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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1 강 - 懺悔品- 4
善知識아 旣懺悔己하니 與善知識으로 發四弘誓願하리라 各須用心正聽하라 自心衆生無邊誓願度하며 自心煩惱無盡誓願斷하며 自性法門無量誓願學하며 自性無上佛道誓願成이니라
善知識아 大家 旣不道衆生無邊誓願度아 恁麽道는 此不是慧能의 度라 善知識의 心中衆生인 所謂邪迷心, 狂妄心, 不善心, 嫉妬心, 惡德心, 如是等心이 盡是衆生이니 各須自性自度함이 是名眞度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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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참회품에는 오분법신향에 관한이야기. 참회에 관한이야기.
사홍서원에 관한이야기. 삼귀의 제목 같은 것은 보면 아주 지극히 불교의 상식에 불과한 내용입니다. 삼신도 나오고요. 法身(법신) · 寶身(보신) ·
化身(화신) · 이렇게 삼신이지요?
삼귀의는 아시다시피 佛(불) · 法(법) · 僧(승)에 귀의 하는 것을 삼귀의라고 하고, 사홍서원은 모든 법회의식에 마지막에 하는 것이 사홍서원인데요. 그것을 우리가 흔히 하듯이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이해를 하면, 굳이 육조스님께서 당신의 투철하신 깨달음을 가지고 여기서 중언부언 그렇게 하실 까닭도 없고, 또한 우리도 그것을 참으며 들을 필요도 물론 없습니다.
늘 보아왔듯이 육조스님께서는 당신의 아주 투철한 깨달음. 그 얻은 확신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당신의 소신대로 해석을 합니다. 삼귀의가 그렇고 사홍서원이 그렇고 삼신이 그렇고, 참회라고 하는 것이 그렇고, 오분법신향 이라는 것. 오분법신향 · 참회 · 사홍서원 · 삼귀의 · 삼신. 이런 것은 정말 불교인으로서 기본상식에 불과한 것이지만, 여기서 해석한 육조스님의 해석을 보면 아주 차원 높은 해석. 또 더 이상 어떤 지견을 거기서 언급할 수 없는 그런 최상의 지견. 소견을 여기서 기본적인 불교의 용어를 통해서 설명을 하는데, 결론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우리마음에 바탕을 두고, 중생을 제도 한다든지, 불도를 이룬다든지, 또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든지 하는 것. 이런 것이 체계가 잡히고, 거기에 대한 어떤 소신이 있어야 부처님을 뭐라고 설명하든지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제대로 그 뜻을 이해하게 되지, 마음을 떠나서 우리가 달리 사홍서원이나 삼귀의나 오분법신향을 설명한다든지 이해하기로 하면, 늘 겉돌게 되는 것이고, 겉돈다는 것은, “불교와는 관계없는 이야기가 된다.” 육조스님은 그런 생각이에요.
육조스님께서 깨닫기에는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 근원이 돼서,
이 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걸림이 되고, 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한 마음으로부터 소멸하고,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 성불이니 중생제도니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우리 한 마음에 바탕을 두고 하는 것이다.
한 마음 떠나서 달리 무엇이 또 존재하는가? 아무리 성스러운 불교적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시종일관된 사상이고, 그 宗旨(종지)가 너무나도 뚜렷하지요.
혼란스럽게 불교를 경전을 통해서 보거나 아니면 교리서적을 통해서 보면 상당히 혼란스럽고, 어떤 때는 바깥을 쫓아가기가 일쑤에요. 우리마음밖에 따로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데요. 그런 뜻에서 보면,
육조스님은 늘 그 근본! 근본을 잃지 아니하고 불교를 이해하도록, 항상 모든 것의 그 근본을 잃지 아니한 상태에서, 온갖 것을 이해를 해야 그것이 제대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취지지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느 외국으로 여행을 가서, 열 나라 스무 나라를 돌아다녀도 한국인이라는 그런 정신! 그런 것을 늘 가지고 남의 나라를 보듯이, 그랬을 때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고, 또 우리가 정신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된다. 이렇게 설명하면 좀 비슷할까요? 이 육조스님은 어쨌든 모든 것의 근본은 마음에 있고, 중생제도다 뭐다 하는 것을 전부 이 마음이 하는 것으로 알아야지 그 밖에 달리 아는 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善知識아 旣懺悔己(기참회이)어니→ 이미 참회해 마쳤으니,
與善知識(여선지식)으로 發四弘誓願(발사홍서원)하리라→ 선지식으로 더불어 4가지 큰 서원을 발하겠다. . “내겠다.” 이런 말이지요. 큰 서원.
이 4가지 서원은 천수경에도 나오고, 불교인으로서 또는 좀 더 바람직한 인생을 살고자하는 그런 사람으로서는 이런 서원이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세속적인 모든 꿈과 뜻이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가 정상적으로 불교에 제대로 귀의를 하게 된다면, 이제 세상사 모두 졸업하고, 그리고도 또 최후의 큰 소원. 정말 진정한 제대로 된 어떤 소원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성스러운 소원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지요. “성스러운 소원!” 그것을 불교 안에 여러 가지, 여래10대 발원이 있고, 또 아미타불의 48대원이 있고, 경전마다 원을 이야기하고,
또 우리가 儀式(의식)을 집행할 때도 보면, 끝에는 꼭 무슨 축원. 또는 발원이라고 하는 이런 것이 있어서 우리들의 어떤 작은, 개인의 소박한 소원에서부터 큰 원대한 보살이나 부처가 꿈꿀 수 있는 원대한 원을 우리는 쉽게 이야기를 하지요. 궁극적으로 큰 사람이 되려면, 다시 말해서 불보살 정도의 경지를 생각한다면 세상의 소원은 이제 다 졸업하고, 최후의 아주 가장 성스러운 소원이 진정한 소원으로 남아 있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四弘誓願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弘誓예요. “큰 소원이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各須用心正聽(각수용심정청)하라→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써서 바로 들으라.
自心衆生無邊誓願度(자심중생무변서원도)하며→ 본래 중생무변서원도지요. 그런데 여긴 自心 이라는 말을 앞에다 덧붙였어요. “중생” “중생” 해봐야 자기마음 중생 밖에 달리 또 뭐가 있겠는가? 밖에 있는 중생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지요.
설사 밖에 있는 중생이라 하더라도 그것도 또 따져보면 내 마음으로부터 일으킨 바깥중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깥중생이 바깥중생이 아니라 내 마음이 중생입니다. 또 그 이전에 내 자신이 아직 중생인 것은 어떻허냐 이것이다. 그래서 ‘自心衆生’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밖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어쨌든 우리가 중생을 제도해야 된다고 할 때는 이것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것임에 틀림없어요.
우리가 또 순수하게 해석을 하면, 내 마음의 중생. 우리들 마음의 중생. 그것도 끝이 없다 이겁니다. 우리가 한두 가지 중생심을 제거 한다고 중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이 중생 제도하고 나면 저 중생 있고, 저 중생 제도하고 나면 이 중생 있고, 내 마음속에서도 사실은 끝없는 중생이에요.
그것참. 이 無明(무명)이라고 하는 것이 끝없는 중생인데, 그런 “끝없다.” 하더라도, ‘自心衆生이 끝이 없다.’하더라도, 맹세코 제도하자.
自心煩惱無盡誓願斷(자심번뇌무진서원단)이라→ “번뇌” “번뇌” 해도 밖에서 나온 것이 아니지요. 번뇌야말로 정말 마음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自心煩惱”예요. 다 함이 없지요. 어릴 때는 이런 번뇌가 참 골치 아팠는데 그것이 어지간히 쉬어졌는가 하면 또 그 사정에는 그 사정에 적당한 번뇌가 일어나고, 이러한 연령에 알맞은 번뇌가 일어나고, 끝이 없어요. 끝없는 번뇌가 일어나는데, “자심의 번뇌가 다 함이 없다.” 하더라도,
맹세코 끊기를 원하라. 無盡誓願斷.
自性法門無量誓願學(자성법문무량서원학)이라→ 중생이 그렇고 번뇌가 그렇듯이, 법문이라고 하는 것도, 육조스님이 큰 법문을 하신다. 부처님이 이런 저런 법문을 하신다. 自性속에 있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그런 법문. 그 법문의 한량없음. 그 한량없음하고는 다른 것하고 비교가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문은 결국은 자성을 설명하는 것이고요.
또 그 많은 8만4천 법문이 자성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는 것이고, 자성에서 나온 법문이면서 결국 자성을 설명하는 법문이에요.
그것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8만4천 법문이라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제일 단순하지요. 왜냐? 어째서 단순하냐? 다른 무슨 나무를 설명하고 어떤 과학물질을 설명하고 무슨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하나 설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성에서. 마음에서 출발해서 마음을 설명하다가 마치는 것이 불교라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그것도 ‘自性法門이 無量’이예요.
간단하지가 않다고요. 곧 이 세계하고 그대로 똑 같아요.
사실은 이 세계가 더 넓지만 이 마음의 세계에다가 견주어 본다면, 큰 바다에 물거품 하나와 같은 것이 이 세계이고, 마음의 넓이는 넓은 바다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自性法門 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한량이 없는 것이지요.
自性法門無量이라. 그렇게 무량하지만 맹세코 내가 배우기를 원하나이다. 이것 뭐 하나하나 배우는 것이 아니겠지요? 하나하나 배워서 언제 다 배우겠어요? 이것 다 一擧(일거)에 되는 수가 있어요.
自心衆生誓願度도 일거에 되는 수가 있고, 自心煩惱無盡 하더라도 맹세코 끊는다고 하는 이것이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무진하고 무변하고 무량하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된다 이것이지요. 왜냐? 마음의 도리니까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어떤 그 나름의 우리 이론. 또 거기에 대한 우리들의 확신. 이것이 있을 때요?
우리불자들은 뭔가 남이 갖지 못하는 그런 자신감이 생겨요. 자신감이 생긴다고요. 세속의 어떤 신분의 사람도 "에개개" 하고 시원찮게 저 눈 밑으로 보여지는 그런 그 우월감 같은 것. 뭐 꼭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또 어느 기간 동안은 필요한 것이기도 하거든요.
그런 우월감 같은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도리. 여기에 대한 우리들의 어떤 확신이 있을 때, 그렇습니다.
自性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게 뭡니까?
우리 마음에서부터 나온 것이지요. 팔만대장경을 일거에, 그렇게 우리가 자신 있게 정리할 수가 있다면, 그것 대단한 것이지요. 육조스님 법문 듣지 못한 사람은 이거 감히 사실은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분명히 육조스님은 ‘自性法門이 無量하다.’고 했으니까요.
부처님도 말이 많은 것을 스스로 좀 미안 했던지 나뭇잎을 훑어가지고 제자들에게
“이 손에 있는 나뭇잎이 얼마나 되느냐?”
“얼마 됩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럼 이 손에 있는 나뭇잎과 저 숲에 아직도 달려있는 나뭇잎과
비교를 한다면 어떻겠는가?”
“아니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손에 있는 나뭇잎이야 그거 세어본들 몇 개나 되겠습니까? 기껏해야 10~20쪽에 불과한데, 어찌 저 숲에 달려있는 그 많고 많은 나뭇잎을 손에 있는 나뭇잎과 비교한단 말씀입니까?”
“그래? 내가 지금까지 한 법문이 하지 못한 법문과 비교를 할 때 이와 같다. 손에 있는 나뭇잎은 내가 그동안 설한 법문의 量(양)이라면, 내가 아직 하지 못한 법문의 양은 저 숲에 달려있는 저 무수한 나뭇잎과 같다.” 이런 표현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自性法門無量 이지요. 이것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을 설명하면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自性法門을 두고 부처님이 생각하니 아무리 설명하고 설명해도 눈 어두운 사람에게는 이것이 도대체가 성에 차지 않거든요.
제대로 설명된 것이 아닙니다. 한량이 없어요. 그렇게 설명하기로 하면... 그래 뭐 깨달아야지 깨닫지 않고 이것을 설명하기로 하니까 이것이 끝이 있나요?
그래서 ‘自性法門은 無量하다.’ 그러나 “맹세코 배우기를 원한다.” 했지만, 이 배우는 일도 하루아침에 되는 도리가 있는 것이 또한 불교입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도리가...
無量하다고 하니까,
無邊하다고 하니까,
無盡하다고 하니까, 오랜 세월을 경과해야 되는 것으로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겠지요?
自性無上佛道誓願成(자성무상불도서원성)이라→ 무상불도. 최상의 불도. 깨달음의 도이지요. 최상의 깨달음의 도! 이것도 자성으로부터 가능한 것이지 자성 빼고 달리. 누가 뭐 부처님이 無上佛道를 이루었다. 그거는 나 하고 관계없는 겁니다. 또 설사 부처님이 無上佛道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내 자성 안에 있는 것이고요. 내 자성이 이해할 만치 이해하는 것이지, 내 자성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그것 이외에는 그것은 무효입니다.
아무상관이 없는 거라고요.
그리고 이건 궁극적으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우리 자성 속에 있는 최상의 깨달음의 길이 無上佛道입니다. 自性無上佛道! 보통 無上佛道誓願成. 이렇게 하는데, 육조스님이 생각하기에는 영 마음에 안 들지요.
그래서 앞에 두 글자를 붙인 겁니다. 自心이다. 自性이다. 거기에 특별한 차이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자심이다. 자성이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요.
영 시원치 않다 이겁니다. 이렇게 자기 확신이 있다고 하는 것. 이것 참 부러운 것이지요.
그 오랜 세월동안 모두가 衆生無邊誓願度 했는데, 육조스님이 뜬금없이 나타나서 自心衆生誓願度, 自性無上佛道誓願成. 그렇게 글자 두 자를 딱 붙였는데 기가 막히거든요. 설명 다 해버렸어요. 그냥 無上佛道誓願成.
이렇게 하면, 이 설명이 도대체 어디 가서 떨어질까요?
뭐 제대로 설명한 사람 같으면, 불교의 이치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마음에다 근거를 두고 설명을 하겠지만,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정리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팔만대장경을 설명할 거란 말이에요. 법문이라고 하는 것도... ‘法門無量’ 하면, ‘아이고 팔만대장경의 한량없는 법문.’
그리되면 이것은 잘못돼 버리는 것이지요. 그만 빗나가 버리는 것이지요. 본래의 취지하고는 거리가 멀어져 버리는 것이지요.
佛道無上. 無上佛道誓願成 하더라도, 아~~! ‘부처님이 깨달으신 이 도는 끝없이 높고 높다.’고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고요. 그러면 잘못 가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다 잘못 가리라는 그런 예상을 하지는 않지만, 육조스님께서는 이렇게 글자 두자씩 붙여 버리니까 그냥 잘못 가기가 없는 거예요.
그냥 똑 떨어지는 거예요.
우리 마음의 위대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만치 안다하더라도 그것은 만분의 일도 제대로 아는 것이 못 되고, 이렇게 깨달으신 분들이 그 마음의 저 뿌리까지 확 뒤집어서 밝혀낸, 그런 분들의 안목에서 볼 때 우리마음의 그 깊이와 그 넓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겁니다.
그래서 無上이다. 無邊이다. 無量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善知識아 大家 旣不道衆生無邊誓願度(대가 기부도중생무변서원도)아→ 大家 = 대중들이 이미 중생무변서원도 라고 不道. 말 하지 않던가?
대개 그렇게 말하잖아요? 衆生無邊誓願度. 煩惱無盡誓願斷이라고 말 하지 않던가?
恁麽道(임마도)는 此不是慧能(차불시혜능)의 度(도)라→ 이것은 혜능이 제도하는 衆生無邊誓願度. 하는 그 도가 아니다 이겁니다.
일반적으로 衆生無邊誓願度라고 흔히 말 하지 않더냐?
그런 식 제도는 혜능이 = 내가 = 육조가 말 하는 제도는 아니다.
말하자면 그럼 나는 뭐냐? 선지식의 心中衆生(심중중생)인→ 마음속에 있는 중생인 所謂邪迷心(소위사미심)→ 삿되고 미혹한 마음. 또
狂妄心(광망심)→ 거짓되고 뒤바뀐 마음. 광자는 미칠 광자니까 뒤바뀐 것이지요.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 머리 없다.’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 불교경전에서 미친 사람의 대표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친것도 경우가 여러 가지겠지요만, 경전에 나오는 미친 사람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 머리 좀 찾아 달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을 미친 사람이라고, 그리고 망령된 그런 마음., 그리고
不善心(불선심)→ 착하지 못한 마음.
嫉妬心(질투심). 惡德心(악덕심) 如是等心(여시등심)이→ 이러한 마음이
盡是衆生(진시중생)이다→ 이것이 모두가 중생들이 하는, “중생들의 놀음이다.”이겁니다.
“중생들의 짓거리다.”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될 리가 없는 것이지요. 삿되고 미혹한 마음이 있을 수가 없고, 뒤바뀌고 망령된 마음.
불선심. 질투심. 악덕심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음이 모두가 중생이니,
各須自性自度(각수자성자도)함이→ 각각 모름지기 자기 자성을 스스로 제도하는 것. 자기의 성품자리를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 이것이 참으로 제도하는 것이고,
是名眞度(시명진도)다→ ‘참다운 제도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뭘 설법하고 뭘 어디 가서 봉사하고, 뭐해서 누구를 “제도한다.”고 하는 것이 참 부끄러운 짓이고 웃기는 일이지요.
‘自性自度가 진짜 제도다.’ 했잖아요. 自性自度! 자기 자성을 스스로 제도하는 것. 이 보다 더 우선하는 일이 어디 있으며, 이 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느냐 이겁니다. 제일 우선하는 일이고 제일 급한 일입니다.
임제록에서 임제스님도 가끔 법문하시다가 급한 일. 切急(절급)한 일.
아주 절실하고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절실하고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경고를 합니다.
참으로 급하고 급한 일이 무엇인가? 또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급한 일. 중요한 일. 그런 것을 거론하시면서, 결국은 거기도 내용은
自性自度! 자기 마음을 스스로 제도하는 것.
이것은 남이 제도 못해요. 부처님도 못하고 어떤 조사스님도 못하고,
부모도 뭐 자식마음 제도 못하고 자식도 부모마음 제도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마음 자기가 제도할 수밖에 없어요. 自性自度!
이것은 육조스님이 잘 쓰시는 말인데 참 유명한 말이지요.
自性은 自度해야 돼요. 자기마음 자기가 제도해야 돼요. 아무도 이것은 제도해줄 사람이 없어요. 이것이 참다운 제도입니다. 봉사활동. 좋지요. 다 좋고 또 내가 차라리 성불을 한 생 늦추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중생을 어떻게 하겠다. 그런 보살의 원력도 경전에 보면 종종 보여요. 종종 보이는데,
이 말 앞에는 사실은 꼼짝을 못하지요.
自性自度하는 것이 참, 진정한 제도다.
저도 간혹, 간혹이 아니라 늘 갈등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예요.
강원에있다가 선방에 있다가, 선방에 있다가 강원에있다가, 또 강원에서 뭐 이렇게 가르치다가 또 선방에 갔다가, 그러다가 또 나와서 좀 일해 달라면 또 나와서 가르치다가, 이런 세월을 지금도 계속 이래저래 반복하고 있는데요. 우선 이렇게 가르치고 법문하고, 강의하고 학인들도 가르치고 하는 것. 다 좋은 일이긴 해요.
좋은 일이긴 하면서도, 이런 말을 딱 이렇게 만났을 때는 그만 ‘내가 뭐 하는 짓인가?’싶기도 하고요. 아주 그 갈등이 아주 보통이 아니라고요.
정말 이것이 중요하고 이것이 다급한 일이고, 이것이 지금 나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이고요. 이런 말 하면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이럴 때 상당히 돌아봐지고요. 그래도 요즘은 그래도 참선하는 시간이 많아지더라고요.
이제 나이가 드니까 뭐가 급한 생각이 드는지 어쩐지 아무튼 옛날에 선방에서 본격적으로 할 때 하고는 또 다른 깊이. 또 그 깊이는 다르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고요. 지금 참선을 하면 본격적으로 제대로 할 것 같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제대로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최종적으로 나도 선방이나 조그맣게 해서 참선이나 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해요.
그거는 누가 같이 참선할 사람이 있으면 그냥 같이 참선만 하면 되는 겁니다. 힘들게 말할 필요도 없는 거고요. 참선하는 방법만 이야기해주고 참선이 급하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하면 되는 거니까요. 그걸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거든요.
서양에서도 불교가 상당히 빛을 보는 것이 禪佛敎(선불교). 선불교가 빛을 보고, 그 나름대로의 자기체험. 그것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우리나라도 이 선이 아니면 불교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선에 젖어들게 하는 아주 좋은 경고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自性自度하는 것이 是名眞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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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_()_()_()_
自性自度하는 것이 是名眞度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 참 진정한 제도다. ...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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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性自度(자성자도) 하는 것이 是名眞度(시명진도)다.......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_()()()_
自性法門無量....대원성님 수고하셨습니다.._()()()_
自性自度 하는 것이 是名眞度 다...자기 자성을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 참다운 제도다...고맙습니다. _()()()_
우리마음에 바탕을 둔 四弘誓願을 발하라! 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自性自度(자성자도) 하는 것이 是名眞度(시명진도)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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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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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性法門無量....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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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 올립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 근원이 돼서, 이 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걸림이 되고, 이 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한 마음으로부터 소멸하고,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 성불이니 중생제도니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우리 한 마음에 바탕을 두고 하는 것이다. 한 마음 떠나서 달리 무엇이 또 존재하는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自性自度 하는것이 是名眞度 다!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自性自度 , 是名眞度.....마하 무비스님 ! 고맙습니다.
自心衆生無邊誓願度 自心煩惱無盡誓願斷 自性法門無量誓願學 自性無上佛道誓願成
自性自度 是名眞度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自性自度 是名眞度 ... _()_
감사합니다
自性自度 ...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自心衆生無邊誓願度 自性自度 고맙습니다. _()()()_
自性無上佛道誓願成 _()_ _()_ _()_
自性自度(자성자도) 하는 것이 是名眞度(시명진도)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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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摩訶般若波羅蜜 摩訶般若波羅蜜 摩訶般若波羅蜜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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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