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락왕손의 갈래
(1) 성씨의 유래
성과 본관이 보편화 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은 금합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가 됐다.
가락왕손은 김해김씨, 김해허씨, 인천이씨로 나누어 진다.
(2) 허씨와 인천이씨
김수로옹과 허왕후 사이에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왕후가 늘 자기의 성이 이 땅에 전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자 왕이 이를 가엾게 여겨 둘째, 셋째로 하여금 외가의 성을 잇게 하니 이로부터 허씨가 된 것이다.
대왕의 넷째로부터 열 번째인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을 따라 지리산 운상원으로 들어가 3년간 수도한 끝에 7불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경남 하동의 칠불사 창건의 유래이다. 그후 허씨의 후손중에 신라 35대 경덕왕때 아찬의 벼슬에 있던 허기(許奇)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그때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반란군이 서울 장안에까지 쳐들어오자 허기는 멀리 촉나라까지 현종을 호종하니 현종은 난이 끝난후 허기에게 황성(皇姓)인 이씨를 사성하고 소성백이란 작위와 식읍 1천500호를 내렸다.
그러나 신라 조정에서는 허기가 당에 오래 머물러 4년만에 돌아왔으므로 이를 허물하여 당나라 황제가 내린 작위와 식읍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허기의 6세손인 허겸(許謙)까지 <李許>복성을 사용하였다. 그후 허겸의 아들 한(翰)에 이르러 허씨 성을 쓰지 않고 이씨 성으로 쓰게 되었으며 소성(작위)은 오늘날 인천인지라 이들을 인천이씨(경원이씨 혹은 인주이씨라고도 한다)라 하게 됐다.
이와같이 인천이씨는 허씨로부터 갈라져 나갔으므로 역시 김수로왕의 후손이 된다. 이렇게해서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는 김수로왕이 세웠던 나라인 가락국의 왕손으로서 제향 참사와 종사를 같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