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상 을파소를 등용한 고국천왕의 리더쉽
고구려가 건국된 후 200년 즈음 고조선의 옛 땅을 지배하고 있는 한나라도 외척과 환관의 갈등과 호족의 대두로 통치 체제가 약화되었다. 이러한 호기를 맞이하여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하여 한 군현과 치열하게 싸우게 되었고, 고국천왕은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하였다.
고국천왕은 신대왕의 다섯 왕자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인물이 출중하여 태자로 책봉되고, 선왕의 사후 백성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그는 키가 9척 장신에 풍채가 웅장하여 힘이 장사였고, 일처리에 있어 관용과 예리함을 겸비하였다 한다. 즉, 문무 겸전의 제왕이었고, 카리스마와 포용력을 두루 갖춘 지도자였다. 고국천왕 즉위 직후 맏형인 발기가 3만여 명을 끌고 한에 투항하였고 한의 침공을 받는 위기를 당하였다. 이 때 그는 친히 군대를 지휘하여 좌원이란 곳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대외적인 위기를 극복한 고구천왕은 내정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고구려는 5부족 연맹체였다. 1세기 태조왕때 어느 정도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졌으나 아직도 부족의 세력이 강하였다. 왕권 행사는 다른 4부족의 협력을 필요로 하였다. 4부족 중에 왕비를 배출하는 절노부(연나부)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왕비 우씨의 친척이었던 어비류와 좌가려 등이 권력을 독점하고 그 자식들이 악행을 저질렀다. 왕이 이를 처벌하려 하자 좌가려 등이 연나부 세력을 끌고 모반하였다.
왕은 친위 부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토벌하였다. 이런 내란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개혁과 통합의 리더쉽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국천왕은 과거 부족의 명칭 대신 동부, 서부, 남부, 북부 등 방위를 표시하는 부의 명칭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하여 부족의 색깔이 많이 희석되어 중앙 정부의 행정력은 강화하였다.
또한, 고국천왕은 국정쇄신을 위하여 4부에 인재 추천을 지시했다. 4부에서는 모두 동부 출신 안류를 천거했다. 그런데, 안류는 사양하면서 대신 을파소를 추천했다. 을파소는 유리왕때 대신이었던 을소의 후손이나 좌물촌이란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귀족들은 온건한 인물인 안류를 내세워 개혁의 속도를 약화시키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고국천왕의 뜻을 간파한 안류는 한미한 출신인 을파소를 추천하였다.
을파소의 등용은 4부의 합의로 천거한 안류의 추천이란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을파소는 최고 관직인 국상(國相)에 임명되어 모든 정사를 주관하였다. 외척이나 귀족 세력은 을파소를 견제하며 저항하였다. 이 때 국왕은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친척까지 징벌하겠다.”는 조서를 발표하여 을파소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국정 개혁에 반대하면 부족에게도 연대 책임을 묻겠다는 강력한 선언이었다. 전권을 위임받은 을파소는 지극 정성으로 정사를 살폈다.
삼국사기에는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을파소는 개혁의 명분을 밝히고 4부를 설득하여 동의를 받아내는 정치력을 발휘한 듯하다. 그리고, 사법 처리는 합리적 원칙에 입각하여 공정히 집행함으로써 백성들 누구나 공감하는 정부, 국민적 지지를 받는 정부가 되었고, 국내외적인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고국천왕 개혁의 백미는 진대법(賑貸法)의 실시이다. 진대법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사회 보장 제도이다. 당시 빈궁한 농민들이 몰락하여 귀족의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조세 부담층을 약화시키고, 귀족의 경제 기반을 확대함으로써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고, 국왕의 통치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진대법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 추수 때 갚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가 실시되면서 민생이 안정되고 국가 재정도 충실하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 제도는 이후 고려 시대의 의창, 조선 시대의 환곡 제도로 계승되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복지 정책이다. 이렇게 백성을 배려하는 정책을 펴나가게 되니 주변에서 고구려를 부러워하게 되었다. 고국천왕 19년(서기 197년) 한나라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한군현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에 귀순하였다. 고구려는 인구 증가와 함께 우수한 중국 문화를 수용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국력이 크게 신장되게 되었다.
고국천왕의 을파소 등용은 대성공이었다. 을파소의 개혁은 신돈의 개혁처럼 너무 무리하게 추진하여 좌초한 개혁이 아니라 귀족 세력의 동의와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내어 명분과 실리를 함께 챙긴 성공적인 개혁이었고, 고국천왕은 통합과 개혁의 리더쉽을 발휘하여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할 수 기반을 닦아 나갔다.
출처 : 민족혼닷컴 http://cafe.naver.com/coreaspirits/994
첫댓글 리더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신뢰의 리더십입니다. 고국천왕과 을파소에는 이것이 작용하고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