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달라졌다
황 금 찬
작년의 그 나무다.
같은 나무에 매미가 앉아
작년과 같은 소리로
한낮을 울고 있다.
나는 매미가 앉아 있는
그 풀무레나무 그늘에서
시를 읽고 있다.
작년에도 나는 오늘과 같이
매미소리를 들으며
시를 읽고 있었다.
같은 시를 작년에는 춤추며 읽었는데
지금은 매미소리가
슬프게 들리고 있다.
매미소리가 달라졌을까 아니다
이 석양이 내 마음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 고샅길
최 은 하
누이야
지금도 눈 쌓인 고샅굽이엔
대숲 그림자 드리워 서걱이고
달빛은 그대로 해맑기만 하겠지
한밤중 심부름 다녀올 때면
나는 휘파람소리로 마을 골목을 내달려가고 왔었지
대울안 팽나무가지엔
밤을 지키던 부엉이 한 마리
긴 울음 메아리는 밤새내 온 마을을 감쌌지.
뒷들녘 강에서
밀물져오는 소리 넘쳐올 때
동살은 노을 속으로 잡히고
새벽은 그저 처연하기만 했지.
그토록 아득히 머얼기만 하던 고향길
이제는 삼삼히 잡히는가 싶더니만
가벼워지는 중량의 온 몸이 전율되네.
김삿갓
김 년 균
당신은 은사시나무다.
몸을 뒤척이면 금방 번쩍인다.
바람이 불면 은빛이 출렁인다.
당신은 시다. 시는 이상의 숨결.
당신은 노래다. 노래는 순정의 꽃.
당신은 술이다. 술은 애통의 눈물.
길이 막혀 아득한 어둠의 뒤편에서
눈멀고 귀먹은 허황한 거리에서
돌멩이가 날으는 가파른 언덕에서
시는 술.
시는 노래.
시는 시.
시는 가슴에서 썩지 않는다.
시는 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시는 석양에 지지 않는다.
머리에 삿갓 쓰고, 손에 죽장 짚고
한 시대를 떠돌던 풍류여, 방랑의 시인이여,
오늘도 내 마음에 와서 시 한 수 읊는다.
그는 이제 형체도 없이 무덤만 남았지만,
우리의 가슴에 별이 뜬다. 세월이 가도
꺼질 줄 모르고, 휘황한 광채가 난다.
꽃의 단상(斷想) 40
-배롱나무꽃(백일홍)
이 오 장
친구여
올해도 자리는 마련하였네
하이얀 모시적삼 한 벌
실가지 그늘 아래 시원하고
화로위의 숯은 불씨 기다린다네
뽕나무 샘물 길어오며
덤으로 얻은 산딸기 한 줌
돗자리 머리맡에 보이지 않는가.
자네가 지었던 싯귀 대로
송송 피어난 꽃숭어리
섶다리 건너오는 그대를 기다리네
해마다 핀 꽃
백일동안 기다리다 떨어지고
서리 맞은 국화송이 다듬을 땐
함께 마시던 술잔 챙겨두었지.
꽃 필 때마다
돗자리 펴놓고 기다리는 친구여
분홍 꽃이파리 다 지기 전에 찾아오시게나
올해는 찻잔 속에 뜬 꽃그림자까지
남김없이 마셔 보세나.
해돋이
유 회 숙
저기 저, 바다
나를 잉태하신 어머니
젖은 단풍잎 같이
한 점 부끄럼 없는
새벽 산실이 차려진다.
구름은 층층이 불을 밝히고
어디선가 북소리
둥, 둥, 파도를 몰고 온다.
황홀한 난산이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천년 왕가의 무덤인가
우뚝 솟은 산의 이마 붉게 물든다.
날이 밝을 무렵 바닷가
이제 막 구워낸 토우처럼 싱싱해져서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고
나는 왕족이다
비로소 어머니 품에 안긴다.
근적 마을에서
정 희
좁고 비탈진 길 따라
삼척시 근적 마을 산중턱
백년 훌쩍 넘긴 오두막집이 있다.
시름과 조바심을 버리려 자주 온 나를
물박달나무가 반겨주고
오늘도 메주를 말리느라
노부부 손이 몹시 분주하다.
긴긴 밤 할머니는
도심으로 간 둘째 아들과 손주 기다리며
굴뚝에 연기가 가득하고
토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다.
밭고랑이 하나하나 만들 때마다
기다림은 깊어가고
할아버지 이마에도 밭고랑
길이 난다.
구름 몇 점,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파른 밭을 산골 노부부
오늘도 쟁기질로 하루를 시작 한다
*근적마을 :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마을이름.
밤바다가 비에 젖는다
박 기 동
바다가 비에 젖는다
흰 울음 우수수 밀려와
제 몸 날려 부서지는
상처난 파도의 소멸이 젖는다
밤 여백 공간으로
한여름의 마지막 꿈이
라이브 음악에 실려
보이지 않는 바다카페도 젖는다
유영하는 불빛과
요란한 빗줄기가
적막에 젖어 잠들고
내 가슴에서 건져 올린 여름바다
그 바다의
물오른 아늑함이 젖는다
홀로된 밤바다와 낯선 그 바다의
어깨가 흔들거린다
밤바다가 비에 젖는다
잠들지 않는 것들이 함께 젖는다
창밖 빗소리는
정 명 숙
그대 무슨 할 말이 남아있어
멀어졌다 또 다시 다가와서
밤새 창문을 두드리는가.
마주할 수 없는 눈물인가
귓저에 울려오는 바람 소리
알아챌 수가 없다.
아침이 오기까지 뒤척이다
검은 그림자 흘어내린 커텐을
조심스리 젖힌다.
그대 떠난 자리
다시 올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는 넘쳐나고
개인 하늘 바라보며
손길 가다듬어 창문을 닦는다.
붉은 용궁으로 가는 길
김 해 빈
케이블카에 업혀 산을 헤엄쳤다
여름 더위에 빨라진 진초록
밀물이 깔아놓은 녹색융단은
갯고랑조차 감춰버렸다
어느 용궁으로 가는 길이
저리도 화려 할까
물고기 때가 능선 타고 몰려들면
쉼 없이 호흡 불어넣는 바람
비늘 끝을 들고
힘찬 파도 밀어 올리면
녹음은 만조가 된다.
산을 유영하는 이들이여
파도 아래 빠른 움직임을 보라
형형색색 가을을 빚고 있음이 보이는가.
천이백만 화소 눈이 터진다.
익어가는 가을을 찾았다
성급히 가을 한줌 클로즈업하고
썰물에 업힌다.
산을 내려올 때도
붉은 용궁으로 가는 길은 또렷했다
카페 게시글
시낭송 발표작품
제261회 시낭송 작품모음{2007.8.31~9.1(금,토) 강릉 경포호수}
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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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24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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