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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루즈 시대(1975-1979)는 “폴 포트 정권”이라고도 불리며,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파가 캄보디아 전국을 통치한 시대이다. 당시의 국호는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였다.
이 기간 캄보디아에서는 거의 200만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처형이나 기아, 그리고 강제노역으로 죽어갔다. 크메르루즈 시대는 이웃국가이자 예전의 동맹국이었던 베트남의 침입으로 종식되는데, 이 전쟁을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이라 부르며, 전쟁의 영향으로 캄보디아는 이후 10년간 베트남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된다.
목 차
- 1. 배 경
- 2. 강제소개령
- 3. 앙까 통제하의 사회
- 3.1 종교 및 소수민족 공동체
- 3.2 교육 및 보건
- 3.3 경 제
- 3.4 정 치
- 3.5 민주 캄푸치아 헌법의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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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 경
1970년 론 놀(Lon Nol) 총리와 국회는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왕자를 국가수반직에서 실각시킨다. 그 후 캄보디아 정부는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군수물자가 캄보디아 항구를 거치지 못하도록 하고, 영토 내에 설치된 북-베트남의 군사기지 사용도 금지한다. 일부에서는 당시 북-베트남은 미국과 전쟁 중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조치가 친미적인 정책 전환이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한편 시하누크는 새로운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크메르루즈와 연합한다. 크메르루즈는 이미 캄보디아 동부를 북-베트남이 장악하고 있던 이점을 등에 업고 있었고, 전국적으로 진행된 미국의 융단폭격에 대해 국민여론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 다수의 대표성을 지닌 이 유명한 시하누크와 연합함으로써 자신들이 평화를 지향하는 정파임을 과시하려 했다. 특히 농촌지역에서 주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가던 크메르루즈는, 마침내 1975년 4월 17일 수도인 프놈펜에 입성한다. 그들은 노로돔 시하누크를 정부의 얼굴마담으로 이용하는 정책을 지속했다.
2. 강제소개령
크메르루즈의 첫번째 행동은 대부분의 도시지역 주민을 시골로 소개시킨 것이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도시 바깥 “2~3킬로미터” 지역으로 갈 것이며, “2~3일 이내에” 귀가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증언을 기록한 또다른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융단폭격을 피하기 주민들을 소개하는 것이라 했으며, 크메르루즈 군대가 주민들이 귀가할 때까지 “모든 것을 잘 돌볼 것”이라 하여, 집안 문단속도 하지 못한 채 소개당했다고 한다.
(크메르의 세계 추가사진) 프놈펜 소개령 당시의 모습.
도시 외곽의 도로는 피난민들로 넘쳐났다. 당시 프놈펜 인구는 250만 정도로, 그 중 150만명 정도는 친지들과 함께 거주하거나 아니면 도시중심가에서 노숙하던 피난민들이었다. 얼마 안 있어 도시는 거의 공동화 상태로 변했다. 이와 유사한 주민에 대한 강제 소개령은 밧덤벙(Battambang, 바탐방), 껌뽕 짜암(Kampong Cham, 캄퐁 참), 시엠립(Siem Reap, 시엠 리업), 껌뽕 톰(Kampong Thom, 캄퐁 톰) 등 전국의 도시 및 읍내에서 실시됐다.
소개당한 주민들은 그 작전을 수행한 군부대 및 지휘관이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환경에 놓여졌다. 보고에 따르면 프놈펜에서 민주 언론인으로 일했던 폴 포트(Pol Pot, 뽈 뽓)의 동생 처이(Chhay)도 프놈펜 소개작전 때 사망했다. 심지어 프놈펜 각 병원의 환자들도 모두 소개당했다. 크메르루즈는 노약자 및 장애인들을 위해 약간의 차량도 준비했으며, 피난민들을 위해 도시 외곽에 식량을 비축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상으로 몰려나온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심지어는 중상자들조차 아무런 호송대책 없이, 상황을 고려받지 못하고 일괄적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키우 삼판 (Khieu Samphan)에 따르면, 프놈펜 주민 소개 과정에서 2,000~3,000명의 주민이 사망했다고 한다. 800명에 이르는 외국인들은 프랑스 대사관에서 안전을 확보받은 후, 그 달 말에 트럭을 타고 태국국경으로 보내졌다. 외국인과 결혼한 크메르인 아내들도 그 남편과 동행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외국인 아내를 둔 크메르인 남편들은 아내와 동행하지 못하고 강제로 남아야만 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크메르루즈 측은 미국의 공습에 대한 대비와 더불어, 2~3백만에 달하는 도시주민들을 부양할 식량조달이 불가능해 취해진 조치라며 정당화시켰다. 프랑소와 뽕쇼(François Ponchaud) 신부에 따르면 당시 항구도시 껌뽕 솜(Kampong Saom: 현재의 시하눅빌) 항구의 창고에는 상당량의 식량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충분한 운송수단이 없었으므로 주민들에게 식량을 운반하질 못하고, 주민들을 식량이 있는 곳으로 이주시키는 방법을 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방측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소개령이 정치적 동기를 지닌 것으로, 도시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한다. 크메르루즈는 국가를 완전한 농민국가로 전환시키기로 결정했고, 그 안에서 도시적 삶이 지닌 타락성과 “기생충적 성향”(parasitism)은 완전히 뿌리뽑혀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게다가 폴 포트가 도시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 “적들의 간첩조직”을 파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폴 포트 및 "캄푸치아공산당"(CPK) 정치국을 주도한 그의 강경라인이, 도시지역 주민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고 공산당 조직 내 라이벌 분파들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엉까 통제 하의 사회
크메르루즈가 시도한 사회개혁은 론 놀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 자신들이 장악했던 농촌지역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그후 전국 각지로 확대되어 갔다. 이들이 시도한 개혁은 러시아나, 중국, 그리고 베트남의 혁명에서도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극단성을 보여주었다.
폴 포트에 따르면 전-혁명기 캄보디아에는 5가지 계급이 존재했다. 즉 농민, 노동자, 부르조아, 자본가, 봉건주의자가 바로 그것이다. 1976년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헌법에서 규정한 바에 따르면, 후-혁명 사회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모든 여타 캄푸치아의 일꾼들(working people)”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애국적인” 지주나 브루조아들도 사회주의 건설에 동참시켰던 중국식 “신민주주의”(New Democracy) 같은 과도적 단계는 허용되지 않았다.
시하누크는 저서에서, 1975년 자신과 키우 삼판, 그리고 이엥 사리(Ieng Sary)의 부인 키우 티릿(Khieu Thirith)이 함께 말기 지병을 앓고 있던 저우 언라이의 병문안을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저우 언라이는 1950년대 후반 중국이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Great Leap Forward)에서 보여준 것처럼, 단번에 공산주의 단계를 얻으려 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고 한다. 키우 삼판과 키우 티릿은 “다만 의아하고도 우월감에 찬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고 한다.(인용각주 필요) 후에 키우 삼판과 손 센(Son Sen)은 시하누크에게 “우리는 시간낭비와 과도적 단계없이 완전한 공산주의를 이룩하는 첫번째 국가가 될 것”이라 자랑했다고 한다.
비록 지역적으로 상황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당시 난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1970년대 "캄푸치아공산당" 내에 극단적 차별의 시각이 존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즉 공산당 승리 후 도시에서 밀려나온 정치적으로 의심되는 “신 인민”과, 시골에 머물러 있던 가난한 중하층 농민들인 “구 인민” 사이의 구분이었다. 또한 이념적으로는 급진적 평등을 주장했으면서도, 캄푸치아 공산당 당원과 군대는 명백히 엘리트로 인정받고 있었다. 노동자 계급의 경우 도시지역 출신이라는 것과 국가 내 생산시설 대부분이 정지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편이었다. 더욱이 노동계급 내 중요한 일원인 전-혁명기 캄보디아의 여러 고무농장에서 일했던 고무 노동자들의 경우, 전통적으로 대부분 베트남 출신 이민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심을 받고 있었다.
전쟁기의 도시지역 총인구가 570만~730만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공산군대가 승리하던 무렵에도 피난민을 포함해 최소 300만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피난민이었던 이들은 원래 농촌 출신이었지만 “신 인민”으로 분류됐다. 즉 이들이 "민주 캄푸치아"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구 인민”에 들어갔지만, 크메르루즈는 극단적으로 엄중한 기록을 관리하며 가족 및 개인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행정구역 분류 상 가장 작은 단위인 끄롬(리, 반)은 10~15가구의 핵심가구로 구성됐고, 이들의 움직임을 3인 위원회가 관리했다. 위원장은 "캄푸치아공산당"(CPK)이 선정했다. 이 풀뿌리 지도자는 자신이 관할하는 각 가정의 사회적 성분을 기록한 후, 엉까(Angkar: “조직”이란 의미)의 위계질서를 따라 상부로 보고토록 강요받았다. 최초의 “신 인민”들은 250만을 넘지 않았다.
신 인민들은 노예노동에 처해졌다. 그들은 끊임없이 옮겨다녀야 했고, 주로 고지대나 늪지대 같이 국토의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비참한 처우를 받는 가운데, 강압적이고 고된 육체노동이 이루어졌다. 신 인민들은 구 인민들부터 격리되었고, 사생활은 거의 누리지 못했으며, 쌀배급 역시 최소한도로만 받을 수 있었다. 1977년 식량란에 직면했을 때, 이들 신 인민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의료지원은 원시적 수준에 머무르거나 아예 없는 상태였다. 사람들은 성별이나 연령별로 각기 다른 노동대에 소속되어 전국 각지로 흩어졌기 때문에, 가족들조차 종종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신 인민"은 끊임없는 정치적 세뇌교육을 받아야 했고, 재판없이 처형되기도 했다.
크메르루즈 정권 하의 "구 인민"의 상황 역시 모호한 측면이 있다. 난민들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부락민들은 강제노동과 세뇌교육, 아이들 및 부모의 이별, 처형 등 신 인민들만큼이나 가혹한 처우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자신의 고향에 남아 거주할 수 있었다.
아마도 도시 및 농촌 엘리트들에 대한 오랜 적개심으로 인해, 가난한 농민들이 크메르루즈의 목표에 동조했을 수도 있다. 1980년대 초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서방 언론인들에 따르면, 크메르루즈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 여부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관리들이 언급을 회피하고자 한 민감한 문제였다고 전한다. 전국 각지의 난민들과의 인터뷰 및 여타 자료들에 근거해 <캄보디아 1975-1982>(Cambodia 1975-1982)를 저술한 마이클 빅케리(Michael Vickery)는, 크메르루즈 지역 당국이 정책을 얼마나 엄격히 시행했느냐에 따라 지역 별로 다양한 차이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데는 이념적 요소도 작용했지만, 가용한 식량의 양, 지역적 발전 정도의 차이, 그리고 기간당원들의 품성 등도 차이를 가져오게 한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이다.
신 인민들이 국토를 정화하러 들어갔던 미개발지역에서는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상황은 참혹했지만, 그들은 타인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빅케리의 보고에 따르면, 친-베트남적 기간당원들이 통제하던 동부구역(Eastern Zone)의 경우, 적어도 이 지역 지도부가 유혈숙청을 당했던 1978년까지는 폴 포트의 극단적 정책을 수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는 처형도 거의 없었고, 신 인민과 구 인민 사이에 별다른 차별도 없었으며, 식량도 전체 인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남서구역(Southwestern Zone)의 경우는 원래 크메르 루즈 권력의 중심이자 지도부 역시 엄격한 규율을 지켰지만, 상대적으로 처형은 적은 편에 속했고, 신 인민들도 협조적 태도만 가지고 있으면 그다지 박해받지 않았다.
한편 서부구역 및 북서구역의 상황은 혹독했다. 특히 북서구역의 경우, 생산된 쌀을 지역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기보다는 프놈펜에 보냈기 때문에 광범위한 기아에 허덕였다. 북부구역과 중부구역의 경우, 굶주림보다는 처형 문제가 더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동구역의 경우 캄보디아 내에서도 오지로, 그에 대해서는 신뢰할만한 정보가 별로 전해지지 않는다.
"민주 캄푸치아"는 표면적으로는 엄격한 평등주의를 지향했다. 여타 동남아시아의 많은 언어들이 그러하듯, 크메르어 역시 화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복잡한 어법을 구사하는 언어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적 관습은 무시됐고, 사람들은 서로를 "동무" 혹은 "동지"(크메르어로 "믓"មិត្ដ mitt)라 부르도록 강요받았다. 또한 전통적 예법인 인사 시 양손을 모으거나 고개를 숙이는 동작도 금지됐다.
언어는 또 다른 방식으로도 변화됐다. 크메르루즈가 새로운 용어들을 고안해낸 것이다. 인민들은 새로운 혁명적 소양을 "단련"(forge, 롯덤[lot dam])해야만 하며, 엉까의 "도구"(오뽀까[opokar])로서 만일 그들이 전-혁명기적 향수병에 빠진다면 엉까의 "초대"를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 인민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보다 더 평등"했다. CPK(캄푸치아 공산당) 당원이나 예비당원들, 그리고 엉까에 협력했던 지방의 가난한 농민 지도자 및 군인들은 다른 이들보다 높은 수준의 삶의 질을 영위했다. 난민들의 보고에 따르면, 심지어 심각한 식량난 속에서도 이들 풀뿌리 엘리트들은 호사스럽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적절하고 충분한 식량을 공급받았다는 데 이구동성으로 일치하고 있다. 한 난민은, 프놈펜의 강변을 따라 "새롭고 아름다운 대나무 가옥들"이 크메르 루즈 기간당원들을 위해 지어졌다고 증언했다.
민주 캄푸치아 연구의 권위자 크레이그 에치슨(Craig Etcheson)에 따르면, 혁명군대의 소속원들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독자적 영지"(self-contained colonies)에 살았고, "독특한 전사계급의 취향"(distinctive warrior-caste ethos)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무제한 사단들"(Unconditional Divisions)이라 불린 부대들은 폴 포트 개인에 충성을 바쳤고, 군 내에서도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가진 혁명 이데올로기는 극단적인 것이었지만, 크메르루즈 지도부의 최상층부는 시하누크 통치기 엘리트들에 필적할만큼 족벌주의의 재능을 잘 보여주었다. 폴 포트의 아내 키우 뽄나리(Khieu Ponnary)는 "민주크메르여성동맹"(Association of Democratic Khmer Women) 위원장을 맡았고, 그녀의 여동생인 키우 티릿은 사회부장관을 맡았다. 이 두 여성은 민주 캄푸치아 내 대여섯 명의 여성 활동가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개성을 보여준 인물들이다. 손 센의 아내 윤 얏(Yun Yat)은 문화교육학습부 장관을 맡았다. 폴 포트의 남녀 조카들 몇 명도 외무부에 발령을 받았다. 이엥 사리의 딸 중 한 명은 중등교육도 마치지 않은 학력으로 "칼멧병원"(Calmette Hospital)의 원장을 맡았다. 이엥 사리의 조카딸 한 사람은 영어의 유창성이 극도로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라디오 프놈펜"의 영어통역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이렇게 혈연을 중시하게 된 것은 문화적 영향도 있었지만, 특히 친-베트남계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외부인에 대한 불신 및 비밀유지를 통한 지도력 강화에도 목적이 있었다.
탐욕 역시 동기 중 하나였다. 외교부나 산업부와 같이 색다른 부처들은 크메르루즈 패밀리가 장악해 착취하는 대상이었다. 외교사절단을 관리하는 일이 짭짤한 사업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3.1. 종교 및 소수민족 공동체
1976년 제정된 민주 캄푸치아 헌법 제20조를 보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와 동시에 "민주 캄푸치아 및 인민들에게 유해한 모든 반동적인 종교들은 엄격히 금지한다"고도 선언되었다.
당시 인구의 85% 정도는 상좌부불교(테라와다불교)를 믿고 있었다. 크메르루즈 정권은 4만 내지 6만으로 추산되던 승려들을 사회적 기생충으로 낙인찍었고, 강제로 환속시킨 후 노동대로 보내버렸다. 많은 승려들이 처형당했고, 절이나 탑들은 파괴되거나 창고 혹은 감옥으로 전환됐다. 불상들은 파괴된 후 강이나 호수에 버려졌다. 기도를 하거나 종교적 정서를 표출하다 발각된 사람들은 종종 살해되곤 했다.
기독교 및 이슬람 공동체의 경우 친-서방적 세계주의의 한 부분으로 여겨졌고, 캄보디아 문화와 사회에 장애요소로 낙인찍혀 보다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프놈펜에 있던 로마 카톨릭 대성당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크메르루즈는 무슬림들이 금기시한 돼지고기를 그들이 강제로 먹도록 만들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를 거부해 살해됐다. 기독교 성직자들 및 무슬림 이맘들은 처형되었다.
소수민족에 대한 크메르루즈의 태도는 집단마다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계 주민들은 극도의 고통에 시달렸다. 정권의 조직적 학살을 통해 수만 명이 강간을 당하거나 사지를 절단당하고 살해됐다. 무슬림 소수민족인 짬족(Cham)은 원래 고대국가 참파 왕국(Champa)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인데, 이들은 크메르어 및 크메르 민족의 전통을 수용하도록 강요받았다. 또한 전통적으로 크메르족 부락과는 떨어져 갈던 이들의 마을도 파괴되었다. 껌뽕 짜암 도의 2개 군에서만 4만명의 짬족이 살해되었다. 태국 국경에 살고있던 태국계 소수민족도 박해를 받았다.
화교 및 화교계 크메르인들은 수 세기동안 캄보디아 경제권을 장악했었고, 농민들을 착취했다고 간주됐지만, 크메르루즈는 그들을 특별히 더 가혹하게 대하진 않았다. 전쟁은 자연스레 화교들을 도시 안으로 모여들게 했으므로, 도시지역의 강제 소개령 이후 이들 화교들은 그들의 도시 동포들과 더불어 동등하게 "신 인민"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크메르인 "신 인민들"과 마찬가지의 고통은 감수해야만 했다. 크메르루즈는 중국과 조심스럽고도 비공식적 접촉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러한 점이 이 정권으로 하여금 화교들을 공개적으로 박해하지 못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짐작될 따름이다.
1980년대 후반까지도 북동부의 소수민족 크메르 로으(Khmer Loeu)에 대한 크메르루즈 정권의 정책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1960년대 초 폴 포트는 이들 민족이 살고 있던 로따나끼리(Ratanakiri)에 반군 기지를 건설했으므로, 크메르 로으 족의 상당한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확실한 정령신앙(animism)을 갖고 있던 이들은 저지대 크메르 민족의 불교문화와는 별 관련이 없었고, 이들을 "개화시키려는" 시하누크의 정책에 분개하고 있었다. 캄보디아 전문가 세르게 티온(Serge Thion)에 따르면, 이 부족민과 결혼하는 일이야말로 "정파에 대한 무제한적 충성심을 최종적으로 보장받는 것"이었다고 한다. 키우 삼판도 이 부족의 여성 한 사람과 결혼했던 것으로 보인다.
킬링필드 추모관에 전시된 크메르 루즈 희생자들의 유골 (사진: Adam Carr 2005-2)
3.2. 교육 및 보건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에서 나타났던 급진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크메르루주는 전통적인 교육에 대해 대단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프놈펜 함락 직후 그들은 수천 명의 교사들을 처형했다. 1975년 이전에 교육자였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만 했다.
기본적 수학적 능력 및 읽기 외에는, 새로운 교육시스템이 목표로 한 바는 젊은이들에게 혁명의 가치를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전쟁기의 정권은 캄보디아의 전통적 가치를 교육적 목표로 했기 때문에, 새로운 교육은 젊은이들과 비-혁명적 구세대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데 초점을 맞췄다.
크메르루주 정권은 어른들을 감시하기 위해 어린이들을 이용했다. 엉까의 표현에 따르면, 어린 세대의 순진함이 그들을 "당 독재를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1962년 공산당은 비밀조직인 "민주청소년동맹"(Democratic Youth League)을 만들었고, 1970년대 초에는 "캄푸치아 공산 청소년 동맹"(Communist Youth League of Kampuchea: 크메르어-솜뽀안 유와꼭[Sompoan Yuvakok])으로 개칭했다. 폴 포트는 청소년동맹 출신자들을 자신의 가장 충성스럽고 믿을만한 지지자로 생각했고, 그들을 CPK(캄푸치아 공산당) 중앙당 및 지역당의 통제력으로 사용코자 했다. 사회부장관이자 강인한 여성이었던 키우 티릿이 청소년운동의 지도를 맡았다.
많아야 12살이 조금 넘었던 이 어린 기간당원들은, 경직성을 가지고 이 정권이 극도의 포악성을 발휘하는 데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1976년부터 1978년 사이에 프놈펜에서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던 시하누크는, 자신의 저서 <전쟁과 희망>(War and Hope)을 통해 말하기를, 자신을 감시했던 어린 초병들은 가족과 떨어져 쇄뇌교육을 받았으며, 극도로 잔인한 놀이를 하도록 고무받았는데, 그 놀이 가운데는 동물을 고문하는 게임도 있었다고 한다. 전쟁 중 부모와 친척, 그리고 친구들을 잃어버린 채 선대의 불교적 가치들까지 잊어버린 이들 어린 크메르루즈 당원들은, 혁명적 테러에 대한 열정을 부끄러워할 겸연쩍음마져 상실하고 있었다.
1975년부터 1978년 사이의 의료시설은 극도로 빈약했다. 많은 의사들이 처형되거나 진료행위를 금지당했다. 당과 군의 엘리트들은 서방 의약품 및 합리적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체계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 인민들, 특히 "신 인민들"은 전통적 방식의 약초나 민간요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방법은 그다지 약효가 없는 것이었다. 일부는 아스피린이나 간단한 의약품을 구하기 위해, 배급된 쌀이나 개인적 소유물을 들고나가 물물교환을 하기도 했다.
3.3. 경 제
윤곽만 보면 "민주 캄푸치아"의 경제정책은 1958년에 농촌을 중심으로 집단화를 실시했던 중국의 급진적 정책인 "대약진운동"과 유사한 면이 있고, 또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1970년대 초반 크메르 루즈는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 "상호부조단"을 조직했다. 1973년 이후 이 조직은 "초보-단계의 조합"으로 재조직되면서, 토지 및 농기구들을 농민들로부터 차용해 조합에 대여했다. 하지만 이 때는 그 자산들이 여전히 개인의 소유물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개인 소유가 사라지고 생산물이 농민조합의 소유가 되는 "고도-단계의 조합"이 출현한 것은 1974년도이다. 그리고 1976년 초가 되면 "고도-단계의 조합"이 보다 진전되어, 취사 자체를 공동으로 하는 "공동사회"(Communities)가 출현한다. 또한 국영 농장들도 설립된다.
크메르루즈는 중국의 공산주의자들보다도 훨씬 더 나아가 경제적 자급자족의 이념을 냉혹할 정도로 추구했는데, 이는 1959년 키우 삼판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구상했던 내용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화폐는 폐지됐고, 국내의 무역과 상업은 물물교환을 통해 이뤄졌다. 사람들이 금이나 보석, 혹은 여타 소유물을 거래하긴 했지만, 깡통으로 양을 측정한 쌀이 교환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외국과의 무역은 1976년 후반과 1977년 초반에 제한적으로 부활하긴 했지만, 완전 정지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중국 본토가 가장 중요한 거래대상이었고, 홍콩의 중계무역을 통해 프랑스, 영국, 미국과 수백만 달러 수준의 거래만 있을 따름이었다. 크메르루즈의 관점에서 보면, 2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조국이 외세의 경제적 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이었다. 인민들을 군대풍의 노동대로 재조직해 배치하면서, 크메르루즈는 이 대중들이 생산력을 발휘해주길 기대했다.
그들의 경제정책에는 앙코르제국 시대의 요소도 들어 있었다. 고대 크메르 제국은 잉여 쌀 생산을 위한 광대한 관개수로 체계를 통제함으로써 부와 국력을 증진시켰던 것이다. 현대의 캄보디아 벼농사 역시 계절적 강수량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관개수로용 운하와 댐, 그리고 저수지를 축조함으로써 연중 쌀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당 지도부는 믿었던 것이다. 이 야심찬 계획으로 인해 고통받고 희생당한 사람들은 바로 "신 인민들"이었다. 크메르루즈 정권은 자급자족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농업제일" 정책을 펼쳤다고 주장했지만, 일부에서 주장하듯 그들이 "자연회귀적" 원시주의자들은 아니었다.
1070년부터 1975년 사이의 전쟁과 도시로부터의 강제소개령은 대부분의 산업을 파괴하고 무가치하게 만들었다. 오직 일부 소수의 노동자들만이 도시지역으로 돌아가 약간의 시설을 재가동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중국 지도부와 유사하게 캄보디아 공산당 역시 대중의 창의적 힘과 기술적 소양에 커다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낡은 기술을 새로운 방식으로 혁신한 농민에 대한 인쇄물도 지속적으로 발행했다. "대약진운동" 기간에 가내 용광로에 기반한 새로운 제철산업을 시도하다 실패했던 중국과 마찬가지로, 크메르루즈도 산업의 기반을 농촌으로 옮기고자 했다.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벼농사 및 관개수로 정비에만 집단화를 시도한 것이 아니라, 굴뚝산업 분야에도 동일한 노력을 시도했다는 점은 이채로운 것이다.
3.4. 정 치
1975년 4월 공산당이 승리할 무렵, 폴 포트 및 그 동맹자들은 CPK 및 정권 내 서열에서 요직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폴 포트는 1963년 2월 이래 CPK 서기장을 맡고 있었다. 또한 그의 동지들이 당 정치국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이 중앙위원회 의석의 다수를 점유하고 있었다. 키우 티릿이 청소년연맹을 관리한 것은, 폴 포트가 열광적인 젊은 기간당원들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풍부한 저수지 기능을 하는 것이었고, "투쟁의 핵이자 심지"인 그들이 전국적으로 당 중앙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데 참여함을 의미했다.
하지만 혁명운동에 대한 그의 지배력이 완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국내의 다른 지역, 특히 동부구역에서는 친-베트남계 및 크메르이싸락 출신의 관록있는 지휘관들이, 폴 포트 그룹의 자립에 대해 시기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폴 포트가 가지고 있던 혁명적 테러리즘 정책 및 베트남에 대한 적개심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때로는 반기를 들기도 했다. 당의 최고 서열에 대한 이견은 언제나 존재했다. 1970년대 내내, 특히 1975년 중반 이후 당은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심지어는 폴 포트를 전복시키기 위한 무장투쟁 시도도 있었다. 1977년과 1978년에 결정적 숙청은 극에 달해 CPK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크메르루즈 정권 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살인자들도 사망했기 때문이다. 크메르 루즈 정권 시대에 이 나라에 접근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1980년대 초 베트남의 지원 하에 새로 정권을 수립한 정부가 가구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결론은 33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연구자들은 그 숫자를 신뢰할만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있다. 현대적 연구들은 크메르루즈 시대의 집단 사체매장지로 캄보디아 전국에 걸쳐 수천 개소를 지목하고 있고, 사망자 수를 139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사망자 수에 관한 다양한 연구들은 74만명에서 300만명까지 추정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140만에서 220만명 사이로 추정한다. 아마도 그들 중 절반 정도는 처형된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절반은 기아와 질병으로 숨진 것으로 보인다.(주1)
미국 국무부 및 외무국이 예산을 지원했던 "예일대학 캄보디아 학살연구계획"(Yale Cambodian Genocide Project)에 따르면, 각각 120만명과 170만명을 사망자 수로 추정했다. 한편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사망자 수를 140만명으로 추정했고, 정치적 살인에 관한 역사가인 루돌프 룸멜(Rudolph Joseph Rummel)은 200만명을 제시했다. 크메르루즈 지도자였던 폴 포트는 80만명을 주장했는가 하면, 그의 참모였던 키우 삼판은 100만명을 제시했다.(인용각주 필요)
3.5. 민주 캄푸치아 헌법의 제정
공산당은 집권한 후 "캄푸치아 민족연합 왕국정부"(GRUNK: 1970년 수립) 체제를 해체시켰다. 이로써 1976년 1월 5일 <민주 캄푸치아 헌법>이 선포될 때까지, 캄보디아에는 어떤 형태의 정부도 존재치 않았다. 헌법 선포 3개월 후인 4월 2일, 시하누크는 국가수반직을 하야했다. 시하누크는 비록 편안한 생활을 누리긴 했지만, 프놈펜에서 불안한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베트남과의 전쟁 후반 무렵, 그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는 미국에서 "민주 캄푸치아" 문제를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한 후, 최종적으로 다시금 중국에 자리를 잡았다.
키우 삼판은 1976년의 헌법을 "어떠한 외국의 자료들도 참조하지 않았으며,.....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실로 노동자, 농민, 그리고 혁명군대를 비롯한 인민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작성한 헌법"이라고 묘사했다. 이 헌법은 정부의 형태, 경제적 목표, 사회/문화적 정책, 그리고 외교에 대한 기본원칙 정도를 정의한 16장 총 21개 조항으로 구성된 간략한 문서였다.
그 제12조를 보면 "개인의 권리와 의무"에 관해 간략한 정의가 내려져 있다. "남성과 여성은 모든 면에서 평등하다"는 부분을 제외하곤, 일반적으로 정치적 인권이라 간주되는 내용은 어떤 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문서는 "모든 노동자들"과 "모든 농민들"이 그들의 공장과 농토의 "주인"이라 선언하고 있다. "민주 캄푸치아에서 실업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언은 이 정권이 강제노동에 내몬 대중들에게 진실의 빛을 드리우는 것이었다.
민주 캄푸치아의 외교정책에 관해서는 이 문서 중 가장 긴 구절로 된 제21조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독립, 평화, 중립과 비동맹"의 관점에서 원칙들이 제시되어 있다. 이 조항은 제3세계 내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에 대한 국가적 지지를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1977년과 1978년 동안 베트남, 태국, 라오스에 대해 보여준 이 정권의 공격적 태도를 보면, "국경을 접한 모든 국가들과 밀접하고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고 한 약속이 그다지 설득력있게 와닿질 않는다.
이 헌법에는 정부조직에 관해 매우 간략한 개괄적 설명만 존재한다. 입법기관으로는 250명으로 구성된 "캄푸치아 인민대표자회의"(KPRA)가 있는데, 이 대표들은 노동자, 농민, 여타 일꾼들 및 캄푸치아 혁명군대를 대표하는 이들이었다. 농민대표에게 150석이 할당되었고, 군대에 50석, 노동자 및 여타 일꾼들에게 50석이 배정되었다. 이들 입법위원들은 5년 임기로 선출되었다. 그 최초이자 유일했던 선거는 1976년 3월 20일 시행되었고, "신 인민들"은 명백하게 참여가 금지됐다.
정부의 지역 당국 역시 KPRA가 선출했다. 이 지역 당국은 민주 캄푸치아 국내외에서 그 도를 대표하는 "도 최고회의"(state presidium)로 구성되었다. 위원들은 5년 임기였고, 그 의장이 도의 행정수반을 겸했다. 시하누크 하야 후 이 부문을 기획해온 키우 삼판이 이에 관한 전권을 가지고 일했다.
사법부는 "인민재판"으로 조직되었고, KPRA가 그 실무 지국 역할을 할 판사들을 선임했다.
이 헌법은 지방자치정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정권을 획득한 후 크메르 루즈는 과거의 도(khet)를 폐지하고, 전국을 7개의 구역으로 나눴다. 그 7개의 구역은 북부구역, 북서구역, 북동구역, 중부구역, 동부구역, 서부구역, 남서구역이다. 이 외에도 2개의 지역 단위가 더 있었는데, 1977년까지만 존속했던 특별지역 505 끄라쩨(Kracheh)와 이후로도 존속한 특별지역 106 시엠립이었다. 각 구역들은 숫자가 부여되는 "지역"(덤번[damban])으로 다시금 나뉘었다. 1967년 시하누크에 반기를 든 폭동이 일어났던 (밧덤벙을 포함하는) 북서구역의 삼로웃(Samlot) 군 지역을 둘러싼 지역은, 적절하게도 번호 "1"이 부여되었다. 이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곤 덤번의 번호는 임의적으로 부여되었다. 덤번은 다시 "스록"(Srok: 군)으로 나눠졌고, 이하 "쿰"(khum: 면), "품"(phum : 부락, 리)의 순으로 나눠졌는데, 일반적으로 품은 수백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형식은 시하누크 통치기나 "크메르공화국" 시대와 대충 유사한 것이었지만, 부락민들을 10~15가구 단위의 "끄롬"(krom: 반)으로 조직했다는 점은 차이가 될 것이다.
이 지방 행정단위들은 각 단계별로 "3인 위원회"(kanak 혹은 kena)의 지도 감독을 받았다. 고위 행정단위의 위원직은 CPK(캄푸치아 공산당) 당원들이 차지했다. 쿰과 품의 위원회의 경우, 지역의 가난한 농민이나, 아주 드물게는 "신 인민"이 참여하기도 했다. 조합(sahakor)이 쿰에 대한 관할권 유사한 역할을 행사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지역 정부로서의 책임을 지기도 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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