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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바라 본 오녀산성. 높은 산위에 다시 우뚝 솟은 바위산이 한눈에도 천혜의 요새임을 알수있는데 사진에 보이는 면이 남.북 방향으로 약 1km이고, 동서너비는 약 300m인 산성이다.
고구려 유적 답사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첫째 날에 버스로 이동한 시간이 약 8시간. 숙면을 취한 것 같은데도 벌써부터 여독이 시달리는 듯 피곤한 아침을 맞는다. 호텔식 뷔페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아침밥을 잘 먹지 않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지만, 가이드가 오전 일정부터 산행이라고 든든히 먹어두라고 한다. 기름기가 적은 음식으로 배를 채운 뒤 짐을 챙겨 주차장으로 나서니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주차장 입구에는 구형 곡사포 여섯 대가 늘어서있고, 그 앞에 풍선과 꽃으로 장식한 고급 외제차 몇 대가 줄지어 서있다.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차가 신혼부부의 차량이고, 나머지는 친구들이 타고 갈 차량이란다. 재미있는 풍습이었다. 신혼 첫 날밤을 지내는 호텔까지 고급차를 동원해 친구들이 동행을 하다니… 신혼부부 행렬을 뒤로하고 주몽의 건국신화를 간직하고 있는 오녀산성으로 향했다.
오녀산성은 길림성 환인현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8.5km 거리에 있는 오녀산(해발 820m)의 남쪽등성이 두어 개를 포괄하여 쌓은 성으로서 고구려 시조 주몽이 B.C 37년 수도로 삼아 유리왕 22년(A.D 3년)까지 40여 년간 사용하였던 곳이다.
성은 동남쪽으로 큰 골짜기를 끼고 있고 서남, 동북쪽에 약간 낮은 곳이 있으나 서쪽, 북쪽 및 동북쪽의 대부분은 깎아지른 듯 한 수 십 미터 높이의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는 험준한 지대를 이용하여 쌓았다. 820m의 산 정상에 200m가 넘는 직벽이 3면으로 절벽을 이룬 천혜의 환경에 성벽을 쌓아 난공불락의 요새를 이룬 것이다. 게다가 정상에는 넓은 평지가 있고, 수백 명의 식수를 해결할 수 있는 연못까지 있는 이곳을 선택한 주몽의 예지가 놀라울 따름이다.
대형주차장 한편에 오녀산산성사적진열관(한국의 박물관)이 있다. 오녀산성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토기와 철기 등 몇 가지 유물과 주변의 고구려 유적지에서 수집한 그릇, 무기 등을 모아 함께 전시하고 있는데, 1층과 2층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고구려 성벽처럼 만들어 놓은게 인상적이었지만, 실내에서는 촬영을 완전히 금지하고 있어서 카메라에 담아오지는 못하였다. 1층의 입구부터 전시장의 동선을 따라 관람하다보면 2층 출입구로 나오게 되는데, 이곳에서 산성의 입구까지 소형 셔틀버스를 이용하게 된다.
산성 입구에는 매표소가 있고, 곧이어 1천여 개의 계단으로 연결된다. 계단 입구에는 2인 1조로 구성되어 한명씩 탈수 있는 가마꾼들이 있는데 우리 돈 6만원 정도의 삯을 받고 있고, 노약자들이 주로 이용한다. 1천여개의 계단은 가파를 경사로 이뤄진 직선코스이고, 이 계단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S자형태로 만들어진 완만한 경사의 계단을 이용하면 거리는 멀지만 덜 힘들게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정상에는 일대를 전망할 수 있는 장대(將臺)가 몇 군데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장대는 전투와 직접 관계되는 것으로 성의 전체 형편을 잘 살필 수 있는 곳에 설치하여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인데, 지금은 관광객들의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동남쪽 멀리서 시작된 혼강이 서남쪽의 넓은 환인분지로 흘러들어가는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지금은 환인댐이 강줄기를 막고 있어서 강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호수같이 보인다. 장대 끝은 깎아지른 듯 한 절벽으로 500m가 넘는 높이다. 원래 혼강은 해발 197m이고 오녀산성은 820m이니 600m가 넘는 절벽이었다. 댐을 만든 뒤 혼강은 수위가 300m로 높아져 절벽의 높이는 520m가 되었지만, 서울 남산이 해발 320m라는 것을 생각하면 절벽의 위용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1천개가 넘는 계단이 답사회원들을 힘들게 하였지만, 아래로 펼쳐지는 절경이 피곤함을 잊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정상의 숲길을 따라 이동하다보면, 궁궐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온돌의 흔적이 남아있는 병영터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산 정상의 천연 연못인 천지에서 잠시 땀을 식힌 후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올림픽 소식이 궁금해졌다. 현지 시간으로 10일 오전 11시가 넘었으니 한국 수영의 기대주인 박태환선수의 400m 경기가 끝났을 시간이었다. 한국의 친구에게 국제전화를 하였다. 요즘은 휴대전화의 국제로밍으로 이국땅의 산 정상에서도 통화가 쉽게 이뤄지니 직접 사용하면서도 현대문명의 혜택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친구의 들뜬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전해졌다. 한국의 첫 금메달이었다. 그것도 수영에서의 사상 첫 금메달. 급히 회원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했고, 중국 땅이 되어버린 고구려 유적지에서 주몽의 후예들이 쏟아내는 가슴 벅찬 환호가 이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인들의 심한 통제 속에 이뤄지는 답사에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는데, 중국선수를 이긴 박태환의 금메달 소식은 선조의 흔적을 발견하는 기쁨 이상이었다.
오녀산의 인근에는 상고성자 고분군(上古城子 古墳群)과 하고성자 성지(下古城子 城地)가 있다. 상고성자 고분군은 200여기의 무덤 군이 ‘문화혁명’ 이후 개간산업이란 명목으로 대부분이 파헤쳐지고 없어졌으나, 최근 환인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정비되어 지금은 20여기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고성자성지는 혼강 서안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은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돌에 새긴 유적 표지판이 남아있다. 평지에 있는 이 하고성과 오녀산성은 모두 혼강의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고, 두 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비슷해 축성 시기가 비슷할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이곳에서 살고, 전쟁이 일어나면 혼강의 뱃길을 이용해 오녀산성에 들어가 성을 굳게 지켰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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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에서 고구려 유적의 산실인 집안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중국의 삼륜 트럭. 앞쪽에 있는 대형버스가 일행이 타고 있는 버스이다. 차안에서 중국의 시골 풍경을 촬영하면서 이동하던 중에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삼륜차에 20여명의 인원이 함께 타고 가는 모습이 이색적이어서 카메라에 담았는데, 이동수단이 귀한 시골길에서는 정원을 초과한 차량을 가끔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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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 병영터 인근에 위치한 ’천지’로 불리는 연못(좌측)과 연못과 인접해 있는 우물. 우물 형태의 샘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연못이 800m가 넘는 산 정상에 대규모의 인원이 거주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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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셔틀버스 주차장에서 오녀산성으로 올라가는 계단. 좌측의 계단이 1천여개로 이뤄진 직선 코스이고, 우측으로 보이는 계단이 S자 형태로 본 계단과 만나면서 거리는 멀지만 비교적 완만한 경사로 오를 수 있게 만든 길이다. 거리상으로는 돌아가지만, 직선코스가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어 돌아가는 편이 부담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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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오녀산성의 정상에서 답사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뒤쪽 아래로 보이는 것이 혼강을 막아서 만든 환인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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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에 남아있는 궁궐터(사진 상)와 여러개의 병영터 가운데 하나. 궁궐터에는 초석만 남아있는데 7칸의 건물로, 벽은 흙이나 돌로 쌓고 지붕은 풀로 덮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영터는 병사들이 거주했던 건물터로 성의 남쪽에서 여러개가 발굴 되었는데, 바닥에는 온돌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있어서 고구려 온돌의 기원을 찾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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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은 길림성 환인현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8.5km 거리에 있는 오녀산(해발 820m)의 남쪽등성이 두어 개를 포괄하여 쌓은 성으로서 고구려 시조 주몽이 B.C 37년 수도로 삼아 유리왕 22년(A.D 3년)까지 40여 년간 사용하였던 곳이다.
성은 동남쪽으로 큰 골짜기를 끼고 있고 서남, 동북쪽에 약간 낮은 곳이 있으나 서쪽, 북쪽 및 동북쪽의 대부분은 깎아지른 듯 한 수 십 미터 높이의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는 험준한 지대를 이용하여 쌓았다. 820m의 산 정상에 200m가 넘는 직벽이 3면으로 절벽을 이룬 천혜의 환경에 성벽을 쌓아 난공불락의 요새를 이룬 것이다. 게다가 정상에는 넓은 평지가 있고, 수백 명의 식수를 해결할 수 있는 연못까지 있는 이곳을 선택한 주몽의 예지가 놀라울 따름이다.
대형주차장 한편에 오녀산산성사적진열관(한국의 박물관)이 있다. 오녀산성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토기와 철기 등 몇 가지 유물과 주변의 고구려 유적지에서 수집한 그릇, 무기 등을 모아 함께 전시하고 있는데, 1층과 2층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고구려 성벽처럼 만들어 놓은게 인상적이었지만, 실내에서는 촬영을 완전히 금지하고 있어서 카메라에 담아오지는 못하였다. 1층의 입구부터 전시장의 동선을 따라 관람하다보면 2층 출입구로 나오게 되는데, 이곳에서 산성의 입구까지 소형 셔틀버스를 이용하게 된다.
산성 입구에는 매표소가 있고, 곧이어 1천여 개의 계단으로 연결된다. 계단 입구에는 2인 1조로 구성되어 한명씩 탈수 있는 가마꾼들이 있는데 우리 돈 6만원 정도의 삯을 받고 있고, 노약자들이 주로 이용한다. 1천여개의 계단은 가파를 경사로 이뤄진 직선코스이고, 이 계단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S자형태로 만들어진 완만한 경사의 계단을 이용하면 거리는 멀지만 덜 힘들게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정상에는 일대를 전망할 수 있는 장대(將臺)가 몇 군데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장대는 전투와 직접 관계되는 것으로 성의 전체 형편을 잘 살필 수 있는 곳에 설치하여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인데, 지금은 관광객들의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동남쪽 멀리서 시작된 혼강이 서남쪽의 넓은 환인분지로 흘러들어가는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지금은 환인댐이 강줄기를 막고 있어서 강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호수같이 보인다. 장대 끝은 깎아지른 듯 한 절벽으로 500m가 넘는 높이다. 원래 혼강은 해발 197m이고 오녀산성은 820m이니 600m가 넘는 절벽이었다. 댐을 만든 뒤 혼강은 수위가 300m로 높아져 절벽의 높이는 520m가 되었지만, 서울 남산이 해발 320m라는 것을 생각하면 절벽의 위용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1천개가 넘는 계단이 답사회원들을 힘들게 하였지만, 아래로 펼쳐지는 절경이 피곤함을 잊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정상의 숲길을 따라 이동하다보면, 궁궐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온돌의 흔적이 남아있는 병영터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산 정상의 천연 연못인 천지에서 잠시 땀을 식힌 후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올림픽 소식이 궁금해졌다. 현지 시간으로 10일 오전 11시가 넘었으니 한국 수영의 기대주인 박태환선수의 400m 경기가 끝났을 시간이었다. 한국의 친구에게 국제전화를 하였다. 요즘은 휴대전화의 국제로밍으로 이국땅의 산 정상에서도 통화가 쉽게 이뤄지니 직접 사용하면서도 현대문명의 혜택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친구의 들뜬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전해졌다. 한국의 첫 금메달이었다. 그것도 수영에서의 사상 첫 금메달. 급히 회원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했고, 중국 땅이 되어버린 고구려 유적지에서 주몽의 후예들이 쏟아내는 가슴 벅찬 환호가 이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인들의 심한 통제 속에 이뤄지는 답사에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는데, 중국선수를 이긴 박태환의 금메달 소식은 선조의 흔적을 발견하는 기쁨 이상이었다.
오녀산의 인근에는 상고성자 고분군(上古城子 古墳群)과 하고성자 성지(下古城子 城地)가 있다. 상고성자 고분군은 200여기의 무덤 군이 ‘문화혁명’ 이후 개간산업이란 명목으로 대부분이 파헤쳐지고 없어졌으나, 최근 환인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정비되어 지금은 20여기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고성자성지는 혼강 서안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은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돌에 새긴 유적 표지판이 남아있다. 평지에 있는 이 하고성과 오녀산성은 모두 혼강의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고, 두 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비슷해 축성 시기가 비슷할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이곳에서 살고, 전쟁이 일어나면 혼강의 뱃길을 이용해 오녀산성에 들어가 성을 굳게 지켰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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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에서 고구려 유적의 산실인 집안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중국의 삼륜 트럭. 앞쪽에 있는 대형버스가 일행이 타고 있는 버스이다. 차안에서 중국의 시골 풍경을 촬영하면서 이동하던 중에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삼륜차에 20여명의 인원이 함께 타고 가는 모습이 이색적이어서 카메라에 담았는데, 이동수단이 귀한 시골길에서는 정원을 초과한 차량을 가끔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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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 병영터 인근에 위치한 ’천지’로 불리는 연못(좌측)과 연못과 인접해 있는 우물. 우물 형태의 샘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연못이 800m가 넘는 산 정상에 대규모의 인원이 거주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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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셔틀버스 주차장에서 오녀산성으로 올라가는 계단. 좌측의 계단이 1천여개로 이뤄진 직선 코스이고, 우측으로 보이는 계단이 S자 형태로 본 계단과 만나면서 거리는 멀지만 비교적 완만한 경사로 오를 수 있게 만든 길이다. 거리상으로는 돌아가지만, 직선코스가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어 돌아가는 편이 부담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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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오녀산성의 정상에서 답사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뒤쪽 아래로 보이는 것이 혼강을 막아서 만든 환인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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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에 남아있는 궁궐터(사진 상)와 여러개의 병영터 가운데 하나. 궁궐터에는 초석만 남아있는데 7칸의 건물로, 벽은 흙이나 돌로 쌓고 지붕은 풀로 덮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영터는 병사들이 거주했던 건물터로 성의 남쪽에서 여러개가 발굴 되었는데, 바닥에는 온돌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있어서 고구려 온돌의 기원을 찾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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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성벽의 축조방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동문 성벽을 설명하고 있는 고복우 답사선생님(좌측)과 성벽 축조에 사용된 돌. 고구려의 독특한 축성법인 옹문(瓮門)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형태로 알려져 있다. 동쪽 성벽은 모두 돌로 쌓았는데 산꼭대기로 부터 180m쯤 낮은 중턱에 있으며, 성밖에서는 6∼8m 정도의 높이이고 성벽 안쪽에서는 1∼2 정도이다. 우측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돌 안쪽을 날카롭게 깎아서 성벽 축조에 사용하였다.
경북매일신문 2008-09-19 문화유산답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