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친일파 청산’은 통일민족국가 수립과 함께 민족적 과업이자 역사적 당위였다.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유제로 남아있는 실정이다.해방직후 친일파 척결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미군정 3년’이 큰 요인중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정부수립후 반민특위에서는 민족정기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친일파 단죄에 나섰으나 이 역시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들의 방해책동으로 좌절되고 말았다.이후로 이 문제는 역대 친일정권하에서 우리사회의 주요 이슈로 취급되지 부각되지 못하고 결국 역사연구의 한 영역으로 남고 말았다.
그러나 친일파 연구는 한동안 학계에서 방치돼 왔다.오직 임종국만이 재야에서 그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그러다가 80년대 이후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면서 친일파연구는 학계에서 공개적,집단적 연구테마로 부각된 후 지속적으로 성과를 도출해 왔다.그러나 이 분야 연구는 독립운동사나 일제침략사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과제가 많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보다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관련자료의 수집과 전문연구자 양성,기본자료집 보급 등이 급선무라고 생각된다.
제2장 친일파연구의 시대구분과 현황
(*이에 관한 선행연구로는 이헌종의 ‘친일파문제에 대한 연구현황과 과제’(<순국>.1990.7-8월호)가 있다.그러나 이헌종의 연구는 발표된지 이미 8년이나 지난데다 필자와 의견이 다른 부분도 있어 이 글에서 추가,보완했음을 밝혀둔다)
1.친일파 연구의 시대구분
1)태동기(해방후-1949년)
친일파 문제는 일제하 민족진영에서 이미 처단대상으로 지목하면서 언급(의열단의 ‘7가살’)한 바 있다.그러나 이는 연구대상은 아니었다.해방직후 각계에서 언급한 친일파문제 역시 연구대상이라기 보다는 ‘시론’이나 처단의 ‘당위성’ 차원에서 언급한 면이 많다.그러나 이를 완전히 연구차원에서 도외시할 수만은 없다.이는 해방직후 친일파에 대해 언급한 글들(<별첨목록> 참고)이 친일파의 정의.범주 등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무렵에 나온 글들을 친일파연구의 첫걸음,이 시기를 친일파연구의 ‘태동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 무렵에 나온 최초의 간행물로 여론사 출판부가 발행한 <각계인사가 말하는 친일파.민족반역자는 누구인가>(1945.12월,23쪽)는 조선어학회 이극로 박사 등 모두 21개 개인과 단체의 의견을 담은 것으로 전체적으로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 등을 다루고 있다.이같은 내용은 뒤이은 반민특위 활동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친일파연구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또하나의 이유는 반민특위 활동의 전후하여 친일파 연구의 ‘교과서’랄 수 있는 4권의 연구서가 출간된 사실이다.1948년 민족정경문화연구소가 펴낸 <친일파군상>은 이 분야 최초의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이 책은 반민특위에서 참고자료로 활용할 정도로 친일파들의 친일행적을 소상히 담고 있는데 각종 친일단체와 국방헌금납부자 명단을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어 49년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이후 출간된 <민족정기의 심판>(혁신출판사),<반민자죄상기>(고원섭편,백엽문화사),<반민자대공판기>(김영진편,한풍출판사) 등 역시 친일파 개개인의 친일행적과 특위의 공판내용을 담고 있어 친일파연구의 기본서로 꼽히고 있다.
<별첨목록>
-김취정,‘민족반역자 진단’,<대조>,1946.1(1권 1호)
-이영진,‘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논함’<민주주의>,1947.4(15호)
-김종억,‘해방이후의 친일파 동향’<민주주의>,1947.8(25호)
-고정휘,‘민족반역자는 이러한 식으로 조사하고 있다’<선봉>,1946.1(2권 1호)
-고원섭,‘이완용의 후손들’<신천지>,1946.8(1권 7호)
-‘민족반역은 누가했나-영화동맹.연극동맹편’<주간 신태평양>1947.8.30(제8호)
-중화인민위원회,‘친일파.민족반역자의 규정안’<조광>,1946.3(12권 1호,속간 1호)
2)공백기(1950-1964년)
정부수립후 제헌국회에 반민특위가 구성되면서 친일파 처단작업과 함께 친일파에 대한 연구도 시작됐다.그러나 이같은 연구작업은 ‘특위습격사건’(소위 ‘6.6사건’)과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가 극도로 위축된데다 49년 8월말로 반민특위가 문을 담음으로써 운명을 같이하게 됐다.반민특위가 활동할 당시부터 친일파처단 작업을 방해해온 이승만은 집권기간중 반일노선을 지향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친일파 중용책을 폈다.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으나 이 때도 친일인맥은 청산되지 못했다.이는 당시 이미 친일인맥이 정.관계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공화국 초기 반민주인사에 대한 청산작업은 성과가 있었으나 백범암살진상규명이나 친일파 청산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주체세력 가운데 만주인맥을 포함,상당수의 친일인맥이 포진하고 있었으며 박정희 자신 역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친일파였다.박정희는 재임기간중 한일국교정상화와 한일간 인적.물적교류를 확대하여 한일간 ‘밀월시대’를 구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과거 친일파들이 새로 권력층으로 급부상하였다.따라서 이 기간동안 친일파연구는 거의 ‘금기사항’이 되어 결과적으로 ‘공백기’로 기록되고 있다.
3)임종국 독주기(1965-1970년대)
우리 현대사에서 친일파연구는 임종국(89년 타계)의 공로를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다.그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앞두고 친일파의 재등장이 예견되자 이를 계기로 삼아 친일파연구에 돌입하였다.처음 문학평론가로 출발한 임종국은 <문학의 사회사>를 쓸 요량으로 일제하 문인들의 발자취를 수집하였는데 그는 이를 서둘러 정리,분석하여 1966년 그의 대표작 <친일문학론>를 출간하였다.이 책은 친일문학과 친일문인들을 주로 다루고 있지만 당시 상황에서 ‘친일’이라는 주제를 연구테마로 잡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89년 지병으로 타계하기까지 그는 총14권의 저서(편저,역저 포함)를 남긴 바 있다.이 가운데 친일파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은 <친일문학gt; 외 <일제침략과 친일파><친일논설선집> 등이며 다른 책들은 일제침략사나 문학분야의 책들이다.그가 문학관련 서적(<이상전집><한국문학의 민중사><한국문학의 사회사> 등)을 출간한 것은 애초 그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출발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친일연구 성과는 비단 단행본에만 그치지 않는다.그는 각종 시사.학술잡지와 기획단행본(<해방전후사의 인식>등)에 수많은 연구 성과물들을 발표하였다.연구분야는 친일파 인물(집단)연구를 시작으로,일제의 인력동원(정신대.징용.학도병 등)과 물자수탈,만주지역의 친일파,일제잔재 청산문제,친일파 후손들의 근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이같은 연구성과는 그의 유지를 이어 91년 설립된 반민족문제연구소(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임종국 선집>으로 엮어내고 있는데 94년 제1권으로 <친일,그 과거와 현재>(아세아문화사)가 출간됐다.한편 1966년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출간을 계기로 70년대 이후 우리사회에서 친일파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1975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실린 김대상의 “일제잔재 세력의 정화문제”,1976년 최중희의 “반민특위에 관한 분석적 연구”(이대 석사학위논문)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그러나 이같은 성과는 일시적,돌출적인 것에 불과했을 뿐 친일파연구는 단연 임종국의 독무대였다.임종국의 연구성과 본격적으로 발표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들어서이지만 이 기간에도 그는 묵직한 연구성과를 남겼다.(<별첨목록>참조) 이들중 일부(*표 자료)는 일역돼 일본 <アジア公論>에 실리기도 했다.
<별첨목록>
-‘중추원참의’,<월간중앙>1973.5 *
-‘징용’,<월간중앙>1974.1 *
-‘학도지원병’,<월간중앙>1974.3
-‘일제 고등계형사’,<월간중앙>1974.8 *
-‘일제하의 인력,물자 이렇게 수탈됐다’,<월간중앙>1976.5
-‘일제말의 친일군상’,<대화>1977.8
-‘조선주차군사령부’,<월간중앙>1978.8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해방전후사의 인식 1>,한길사,1979
4)확산기(1980년대 초반-90년대 초반)
80년대 들어 친일파(연구)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은 개인적,개별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학문적 영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위 이헌종의 ‘글’ 인용) 이는 80년대 이후 학계에 몰아친 현대사 연구‘붐’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대적 상황이 맞물린 결과로 볼 수도 있다.이 시기에도 선두주자는 임종국이었다.81년 <정신대>(일월서각) 출간에 이어 그는 82년 <일제침략과 친일파>(청사),84년 <밤의 일제침략사>(한빛문화사),87년 <친일논설선집>(실천문학사) 등을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대표적인 논문으로는 ‘제1공화국과 친일파’(<해방전후사의 인식 2>,한길사,1985),‘일제시대 민족개량주의 운동의 계보와 논리’(<한길역사강좌 11>,한길사,1988) 등과 각종 잡지에 여러 편의 친일파 관련 글을 발표하였다.
한편 임종국의 이같은 연구는 사회 각 분야의 ‘친일논쟁’으로 발전하여 각 분야에서 친일연구를 시작하는 촉매제가 되었다.83년 <계간미술>봄호에 실린 ‘한국미술의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란 특집이 미술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진데 이어 이듬해 <한국문학>10월호에서 소장문인들이 생존 친일문인들에게 참회의 글을 요구하기도 했다.이같은 분위기는 문학.미술.음악.영화.연극 등 예술분야에서 시작돼 점차 종교.교육.언론분야로까지 연구열기가 확대됐다.특히 이 기간에 정치학계에서 쏟아진 건국초기의 지배계층 형성과정이나 반민특위의 활동과 관련한 학위논문들도 주목할만 하다.
89년 임종국의 타계는 친일파연구의 큰 손실이었지만 새로운 싹을 틔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90년 그의 1주기를 맞아 김삼웅.이헌종.정운현이 공편으로 엮어낸 <친일파-그 인간과 논리>(학민사)가 그 첫 움틈이었다.이 책 출간을 계기로 이듬해 그의 유지를 계승한 반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였다.김삼웅.정운현 공저의 <친일파 2,3>(학민사)과 더불어 반민족문제연구소가 93년에 출간한 <친일파 99인>(돌베개)은 친일파 문제를 대중적으로 인식시키고 친일파연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이 무렵의 이같은 친일파 연구서 출간‘붐’은 92년 우리 사회를 강타한 매국노 이완용 후손의 ‘땅찾기’ 소동이나 이를 전후한 몇몇 친일인사(정춘수,유진오,유치진,이희승,김활란,서정주,김기창 등)들의 ‘친일시비’가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근본적으로는 80년대 이후 친일파(연구)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연구분위기가 이미 우리사회의 저변과 학계에 조성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5)정체기(90년대 중반 이후- )
지난 95년 광복50주년을 전후하여 ‘일제잔재 청산문제’에 집중 거론된 바 있다.김영삼 정부는 상징적인 행사로 조선총독부의 구청사와 청와대내 총독관저를 철거하였다.각종 기념 학술행사에 이어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일제잔재-건물,쇠말뚝,지명,관직명,언어,‘국민학교’명칭 등-청산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그같은 논의<참고1> 결과 일부 지방에서는 고유지명을 되찾은 사례도 있고 정부에서는 ‘국민학교’명칭을 ‘초등학교’로 고친 바 있다.
한편 일제잔재 가운데 물적.제도적 잔재에 대해서는 상징적이나마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인적잔재(친일파) 청산에 대해서는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매국노 이완용 후손의 땅찾기 소동을 계기로 ‘매국노재산환수 특별법’제정이 거론됐으나 이 역시 입법으로 연결되지는않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파들의 이장문제,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인사들에 대한 서훈박탈 문제 등도 모두 논란에 그치고 말았다.결국 친일파(연구)문제는 사회에서 논란만 요란했을 뿐 규명작업은 여전히 학계의 연구몫으로 남게 되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사회적 여건조성에도 불구하고 친일파연구는 ‘정체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연구영역도 넓어지고 연구자도 증가한 면은 있다고는 하나 사회적 관심이 멀어진데다 연구자들의 연구의욕 역시 그리 높지않아 보인다.95년 이후 별다른 연구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 한 예다.<친일파 99인>에 이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94년 <청산하지못한 역사>(청년사,전3권)를,친일문제연구회에서는 95년부터 <일제잔재 19가지>(가람기획)를 시작으로 총5권의 친일연구 무크지를 간행한 바 있으나 이후로 집단적인 연구는 자취를 감췄다.금년 8월부터 필자가 <대한매일>에서 일간지 사상 최초로 ‘친일의 군상’을 100회 계획으로 연재하고 있는데 이는 시대변화의 한 증좌에 불과할 뿐이다.
<참고1>
1994년 2월 28일 3.1운동 75주년 기념으로 민족운동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일제잔재 청산과 신문화의 창조’라는 세미나에서는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혼 회복’/‘국민학교 이름을 고쳐야하는 이유’/‘태전지명찾기와 신민족문화의 창조’/‘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과 쇠말뚝 뽑기운동’/‘진주성 논개영정 폐출의 당위성’ 등이 논의되었다.
2.영역별 연구현황
1)친일파 ‘생성과정’과 ‘친일논리’에 관한 연구
친일파 연구의 첫걸음은 친일파 생성과정과 그들의 친일논리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다소 개괄적이고 총론격인 연구라고는 할 수 있으나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연구랄 수 있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의외로 부족하다. 친일파 생성과정과 관련한 연구성과(단행본)로는 강동진의 <일제하의 한국지배정책사>(한길사,1982)와 임종국의 <일제침략과 친일파>(청사,1982)가 대표적이다.강동진의 책은 그의 동경대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하여 한국어로 출간한 것으로 구한말 이후 일제하 조선인 친일파들의 생성과정을 시기별로 집중 탐구하였다.반면 임종국의 책은 일제의 사상침략.자원침략.대륙침략을 골간으로 하여 이 과정에서 생겨난 분야별 친일파들의 주요 면면을 주로 다루고 있다.
박은경의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조선인 관료에 관한 연구’(이대 정외과 박사학위논문,1994)는 일제의 조선인 관리 충원과정에서 등장한 관계(官界)친일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장세윤의 논문 ‘일제하 고문시험 출신자와 해방후 권력엘리트’(<역사비평>1993.겨울호)는 이들 중에서도 고등문관 출신자들만 한정한 것이다.이밖에 최덕수의 ‘구한말 일본유학과 친일세력의 형성’(<역사비평>1991.겨울호)과 지승준의 ‘1930년대 사회주의 진영의 전향과 대동민우회’(중앙대 석사논문,1996)등도 친일파들의 생성과정을 분석한 논문이다. 친일파들의 친일논리와 관련한 연구성과로는 유영렬의 ‘개화기 지식인의 친일화 과정’(<오늘의 책>,1984.겨울호),임종국의 ‘일제시대 민족개량주의 운동의 계보와 논리’(<한길역사강좌 11>,한길사,1988)이 선구적이다.뒤이어 김도형의 ‘일제침략기 반민족 지배집단의 형성과 민족개량주의’(<역사비평>1989.가을호),‘한말 친일파의 등장과 문명개화론’(<역사비평>1993.겨울호)과 김경택의 ‘한말 중인층의 개화할동과 친일개화론’(<역사비평>1993.여름호),‘학위논문으로 송훈상의 ‘3.1운동을 전후한 친일반민족세력의 연구’(성균관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88) 등이 있다.특정개인을 대상으로 한 유영렬의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한길사,1985)는 개화기 지식인자 민족주의자인 윤치호가 친일파로 전락해가는 과정을 <윤치호 일기>를 통해 실증적으로 분석한 연구서다.이밖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파 입문서격으로 펴낸 <친일파란 무엇인가>(아세아문화사,1997)에 친일파들의 친일논리를 분석한 글이 다수(<별첨목록>참조) 실려있다.특정개인의 친일논리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별첨목록>
-‘일제의 대한침략기(1876-1904) 친일의 논리와 실태’/하원호
-‘지배체제 구축기(1905-1919)의 친일파와 그 논리’/김도형
-‘1930년대 조선인 유산층의 친일논리와 배경’/정태헌
-‘1930년대 한국인 관료의 충원양식과 반민족적 성격’/박은경
-‘민족말살기 일제의 황민화정책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과 협력의 논리’/이명화
-‘일제하 사회주의자의 전향문제’/김민철
2)특정 친일파의 인물연구
그동안에 나온 친일파 연구는 ‘인물연구’가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90년대 들어 반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문제연구회가 출간한 <친일파 99인>,<청산하지못한 역사>,<친일변절자 33인> 등은 모두 인물연구에 초점을 ?춘 성과물로 친일파문제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그러나 이같은 성과물은 대개가 근거자료가 부족하고 해당인물들의 친일논리를 구체적으로 파헤치지 못해 함량미달인 것이 대부분이다.이들중 일부는 내용상 오류로 인해 해당인물측으로부터 지적을 받거나 소송사태에 휘말릴 뻔한 사례(김은호,장석윤 등)도 있었다.현재 친일파에 대한 인물연구는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독립운동가들의 평전출간이 줄을 잇고 있는 반면 아직까지 ‘을사오적’의 평전 한 권이 나오지 않고 있다.이처럼 친일파에 대한 인물연구가 부족한 것은 관심부족이라기 보다는 관련인물의 기본자료 부족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93년 이완용 후손의 땅찾기가 화제가 됐을 때 나온 임대식의 ‘이완용의 변신과정과 재산축적’(<역사비평>1993.가을호)은 친일파 인물연구의 모범사례로 꼽을만 하다.
3)해방후 친일파처리 논의와 반민특위 활동에 관한 연구
친일파 처리에 관한 연구는 곧 반민특위의 활동에 관한 연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반민특위의 활동에 관해서는 특위가 활동할 당시에 출간된 <반민자 대공판기>(한풍출판사,1949)와 <반민자죄상기>(백엽문화사,1949)가 선구적이다.그러나 이 책들은 당시 특위의 활동과 해당 반민자들의 죄상을 기록하고 있는 정도일 뿐 구체적인 특위 활동의 본질적인 내용에 관한 연구는 없다.오소백(당시 특위 취재기자)의 ‘반민특위’(<전환기의 내막>,조선일보사,1982) 역시 같은 수준이다.반민특위의 활동에 관한 관심은 70년대 후반 이후 신문연재물을 통해서 시작됐다.경향신문은 ‘비화 한세대’(77.6-9,73회),중앙일보는 ‘남기고싶은 이야기’(82.5-7,14회)라는 장기연재물 속에서 각각 반민특위를 테마로 삼아 다룬 바 있다.오익환의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해방전후사의 인식>,1979)와 길진현의 <역사에 다시 묻는다>(삼민사,1984)는 당시 이 연재에 참여했던 기자들이 보충취재를 통해 펴낸 것들이다.김재명도 현직기자 시절 ‘반민특위 파괴공작의 전모’(<정경문화>,1984.7)를 남긴 바 있다.이러한 글들은 당시 특위 관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1차자료 수준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반민특위와 관련한 학위논문으로는 최중희의 ‘반민특위에 관한 분석적 연구’(이대 석사논문,1976)가 최초다.80년대 이후 들어 여러 편의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대표적으로는 이헌종의 ‘8.15 이후 친일파 처리문제에 관한 연구’(연대 석사논문,1988)와 안진의 ‘해방후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일고찰’(<한국사회학연구 9>,서울대 사회학연구회,1988),서영준의 ‘반민특위 활동에 관한 연구’(서울대 석사논문,1988) 등이 있다.이밖에 신용하의 ‘반민특위의 성립과 와해’(광복회 외 25개단체 공동주최 광복50주년기념 ‘일제잔재와 친일파문제에 관한 학술회의’ 발표내용,1995,성대 유림회관) 등이 있다.
반민특위 관련,친일문제연구회에서 무크지 제4집으로 <반민특위>(가람기획,1996)를 단행본으로 출간하였고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93년 <반민특위 재판기록>을 영인본으로 출간하였다.이밖에 필자가 특위 관계자중 6명의 증언을 모아 <증언,반민특위>를 금년말에 출간할 계획이다.해방후 각 정파간의 친일파처리를 둘러싼 논의를 연구한 논문으로 허종의 ‘해방직후 친일파 처리에 대한 각 정치세력의 인식과 대응’(1993년 3월,경북사학회 발표회에서 발표)이 최근에 발표된 바 있다. 친일파의 본질(정의.범주)에 관한 연구도 몇몇 있어왔다.서중석의 ‘친일파의 존재양태와 구조적 성격’(반민족문제연구소 주최 ‘식민지배 청산문제의 민족사적 이해’,1992)와 임헌영의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반민연 주최 ‘한국현대사와 친일파 청산문제’,1993)가 논문으로 나온 바 있고 친일인명사전 기획위원회가 ‘친일파의 범주와 행태’(<친일파란 무엇인가>,아세아문화사,1997)에서 이를 종합,정리한 바 있다.
4)해방후 친일파의 재등장 구조에 관한 연구
해방후 친일파 청산작업의 지연,좌절로 친일파들의 재등장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반민특위의 와해는 결국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함과 동시에 이들에게 재등장의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다.이후 친일세력들은 연대,협력하여 세력화함과 동시에 이승만을 새로운 지도자로 하여 그의 비호하에 새로운 권력층으로 등장하였다.이승만 정권에서 형성된 이같은 인적 구조는 정치.경제.사회 등 우리사회 전역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는데 이같은 현상은 5공 때까지도 지속됐다고 할 수 있다. 해방후 친일파들의 재등장은 그들이 단죄,도태되지않고 새로운 체제에 편입,새로운 권력집단으로 자리잡음을 의미한다.이에 관한 연구로는 오성진의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충원에 관한 연구’(연대 석사논문,1985)가 최초의 성과다.유상영의 ‘초창기 한국경찰의 성장과정과 그 성격에 관한 연구(1945-1950)’(연대 석사논문,1987)는 이 가운데서 경찰분야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장세윤의 ‘일제하 고문시험 출신자와 해방후 권력엘리트’(<역사비평>1993.겨울호)는 이들중 고문출신자들의 변신,출세과정을 집중 분석한 것이다.또 임종국의 ‘제1공화국과 친일세력’(<해방전후사의 인식 2>한길사,1985)은 이승만 정권하 입법.사법.행정부에서 활동한 친일인사들의 면면과 그들의 친일행적,해방후 활동내용 등을 다룬 것이다.강정구의 ‘해방후 친일파 재등장 구조’(<친일파란 무엇인가>,민족문제연구소 편,아세아문화사,1997)는 이를 포괄적으로 분석한 글이다.
제3장 친일파 연구의 향후 과제
그동안 친일파 연구는 임종국 사후 9년이 지났으나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임종국의 연구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예전에 비해 연구여건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큰 진척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전문(전업)연구자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할만 하다.또 1차자료에 대한 수집과 연구가 부족한 점도 지적할만 하다.국학자 가운데는 기본자료인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한 연구자가 더러 있다고 한다.반면 친일파연구자 중에서는 아직도 <매일신보> 전체를 제대로 훑어본 연구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이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아울러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자료의 수집과 기존 공간된 관련자료에 대한 분석,가공작업의 부족도 친일파연구 부진의 한 요인으로 지적할만 하다.향후 연구과제로 남은 몇 가지 사항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자료수집과 기금확보 문제
친일파연구는 대개 일제당시의 자료를 골간으로 하고 있어 자료수집에 큰 애로가 있는 실정이다.그러나 현재 이 분야 연구에 필요한 자료는 연구자가 개별적으로 자료를 수집,소장하고 있을 뿐 체계적인 자료수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우선 국내에 산재한 자료부터라도 체계적으로 집대성 작업이 절실하며 개인이 소장한 자료의 공개(공간) 역시 큰 과제다.
해외자료(미국.일본.중국.프랑스.러시아 등)의 경우 현지 유학생이나 인맥을 통해 산발적으로 수집하고 있는 정도일 뿐 거의 대책이 없는 형편이다.따라서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자료수집을 위해서는 정부예산이나 공익자금을 확보하여 사용하는 방법도 모색해 봐야한다.
참고로 친일파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의 국내 소장처 몇 곳을 소개하면,
가).남산도서관(경성부립도서관의 후신)-일제당시 경성부립도서관 소장자료(주로 단행본)가 거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으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 자료의 소재여부조차 모르고 있다.소장도서는 약4-5만권 규모.공공도서관용 자료가 대부분이나 관급자료(보고서 등),일본 현지자료,인물 전기,화보집 등 다수 소장.
나)서울대 도서관-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이 소장했던 자료가 전면 이관,소장중임.특히 이곳에는 인물 전기,만주관련 자료,학술관련 자료가 다른 곳에 비해 풍부함.
다)종로도서관-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원본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해방직후의 신문 다수와 이 무렵의 잡지도 상당수 소장하고 있음.사직공원 뒤 소재
라)한국연구원-서대문로터리 인근에 소재.재단법인으로 일반인 이용이 가능함.이곳에는 일제당시와 해방전후의 신문,잡지 다수와 단행본도 상당수 소장중임.
마)연세대 도서관-<만선일보>,<한성신보>를 비롯해 일제당시 신문 다수와 총독부직원록 상당수를 소장중임.이밖에도 비장의 자료가 많음.
바)최서면씨의 한국연구원:강남 신사동(?) 소재.최서면씨가 일본현지(주로 외무성사료관과 의회도서관 헌정자료실 등)에서 입수한 한일관계사 자료로 이 가운데는 친일파 관련 자료가 상당수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2.전문연구자 육성
연구의 주체는 연구자다.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친일파연구의 경우 전문(전업)연구자가 단 한 명도 없는데다 기존 연구단체(모임)의 연구활동 역시 지지부진하다.그 이유는 친일파연구를 전업으로 할만한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데다 학문의 대중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현재 친일파 연구는 각 분야별 연구자(<별첨>참조)들이 해당분야의 일제시대사를 연구하면서 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현재 국내에는 민족문제연구소(소장 김봉우)와 친일문제연구소(소장 김삼웅)등 두 곳의 전문연구 단체가 있으나 이곳 역시 전문인력과 전업연구자 부족으로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전문연구자 양성을 위해서는 대학에서 이를 학부과정에서부터 이를 지도하고 졸업후 이를 토대로 계속 연구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별첨> 분야별 연구자 현황
가)총론:김삼웅,서중석,방기중,김봉우,정운현
나)관료.정치인:서중석,박찬승,윤해동,강정구,박은경,김도형,박태균
다)군.경찰:한용원(군),안진,김민철,이헌종,안소영(경찰)
라)경제:***
마)학술.교육:이이화,구양근(학술),이명화,이광호(교육)
바)법조,언론:한상범,박원순(법조)박지동,정운현(언론)
사)여성:강정숙,장하진
아)좌익:정창현,안소영,지승준
자)종교:임헤봉(불교),김승태(기독교),문규현,박문수(천주교),김경택(천도교)
차)문학:임헌영,김재용,김철,김윤재
카)음악.미술:노동은,김수현,권병웅(음악),이태호,윤범모,최석태(미술)
타)기타예술:유민영,박영정,서연호(연극),(영화),김종욱(무용)
3.<매일신보>등 기본자료 색인작업
친일파연구의 기본자료 중의 하나로 총독부의 한글판 기관지 <매일신보>를 들 수 있다.이 신문은 일제통치 35년 전기간에 걸쳐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친일파와 관련한 가장 풍부한 정보(친일단체.행사는 물론 친일파 개인의 활동.기고문 등 행적 포함)를 담고 있는 1차자료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그동안 <매일신보>를 참고한 성과물로는 97년 필자가 편저로 출간한 학병권유 친일문장선집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없어지지않는 이야기)가 거의 유일하다.송방송은 1941년부터 해방때까지 <매일신보>에 게재된 음악관련 기사의 색인집을 낸 바 있다.임종국도 연구과정에서 1920년대 이후 해방때까지의 기사색인집을 메모형식으로 남겼다.(미출간) 이외에는 <매일신보>를 정면으로 취급하여 다룬 성과물이나 가공물은 없는 실정이다.장기계획을 세워서라도 <매일신보 기사색인집> 출간작업을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또 일어판 기관지 <경성일보>(국립중앙도서관 소장,영인 안됨)와 만주판 기관지 <만선일보>(연세대 도서관 소장,일부 영인본 출간됨)에 대한 기사색인집 출간도 병행돼 한다.이같은 작업은 반민족문제연구소측이 추진하고 있는 <친일파인명사전>출간작업보다 선행돼야할 과제다.이 신문들에 대한 기사색인집이 출간되면 친일파는 물론 일제시대사를 연구하는 각 분야 연구자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지난 93년 영인출간된 친일파들의 재판기록인 <반민특위 재판기록>(다락방)에 대한 해제작업도 시급한 실정이다.이는 친일파 인물연구의 첫손가락에 꼽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으나 출간후 5년간 방치돼 왔다.금년초부터 필자가 해제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완료까지는 5년여의 소요기간이 예상된다.
연세대 행정학과 안용식 교수가 구한말 이후 정부수립 직후까지의 <관보>내용중 ‘공직자 임면사항’을 정리,총9권의 책으로 엮어낸 것과 97년 파인 김동환의 아들이 출간한 <삼천리> 색인집은 친일파 연구의 기본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부끄럽기도 하고!)
4.해외친일파 연구
친일파 가운데는 국외에서 활동한 자들도 적지 않다.특히 중국지역에서 활동한 친일파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이들을 크게 1)일제초.중기 韓-中 국경부근(간도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밀정노릇을 한 자 2)상해임시정부 시절 상해 일대에서 친일활동을 한 자 3)만주국 건립 이후 만주지역에서 친일활동을 한 자 등으로 나눌 수 있다.이들에 대해서는 증언자가 거의 사라지고 없는데다 밀정들의 경우 관련문서를 확보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그러나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친일파들에 대해 임종국이 몇 편의 글을 남긴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박정희를 위시해 ‘만주인맥’의 경우 우리 현대사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한 인물이 적지 않으나 이에 관한 연구(시대사.인물사)는 국내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태부족이다.(필자가 <만주인맥>을 내년 출간계획으로 준비중임)
일본지역의 친일파에 대한 연구 역시 마찬가지다.박춘금.이기동 등 대표적인 인물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인물연구 하나가 없는 편이다.일본지역의 경우 관련자료가 상당수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까지 연구자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김인덕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중이다.이밖에 미국과 프랑스에도 친일파 관련 자료가 더러 잔존해 있다.미국의 경우 해방후 미군정이 수집한 정보 가운데 친일파들의 명단과 활동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확인된 바 있으며 프랑스 등지에도 관련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5.비교연구
친일파연구가 차원을 한 단계 더 높이려면 우리처럼 외세지배를 경험한 나라들의 민족반역자 처단사례를 비교 연구해야 한다고 본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 일부 국가,아시아에서 중국.대만,북한,일부 동남아 국가가 전후처리 차원에서 자국내의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였다.그러나 이들에 대한 연구는 물론 자료소개조차 극히 미미한 상태다.프랑스의 경우 현지 특파원을 지낸 몇몇 언론인(주섭일,장행훈)이 지식인의 처단내용을 개괄적으로 소개한 정도에 불과하다.이와 관련된 자료로 <프랑스 대숙청사 1,2,3>(1973),<프랑스의 대숙청,1944-1949> 등이 있으나 아직 국내에 소개(번역)된 바 없다.
아시아국가에 대한 정보 역시 마찬가지다.지난 95년 필자가 <중국.대만 친일파재판사>(한울)를 소개한 정도가 고작이다.북한의 해방후 친일파 처단내용은 어떤 형태로든 입수가 불가피하나 아직 만족스러운 것은 없다.북한연구자들이 단편적으로 언급한 한 두 편이 있는 정도다.인도의 경우 위팬 찬드라 교수의 ‘제국주의 시대의 인도 친영파’(<반민특위>,무크친일문제연구,제3집)가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2차대전후 유럽과 일본의 전범재판에 대해서도 아직 국내에서 제대로 연구된 바 없다. 박원순 변호사가 몇 편의 글을 남긴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