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 팀으로 늘어난 83년의 한국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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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은 82년과 함께 한국 히말라야 원정의 양적 성장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해로 기록된다. 이 2년 동안에 시도된 원정은 모두 14개 팀으로 1962년부터 1981년까지 20년간에 있었던 13개 팀보다도 오히려 많았다.
또한 이 두 해는 비단 양적인 증가만이 아니라 등반의 내용에 있어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준 해로 꼽힌다. 단지 2년 동안에 2개의 세계 초등정을 비롯해서 2개의 8천미터봉 등정과 1개의 동계 초등정, 그리고 국내 최초의 단독등정, 여성등정, 복수등정 등의 기록이 속출하고 그 활동무대도 네팔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83년도의 첫 히말라야 원정은 5월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악우회(회장 정홍택)가 파키스탄의 카라코룸 지역에 있는 바인타브락 2봉(6,960m)에 재도전하면서 83년의 포문이 열리게 된다. 81년 원정에서 정상을 불과 60미터 남겨두고 통한의 후퇴를 했던, 그리고 하산 도중 이정대대원을 잃었던 악우회는 2년 만에 ‘사람 잡아먹는 귀신’ 바인타브락에 다시 도전장을 던졌다.
한국대는 5월 17일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총대장은 정홍택(47)악우회 회장이 맡았고 대장에 윤대표(31), 부대장 유한규(28), 그리고 임덕용(28), 이진섭(27), 곽영운(24), 신한철대원(23) 등 전부 7명으로 구성된 원정대였다.
이들이 스카루드에서 카라반을 시작,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것은 6월 1일. 이로부터 27일 뒤에는 정상벽 바로 아래의 6,520미터 지점에 세 번째 캠프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7월 2일부터 세찬 바람과 함께 눈이 오기 시작해 공격조는 1캠프로 후퇴해야 했다. 이로부터 열흘간이나 계속된 눈보라는 전구간의 운행을 마비시켰다.
7월 15일 기다리다 못한 원정대는 눈보라를 뚫고 정상 공격을 감행했다. 공격에 참가한 대원은 윤대표, 유한규, 임덕용대원. 새벽 5시에 세 번째 캠프를 출발한 일행은 8시간 만에 6,700미터 지점의 빙벽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100미터의 빙벽을 오르고 나니 오후 7시가 되어 버렸다. 비박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한 시간 반이나 작업한 끝에 겨우 세 사람이 쪼그리고 앉을 만한 빙동을 마련했으나 추위로 인해 밤새 한잠도 못자고 ‘악몽 같은 밤‘을 보냈다.
다음날 오전 9시 15분, 눈보라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다 못한 일행은 그대로 정상 공격을 결심했다. 윤대장은 만일에 대비해 비박지에 남기로 하고 유,임대원만이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남은 것은 정상까지 1백 60미터의 고도. 두 사람은 그칠 줄 모르는 눈보라 속에서 쉬지도 못하고 등반을 감행, 오후 1시 50분에 마침내 정상에 섰다. 이로써 한국은 전년도의 고줌바캉 등정에 이어 또 하나의 값진 세계 초등정 성과를 얻게 되었다.
악우회의 바인타브락 2봉 초등정 소식이 국내에 전해진 직후 한국산악계에 또다른 희소식이 접수되었다. 다름아닌 인도 펀잡히말라야에서 포항 향로산악회가 눈(7,135m)봉을 등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정병택대장(34), 고상배부대장(31), 왕봉순(27), 김정렬대원(31) 등 포항제철 직원으로 구성된 등반대가 국내에서는 최초로 인도히말라야에 진출, 정상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눈(Nun)봉은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인더스강 상류인 스르계곡 일대에는 이보다 높은 봉우리가 없어 특별히 뛰어나 보이는 산이다. 이 산의 옆에는 또다른 7천미터급 산인 쿤(7,077m)봉이 함께 솟아 있는데 각기 ‘세르’와 ‘메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티베트어로 각기 ‘소금의 바위산’과 ‘수정의 버들’이란 뜻이다. 이것은 눈과 쿤봉이 얼음과 눈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피라밋 모양을 하고 있는 데서 온 것이다.
▲ 눈봉정상에선 고상배대원
[사진배경 : 쿤봉 서벽]
눈봉은 1953년 프랑스팀에 의해 서릉으로 초등정된 이래 인도(71,79,82년), 스웨덴(75년), 체코(76년), 프랑스(77,82년), 미국(77,80,82년), 일본(78,79,80,82년), 영국(79,81년), 오스트리아(80년), 서독(81년), 스위스(82년) 등 10개국에서 20회에 걸쳐 비교적 많은 등정이 이루어졌다. 한국대의 등정은 11번째 국가에 21회째 등정인 셈이었다.
6월 17일 베이스캠프(4,100m)를 구축한 한국대는 1캠프(4,850m)를 거쳐 22일에는 빙하 상단 아이스폴 지점에 2캠프(5,250m)를 설치했고, 27일에는 3캠프(5,600m)를, 그리고 7월 10일에는 4캠프(6,250m) 설치를 마쳤다.
1차 공격에 실패한 후 고상배, 왕봉순 두 대원은 7월 19일 북릉의 마지막 캠프를 떠나 11시간 30분 만에 눈봉의 정상에 올랐다. 이들이 80년 4월 원정을 추진하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얻은 수확이었다.
[▲Top]
안나푸르나 1봉과 2봉서 연속 패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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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가을에 접어들자 3개의 국내팀이 히말라야로 향했다. 모두가 네팔쪽 원정대였다. 은벽산악회가 안나푸르나 1봉, 영남대산악회가 안나 2봉 그리고 허영호가 주축이 되어 3명이 마나슬루에 각기 도전장을 냈다.
안나푸르나는 크게 북쪽과 남쪽에 루트가 나 있는데 북쪽은 초등정된 루트고 남쪽은 급경사의 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70년에야 등정되었다. 당시까지 에베레스트, 다울라기리 남벽과 함께 히말라야의 3대 남벽으로 꼽히는 이 벽의 등정은 히말라야 등반에 있어서 철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산의 북쪽루트는 지형상 눈사태가 잦고 남벽보다 그 위험도가 심해 초등정 이후 82년까지 모두 27명의 생명을 앗아간 곳이었다. 여기에 한국대는 또 하나의 희생자를 추가하는 불행한 결과를 맞았다.
안창렬대장이 이끄는 83년의 한국대는 이 산의 12번째 등정을 노리고 북면의 네덜란드루트로 입산허가를 받았다. 대원은 허정식부대장(28·82년 마칼루 대원)을 비롯해서 이현수(28), 차예철(27), 김청환(27), 김영자(여·30·82년 닐기리중앙봉 대원), 정양근(27), 허인석(26), 조수헌(35·의사) 등 9명으로 구성되어 7월 4일 한국을 출발했다.
9월 2일 안나푸르나 북면 4,3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원정대는 4일부터 등반을 개시했다. 좋은 날씨로 초반에는 루트공작이 순조로워 첫날 1캠프(5,000m), 6일 2캠프(5,400m), 그리고 9일에는 세 번째 캠프(6,250m)를 설치했다. 그러나 10일에는 눈사태가 발생, 2캠프의 장비가 유실되자 등반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9월 21일에는 4캠프까지 진출했으나 다음날부터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3일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9월 24에는 무게를 견디다 못한 상층부의 눈더미가 마침 2캠프에 있던 정양근대원과 두 명의 셀파를 덮쳤다. 이 눈사태로 한 명의 셀파만이 극적으로 살아났고 정대원과 셀파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1972년에 있었던 한국대의 마나슬루 참사에 이어 국내에서는 두 번째의 눈사태 사고였다.
한편 같은 시즌 같은 산군에서 영남대산악회가 안나푸르나 2봉(7,937m)을 공략하고 있었다. 이들은 81년에 정찰을 마치고 2년 여의 준비 끝에 대구 매일신문사 후원으로 장도에 올랐다. 대원은 정상모(30)대장의 지휘아래 권봉기(30), 정영수(26), 홍경용(26) 등 4명이었다.
안나 2봉은 주봉과 불과 154미터의 표고차밖에 나지 않는 고봉으로 7천미터급 산으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 산에 처음으로 도전한 것은 1950년 영국의 틸만대였다. 그러나 이 산에 바로 오르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옆에 있는 안나 4봉 허리 부분까지 진출하는 데 그쳤다.
55년에 이르러 안나 4봉이 독일대에 의해 초등되자 2봉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57년에는 영국대가 4봉을 오른 후 2봉까지 등정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다.
60년 봄시즌에 이 산의 초등을 노리고 영국-인도-네팔 3국의 군인들로 구성된 합동대가 꾸려졌다. 이들은 북서릉상에 4캠프(6,980m)를 설치하고 산소를 사용하면서 정상공격을 하여 5월 16일에 드디어 등정에 성공했다. 이 등정은 인도 최초의 7천미터급 초등정 기록이 되었다. 안나 2봉은 초등정된 이후로도 82년까지 15개 팀이 도전하였으나 69년 유고대와 73년 일본대에게만 정상이 허락되었다.
이 산의 4등을 노리고 북쪽의 서릉루트로 등반에 나선 영남대팀은 8명의 셀파를 고용하여 7,200미터까지 올랐으나 때마침 안나푸르나 지역에 내린 폭설과 계속되는 악천후로 끝내 등정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반면에 반대편인 남측에서 공략한 오스트리아 팀은 등정에 성공해 남면 초등기록을 세웠다.
[▲Top]
허영호의 마나슬루 단독등정과 그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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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한국 마나슬루원정대
83년 가을 네팔히말라야로 진출한 한국원정대 세 팀 중 유일하게 등정에 성공한 것은 허영호 일행이 시도한 마나슬루였다.
그는 당시 그의 소속산악회인 제천산악회 송만배회장(49)의 후원으로 단 둘이서 원정을 떠났다.
▲ 83년 10월 23일 단신으로 마나슬루 정상에 오른 허영호대원이 하산 길에 만난 독일팀 대원과 셀파들.
8월말 네팔의 카트만두에 도착한 일행은 여기에서 마낭등산학교에 입교하려고 머물고 있던 대구 파라마운트산악회 소속 손기오(24)를 비공식 대원으로 합류시켰다.
세 명으로 늘어난 원정대는 2명의 셀파를 고용 9월 15일 베이스캠프(4,800m)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늦은 일정이었다. 그 뒤 2주간에 걸쳐 3캠프 지점까지 진출했지만 갑작스런 폭설로 인근 부락으로 피신 다시 좋은 날씨를 기다려야만 했다.
10월 17일 날씨가 호전되자 허대원은 손대원과 2명의 셀파를 데리고 다시 베이스캠프로 올라가 5,200미터에 전진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 그리고 19일에는 6,400미터, 21일에는 7,200미터 지점에 각각 캠프를 설치했다. 여기서 허대원은 단독등정을 결심했다. 이미 고소순응은 되어 있었고, 날씨만 좋다면 정상까지의 표고차 944미터를 하루에 왕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대원은 23일 새벽 1인용 텐트와 약간의 식량을 가지고 단독 정상공격에 나섰다. 새벽 3시 30분 2캠프(과거에는 3캠프)를 출발하여 5시간 만에 7,700미터 고지에 도착, 가지고 간 소형텐트를 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오전 10시 다시 정상을 향했다. 한참만에 바람이 몰아치는 플라토에 이르자 남면쪽에서 올라오는 독일등반대원들이 보였다. 여기서 조금 더 전진하자 암봉으로 이루어진 전위봉이 나왔고 그곳을 지나쳐 설릉을 고통스럽게 올라 오후 3시 30분 드디어 정상에 섰다. 그곳은 바람이 너무 심해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하산을 시작한 허대원은 독일팀의 두 셀파를 만나 사진도 찍고 휴식도 취했다. 허대원이 지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캠프로 돌아온 것은 오후 7시, 날은 이미 어두워졌을 때였다.
허영호의 등정은 7,200미터 지점부터이긴 하지만 단독등정이라는 데서 기록될 만한 등반으로 평가받았다.
[▲Top]
아마다블람 동계초등과 틸리초 등정 이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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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마다블람 동계원정대
▲ 쿰부히말라야에 아름답게 솟아 있는 아마다블람(6,812m).
3개의 한국대 중에서 가장 먼저 정상을 밟은 팀은 아마다블람원정대였다. 이미 전년도에 푸모리에서 국내 최초로 동계등정에 성공한 바 있는 남선우대장(28·양정고, 중앙대)은 김영수(35·중앙대), 임병길대원(28·양정산악회)과 함께 아마다블람의 동계초등을 노리고 소규모 원정대를 꾸렸다.
아마다블람(Ama Dablam)은 비록 7천미터에 못미치는 봉우리이지만 호쾌한 릿지와 아름다운 설벽으로 이루어져 산악인들의 등반욕구를 채워줄 아주 매력적인 봉우리로 여겨져왔다. 에베레스트가 있는 쿰부 계곡의 가장자리에 우뚝 솟아 있는 이 산은 일대의 산기슭 어디서고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산의 이름은 셀파어로 어머니를 뜻하는 ‘아마(Ama)’라는 단어와 목걸이를 뜻하는 ‘다블람(Dablam)’이 합쳐진 것이다.
83년 겨울 이 산의 동계초등정을 노리고 찾아든 한국대는 3명의 대원과 2명의 셀파로 속공 등반을 펼쳤다. 동계등반 개시일은 12월 1일부터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한국대는 11월 말의 좋은 날씨를 이용해 1캠프(5,350m)까지 물자 수송을 마쳤다. 그리고 12월 2일에는 남서릉상의 가장 어려운 50미터 크랙 지점을 돌파 두 번째 캠프(6,150m)를 전진시켰다.
12월 4일 세 번째 캠프 설치를 위해 셀파와 함께 등반을 개시한 남대장은 6시간 만에 3캠프(6,450m)에 도착해 여기에서 다음날 곧바로 정상공격에 나설 결심을 했다.
5일 새벽 혼자서 마지막 캠프를 떠난 남대장은 남서릉을 따라오르다 서벽의 불거진 빙하에 붙었다. 그리고 11시경부터 가파른 정상 설벽에 스탭을 만들면서 올라 12시 30분 넓은 정상에 도착했다. 아마다블람에 대한 동계초등정과 단독초등정이 함께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새벽 6시 나머지 김, 임 두 대원이 다시 정상공격을 시도 12시에 정상에 도달했다. 이 등정으로 한국대는 대원 전원이 등정에 성공하는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83년 동계시즌에 틸리초(Tilicho)에 도전한 알파인가이드협회는 82년에 공식적으로 출범한 국내 최초의 프로가이드협회로 이용호(31)대장을 중심으로 윤대표(31), 장봉완(31), 김영운(21) 등 4명으로 구성했다.
▲ 83년 12월 10일 틸리초(7,134m) 동계등정에 성공한 알파인가이드협회의 윤대표대원. 장봉완대원과 함께 이 산의 동계 2등을 기록했다.
이들은 11월 20일에 마르상디 계곡을 따라 카라반을 개시, 4,200미터 캉사르강가부터는 포터들의 파업으로 갖은 고생끝에 12월 3일에야 베이스캠프(5,100m)를 설치했다.
한국대가 오를 루트는 북릉 경유 북벽루트로 78년 프랑스팀(대장 글레아망)이 초등한 루트였다. 이 산은 초등정 후에도 일본(79년), 스위스(80년), 네팔(82년), 서독(82년)팀이 올랐고 81년에는 네팔경찰대가 동계초등정을 기록했다. 한국대는 동계 2등과 동시에 통산 6등을 노리고 있었다.
이 산의 이름은 안나푸르나 주봉 북쪽 기슭에 있는 틸리초 호수에서 유래한 것으로 ‘틸리(Tilli)’는 근처 투크체 마을의 다카리족 언어로 ‘멀다’라는 뜻이고 ‘초(Cho)’는 ‘호수’를 뜻한다.
12월 5일부터 등반을 시작한 한국대는 전 대원이 함께 등반에 나서 7일에는 꿀루와르를 통과 북릉 중간지점까지 올라섰다. 여기서 김대원이 고소순응에 실패 이대장과 함께 하산하고 윤, 장 두 대원만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캠프없이 속공으로 정상공격을 하기로 하고 우모복 상의와 예비 장갑, 양말, 카메라 등만 챙겨 정상으로 향했다. 중간에 비박을 하며 계속 전진했으나 다음날도 정상에 미치지 못하고 두 번째 비박을 해야만 했다.
크레버스 속에서 고통스런 밤을 보낸 일행은 10일 아침 얼어붙은 이중화를 겨우 녹여 신고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벽의 왼쪽 모퉁이를 돌아 오르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정상이 눈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그곳에서 왼쪽 오버행 눈처마를 넘어서자 운동장만한 정상 설원이 나왔고,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알파인가이드협회팀은 셀파의 도움없이 속공등반을 펼침으로써 국내 히말라야 등반의 새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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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강가푸르나 동계원정대
한편 단신으로 강가푸르나에 도전했던 이석우는 셀파 1명과 함께 등반에 나섰다. 이들은 84년 1월 31일 북벽을 뚫고 정상으로 연결되는 능선 7,100미터까지 진출했으나 시간이 늦은 데다가 비박 장비도 휴대하지 않은 상태여서 아깝게 후퇴하고 말았다. 그는 80년부터 세 차례나 이 산을 정찰하며 등반 기회를 노려왔던 것인데 포터들의 물자 수송 기피와 악천후로 등정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전부 8개 팀이 나선 83년 한국 히말라야 원정은 5개 팀의 등정과 3개 팀의 좌절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83년은 한국 히말라야 원정이 성숙기로 진입하는 데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 해로 기록된다. 83년 활동은 다음해부터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히말라야 원정의 전초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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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네팔히말라야 최다 원정국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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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에서 슈퍼알피니즘이란 새로운 등반사조가 강력히 대두되던 84년은 한국이 히말라야 원정 본궤도에 깊숙히 들어선 해였다. 전부 13개 팀이 히말라야에서 등반활동을 펼치며 그 어느 해 보다 많은 기록을 남겼다.
우선 이 해의 첫 등반시즌인 프레몬순기에 한국은 네팔히말라야에서 전체 33개 외국팀 중 5개 팀을 파견해 최다 원정국을 기록했다. 이것은 전년도 봄 가을에 각각 6팀과 10팀을 기록했던 일본대가 이 해 봄에 4개 팀으로 줄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대는 84년 네팔히말라야에서 한국대보다도 적은 10개 팀을 기록했지만 인도에 15개, 파키스탄에 10개, 부탄에 3개, 그리고 중국에 7개 팀 등 한햇동안 모두 45개 팀이란 엄청난 등반대를 보내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84년 봄 네팔히말라야로 몰린 5개의 한국원정대는 외대산악회의 바룬체(7,129m), 경남공고OB의 푸타 히운출리(7,246m), 알파인가이드협회의 샤르체(7,459m), 원주 치악산악회의 캉구루(6,981m), 정원산악회의 츄렌히말(7,371m)원정대로, 특이한 것은 5팀 모두가 7천미터급 봉우리를 택한 소규모의 원정대란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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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 두 번째 등정 이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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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공고OB산악회 푸타 히운출리원정대
84년 봄의 원정대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정상에 도달한 팀은 푸타 히운출리팀이었다. 부산의 경남공고 산악부 졸업생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조정술(38)대장과 정상균(29), 윤대효(28), 김경남(24), 강영기대원(24) 등 5명으로 구성되어 이 산의 남릉을 택해 등반에 나섰다.
푸타 히운출리(Putha Hiunchuli)는 다울라기리 산군의 서쪽 끝에 있어 일명 다울라기리 7봉이라고도 하는데 1954년 가을 영국의 로버츠가 이 산군의 북쪽을 정찰하다가 가야콜라를 거쳐 초등정한 산이다.
3월 21일 베이스캠프(4,100m)에서 등반을 개시한 한국대는 다음날로 1캠프(4,800m)를 설치하고 24일 2캠프(5,600m), 그리고 28일 3캠프(6,400m)를 설치하는 빠른 전진을 보였다. 그리고 4월 1일 정상균, 강영기대원이 두명의 셀파와 함께 3캠프를 떠나 중간의 7백미터에 달하는 암벽지대를 돌파, 이날 오후 4시 5분에 정상에 섰다. 등반 개시 불과 12일 만의 등정이었다. 이 등정은 82년 파빌봉 등정에 이은 부산 지역의 두 번째 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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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로주의 내세운 바룬체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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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산악회 바룬체원정대
쿰부히말라야 지역의 바룬체(7,129m)를 목표로 등반에 나선 한국외국어대학산악회 원정대는 이 산의 북서벽을 택했다. 이 팀은 77년 한국에베레스트 원정대원이었던 김병준(35)대장의 지휘아래 정광식(28), 배경철(28), 정상욱(27), 오영택(25), 류승대(23), 채경석대원(23) 등 7명으로 구성되었다.
▲ 84년 4월 9일 바룬체 북봉(7057m) 정상에 오른
왜대산악회팀의 류승대(좌측), 파쌍일라 셀파.
이팀은 중앙봉도 올랐다.
바룬체(Baruntse)는 1954년 힐라리가 이끈 뉴질랜드대가 남릉으로 초등정한 이후 스페인(80년), 일본대(80,81년)가 역시 남릉으로 등정했다. 그리고 83년 가을에 프랑스대가 이 산의 가파른 북서벽을 올라 북봉을 등정했다.
외국어대팀은 노멀루트인 남릉을 피해 어려운 북서벽을 목표로 삼았다. 3월 23일 임자빙하에 베이스캠프(5,100m)를 건설한 이들은 30일 1캠프(5,550m)를 건설하고 75도 경사에 800미터의 북서벽을 돌파, 2캠프를 설치했다. 그리고 북릉 위에 3캠프(6,500m)를 설치한 이들은 4월 9일 두 팀으로 나뉘어 북봉과 주봉을 공략했다. 먼저 북봉(7,057m)에 오영택, 유승대대원이 올랐고 주봉을 향해 출발한 정광식, 정상욱 두 대원은 1시간 뒤인 11시 45분 중앙봉(7,066m)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본 주봉은 길고 넓은 크레버스로 나뉘어져 있어 사실상 등반이 불가능해 중앙봉 등정으로 만족해야 했다.
외대팀의 등정은 비록 주봉을 등정하지는 못했지만 남동쪽의 노멀루트를 피해 북서벽 바리에이션루트를 택함으로써 국내 최초로 ‘등로주의’를 실현한 등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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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최초원정대 캉구루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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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악회 캉구루원정대
강원도에서는 최초로 결성된 원주 치악산악회의 캉구루원정대는 박순조대장(38)을 비롯하여 홍순국(31), 강인선(28), 강병호대원(26)과 알파인가이드협회의 허정식대원(29)이 지원차 동행해 전부 5명으로 꾸려졌다.
안나푸르나 산군의 북측에 있는 캉구루(Kang Guru·6,981m)는 55년 슈타인메츠가 이끈 서독대가 초등정한 이래 모두 여섯 번의 등정이 이루어진 산이다.
캘커타로 보낸 화물 연착으로 카라반 출발이 늦어져 4월 20일에야 등반을 개시한 한국대는 빠른 속도로 등반을 진행, 9일 만인 4월 28일 남동릉 6,300미터 지점에 세 번째 캠프 설치를 완료했다.
다음날 홍순국, 강인선대원이 정상공격을 시도했으나 정상을 백여 미터 남겨두고 역부족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5월 1일 두 번째 정상공격에 나선 강병호대원과 두 명의 셀파는 오전 6시 30분 3캠프를 출발한 지 5시간 만에 나이프 리지를 통과하여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산에 대한 통산 7번째 등정이었다.
84년 봄의 5개 한국원정대 중 가장 높은 산을 택한 팀은 알파인가이드협회의 샤르체(7,459m)원정대였다. 전년도에 알파인가이드협회를 발족시키고 틸리초 원정을 주도했던 이용호대장(32)을 비롯해서 바인타브락 초등정자 윤대표(32)와 박병원(30), 곽효균(32), 홍옥선(29), 그리고 홍일점 김정자대원(32) 등 6명으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샤르체에 이어 눕체 서봉(7,795m)까지 등정할 계획을 세웠다.
샤르체(Shartse)는 쿰부 지역 에베레스트 산군에서도 로체에서 동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능선상에 솟은 봉우리로 동쪽을 의미하는 ‘샤르’와 봉우리를 의미하는 ‘체’의 합성어로 결국 동봉이란 뜻이다.
한국대는 4월 19일 베이스캠프(5,220m)에서 본격적인 등반에 들어가 25일 2캠프(6,100m), 28일 3캠프(6,360m), 5월 1일 4캠프(6,600m), 2일 5캠프(6,750m) 그리고 3일에는 6캠프를 7,000미터 지점에 설치했다. 13일 만에 6개의 캠프를 전진시킨 것이다. 이어서 5월 7일에는 윤대표, 곽효균대원이 한 명의 셀파와 함께 정상공격을 감행, 중간에 하룻밤 비박끝에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74년 독일대에 의한 초등정이 있은 지 10년 만의 등정이며 정상부 남서벽은 루트 초등으로 기록되었다. 이 루트는 ‘아리랑루트’라 명명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두 번째 목표인 눕체 서봉 등반은 포기했다.
한편 단 두 명으로 이루어진 추렌히말원정대는 71년도 한국대의 등정 의혹을 풀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출발했으나 역부족으로 패퇴했다. 김병훈(31·대장), 조건호(27) 등 정원산악회 회원으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이 산의 서릉으로 등반을 시도하긴 했으나 긴 설릉을 통과하지 못하고 6,700미터 지점에서 돌아서고 말았다. 이들은 84년 봄시즌의 다섯 한국원정대 중에서 유일하게 등정에 실패한 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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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원정 지방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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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가을시즌에는 5개의 한국원정대가 네팔히말라야에서 등반활동을 펼쳤다. 부산합동대의 탐세르쿠(6,623m)를 비롯해서 광운대산악회의 캉구루(6,981m), 조선대산악회의 안나푸르나 3봉(7,555m), 미국 남가주한인산악회의 푸모리(7,145m), 그리고 강릉합동의 글레이셔 돔(7,193m) 원정대 등 5개 팀은 3명에서 6명의 소수 대원으로 꾸려져 한국대가 점차 소규모화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또한 이들 5개 팀 중에서 3개 팀이 지방팀이어서 원정사상 최초로 지방 원정대가 서울 지역의 원정대 수를 능가하는 이변을 보였다. 따라서 84년은 한국 히말라야 원정 지방시대의 원년으로 기록된다. 또 이 해에는 미국에 거주하는 교포산악인들이 원정대를 꾸려 관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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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히말라야 탐세르쿠원정대
부산의 알파인클럽 등 4개 산악회가 공동으로 꾸린 탐세르쿠원정대는 신용태대장(43)을 비롯해서 정인길(43), 김장환(42), 김석태(36), 노종백(35), 신창제대원(32) 등 6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히말라야 초행자들이었고 평균 연령 38세나 되는 고령의 원정대였다.
탐세르쿠(Thamserku·6,623m)는 1964년 힐라리가 이끄는 뉴질랜드대에 의해 초등정된 후 79년과 80년에 일본대에게 제2, 3등을 내주었다.
한국대는 이 산의 네 번째 등정을 노리고 남릉에서 동벽으로 이어지는 루트를 택해 9월 15일 등반을 개시했다. 9월 17일 1캠프(4,850m), 21일 2캠프(5,700m), 그리고 25일에는 6,400미터 지점에 3캠프 설치를 마쳤다. 이어서 9월 27일 노종백, 신창제대원과 그리고 두 명의 셀파는 마지막 캠프를 떠나 6,623미터의 정상에 서는 데 성공했다. 등반 개시 13일 만의 등정이었다.
탐세르쿠원정대가 최고령 원정대였다면 광운대 재학생들로만 구성된 캉구루원정대는 최연소 원정대였다. 배승렬대장(26)과 양용덕(22), 박희동(21) 등 3명으로만 구성된 이 원정대는 총비용 770만원으로 원정을 성사시켜 경량등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캉구루는 이미 이 해 봄시즌에 원주 치악산악회팀에 의해 남동릉으로 등정된 바 있었지만 이들은 서릉을 택해 등반 개시 7일 만에 정상에 올라 최단기일 등정이라는 또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9월 13일 등반을 개시 16일에 1캠프(5,920m), 18일에 2캠프(6,570m)를 설치하고 곧바로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한편 안나푸르나 3봉(7,555m)에 도전한 조선대팀은 카트만두에서의 행정업무가 늦어지는 바람에 10월 중순에야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고광수(27)대장의 지휘아래 임형칠(26), 최경주(24), 소병현(26)대원 등 4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호남 지역에서는 첫 히말라야원정대였다.
3봉은 61년 인도팀에 의해 북측면으로 초등정된 이래 일본(70년), 이태리(77년), 영국(79년), 스위스(80년)에 의해 등정되었다. 한국대는 이 산의 제 6등을 노리고 남쪽으로 접근하였으나 6,700미터를 최고 도달지점으로 간단히 물러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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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글레이셔 돔원정대
일명 타르케 캉(Tarke Kang)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글레이셔 돔(Glacier Dome·7,193m)에는 강릉 산악인들이 도전장을 던졌다. 엄개성(29)대장을 비롯해 이경수(34), 최기순(26) 등 3명의 대원은 모두 한국산악회 소속이었다.
안나푸르나 3봉과 같은 산줄기에서 서쪽으로 강가푸르나를 사이에 두고 솟아 있는 이 산은 64년 일본대에 의해 초등정된 후 12개 팀이 등정을 시도, 7번 등정이 이루어진 바 있었다.
한국대는 이 산의 북쪽 루트를 택해 등반을 개시했다. 4,600미터의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이들은 25일 만에 1캠프(5,400m), 2캠프(5,900m), 3캠프(6,400m)를 전진시킨 후 10월 27일 엄개성대장과 두 셀파가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 등정은 강원도에서는 원주 치악산악회의 캉구루 등정에 이은 두 번째 성과였다.
한편 미국의 남가주 한인산악회에서 한국일보 L.A지사 후원으로 꾸려진 푸모리원정대는 이 산의 동벽루트를 목표로 하고 9월 3일 벽 아래에 1캠프를 설치했다. 푸모리는 이미 82년에 한국대에 의해 남서릉으로 동계에 등정되었으나 이들이 오르려는 동벽은 60년 초등정된 루트로 ‘제2의 아이거 북벽’이라고 불릴 만큼 800미터의 암설벽을 이루고 있었다.
김기환대장의 지휘아래 이윤우부대장, 이성하, 최상범, 주영, 최태현대원 등 모두 6명은 9월 7일 동벽등반을 개시했다. 초등루트보다 직선으로 길을 뚫기 시작한 이들은 10일에 2캠프를 설치하고 14일에는 주영과 최상범대원이 3캠프(5,800m)까지 진출했다. 이어서 17일에는 4캠프가 설치되었고 동벽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까지 올랐다. 그리고 20일 김대장과 주영, 그리고 셀파 2명이 정상공격에 나섰다. 이들은 중간에서 하룻밤을 비박한 끝에 드디어 동벽을 돌파, 6,400미터의 능선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이미 장비를 모두 사용해버린 이들로서는 더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김대장은 후퇴를 선언했다.
남가주팀은 비록 등정은 못했지만 동벽에 직등루트를 내고 ‘코리안 다이렉트’라고 명명하였다. 이들이 동벽을 등반할 때 소요된 장비는 100여 개의 하켄과 1,200미터의 고정로프였다는 것이 그 어려움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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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놀란 안나푸르나 동계초등과 그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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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벽산악회 안나푸르나원정대
84년 겨울 한국원정대 중에서 은벽산악회의 안나푸르나원정대가 가장 먼저 등정보를 국내에 보내왔는데 그것은 한국 산악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산악계를 깜작 놀라게 할 만한 엄청난 성과였다. 다름아닌 김영자(31)대원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안나푸르나를 올랐으며 그것도 동계초등정이란 경이적인 기록을 함께 세웠다는 것이다.
84년 12월 7일 북릉에 설치된 4캠프(7,700m)를 떠난 김영자대원과 파쌍 노르부 등 4명의 셀파는 10시간 만인 오후 3시 20분 드디어 안나푸르나 정상에 선 것이었다. 그러나 하산 도중 두 명의 셀파가 제트기류에 휘말려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원정대는 추락한 두 셀파의 배낭 속에 있던 카메라를 잃어 정상 사진을 제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어쨌든 이 등정은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상 77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꼽혔다.
안나푸르나 동계초등정을 성사시킨 안창열(34)대장은 홍일점 김영자대원과 김청환(30), 박만진(27), 김호영(26) 등 5명의 대원만으로 원정대를 조직했다. 경비 조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원정대는 10월 6일 장도에 올라 11월 27일 4,3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 등반 개시 10일 만에 등정을 이루어냈다.
그런데 84년도 세계산악계의 최대 이슈가 된 안나푸르나 등정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등정에 의혹이 제기된 것이었다. 당시 카트만두에 주재하던 로이타통신 기자 엘리자베스 홀리(여·61)가 ‘한국대 안나푸르나 등정 의심스럽다’는 제하의 글을 영국산악잡지에 기고하면서 의혹이 제기된 이 사건은 일본의 산악전문지 <암과 설>에 토픽으로 게재되었고 급기야는 국내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이 등정이 가진 이슈만큼이나 국내외 산악계에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다.
등정 의혹설에 접한 은벽산악회팀은 등정 진위 여부를 가려줄 분명한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었다. 정상 사진은 하산중 추락한 셀파의 배낭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등정을 둘러싼 각종 구설수가 산악계에 난무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이 등정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홀리기자나 프랑스팀에 대해 보다 명확한 해명이나 항의가 없이 시간을 넘김으로써 이 등정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86년 겨울에 있었던 폴란드대의 등정(예지 쿠쿠츠카외 1명이 87년 2월 2일에 등정)이 동계 초등정으로 기록됨으로써 공식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사자들이나 한국산악계가 공식루트를 통해 보다 논리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서양 산악인들의 자의적인 해석 여부를 떠나서 반목과 질시로 일관한 한국산악계의 취약점을 보여준 것이었다.
안나푸르나 등정과 함께 84년 겨울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쟈누봉 동계초등정이었다. 전국에서 합동으로 구성된 쟈누원정대는 ‘스핑크스’ 또는 ‘잠자는 사자’라 불리는 히말라야의 괴봉 쟈누(Jannu·7,710m)봉 겨울철 첫 등정을 이룩해 주목을 받았다.
이 원정은 82년 닐기리 중앙봉을 등정한 바 있는 김기혁(31.하켄클럽·양정산악회)대장의 지휘아래 전국 각지에서 자원한 최성수(29), 김동재(25), 신교봉(24), 박정식(23.이상 하켄클럽), 송정두(27·거리산악회), 서성수(26·부산솔뫼), 박성만(25·울산산악회), 안신현(22·부산대륙산악회)대원 등 9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경비 절감을 위해 단지 1명의 셀파와 1명의 고소포터만을 고용해 등반에 나섰다.
모든 짐 수송과 루트공작을 대원 스스로가 하는 소위 ‘멤버 클라이밍’으로 밀어붙인 끝에 12월 6일 7,100미터 지점에 마지막 캠프를 설치하고 다음날 1차 정상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송정두, 박성만, 신교봉과 두 명의 셀파가 나선 이날 공격은 길을 잘못 들어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12월 9일 이번에는 김기혁대장이 직접 나서 두 명의 셀파와 함께 두 번째 정상공격을 시도, 오후 2시 40분에 드디어 정상에 섰다. 카라반이 길고 난이도가 높아 동계등반이 전혀 시도되지 않았던 쟈누봉이 한국산악인에 의해 첫 등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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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한국 에베레스트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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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산악회 에베레스트 동계원정대
한편 84년 겨울시즌 3개의 한국대 중에서 가장 의욕적으로 출발한 양정산악회의 에베레스트 동계원정대는 77년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7년 만에 다시 시도되는 원정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특히 국내 유일의 에베레스트 등정자인 고상돈대원이 이듬해 매킨리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생존한 등정자가 없는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가장 이슈가 될 만한 원정이었다.
▲ 84년 12월 양정산악회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전경. 국내 두 번째 에베레스트원정대인 이들은 강풍과 혹한을 견디다 못해 12월 16일 후퇴했다.
이 원정대는 오인환(36)대장을 위시해서 정기범부대장(34), 남선우등반대장(29), 심상돈(30), 전석훈(29), 장석창(29), 임병길(29), 김백수(27), 이승민(25), 석채언(23) 등 양정고산악부 출신들로 구성된 대원진과 한국방송공사에서 파견한 민상기(36), 정성근(29), 백승민 기자(28)를 포함하여 13명으로 구성되었다.
11월 17일부터 등반을 개시한 이들은 일주일 만에 아이스폴을 뚫고 1캠프(6,050m)를 설치했고 26일에는 2캠프(6,400m)를 건설했다. 그리고 베이스캠프에서 3일간 휴식을 취한 후 12월 1일부터 다시 등반을 속개, 13일에는 3캠프(7,300m)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 원정대는 12월 16일 모처럼 좋은 날씨를 셀파들의 파업으로 놓치고 사우스 콜을 목전에 두고 강풍과 추위를 견디다 못해 후퇴하고 말았다. 이들이 도달한 최고 고도는 7,900미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