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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개편, 개명이 왜 그리 잦을까
백치(白痴)도 순수하다는 점에서는 축복일 수 있겠다.
1시간 남짓 만에 교회를 나왔을 때 잠시 백치된 느낌이었으니까.
이천땅 율면 산양리(山陽) 용산동(龍山)으로 나아갔다.
용산동은 예전의 음죽군 상율면 지역으로 산양리의 옛 이름이다.
대동지지에는 龍山등('등'의 한자 石+登의 訓은 '돌다리')이다.
즉, '등'이 '동'으로 변음된 것이며 돌다리가 있었던 곳 아닌지?
석원마을 역시 옛 상율면, 현 율면 산성리의 예전 이름이다.
그러나, 용산등에서 10리길 석원(石院:원터)은 여기 산성리(山星)
조금 지나 음성군 생극면(笙極) 관성리(館成) 관말(館村)과 금왕
읍(金旺) 호산리(湖山) 석교촌(石橋) 어디쯤이 아닐련지.
이조때 무극역(無極驛)의 역관(驛館)이 있어서 관말이라 부르게
됐다는 이 마을 앞길이 영남대로였고 역시 이조때 큰 돌을 잇대어
만든 돌다리가 놓여서 석교촌이 되었으며 행정구역개편 이전에는
석원마을이었다니까.
양도, 양시군, 삼면읍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다 애매해진 것이다.
고개를 넘다가 죽은 사람이 많아 마을에서 관을 많이 짜게 되어
관말이 되었다는 우스갯소리의 근원지인 아홉사리고개를 넘어
얼마 가지 않아 응천(鷹川) 뚝으로 올라섰다.
응천은 '수리내'의 한자 이름이다.
생극면에 의해 잘 정비된 고수부지에는 대형버스편으로 온 야유
팀들이 어느 새 거나해 흥을 돋구고 있다.
낚시 삼매경에 빠진 이들도 있다.
실제로도 저처럼 태평세월이면 얼마나 좋을까.
둑길에서 관말에 산다는 초로의 두 여인을 만났다.
음성장 보고 온다는 그네는 늙은 이를 그냥 보내려 하지 않았다.
무에 그리 궁금한지 심문하듯 하다가는 여자이기 때문일까 끝내
서울 내 집 할머니까지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말을 튼 김에 나도 아홉사리고개에 대해 물었으나 구전(口傳)해
오는 설화도 없나 모른단다.
그리고는 장에서 얻었다는 달떡을 내게 내놓았다.
오늘은 떡먹는 날인가.
아침에도 죽산 가게에서 찰떡을 사서 먹으며 왔는데.
그런데, 2. 7일에 선다는 음성장을 포함하여 연 3일을 내리 장
서는 지역을 통과하다니 참 공교로운 일이다.
내가 지금 옛길을 걷고 있는 건가 장마당을 쫓아다니는 건가.
곤지애(昆池厓)는 아예 분해되어버렸다.
안곤재, 밖곤재, 곤재, 곤지리 등 여러 이름으로 분화, 병암리와
신양리(新陽)에 포함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병산리(屛山)와 곤지암리(昆池岩)등을 병합해 병암리(屛岩)라
하였다 하나 현 병암리에는 곤지암리가 보이지 않는다.
석원에서 10리라면 병암리 이진말 일대쯤으로 짐작될 뿐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행정구역 개편과 개명이 왜 그리 잦을까.
열악한 재정을 이유로 복지 분야에는 인색하면서도 이런 낭비에
다름 아닌 일이 끊임 없이 반복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혹, 풍수 지리 탓이거나 지역간의 이해 때문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소탐대실하는 짓일 것이다.
미국의 남부지역은 1850년대 이전에는 거의가 멕시코 땅이었다.
전쟁을 치르고 미국땅이 되었지만 지명들은 스페인어와 영어의
발음상 다를 뿐 옛이름 그대로다.
나는 불가원 불가근할 수 밖에 없나
영남대로를 준비할 때부터 막연히 나마 생극땅을 통과할 때 친구
집에도 들를 수 있겠거니 기대했다.
그런데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듯이 그리 되어 얼마나 다행인가.
가을 해가 석양에 걸린 시각, 나는 충북 음성군 생극면 산51번지,
대지공원 9 -11- 6호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소주 1병과 꽃 한 다발을 사들고 갔다.
그가 1997년 7월 15일 이리로 이사온 후 평소에는 그와 단 둘이
마시는 양주를 준비해 가곤 했지만 나그네길이라 부득이했다.
永眠中인 대지공원의 친구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의 왕정이
붕괴되던 1979년에 친구는 이란의 테헤란에서 근무중이었다.
극도로 혼란한 정정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그는 머잖아 다시
사지(死地)에 다름 아닌 그 곳으로 가야만 했다.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으나 정부간의 공식 채널은 끊기고 현지
사정에 정통한 이 친구에게 밀명이 떨어진 것.
To do or not to do!(이 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친구는 무척 많이 고심했다.
그러나 회피하는 일마저 자유롭지 못할 만큼 절박한 당시였다.
그는 떠나기 전날 밤에 나와 단 둘이 대취했다.
다음날 아침 공항에 갈 때도 회사가 제공하려는 차편을 거부하고
내가 모는 차로 갔는데 우리는 아직 작취미성 상태였으니까.
1997년 봄에 그는 한미 합작 금융회사를 설립했다.
미국측에서는 그가 경영을 맡는 것(대표이사)을 옵숀으로 했다.
그만큼 월가(Wall Street)에서도 인정받는 미국통이었다.
그 해 말(末)에 몰아닥친 IMF 위기에서 막중한 역할을 했을 것이
명약관화한데 그는 이 합작회사의 오픈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그 여름에 온갖 세상사를 접고 이곳에 영면했다.
나는 하늘을 향해 거세게 항의한 적이 있다(메뉴 우리의이야기들
197번 하늘나라도 인재난입니까?)
이 친구를 필두로 해서 내가 사랑하는 벗들은 남녀노장을 망라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데려갔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얼마나 하고 있길래 하늘은 나로 하여금 이처럼
철저하게 외톨이로 살게 하려는 것일까.
백두대간 삼척시 덕항산(환선굴 뒤) 지근에 '구부시령'이 있다.
기구한 팔자의 여인에 얽힌 재다.
신기면 대기리 한 주막 여인과 결혼하는 족족 남자가 죽어나가기
아홉에 이르러 마침내 이 재마루로 쫓겨나고 말았다는 전설이다.
나는 겁이 난다.
지나치게 가까우면 하늘이 또 시샘하여 소환해버릴까 봐서다.
그래서 불가원(不可遠)이면서도 불가근(不可近)으로 산다.
멀리 하기 싫으면서도 가까이 하기가 주저되는 것이 한스럽다.
날로 더 늙어가는 남은 날들을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먼 발치에서라도 이승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진정 그렇게 해야
한단 말인가.
친구와도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여름이라면 그 옆에 자리 펴고 한 밤 같이 지낼 수도 있지만.
김재옥 여교사를 추모함
한남금북정맥 종주때 한 밤을 편하게 해주었던 금왕의 찜질방이
영남대로에서는 제법 비켜 있음에도 찾아가는 성의를 평가했나.
전날의(13.000원) 반값이 못되는데도 분위기는 되레 더 편했다.
그러나 첫차로 돌아온 생극의 새벽 안개는 가히 가공스러웠다.
국도라 하나 갓길 없는 도로를 질주하는 대형 트럭들의 전조등이
길손을 판별해 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직선화되고 확장된 신3번국도가 있음에도 작업용 덤프트럭들은
여전히 좁은 구도로의 난폭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곡예하듯 내달리는 차들이 용케도 나를 피해 갔나.
내가 운좋게도 아슬아슬하게 사선을 뚫은 것인가.
오생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는 모험할 뱃장이 바닥난 듯 했다.
넋나간 듯 멍청히 서있는데 코 앞에 한 여인이 불쑥 나타났다.
하마터면 부딪힐뻔 해 놀란 그녀는 40대 초쯤 되었을까.
어디론가 출근길인 듯 한데 무에 그리 궁금했을까.
묻고 또 묻고, 감탄사를 연발하던 그녀를 태운 통근버스가 떠난
후 다시 홀로인 나는 안개가 걷힐 때까지 걷기를 중단하려 했다.
그러나 잠시였을 뿐, 이번에는 오한(惡寒)때문에 걸어야 했다.
주위에 있을 법한 마을들과 시군계 등을 확인하지 못한 채 마냥
걷다가 모도원(옛毛老院))마을 표지를 간신히 확인했다.
그러니까 충주시 신니면(薪尼)땅으로 넘어간 것이다.
동락(同樂)마을 직전의 <새로운24시편의점>에서 컵라면 먹으며
안개 걷히기를 기다렸다.
안개의 두께가 조금씩 얇아감을 느껴가는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동락초등학교 교문 옆의 <김재옥여교사 현충탑>.
그녀는 교사가 된지 겨우 5일만에 6. 25 동란을 맞았다.
학교를 지키고 있던 이 햇내기 여교사는 4km를 달려가 국군에게
적군의 동태를 제보해 대승을 걷우게 했단다.
국방부는 김교사의 공을 기리기 위해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전쟁과 여교사>를 제작했으며 각계에서 현충탑, 기념관을 세워
그녀를 추모하고 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단다.
김재옥 여교사 현충탑
그러나 그녀의 어이없는 죽음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애통한
마음 금할 수 없게 한다.
온 세상을 경악케 했던 1963년 고재봉의 국군장교일가 도끼살해
때에 희생된 가족중 하나라니.
더구나 아무 원한도 없는데 단지 범인이 지목한 복수의 대상으로
오인되어 참변을 당했다니 더욱 애석한 일이다.
여교사이며 전방의 국군 장교 가족인 그녀의 삶은 참으로 헌신적
이었다고 지인들은 추모하고 있단다.
당시, 육군 일등병 고재봉은 도둑과 살해위협죄로 7개월을 육군
형무소에서 복역한다.
그는 자기를 사병(私兵)처럼 부려먹고 끝내는 죄인으로 만든 박
모(某) 중령에 원한을 품고 그 일가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 사이에 박중령은 타부대로 전속되고 후임으로 김교사의 남편
이득주 중령이 부임한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고재봉은 출소한 날 야음을 틈타 박중령의
사택에 침입하여 6명을 무참하게 살해한다.
그런데 그에게 살해당한 가족은 박중령 일가족이 아니라 이중령,
김교사 부부와 자녀들이다.
그리고 고재봉을 전대미문의 살인마로 만든 죄목인 도둑은 그가
아니라 박중령의 가정부라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단다.
도둑 누명을 씌운 진짜 도둑 가정부, 사려 깊지 못한 상관 박중령,
군법회의의 오판중 하나만 없었다면?
그랬으면 고재봉이 희대의 살인마가 되지 않았겠지.
당연히 미증유의 살인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무렵에 군(軍)의 인사이동만 없었더라도 김재옥 교사 가족의
참변 또한 없었을 것이다.
부질없는 가정(假定)이다.
다만, 근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일인데도 늙은 나그네의 걸음이
천근이며 가슴을 저미는 듯 아파왔다.
가엽산 기상과 정기받은 용원
아직도 공포의 안개가 자욱했다.
신덕저수지 때문이란다.
그러니 주범인 저수지가 제 알몸을 속시원히 내보일 리 있는가.
따라서 숭선참(崇善站)도 확인할 길 없었다.
수몰되었다면 어차피 점쳐볼 수도 없겠지만 지금의 문숭리(文崇)
내에는 숭선마을이 있다.
예전에 선비들이 많이 모여서 논 마을이라느니 저수지에 터전을
뺏긴 주민들이 원래의 마을 이름과 함께 이주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마을 서북 계곡의 경작지에 숭선사지(崇善寺址)가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숭선마을 일대일 것으로 추정해 본다.
왜냐하면, 고려 광종이 재위 5년(954년)에 모후이며 태조 왕건의
제3비(妃)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창건한 절의 터라니까.
용안역(用安驛)이 있던 용원리(龍院)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대명
천지가 되었다.
음성군 생극에서 여기까지는 아쉽게도 동락초교 교정의 김교사
현충비 외에는 몽유(夢遊)에 다름 아닌 길이었다 할까.
아쉽기 그지 없어 길가 수퍼 평상에 잠시 앉았다.
휴식하는 대가로 우유 1팩을 사마시며.
용원리는 옛 역과 원이 있던 곳일 뿐 아니라 지금도 면사무소를
비롯해 각급 기관이 자리하고 있는 신니면의 중심지다.
초등학교 교정에 떨어지는 낙엽 쓸어모느라 여념없는 수위영감.
그의 빗자루를 통해 바야흐로 다가오는 가을이 보인다 할까.
집 나설 때만 해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부터는 가을과 더불어
남행을 하게 되는가.
일제의 강제합방에 항거하고 독립을 외친 함성의 자취들이 우리
나라 방방곡곡 어디엔들 없는가.
지극히 당연하거니와 여기 신니 용원의 독립만세운동 또한 작은
면단위로는 그 기세가 괄목할만 했나 보다.
초등학교 교문 앞에 서있는 <신니면민 만세운동 유적비>와 용원
표석의 증언이다.
709m 가엽산(迦葉)의 높은 기상과 정기를 받아서 란다.
아마, 그래서 신니면민들은 가엽산을 사랑하나 보다.
신니면민 만세운동 유적비(상)와 용원 표석(하)
그리고 김재옥 교사가 4km를 달려가 제보했다는 국군의 진지가
이 가엽산 644고지에 있었단다.
지금은 정상에 통신 중계탑이 서있고 등산로들도 사통팔달로 잘
정비되어 있지만 6. 25당시에는 험준한 산이었다는데.
1934년생이라니까 나보다 단 1살 위일 뿐이며 나약한 여자인데
이처럼 장한 기지와 담대함의 소유자라니!
다시 감탄하고 더더욱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엽산을 바라보다가
용원을 떠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