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천도교는 어떤 종교인가?
정석준(법사/ 수필가)
천도교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민족종교이며, 그 발상지가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이다. 금년이 천도교 창도 164년으로, 다가오는 4월5일은 최제우가 용담정에서 득도한 날이다.
이에 본고(本稿)에서는 천도교가 발생한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며, 천도교의 핵심사상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천도교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이 태어난 당시의 국내외 사정은 극도의 혼란과 불안 속에 놓여져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 대한 열강의 침략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고, 광동사건(廣東事件)ㆍ영불군(英佛軍)의 북경침입 등 대사변이 연달아 일어났으며, 그러한 소식들은 우리나라에도 속속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국내사정 또한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져 헤어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세도정치의 폐해가 날로 심해져 정치는 문란할 대로 문란해 졌다. 3정(三政)의 누적된 폐단에 의해 민생은 도탄에 빠졌는데, 거기에다 계속된 흉년에다 괴질마저 창궐하니 민란은 3남(三南) 지방에서부터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에 부채질을 가한 것은 사상의 혼란이었다. 즉 서교(西敎)라고도 불리는 천주교의 유행과 그 교도들에 대한 관(官)의 지나친 탄압이 그것이었다. 전통적인 우리들의 사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천주교의 포교와 교세의 확충은 확실히 하나의 충격이며 동요의 요인이 될 만 했다. 수운은 이러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모순, 그리고 사상적인 이질감으로 인하여 사회가 극도로 동요하던 시대였다.
그의 아버지 옥〔근암〕은 유학에 능했다고 하나 벼슬은 하지 못했다. 두 아내를 사별하고 후사를 두지 못해 고심하던 중, 마침 이웃 마을에 살던 과부 한씨를 뒤늦게 맞아 그리던 아들을 보니 이때 근암공의 나이 63세였다. 그러나 한씨 부인도 6년 만에 사별하고 만다. 따라서 모친없는 수운은 할아버지 같은 홀아버지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나이가 70이 넘은 근암은 수운의 나이 13세 때 울산 출신의 박씨와 결혼시키고 자신은 4년 뒤에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다. 수운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아버지로부터 경서(經書)를 배웠지만, 서자로 태어났으므로 그 재능을 펼 길이 없었다. 갖가지 장사도 하고,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청년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그의 나이 30세쯤 되자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당면한 인류 문명의 총체적 붕괴에서 오는 것이라 믿고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인간을 두루 구할 수 있는(輔國安民 廣濟蒼生)’ 길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났다. 주유(周遊)하는 동안 어떤 알 수 없는 승려로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이서(異書)를 받고 3일 만에 터득하는 일이 있었다.
수운은 전통 종교인 유ㆍ불ㆍ선이 이제 기운을 다 해 새로운 시대에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없고, 서학인 천주교도 그 공격성이나 흑백논리로 보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도가 못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이 붕괴되는 선천문화를 개벽할 수 있는 새로운 도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전국을 두루 다니고 다시 고향 경주의 구미산 밑 용담으로 돌아와 원하는 대도를 얻기까지는 그 산을 떠나지 않기로 작정하고 구도에 정진한다. 드디어 1860년 4월5일, 37세 되던 해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한다. 갑자기 마음이 차고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지면서 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두려워 말고 저어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나니,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하고, 이어서 “너를 세간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나니 의심치 말고 의심말라.”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울님과의 문답 『강화(降話)』가 거의 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때 이른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는다. 그 1년은 그가 체험하여 깨달은 사실을 되새기며 체계화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진리를 널리 펴는 일, 곧 포덕(布德)을 위한 준비 기간인 셈이다. 득도(得道) 다음 해 6월, 포덕(布德)을 시작했다. 스스로 다닐 필요도 없이 그의 득도에 대한 소문이 퍼져 찾아오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울님을 소개하고 인간이 다 같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고 가르쳤다(수운은 자기 집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노비 중에 하나를 딸로 삼고 다른 하나는 며느리로 삼는 등 신분차별 폐지의 평등주의를 몸소 실천하였다). 양반ㆍ상인(常人)의 계급과 서열이 엄격하던 사회에서 이런 가르침은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동학의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3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때 수운의 나이 41세였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글을 모아서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엮었다.
천도교의 사상은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유불선(儒佛仙) 전통뿐 아니라, 민간에 퍼져 있던 무속신앙 및 새로이 전래된 서학(西學, 천주교)을 통합한 측면이 강하다. 즉 주역의 선후천 순환논리를 받아들였고, 당시 기층민 사이에 뿌리내리고 있던 도참(圖讖)사상,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사상도 흡수하였다. 위와 같이 여러 민중사상을 흡수하여 동학이 완성되었고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이다. 운(運)은 하나이고 도는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고 「논학문(論學文)」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서학에 대응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동학은 여러 사상의 단순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교조 최제우가 20여 년 간의 구도 끝에 얻은 교리, 즉 한울님의 말씀은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귀결된다. 인내천 사상은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 우주관 속에서 한울님을 바로 자기와 일체화시킨 인간관 제시이다. 이런 기론(氣論)에 바탕한 인간관은 그 지극한 기를 자신의 정성에 따라 내 몸 속에 영원히 모실 수 있는(侍天主), 그리하여 한울님과 하나가 되는 사상이다. 곧 인내천의 교리는 내유신령(內有神靈)으로 자신의 몸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하여 시천주(侍天主) 신앙을 유도한다. 또한 사람이 곧 한울님이므로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을 한울님 섬기듯 섬겨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따라서 인내천에서 도출된 신관은 편향적 유물론이나 유신론에 반대하고 오직 물심(物心)만이 근본일체라는 지기일원론(至氣一元論)에 입각하여 개인과 사회의 한편만의 가치를 지양하고 사람을 본위로 한 원천으로 돌아가 개인이 곧 사회요, 사회가 곧 개인인 개전일체(個全一體)를 깨달아서 동귀일체(同歸一體)할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당면한 의식주 해결뿐만이 아닌 지향해야 할 진정한 목표는 바로 우리민족을 먼저 구하고 세계인류를 구하자는 포부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한 마디로 천도교 교리를 요약하면 종교적으로 신인일체, 철학적으로는 개전일체, 윤리적으로는 자타일체로서, 이 모두가 인내천에 의한 동귀일체에 비롯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사상의 하나는 후천개벽론(後天開闢論)이다. 최제우는 『용담유사』에서 인류 역사를 크게 두 시로 구분하여, 창도 후의 새 시대를 후천(後天)이라고 하고, 구시대를 선천(先天)이라고 하였다. 후천개벽은 선천운수(先天運數)가 지나고 후천운수(後天運數)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후천운수는 5만년이며, 공간적으로는 인간생활의 전면적 변혁이 시작될 때라 한다. 선천시대의 종교란 천계(天界)의 한울님을 순종하며 천상의 극락을 누리려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만, 후천시대의 종교는 인계(人界)에서 한울님을 모시는 지상극락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또 선천시대는 존비귀천(尊卑貴賤)의 계급주의이지만, 후천시대는 평등주의를 원칙으로 하며, 이에 따라 정치ㆍ사회의 제도까지 바뀌어져 국기(國基)가 바로 서고, 모든 사회의 불안이 제거되는 지상극락의 이상사회가 이룩된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혼란한 시대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종말론(終末論)을 주창하면서도 다가오는 새 시대야말로 이상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종말론을 주창했다. 그리고 자신이 확립한 동학사상이야말로 오만 년 동안 지속되어온 지금까지의 문명을 해체시키고 다시 오만년 동안 지속될 새로운 문명을 열기 위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후천개벽론은 현실사회를 부정하고 후천개벽ㆍ지상천국을 예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감록(鄭鑑錄)」과 같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회운동의 일면, 즉 혁명성의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이밖에도 천도교는 민족주의적인 일면을 지니고 있었다. 서양세력의 침투에 대한 위기의식 속에서 동학의 힘을 빌어 전민족적 차원에서 그 침투를 막아내려는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강렬하게 노출시키고 있었다. 즉 외세의 위협에 저항의식의 발로로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염원하는 사회사상적인 일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경북연합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