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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강원 무비스님의 증도가 강의(3)-1
증도가(證道歌) 도를 증득한 노래라, 도를 깨달은 노래라, 우리는 아직 도를 이루진 못했지만은 그래도 도를 이룬 사람들의 말씀을 통해서 엇비슷하게 짐작은 할 수가 있고, 자꾸 이렇게 깨달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자주 접하고 그것을 또 중생의 마음이지만은 그런 대로라도 그 마음 가지고 이제 사량을 하고 분별을 하고 그러면서 사유를 하고 이렇게 하다보면은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이 비슷하게 내 것으로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자꾸 설법을 많이 하시고 또 역대 조사스님들도 깨달음의 말씀을 자꾸 남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꼭 깨달은 사람의 것이다’ 이렇게 미루어 버릴 일이 아니라는 거죠. 자꾸 이제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은 사람의 안목을 내것으로 이제 함으로 해서 그 깨달음이 빨리 이제 다가올 수 있다 하는 그런 그 마음으로 우리가 경전이나 어록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이게 우리가 공부하는 의미지요. 오늘은
淨五眼得五力은
(정오안득오력은)
다섯 가지 눈을 청정하게 하고 다섯 가지 힘을 얻는 것은
정오안득오력(淨五眼得五力) 유증내지난가측(唯證乃知難可測) 여기부터 할 차례인데, 깨달음을 이루고 보면 오안을 청정하게 할 수 있다. 오안을 얻는다 이뜻이예요.
또 오력을 얻고, 오안과 오력은 뒤에도 이제 팔해육통(八解六通) 삼신사지(三身四智) 나오지만은 그런 것들이 모두가 우리 마음에 이미 갖추고 있는 본래의 능력이라.
인간은 지금 보통 인간의 눈으로 보면은 하잘 것 없는 존재지만은 좀 더 열린 눈으로 볼 때 무한한 어떤 가능성,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본래의 모습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오안(五眼)이니 오력(五力)이니 뭐 삼신(三身)사지(四智) 팔해(八解) 육통(六通)등등 만행만덕(萬行萬德)이 전부가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 이미 씨앗처럼 갈무리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깨달음을 통해서 그것이 활용할 수 있는 완전한 자기 것으로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오안을 깨끗이 하고 오력을 얻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은
唯證乃知難可測이라
(유증내지난가측이라)
오직 증득해야 알 바요 헤아리기 어려움이라.
유증내지난가측(唯證乃知難可測)이야, 우리끼리 아무리 이야기 해봐야, 우리끼리라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끼리 아무리 이야기 해봐야 그게 제대로 요량이 안 된다 이 말이예요.
깨달은 사람이라야 그게 확실하게 ‘아 그래 맞아’ 온갖 만행 만덕과 뿐만 아니라 무량 공덕, 영원한 생명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 내 속에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말하자면 서로 인정한다 이거예요.
오직 증득해야만 이에 알 수가 있고,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는 가히 측량하기 어려움이라.
사실은 수없이 이야기 하고, 나부터도 들어온 대로 경전에서 보아온 대로, 무한한 능력과 영원한 생명, 이런 이야기를 아주 거침없이 하죠.
그리고 또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는 것은 바로 유한한 어떤 삶을 가지고 무한의 삶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특히 종교활동, 이 불교 활동이라고 하는 것, 불교적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유한의 삶에서 무한의 세계로 들어가는 이 작업이 바로 종교적 수행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그 무한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한한 생명이라는 것이 과연 그러면은 가능한가? 과연 그건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은 우리가 확연히 깨달은 사람을 통해서 들어서 짐작은 하고 또 사유를 통해서 어느 정도 느끼고는 있어요.
그렇지만 그건 확실하게 ‘이것이다’ 라고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 그러니까 이게 유증내지난가측(唯證乃知難可測)이라, 오직 증득해야만 이에 알 지 가히 측량하기 어렵다.
그런데 측량하기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이것을 부정하면 그건 큰 아주 잘못이예요.
우리가 과거 불조의 말을 우리 감량으로 이해가 안된다고 해서 그걸 부정하기로 하면 공부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불교를 믿을 필요가 없는 거야, 우리 감량으로 이해는 안되더라도 불조의 말씀을 믿고 언젠가 나도 이 불조의 말씀을 증명하리라 라고 하는 그런 자세, 이게 있을 때 우리가 공부할 희망이 있는 거지.
안그러면 공부할 희망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사 우리 짐작으로 이해가 안된다손 치더라도 불조의 말씀, 다시 말해서 깨달은 분들의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깊은 사유를 하고, 그래서 또 느끼고, 이해와 사유, 그리고 느낌 그래서 확실하게 깨달음이 우리에게 다가 올 수가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참 깨달은 사람의 경지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설명해주려고 할 때 얼마나 문제가 많겠어요?
참 답답하기 이를 때 없지,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도 49년간 설법해놓고도 ‘나는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이런 말을 한 이런 이유가 바로 그거라.
제대로 설명했다고 하지만은 성이 안차는 거야. 그건 깨달은 사람끼리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이지 그걸 뭐 언어로 표현할 수 있고, 사유로 사량분별로 그게 이해되어지는 게 아니거든.
다시 말해서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 있다. 그랬을 때 그 사람은 나이가 3,40대 아주 그 모든 기능이 정상적이고 머리도 총명하고 사고가 아주 정상적인 그런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다 이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이 세상 현실의 우리가 눈뜬 사람이 보고 듣고 하는 그런 상황들을 설명하려 한들 그게 설명이 되겠어요?
하루종일 예를 들어서 뭐, 아침에 해가 뜨는 모습, 해가 지는 모습, 봄이나 가을의 어떤 그 산천의 변화같은 것, 꽃 한송이를 두고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 꽃 한 송이의 그런 그 아름다운 모습을 하루종일 설명을 해도 아마 제대로 설명이 안됐을 거예요.
또 맹인은 그게 이해가 안 될거예요. 짐작도 안 될거라.
왜냐,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깨달음의 경지를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런 거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49년 설하고도 나는 한마디도 설한 적이 없다. 왜냐 깨달음의 실체를 제대로 짚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
그래서 유증내지난가측(唯證乃知難可測)이라
오직 깨달은 사람만 알지 그 외에는 어렵다 하는 게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런 것이죠. 나는 그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의 안목의 차이를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제 꿈을 꾸는 사람과 깬 사람의 차이, 이렇게도 설명을 하지만은 맹인과 눈 뜬 사람의 차이다, 그렇게 이제 이해를 많이 하죠. 여기 이제 그 다음에
鏡裡看形見不難이요
(경리간형견불난이요)
거울 속에 있는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경리간형견불난(鏡裡看形見不難)이요 수중착월쟁점득(水中捉月爭拈得)가 이것은 이제 깨달은 사람의 안목으로 볼 때 어떤 존재의 실상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은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어떤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애.
그런데 그걸 보는 데는 어렵지가 안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상을 보는 데는, 이건 허상이지만 보는 데는 하나도 어렵지 않아. 그런데 그 다음
水中捉月爭拈得가
(수중착월쟁점득가)
물 속의 달을 건지는 것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수중착월쟁점득(水中捉月爭拈得)가 라고 하는 것은 물 속에 비친 달, 이것도 역시 존재의 현실을, 존재의 어떤 허상을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경리(鏡裡)에 간형(看形)이나 수중착월(水中捉月)이나 똑같은 뜻이라. 말의 표현이 달라서 그렇지,
이것이 이제 물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거야. 깨달은 사람의 안목에서 볼 때.
보는 데는 수중에 있는 달을 보는 거나, 거울속에 있는 형상을 보는 거나 보는 데는 지장이 없어.
그런데 거울 속에 있는 형상도 잡아낼 수가 없는 것이고 물에 비친 달도 잡을 수가 없는 거야. 물에 비친 달도 잡을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현실을 ‘있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집착을 하고 그것을 잡으려고 하고 영원히 내 것이라고 만들려고 하지만은 그게 잡히지가 않는다고.
수중착월과 같은 거야. 이게.
눈에는 보이지. 경리간형견불난(鏡裡看形見不難) 이 참 묘한 표현인 것이 경리간형은 견불난이야.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데는 어렵지 않아. 지금 눈앞에 있는 현실을 우리가 보고 이해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런데 이것이 실체다 하고 내 손에 꽉 잡는 것은 이거는 불가능한 일이야. 마치 수중착월과 같애. 물에 비친 달을 잡는 거하고 똑같다고 이게.
우리는 무슨 명예다, 이익이다, 부다, 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라고 했을 때 그것이 내 손에 잡힌 것이라고 알고 있지.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아무리 작은 소소한 거라도 그것을 내가 했을 때, 그것이 내 손에 잡힌 것이라고 생각하는거야. 그런데 잡힌 것은 아무것도 없어 사실은 알고 보면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 내가 성취한 것처럼 보여. 명예가 됐든 부가 됐든간에 그것이 내가 성취한 것처럼 보이지. 내가 목표한 경지를 달성했을 때 성취한 것처럼 보이지만은 그것은 실제로 그건 손에 있는 것이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걸 조금 이제 우리가 불교적인 어떤 이론을 밑바탕으로 해서 생각해 보면 그건 뻔히 아는 일이지.
불교의 현상론이라고 하는 것이 전부 공하다고 보는 것, 왜 공한 것이냐? 인연소치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조건에 의해서 잠깐 그 조건의 힘이 유효한 동안까지만, 그 힘이 세력이 있는 동안만 말하자면 그게 있는 거야. 그 세력이 힘이 다하는 날엔 없는거야.
예를 들어서 강원 생활 4년이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했을 때 4년간만 학인이야. 그 외에는 학인이 아니라고.
그러기 때문에 4년간도 이제, 말하자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없다고 이렇게 본거야.
모든 존재를 그렇게 보는 거야.
모든 존재가 수중착월이야. 손에 잡히는 게 없어요 사실은. 요것을 조금만 생각해 봐도 짐작은 해요. 깨달은 안목이 설사 아니라 하더라도. 물론 깨달은 안목을 가지고 확연히 보면은 그건 뭐 말할 것도 없지. 텅비게 보이지.
내가 간혹 홀로그램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홀로그램 같이 존재하는 거야. 눈에는 보이는 것 같지만 손에 잡아 보면 안 잡혀, 없어. 그냥 환상이야, 환상에 불과해.
이렇게 깨달은 사람들은 이런 것이 너무나도 가슴에, 너무나도 와 닿는 거야 이러한 사실이.
정말로 있다고 믿었던 그런 사실이 너무나도 이것은 허망하기 때문에 얼마나 그 충격이 크겠어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수중착월이야. 그야말로 이 현실에 우리가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물에 비친 달을 잡는 거와 같애.
수중착월이라고 하는 것은 설화에서, 오백 나한의 설화에도 이제 나오는 이야기고 하지만은, 사실은 우리가 현실을 실재하는 것이라고 공이 아니고 실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현실을 부여잡으려고 하는 것, 거기에서 나온 말이라. 그런데 이게 뭐 설화로 되어 가지고서는 통도사 대웅전에도 가면은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 그런 말이 있거든, 연비산산 팔을 뻗어가지고 산산이가 원숭이들이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아무리 허우적대봐야, 물을 잡아버리면 또 물이 깨지고, 물을 잡아보면 또 물이 깨지고, 부처님께 바치려고, 그런 설화는 다 아는 이야기죠.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이예요.
그 산산이가 원숭이들이 팔을 뻗어가지고 물에 비친 달을 아무리 잡으려고 해봐야 도대체 잡히지가 않아.
그 존재의 실상을 우리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거기에 목을 매고 그걸 부여잡고 그것을 내 것으로 아등바등 하려고 하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거야.
아주 그 좋은 표현이거든요. 깊은 뜻을 우리가 그렇게.
설화로만 설명하려면 너무 부족해 설화로 설명하려고, 설화를 이야기 하려고 한 게 아니야 그건.
우리 보통 사람들이 현상을 어떻게 보는가? 깨달은 사람의 안목으로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내 것이라고 할려고 하는 그것이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이제 표현하고 있는 거죠.
요런 글에서 우리가 한 생각, 조금씩 달라져야 되죠.
경리간형견불난(鏡裡看形見不難)이요 수중착월쟁점득(水中捉月爭拈得)가
거울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아, 지금 현실을 보는 것은 눈에 다 들어오고 귀에 다 들리고, 명예고, 이익이고 부고, 일체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것은 전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거예요. 그러나 그게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수중착월쟁점득(水中捉月爭拈得)가 참 이 두 구절이 시적이면서도 멋지게 표현을 했어요. 그 속에 담긴 것이 아주 무궁무진한거야.
깨달음의 눈으로 이 세상을 봤을 때 그와 같은 것이고 우리는 또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하는 거와 같은 그런 허우적대는 삶을 살고 있다.
이걸 가지고 사실은 불교를 다 설명할 수 있어.
경리간형견불난(鏡裡看形見不難) 수중착월쟁점득(水中捉月爭拈得)
불교의 현상론이니 본체론이니 하는 것이 결국은 여기서 벗어나있지 않거든. 이걸 가지고 부연설명하면은 다 설명이 가능한 거예요.
우리의 안목은 어떻고, 깨달은 이의 안목은 어떻다,
그리고 존재는 어떻게 어떤 원리로 지금 존재하게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요 속에 설명이 다 된다고, 다 포함되어 있어. 공이다. 연기다 중도다 하는 것들이 이 속에 다 포함되어 있어.
그래서 수중착월의 일이고, 경리간형의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공이다 하고 연기다 하고 그런 것을 뭉뚱그려서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도다 하는 거예요. 어떤 그 부정과 긍정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이제 어떤 그 불교의 안목을 말하자면 추리는 방법인데 이런 것은 교리로 정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이건 하나의 종지로써 꼭 우리가 알아둬야 되고, 이런 안목이 제대로 갖춰졌때 그런 것을 경안(經眼)이다 이렇게 말하고, 또 경전이나 어록을 보는데 분해를 잘 할 수가 있어. 분해.
싹싹싹 이제 어느 것은 어느 것이고 그런 거를 이제 분해를 제대로 할 수가 있는 거지.
성철스님 녹음을 들어보면은 중도라고 하는 그 원리 하나 가지고 딱 다 이제 어록과 경전을 싹 분해 했어요. 그건 아주 뛰어나다고.
그런데 이제 현실을 이야기 할 때 중도의 공식을 적용하지 를 않았어.
‘일체법이 중도 아닌 것은 없다’라고는 하면서, 현실을 가지고 예를 들어서 컵을 가지고 중도를 이야기해야 되고,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것을 중도의 원리를 가지고 그걸 분석을 해야 되거든. 그런데 대개 보면 그 스님 말씀은 전부 경전과 어록의 말을 가지고만 했지. 그 외에 거는 이야기 안했다고요.
그래서 내가 ‘미완성 중도이론이다’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 경전어록은 제대로 중도로 분해를 했어. 그런데 현실을 가지고 또 중도 이론으로 분해를 해야 된다고 이렇게.
그게 이제 좀 설명이 부족하지. 부족함을 내가 느끼는게 바로 그 점이라.
첫댓글 인간은 지금 보통 인간의 눈으로 보면은 하잘 것 없는 존재지만은 좀 더 열린 눈으로 볼 때 무한한 어떤 가능성,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본래의 모습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_()()()_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하는 거와 같은 그런 허위적대는 삶을 살고 있다...꽃물들다님 수고하셨습니다.._()()()_
水中捉月爭拈得가 (수중착월쟁점득가) 물 가운데을 잡는 것은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 감사드립니다 물들다님.... 이 겨울에도 매일 행복하심을 빕니다... _()()()_
모든 존재는 水中捉月... 慧明華님!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_()_
삼배 올립니다
경리간형견불난(鏡裡看形見不難)이요 수중착월쟁점득(水中捉月爭拈得)가...깨달음의 눈으로 이 세상을 봤을 때 그와 같은 것이고 우리는 또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하는 거와 같은 그런 허우적대는 삶을 살고 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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鏡裡看形見不難 水中捉月爭拈得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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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