어 한량없는 고통이 핍박하여도
관음보살 묘지력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 모든 고통 건져주리라.
관세음 보살의 염피관음력이 이와 같이 이 세상 모든 고통 건져주리라 하였듯이 원봉사는 광명을 찾을 수 있었으며 그 뒤로 95세의 나이까지 복락을 누리면서 여생을 평안하게 살았다고 한다. 또한 홍장으로부터 금은 보화를 시주받은 성공대사는 홍법사 대작불사를 환희 원만하게 회향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성덕한 관음연기에서 볼 때 관음성상은 실로 홍장의 효심이 불심으로 나타난 것이며, 또한 4만단의 폐백과 금은진보를 기꺼이 법보시 하였으며 온갖 정업을 행하였고 마침내는 관음성상을 원불로 조성하여 본국에 이르게 하여 뒤에 성덕보살에 의해 열매를 맺어 더욱 빛나게 하였으니 후세인은 홍장과 성덕보살을 관세음 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하였으며, 이로서 전라남도 곡성군(옛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의 관음연기는 오늘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 번역본
세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언어는 영어이다. 우리 나라 학술논문이나 문학작품이 작품성에 있어서 상당한 수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단 한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없는 까닭은 외국어 번역에 대한 경시 때문이다. 관음사사적기의 영문 번역은 공부하는 학생들의 좋은 참고서가 됨은 물론, 한국을 알고자 하는 외국인에게 우리의 정서를 가장 쉽고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번역 생략)
일어 번역본
관음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을 통해 우리 나라에 먼저 들어왔지만 더 화려한 꽃을 피운 곳은 일본이다. 이는 조선 왕조가 억불정책을 사용했던 것과 큰 관련이 있다. 관음사의 원통전과 관음보살상이 국보로 지정되었던 것도 관음불교에 심취되었던 일본인 학자의 보고서를 근간으로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관음사사적기의 일본번역은 관음불교의 본 고장이었던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진면모를 일본인에게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번역 생략)
심청 이야기의 원류와 곡성
판소리의 소재는 대게 실제 인물을 근거한 전승 야담이나 전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판소리의 보편성은 심청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심청전의 핵심 이야기인 효녀설화와 개안설화는 여러 유사 형태가 있지만, 곡성군의 관음사 연기 설화가 그 원형이 되고 있다.
대흥현에 살던 맹인 원량은 처를 잃고 홍장이라는 딸과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날 공덕을 쌓으면 눈을 뜰 수 있다는 흥법사 스님의 말을 듣고는 외딸 홍장을 시주하였다. 홍장은 스님을 따라가다 소랑포에서 쉬고 있었다. 한편 진나라 혜제는 황후가 죽고 난 후 외로움에 젖어 있다가 꿈을 꾸고는 현몽한 대로 동국에 신하를 보내었다. 황제의 신하들이 소랑포에 도착하여 홍장을 보고는 스님에게 보화를 주고 그녀를 데리고 갔다. 황제는 홍장을 새 황후로 맞았고, 이어 홍장은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황후는 자신의 행복을 얻었지만 고국에 있는 부친을 잊지 못하여 관음상을 조성하여 바다 건너 동국으로 건너 보내었다. 배에 실은 관음상은 표류 끝에 옥과현 출신의 성덕처녀의 손에 들어갔고, 성덕처녀는 그 관음상을 고향에 있는 성덕산에 안치하고 관음사를 창건하였다. 그 후 원량은 부처에 대한 시주 공덕으로 인연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러한 효녀 홍장이야기는 곡성 관음사의 관음신앙과 결부되어 호남지역에서 주로 전승되었다. 그러다가 황후가 된 홍장과 그 부친 원량의 개안 이야기는 심학규의 딸 심청이 황후가 되고 그 부친 또한 개안하는 이야기로 판소리화 함으로써 심청가를 이루게 되었다. 홍장의 이야기가 심학규의 딸로 변개한 것은 이웃 지역 남원의 실존인물 춘향과 성이성 이야기가 성춘향을 내세운 춘향가로 발전하고 변모한 것과 길을 같이 한다.
이처럼 곡성의 실존인물과 남원의 실존인물의 전설화나 야담화는 결국 17세기말에 효와 열을 구현하는 심청가와 춘향가가 되어 한국 판소리 2대 명작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곡성은 심청 이야기의 모델이 되는 원홍장의 출생지로서 그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고장이다.
심청 연대기
실존 효녀 심청(원홍장)을 아십니까?
1. 태어난 해는?
서기 286년(백제 고이왕 말년) : 관음사 사적기에 의하면 서진 혜제 영강 원년인 서기 300년에 중국의 사신이 중국을 떠나 이듬해인 301년에 지금의 완도군 금일도에 위치한 소랑포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6종의 관음사 연기설화와 200여종에 달하는 심청전의 이본에도 당시 심처의 나이가 16세로 나와있다.
관음사 사적기 : 현재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
심청전 경판본 : 심청이 16세에 중국 남경상인에게 팔려간 것으로 기술하고 있음
2.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송정마을(도화촌) : 효녀 심청이 태어난 송정마을 뒤쪽에 무릉도원이 있고 마을 옆으로 무릉도원의 복사꽃이 흘러 내린데서 유래한 도화천이 흐른다. 이 곳에는 심청이가 목욕을 했다는 옥녀탕이 있고, 마을 한 복판에는 사시사철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심청샘이 있다. 심봉사의 등에 업힌 어린 심청은 이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동네 아낙네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전해진다. 또한 인근 야산에는 철을 주조했던 야철지가 있으며, 공씨성을 가진 중국 철상인이 풍광이 아름다워 이곳에 정착한데서 유래한 공방산이 있다.
송정마을 : 뒤쪽으로 보이는 산이 공방산이다.
송정마을 앞 섬진강 나루터 : 효녀 심청은 이 나루터를 통해 중국에 팔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섬진강 나루터에 외롭게 떠 있는 나룻배 : 지금은 상류의 댐을 막아 놓는 바람에 수심이 얕다.
곡성의 하천을 따라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왕버들나무 : 이런 연유로 심청전에서는 심청의 고향이 버드나무가 많은 오류촌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3. 심청의 가족
관음사 사적기에는 심청의 이름이 원홍장이며 부친은 원량이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부친이 심현, 심학규, 심학구, 심학귀, 심학효, 심평귀, 심학구로 나와 있고, 모친은 정씨, 곽씨, 양씨부인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편, 중국 영파시지 등의 문헌에는 심청이 성비로 표현되고 중국의 정사인 진서에는 부친이 원량이며, 심청은 원희로 표기되어 관음사 사적기와 친연성을 보인다.
심청의 중국에서의 호칭이 성비로 기술된 영파시지 지리편, 현재 절강성에 성비 궁터가 남아 있다.
진서후비전에 의하면 심청의 이름이 원희이며, 부친은 원량으로 나와 있다. 이는 관음사사적기의 찬자인 백매선사가 무명인 곡성의 효녀의 이름을 진서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
4. 효녀 심청의 발자취(이동경로)
286년(백제 고이왕 말년) : 곡성군 오곡면 송정마을(도화촌)에서 출생
286년-291년 : 아버지의 등에 업히어 젖동냥으로 성장
292년-301년 : 장님인 부친을 극진히 봉양,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멀리 중국에까지 효심이 알려짐.
301년 : 중국 회계국(지금의 절강성 보타구 일원)의 국제상인이었던 심국공의 아내로 팔려감. 관음사 사적기에는 서진 혜재의 황후가 되기 위해 중국 사신에 의해 초빙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실제 상황이 아니다. 실은 중국 제후국의 왕이었던 심국공의 부하가 심청의 부친을 안심시키기 위해 허위로 황후로 모셔간다는 이야기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312년 : 중국 회게국 심국공의 아내인 성비가 되어 고국에 관음성상을 보내옴. 옥과의 성덕처녀에 의해 지금의 성덕산 기슭에 이 불상이 안치되고 관음사가 창건됨.
한국과 중국 절강지역과의 해양 교류의 항로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서긍이 지은 고려 도경
심청의 바닷길. 중국 연안의 바닷물은 황사로 인해 사시사철 뿌옇다. 심청은 이 길을 통해 중국 절강성 보타도에 도착하였다.
3-4세기에 국제 교역의 수단으로 사용하던 범선. 5년 전 중국 절강성 영파해안에서 선체의 일부가 수습되어 복원한 것으로 현재 남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마 효녀 심청은 이 배를 타고 중국에 팔려갔을 것이다.
중국에 팔려가 황후가 된 효녀 심청이 고국에 보내온 소조관음불상. 안면의 미소가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현재 관음사에 소장되어 있다.
5. 한국과 중국에 남아있는 심청관련 유적과 유물
한국
* 곡성군 - 관음사(심청이 중국에서 보내 온 관음불상을 봉안하여 창건된 사찰), 가곡리 5층 석탑(원홍장탑), 생가터, 심청샘, 옥녀탕, 야철지
* 완도군 금일도 - 소랑포(심청이 중국 상인을 만나 처음 팔려간 곳, 이별의 장소)
* 벌교 - 단교(중국에서 보내온 관음성상이 처음 발견된 곳)
* 부안 - 석포(중국에 팔려간 심청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던 항구)
* 인수도 - 심청전에서 심청이 바닷물에 몸을 던진 곳으로 전해지는 인당수의 현재 지명
* 문인석 - 인신공희를 법으로 금지하면서 사람을 돌로 조각하여 바닷물에 빠뜨림
* 용궁무늬 기와 -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과 용궁의 문양이 새겨진 기와
* 위도 진리당집의 탱화 - 중국에 팔려간 우리 나라의 수 많은 처녀와 바다의 수호신이 되어 위도 주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이지저장군(예안이씨 시조)의 초상화
위도 진리당집의 탱화. 상인의 재물이 되어 중국에 팔려간 한국 처녀들의 모습이 가련하게 느껴진다.
용궁무늬 기와
위도 취도리 해안에서 발견된 문인석상. 법으로 인신공희가 법으로 금지되자, 돌로 사람의 형상을 빚어 바다에 빠뜨리는 의식이 있었다.
심청이 중국에서 보내온 관음불상이 처음 도착한 벌교 포구에 있는 단교.
심청이 중국 상인에게 팔려간 소랑포.
관음사 경내에서 지표조사를 벌이고 있는 학술팀. 이곳에서 수습된 자기, 유리, 와당의 편년이 삼국시대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 중국 심가문진(항구), 심가촌, 심가산, 연화양, 성비궁
중국에 팔려간 심청이 심국궁의 아내가 되어 생활한 성비궁에 관한 기록이 영파시지 등에 실려있다.
심청의 시댁인 심가문에서 바라본 연하 바다 전경, 늘 안개에 덮여 있어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상해의 터미널에 심가문행 선박의 시간표가 적혀있다.
절강성 일원에서 쉽게 발견되는 연꽃. 이곳이 관음불교의 성지였음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보타도 보제사에 봉안된 어람관음불상. 33관음화신의 하나로 현재 곡성 관음사 경내에도 우리나라 유일의 어람관음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심청의 시댁으로 전하는 중국 주산시 심가촌. 곡성군 친선교류 방문단이 보타구청의 안내를 받아 현지 주민들과 교류를 하고 있는 모습.
6. 효녀 심청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기록한 문헌들
* 국내 - 관음사 사적기(6종), 심청전(223종), 조선사찰자료, 한국사찰전서, 한국민간전설집, 해동의 불교, 불교설화전집, 국사대사전,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내고장전통가구기, 한국관음신앙 등 약 50여종의 단행본.
중국 역사소설인 태평광기. 심청전에서 심청이 물에 빠진 인당수 부분은 여기서 발췌한 것이다.
무사항해를 기원하여 철과 돌로 사람의 형상을 빚어 처녀 대신 바닷물에 빠뜨렸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풍혜묘비기. 현재 영파시 천일각 경내에 비가 세워져 있다.
(퀴즈로 풀어보는)
효녀 심청과 함께 하는 역사기행!
1. 심청이가 태어난 곳이 황해도 황주라고 하던데?
학계에 보고 된 현존하는 심청전의 이본은 모두 200여종에 달한다. 이들의 계통과 선후 관계는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공간적 배경에 관해서는 황해도 황주, 유리국, 남군땅, 남대섬주 등으로 장치되어 있다. 그러나 황주설에 관해서는 1905년 이후의 이본에서만 확인되는데 현재까지의 학계의 통설은 판소리 명창인 방만춘 선생이 황해도 황주에서 소리 공부를 하면서 암기하기 쉽게 지명을 황주로 바꾸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전의 판본은 한반도의 남부인 남군, 남대섬주(지금의 남원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 일원, 곡성은 당시 남대방주의 일부였다.) 등으로 곡성지방에 전해오는 전승과 유적, 유물의 실제성을 반영하고 있다. 근대 판소리 등에서 공간적 배경이 황주로 정착된 것은 남경상인과 바닷길, 철광석의 국제 교역, 관음불교의 보급 등 관음사 사적기와 심청전의 근간을 이루는 공간적 배경에 혼동을 초래하여 이들이 실존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허구적인 픽션으로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확한 학술적 고증이 없는 원문의 첨삭과 변개는 대단한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2. 심청의 본래 이름은 무엇일까요?
심청의 이름에 관해서는 원홍장(관음사 사적기), 원희(진서), 성비(영파시지), 홍낭자(홍법사연기설화)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인명과 지명에 한자표기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경덕왕 이후이며 1700여년전인 3-4세기 경에는 우리나라 성씨가 보편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효녀 심청의 본명은 확정하기 어려우며 아마도 효성이 지극한 "곡성의 처녀"로 전승되어 오다가 진서나 불교관련 문헌을 참고 하여 훗날 심청으로 명기되어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심청은 남편의 성이 심씨인데서 따온 것이며 청은 도교에서 옥황상제가 산다는 삼청궁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3세기 말엽, 중국 절강성 일원에 관음불교가 번성하기 이전에는 이 일대가 중국 최고의 도교성지였다. 지금도 중국 절강성 보타구에는 수정궁, 도화도 등 도교관련 지명과 사철이 다수 남아 있으며 심청의 남편인 심국공도 훗날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지만 소시적엔 도교를 신복하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서해바다 전경. 심청은 이 뱃길을 따라 팔려갔을 것이다.
3. 관음사 사적기는 심청(원홍장)의 출생지가 충청도 대흥현이라 나와 있는데?
이는 관음사 사적기의 배경지를 둘러싼 가장 어려운 난제 중에 하나 이며 학계에서 관음사 사적기의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거론하고 있다. 결국 심청의 출생지가 전라도 곡성과 충청도 대흥, 그리고 황해도 황주 등으로 대별되는데 이 3가지 지명은 공교롭게도 공통점이 있다.
관음사연기설화와 관련지어 보면 동사적기의 배경이 충청도 대흥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백제시대에 대흥현이라는 지명이 없었다. 실제 대흥현은 금주나 임존성으로 불리다가 신라 통일 후에는 임성군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이르러 대흥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또한 충청도라는 지명도 조선 조에 처음으로 부르기 시작한 지명이다. 따라서 관음사 사적기를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는 송광사의 백매선사는 관음사 장로의 구술을 토대로 세간에 전해지는 관음사연기설화를 기록해 나가다가 특정 지명이나 인명에 있어서는 자신의 고증을 토대로 조선 영조 당시의 명칭으로 수정하여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항간에 전해지던 심청 또는 원홍자으이 출생지가 대흥과 발음상으로 유사하거나 의미가 상통하는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공교롭게도 황주의 옛 명칭이 대홀이었다.
이는 당시 항간에 전해지던 심청 또는 원홍장의 출생지가 대흥과 발음상으로 유사하거나 의미가 상통하는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공교롭게도 황주의 옛 명칭이 대홀이었다. 고어의 홀은 후대에 이르러 주 또는 성으로 바뀐다. 즉 홀이라는 의미가 큰 고을이나 성을 뜻하는 보통명사라는 점이다. 역설하면 아마도 홍장의 출생지는 대홀의 의미인 큰 고을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인근 마을에 승상벼슬을 한 인물의 생가가 있고 중국 상인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교통의 요충지라는 사적기의 공간적 배경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심청전의 공간적 배경이 황주로 둔갑하는 이유로 방만춘에 의한 지명변경 외에도 큰 고을임을 뜻하는 대홀로 전승하여 오던 지명이 백매선사에 의해서는 발음이 비슷한 충청도 대흥으로 기록되고 완판본 심청전과 창본에 이르러서는 대홀의 조선 조 명칭인 황주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다른 이본보다 선행하는 경판본계열의 심청전에서 공간적 배경이 남군, 또는 남섬주부로 명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명에 있어서 방위를 나타내는 동서남북의 호칭은 도읍지를 기준으로 하여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청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중국 송이나 명나라 시절의 우리 나라는 고려나 조선 조로서 그 수도가 개성이나 한양이다. 그러나 황해도 황주는 위도상으로 이들의 북쪽에 위치한다. 만약 실제로 황주가 심청의 출생지라면 심청전의 첫 시작은 당연히 남군땅이 아닌 북군땅에 등으로 기술해야 옳을 것이다. 이는 심청전의 공간적 배경이 황해도 황주가 아니라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 관음사가 있는 저라도 곡성에는 대흥이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이 세 군데나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 곡성을 포함하는 섬진강 중하류의 자명이 덕근홀이다. 여기서 덕은 크다는 의미로 대와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또한 덕근은 우리말의 더 큰 한자표기로 보여지며 결국 덕근홀은 더 큰 홀로 대홀과 통하고 이것이 관음사 사적기에서는 대흥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판본에서 보이는 남섬주부 이야말로 배경지를 고증할 수 있는 귀중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데 남섬주부란 직역하면 섬진강이 있는 남쪽의 고을이라는 뜻이다. 이는 관음사가 있는 곡성일대를 구체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관음사연기설화가 심청전의 근원설화라는 결정적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관음사 연기설화에는 대흥이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홍법사가 등장한다. 이 절은 맹인인 원량에게 딸을 부처님께 시주하면 눈을 뜨게 될 것이라고 전한 화주승 성공대사가 다니던 절이다. 문장의 구조로 보아 대흥이라는 곳과 홍법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 홍법사라는 절은 실재하는 것일까? 사찰관계 문헌에 의하면 홍법사는 경기도 개성과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그리고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홍법리 등 3개소가 소개되고 있다. 이 중 개성의 홍법사는 창건연혁이 미상이며 1342년 고려 충혜왕이 이 절에 와서 승려 학선을 만나 장생하는 비결을 물었다는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그러나 충청도 대흥과는 거리상으로 500리나 떨어져 있어 관련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에 서재한 홍법사가 있는데 이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 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1376년에 탑상골에 창건했다가 도둑이 자주 출몰하여 몇 번의 이전을 거쳐 현재 봉담면 수기리에 신축한 사찰이다. 창건연대가 고려 말로 관음사연기설화의 시대적 배경인 3세기 말과는 무려 1000년 이상의 시간적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이 절의 사적기나 전승은 관음사연기설화와의 관련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용주사의 말사로 서신면 홍법리에 1611년에 세워진 홍법사가 있다. 1988년에 발간된 경기내사원지에는 이 절의 연혁에 관하여 홍씨문중에서 창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약사전을 비록하여 오사채 2동이 있는데 약사전의 외벽에는 무쇠사공과 돌배의 전설이 벽화로 그려져 있고 내부에는 명나라에서 보내왔다는 비로자나불과 관음보살상, 대세지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절에는 관음사연기설화와 비슷한 설화가 전해오는데 "1610년경 이 마을의 홍만석의 딸 홍랑이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홍랑은 조선에서 가져온 대추와 물만 먹고 명나라의 음식은 먹지 않고 버티던 중 식량이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뒤 황제가 갑자기 병석에 눕고 말았는데 이 때 황제의 꿈속에 홍랑이 나타나 "방탕한 성품을 참회하고 나를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황제는 백일기도를 올리고 홍랑의 상과 무쇠사공 12위를 조성하여 돌배에 태워 보냈다. 돌배가 서신 앞바다에 도착하자 홍씨문중에서 절을 지어 봉안했다. 다만 10위의 무쇠사공은 돌배에서 내리기 직전 돌배와 함께 바다 속에 가라 앉았다."는 내용이다. 일단 이 설화는 효녀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1610년경에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끌려 갔다는 기록을 중국이나 국내의 어떤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사찰의 조성경위가 관음사 창건기와 유사한 측면이 일부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주인공의 이름에 있어 원홍장과 홍랑으로 비슷한 점이 눈길을 끈다. 실제로 지금의 대흥과 홍법사는 100리 남짓한 거리여서 서로의 관련성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여기서 관음사사적기의 판각시기가 1729년 이어서 홍법사의 창건시기와 불과 100년 정도의 시차밖에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관음사적기에 나오는 홍법사는 백매선사에 의해서 가탁된 사찰명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겠다. 이는 심청전에서 홍법사 대신 몽운사 또는 몽은사로 그 명칭이 달라지고 있는 것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즉, 관음사 창건 시기인 3-4세기 경에 화주승이 다니던 절이 홍법사나 몽은사와 같은 특정 이름을 가진 사찰이 있었다기 보다는 아마도 후세에 전승과정에서 붙여진 명칭일 것이다. 따라서 관음사 연기설화에 나오는 홍법사를 지금의 경기도 화성에 있는 홍법사로 추정하거나 이와 거리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충청도 대흥을 원홍장(심청)의 출생지로 설정하는 것은 상당한 모순점이 있다.
공교롭게도 관음사와 홍법사 연기설화에는 공통적으로 석선이 등장한다. 학계의 일부에서는 홍법사가 있는 경기도 화성 출신의 홍민식이 1600년 곡성 옥과 현감으로 재직한 것과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른 봄 흐드러지게 피어난 복숭아 꽃.
4. 심청이는 왜 국제결혼을 해야 했을까?
삼국지, 후한서 등의 문헌에는 섬진강 연안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철이 가장 중요한 국제 교역품으로 중국은 물론 한반도 북부와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 서기에는 곡나(지금의 곡성)에서 생산된 철로 만든 칠지도에 관한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면 섬진강 중류에 위치한 곡성이 양질의 철이 생산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제 철광 시장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해상인에게 있어 험난한 해로의 무사항해를 위한 제의로 인신공양의 제물이 필요했을 것이며, 우리 나라의 수 많은 처녀들이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섬진강 유역에 이러한 철산이 없었으면 상인들이 처녀를 구하기 위해 섬진강을 따라 내륙으로 깊숙이까지 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곡성지역에는 철광, 옥광, 금광 등의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특히, 이 곳에서 생산되는 옥과 금은 질이 우수하여 30년전까지도 채굴이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심청이 출생했다고 전해지는 곡성군 오곡면 송정마을 공방산 밑에는 심청전의 배경이 되는 무릉도원이 있고, 마을 옆으로 무릉도원의 복사꽃이 흘러 내린데서 유래한 도화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공방산은 옛날 공씨성을 가진 중국 상인이 이곳의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중국으로 되돌아 가지 않고 머물렀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이는 이곳이 중국과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진 곳이라는 점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전승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최근 학술팀의 정밀답사를 통해 송정마을 인근의 야산에서 고대시대에 철을 주조했던 터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무수한 철기류와 부산물이 출토되었는데 이곳 촌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어렸을 때(일제시대) 땔감을 구하러 이곳에 왔다가 녹슨 쇠붙이가 있어 고물상에 판 적이 있다고 한다. 이로 보면 심청은 철과 옥을 교역하던 상인에 의해 팔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바로 회계국의 심국공 이었던 것이다.
남경박물관. 한국과 중국간의 교류 사실을 입증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심청의 친정인 곡성과 그녀의 시댁인 중국 절검성 보타구와 자매결연을 맺기 위해 중국을 친선 방문한 곡성군 관계자를 소개하고 있는 주산일보. 이제 한국과 중국은 효녀 심청을 통해 하나가 되고 있다.
전라도 곡성지방에서 양질의 철이 생산되는데, 이 철로 칠지도를 맏들어 일본에 보내졌다고 기록하고 있는 일본서기.
5. 심청이는 실제 인당수에 빠졌는가?
남경상인의 재물이 되어 만경창파에 몸을 던진 심청의 모습은 지극한 불심과 부친의 개안을 바라는 효심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관음사사적기는 인당수 부분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는 중국의 황후가 되기 위해 중국에 건너간 것이지, 인신공희의 제물이 되기 위해 팔려간 것이 아니라는 동사적기의 일관성과 궤를 같이 한다.
당시에 처녀들이 인신공희의 재물이 된 사례는 속일본기 등의 문헌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심청전의 인당수 대목과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 중국 야사인 태평광기에 실려 있다.
이로보면 관음사사적기에 나와있는 바와 같이 곡성의 실존효녀 심청의 효행담이 민간에 전승되어 오다가 송나라 중엽에 고려에 유입된 다양한 서적 중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태평광기의 일부분이 그대로 가미되어 심청전으로 변개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 한국 여인들의 수난사는 진, 당, 송, 명의 공녀와 병자호란에 청나라에 잡혀간 환향년을 거쳐 일제시대의 정신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의 모습은 수 많은 한국여인들의 슬픈 수난사를 반영일 뿐 심청은 인당수에 빠지지 않았다.
처녀를 바닷물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영파시지.
정말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단순히 인당수...... 그런 심청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깊은 뜻이 있었다니......
저에게 압록, 곡성의 역사적인 의미를 일깨워준 책이 아닐까요?(정말 약간 과장의 표현)
이렇게 엄청나게 긴 책자를 읽고 나니 이미 사람들이 탑승하고 #3336열차는 17:12분 출발합니다.
아까 산악회? 분들이 모두 나와서 작별인사를 드리는군요.
감사!
역시 순천에서 청소, 급수 등을 한지라 깨끗한 열차......(그러나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제 자리에 앉았더니 일행이 있으신 분들이 자리를 바꾸어 달라는 요청에 할 수 없이......(어른에게 양보를 해야지요.)
자리를 바꾸어 드린 후 뒤를 보니 고성이 오가는군요.(자리 바꾸는 것 가지고 서로의 일행의 자리 때문에 약간 마찰이 있으신 듯, 조금씩 양보하면 되는데, 결국 차장님이 오셔서 겨우 진정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으르렁 으르렁, 다 크신 어른 분들이 이러시면 되려나, 이 것을 보시는 나이 어린 분들은 어떻게 보이려는지 생각은 해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우측의 섬진강을 바라보며 가는데 이번에도 곡성군수님의 안내방송이.(어른 들의 싸움 때문에 잘 못들어서 일부만 적어봅니다.)
오늘 즐거우셨는지......
아까의 요약을 하신 후.
이 곳은 능산(신숭겸)의 고향이시며 능산 장군은 대구 공산 전투에서 돌아가셨으며, 묘소는 강원도......(하여간 약간 복잡)
전라도 29개 마을에서 범죄 없는 마을에 15마을이나 포함된 곡성군
이것이 낙후의 상징일 수도 있으나......
그리고 아까의 말씀과 중복되는 것이 많았습니다.(생략!)
17:23분쯤 구 전라선 철로가 끝나고 전라선과 합류하여 압록역입니다.
여기서 그 동안 수고해 준 후부에 붙은 기관차는 떼어내고 압록역 출발시각인 17:40분까지 기다립니다.
그 동안 여수발 서울행 #478 밀레니엄 객차로 편성된 무궁화호가 빠르게 통과합니다.
곡성군수님 외에 관광안내 도우미 등은 모두 하차......(또 인사)
우리 열차는 정확히 17:40분 압록역을 출발합니다.
역의 구내에 진입할 때마다 통표 때문에 천천히 서행......
서울역까지 잠을 자지 않고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갑니다.
제 옆의 여자 분이 있는데 혼자 여행오신 듯(대단, 그냥 밖을 보고 싶은 나머지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남원역은 무정차(아까 하행은 관광도우미 및 곡성군수님을 태우기 위해 잠시 머문 것이죠)
전주는 아시다시피 제가 축구장 갔을 때 워낙 많이 간 곳이라(전주비빔밥과 기타 등등), 익산도 마찬가지
강경역 지날 때 강경의 맛있는 오징어 젓갈이 생각나는군요.
강경은 오징어 젓갈로 유명하죠.
어렸을 때 맛있게 많이 먹어본 기억이 납니다.
논산은 제가 군 입대 한 곳......
서대전에서 많은 손님이 내리면서 객차 안은 썰렁.(타는 사람 없습니다, 내리는 분만이 있을 뿐)
게다가 제 앞의 어떤 할아버님이 계속해서 코를 크게 고시는 바람에(무청 피곤하셨던 듯)
전부 생생하게 들리고 장난 아니었습니다.(가장 사실적인 표현이 아닐까요?)
수원, 영등포에서 계속 손님이 내리고, 서울에 도착하니 비가 오고, 그 동안 서울에는 비가 왔었던 듯 합니다.(우산을 가지고 있으니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