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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어도와 고기잡이
이 장에서는 세어도와 세어도 사람들을 소개하였다. 이것은 어부의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배경과 맥락이 될 것이다. 먼저 현지 연구의 대상 지역인 세어도에 들어가는 과정과 세어도, 세어도 사람들을 소개한다. 세어도를 들어가는 과정은 연구자가 섬 세어도에 배를 타고 들어가는 과정에서부터 관찰한 내용과 셰어도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률 바탕으로 구성하였다. 내러티브로 구성된 인용문 중에서 괄호( )안의 이야기는 연구자의 질문이나 응수이다. 제시된 스토리는 세어도의 주민이자 어부인 정진수와 김효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하였으며 각 내러티브의 처음에 누구의 이야기인지 표시하였다.
4.1. 세어도 들어가기
세어도는 최근 약 십 년 동안 신문 등 매체에 꾸준히 기사화되어 왔다. 그 이유는 첫째, 서해안의 간척사업과 섬과 육지간 다리 건설 등으로 농어 어획량과 바지락 채취량이 급격하게 줄어가고 있다는 것(동아일보, 2000. 7. 16), 둘째, 세어도 등 인근 섬 지역의 갯벌이 서해안 개발과 함께 훼손되고 있다는 것(동아일보, 2001. 6. 22), 셋째, 세어도에 ‘어촌체험 관광마을 조성사업’을 시행하겠다는 것(동아일보, 2003. 11. 19), 넷째, 이 사업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자가발전기툴 사용하고 있던 세어도에 해저케이블을 통해 전기를 공급한다는 것.(2003년 당시에는 2005년까지 전기를 공급할 계획이었지만<동아일보. 2003. l l. 19>. 실제로 공사가 완료되고 전기가 공급된 것읒 2007변 3월 12일이다) 그리고 다섯째는 ‘어촌체험 관광마을 조성사업’의 계획이 확대되고 연기될 때마다 새로이 발표되는 내용 등이다.(2003년 당시에는 약 20억 원 예산으로 2008년까지 조성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동아일보, 2003. 11. l9>. 이것은 2004년 인천시 서구에서 수행한 연구 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예산이 약 23억 원, 계획기간은 2005년부터 2015년까지이다. 2007년 3월 7일 동아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예산은 약 74억 원으로 증가하는 등 개발사업의 규모와 기간이 확대, 연장되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이 세어도는 환경오염, 저개발 지역, 개발 대상 지역 등을 주제로 외부에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세어도 사람들, 특히 토박이 어부는 세어도와 주변 환경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것이 이 연구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주요 내용이다.(세어도는 육지와 매우 가까운 섬인데도 불구하고 사회기반시설이 매우 열악하다. 셰어도의 경우에는 섬이 육지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이익울 받은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육지의 도시가 가깝기 때문에 학교가 폐교되어도(1980년대 중반) 유학을 가면 되고, 생업이 힘들어지면 모두들 도시로 쉽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육지로부터 아주 멀었다면 학교나 각종 기반시설이 더 잘 갖추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어도는 육지와 가깝고도 먼 곳이다. 세어도에서는 거의 어느 곳에서든 육지를 바라볼 수 있다. 밤이 되면 인천과 김포의 불빛이 아주 가까이 보인다. 송전시설이 들어오기 전에 세어도 사람들이 도시의 불빛을 보면서 상당한 박탈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도시와 육지가 시각적으로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모두들 섬을 쉽게 떠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사람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이유로 착용할 수도 있다.)
세어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섬 사람들과 미리 연락이 되어야 했다. 섬에 들어가는 배는 인천시 서구에서 지원하는 행정선(서원호)이 유일했고, 하루에 한 번만 섬과 인천 사이를 왕복하기 때문이다. 서원호롤 운전하는 선장과 선원은 세어도 주민으로, 매일의 물때에 따라 섬과 인천 사이를 왕복한다. 배 시간은 매달, 매일 다르기 때문에 한 달 전에 선장이 며리 작성하여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배포한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달 1일부터 31일까지 세어도와 반석부투에서의 출발시간이 다르다. 또한 한 달에 두세 번은 아침에 세어도에서 배가 떠나 저녁에 세어도로 들어온다(2007년 5월의 경우에는 9일, 23일, 3l일). 인천에 볼일이 있어 나가는 세어도 주민들이 하루 안에 일을 보고 그날 섬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며, 특히 세어도에는 고령자가 많고 이들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인천시 서구청 공무원과 세어도 통장, 서원효의 선장 등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l 세어도로 들어가는 배를 탈 수 있었다. 서원호는 인천시 동구 만석동에 있는 만석부두에서 세어도로 매일 한차례 출발한다. 세어도는 서구에 속하지만, 세어도에서 가까운 서구에 사용가능한 부두가 없어 섬에서 먼 동구의 만석부두를 이용한다. 세어도는 실제로·육지와의 직선거리가 약 1 킬로미터 정도이기 때문에 칙선 뱃길을 이용하면 약 5분 이내에 육지로 갈 수 있지만, 동구의 부두에서는 편도만 40분이 걸린다. 세어도에서 가까운 육지에는 군대 시설이 입지해 있어 그 동안 부두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으나, 어촌체험 관광마을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섬에서 가까·운 곳에 부두를 새로 만들기 위해 논의 중이다.
약 40분 걸려 도착한 세어도는 조용한 작은 마을이었다.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길에서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은 ‘누구냐’, ‘왜 왔느냐., ‘이 섬에 무슨 연구할 게 있어서 왔냐’ 등의 질문하면서 연구자의 출현에 의문과 놀라움을 드러내었다. 마을에는 외지인의 출입이 거의 없고, 당시 이 섬은 각종개발사업과 관련하여 지가가 크게 오르면서 부동산에 관심 있는 외부인들의 접촉이 많은 시기였기 때문에 연구자를 경계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연구자에 대해서도 혹시 땅을 물색하러 온 사람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였지만, 통장과 선장을 통해 연구자의 방문목적이 알려지면서 이러한 의심은 곧 사라질 수 있었다.
세어도의 선창은 갯벌 끝자락에 만들어져 있고, 최근에 설치된 송전시설이 세워져 있다.
선창 앞의 작은 바위섬(키도)은 연구 초기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셰어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섬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셰어도 앞바다에서 농어잡이를 할 때 배의 위치나 물때를 알아보는 데 있어서 이 섬은 하나의 지표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연구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이다. 사람들과의 이야기와 관찰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선창에서 가까운 곳에 모여서 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세어도를 ‘시루’라고 부르고, 섬의 왼쪽 끝에 있는 작은 섬을 ‘작은시루’라고 부른다.
이곳 작은시루에도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고 좋은 물도 있지만 선창에서 멀기 때문에 모두들 선창 가까운 쪽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선창 옆에는 60년대에 채석장을 하던 자리가 있고, 마을 뒤쪽의 갯벌에서 주로 바지락, 문어, 미끼로 사용하는 작은 새우 등을 잡는다. 세어도의 인구는 2012년 12월 현재 27명이고, 세어도의 어선은 총 12척으로, 1톤 미만의 소형 선박은 6척, 1~5톤 선박은 4척, 5~10톤 선박은 2척이다. 세어도 주변의 바다에서 나는 어류로는 숭어, 농어, 망둥어, 우럭, 가무락 등이며, 조개류로는 바지락, 소라, 맛 등이 있다(인천시 서구, 2004). 그러나 이들 중 판매를 위한 고기잡이 대상이 되는 것은 농어이고, 나머지 어류나 조개류는 자급용이다. 큰 선박은 마을 주민들 중 장년층이 주로 운영하며 먼 바다로 나가 새우잡이 등을 한다. 60대 이상의 주민은 작은 1톤급의 배롤 타고 세어도 앞바다에서 농어잡이를 주로 한다.
※ 세어도가 ·시루’, 왼쪽 위의 작은 섬이 ‘작은 시루’이다. 세어도 앞바다를 빠르다는 의미로 ‘세청개’라고 부른다. 마을은 선창 근처에만 조성되어 있고, 섬 곳곳에 빈집이 남아 있다. 마을 뒤쪽의 갯벌에서 바지락. 미끼로 사용되는 작은 새우 등을 주로 잡는다. 농어잡이는 키도 주변의 바다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고기잡이를 하지 않을 때에는 섬의 밭에서 자급을 위해 약간의 농작물을 키운다. 세어도의
숲에는 고라니 등 동물들이 서식하는데, 이들이 밭에 들어와 직물을 훼손하기 때문에 밭 주변에 그물을 쳐 놓기도 한다.
세어도 사람들은 매달 조금 때 섬 주변의 바다에서 농어잡이를 한다. 농어잡이는 낚시 대
없이, 낚시줄의 끝에 바늘과 낚싯봉 닿고 미끼 (새우)를 뀌어 낚시줄을 물 속으로 늘어뜨리
고, 고기가 미끼를 물면 수면 바로 아래까지 끌어올린 후 체로 떠올려 잡는다. 미끼 새우는 섬 주변 갯벌의 갯고랑에서 잡아서 사용한다. 매달 조금 때가 되면 배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농어잡이를 나간다. 배가 없거나 고기잡이를 나갈 수 없는 사람들 충에는 마을 정자에 모여 앉아 농어잡이를 구경하기도 한다.. 이들은 농어잡이를 구경하면서 누구네 배에서 농어를 잡았는지 알아맞히기도 하고, 자신들의 농어잡이 하던 경험들을 나누기도 한다.
농어잡이철이면 동네 사람들은 정자에 모여구경을 한다. 고기잡이철 동안 마을의 활기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세어도를 다섯 차례 방문하면서 만난 마을 사람은 모두 20명 이다. 세어도 사람들은 농어잡이가 없는 계절이거나 농어 낚시가 안 되는 사리 때가 되면 인천 등 도시로 나가 다른 생 업을 하거나 가족들의 집에서 지내기도 하고 인천에 집이 하나 더 있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지내기도 하기 때문에 세어도 주민 모두를 만나지는 못했다. 세어도 사람들은 대부분 평소에는 밭작물을 돌보고 물때가 되면 고기잡이르 하고 조개를 캔다. 세어도에서 만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앞으로의 연구진행과 심층 면담시 나눌 이야기의 주제를 결정하려고 노력하였다.
마을 사랍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어도 사람들의 주요 생업은 고기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심층 면담의 방향을 고기잡이로 설정하였다. 고기장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고기를 잡는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역 사람들의 삶과 세어도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기잡이라는 주제는 사람들의 삶과 지역을 이해하는 간접적인 통로로 활용되었다.
세어도 사람들의 주요한 생업이 고기잡이라는 것은 섬 지역애서 당연한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제가 고기잡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다. 세어도의 통장은 당시까지 약 10년 동안 해온 통장 일과 고기잡이를 중심으로 한 마을 개발 사업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서원효의 선장은 세어도를 고향으로 하고 있지만 청년 시절에는 주로 도시에서 생활을 하였으며 약 20년 전에 점으로 다시 들어와 정착하여 살고 있다. 선장은 현재 마을 통장이 일을 보기 전인 약 10년 전에 통장을 하였으며, 그 당시의 일들과 마을 역사에 대해 소개해주었다. 바지락 채취를 생업으로 살아온 한 마을 사람은 출산 후 바지락을 한 가득 잡아 머리에 이고 오던 중에 갯벌에 발이 빼져 고생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특히 마을의 청장년층의 사람들은 주변 지역의 사람들이 셰어도 앞바다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아가는 것에 대해 대단한 우려를 표시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어촌체험 관광마을 조성사업’이 잘 되어서 마을 사람들의 경제 수준도 높아지고 마을에 각종 기반 시설이 조성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동시에 사업으로 인해 섬의 지가가 오르고, 외지 사람들이 섬에 들어와 섬의 환경을 훼손할까 염려하기도 한다. 2007년 여름에는 실제로 사업의 일환으로 관광안내소가 건설되고 있는 중이었고, 그해 3월에는 마을에 전기선이 해저케이블을 이용해 연결되었다 인천까지는 대용량 발전기룰 이용하여 전기를 사용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은 그동안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떼에 있어서 불편이 많았음을 토로하였다.
고기잡이와 세어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 고민하면서 세어도의 토박이이고 거주기간이 가장 긴 주민을 찾고자 시도하던 중에, 세어도를 고향으로 하고 세어도에서 평생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아온 세어도 토박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정진수(가명, 남, 2008년 현재 70세)와 김호준(가명, 남, 2008년 현재 66세)은 세어도에서 태어났으며 청년 시절 약 2년과 군대 복무기간 3년을 제외하고는 세어도에서 살아왔다. 두 사람을 주요한 면담 대상으로 삼고 심층 면담을 수행하였으며, 이듥과의 면담에서 이야기의 주제는 잘아온 이야기, 동네 이야기, 고기잡이 이야기 등 이었다. 농어잡이는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농어가 있는 곳을 아는가, 누구한테 배웠는가 등으로부터 면담을 시작하였으며, 동네 이야기, 면담 대상자의 삶 이야기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어부 정진수와 김호준이 살아온 이야기와 세어도 이야기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구성하였다.
4.2. 어부 정진수의 이야기
(1) 살아온 얘기를 어떻게 다 하나
살아온 얘기 참 거 뭐 옛날 얘기 하자면 길지. 아이고 그런 얘기를 어떻게 다 하나 허허허. 우리 태어날 때야 내가 39년도에 태어나서, 50년대 60년대까지 먹고 사는 게 어렵기 때문에 어떤 결 몰라.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까. 뭐 옛날엔 식솔도 많잖아요. 한 가족이 보통 열 명 이상 초가집에서 그냥 살아가지고 살다보니까 먹을 거 귀하고 농사도 그렇고 사다 먹
는 것도 그렇고. 일 년 바다에서 벌어가지고 일 년을 못 먹어. 예를 들어서 봄에 한 삼월 달부터 바다에 나가서 시월, 십일월 벌어도 한 해롤 못 먹고 사는 거야· 겨울 지나고 음력 정월 되면 몇 개월 동안 참 힘들어요, 먹고 살기가·돈을 벌어야 되는데 못 벌지. 뭐 열 식구 쌀 한 가마니 가지고 그렇게 살다가. 참 고생 많이 했지, 허허..
내가 (초동학교)4학년 때 육이오(전쟁)를 만났는데. 이십 살까지 어렵게 살았어. 내가 22살(l960년)에 군대를 갔으니까. 그때만 해도 군대 무서웠지·5.16혁명 직후로 나갔으니까. 그 일 일어나고 나서 그해 11월에 나갔지·그래도 뭐 훈련받기가 w금보다야 힘들었지만 뭐 젊었으니까 그거 못 받겠나. 군대 생활 한 3년 고생하다가 나와 가지고, 그때부터 사람이 좀 영업하는 것도 그렇고 좀 살기가 좋아지는 거야. 그때부터 살기가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는 거야. 내가 64년도에 제대 해가지고 2년 내가 준치잽이를 했나? 2년인가 3년인가 하다가 그러고 끝났어요. 그러고는 인제 농어낚시. 이제 그것만 하는 거지. 민어는 군대 가기 전 잡에 잡고. 갔다 오니까 없다 그러더라고. 군대 가기 전에는 많이 잡았지. 참 민어 괭장하지.
내가 스물 여섯 살에 장가갔나. 허허 그러고서는 인제 애들 생기고 나면서 점점 영업하는 것도 그전보다 조금 달라지고 좀 낫고. 이제 그럭저럭 먹고 살려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
지. 죽는 일 아니 면은 다 했으니까. 뭐 이십대 후반부터 한 사십대까진 고생 많이 했어요. 살기가 좀 나아지면서 애들 육지에다 공부시키고 학교 보내고, 딸들은 고등학교까지 밖에 못 보냈어. 아들은 대학까지 나오고·딸들은 시집보대고. 내 딸 셋 아들 하난데. 딸들은 고등학교 나와서 갈 데로 다 갔고, 아들은 인천에 잘고 있어요.
이렇게 살아오는 건데. 역사라는 게 뭐. 내가 거기(세어도)에서 6대, 7대를 살았는데 그전에는 내가 모르지. 우리 아버님이 1901 년 생이신데 여든 여덟에 돌아가시고 장수하셨지.
어머니는 60대에 돌아가시고. 우리 열 한 식구가 살았어. 8남매야. 장가 들면 또 식구가 늘잖아. 내가 다섯 째니까. 형제로 다섯 째고, 누나가 있어가지고 여섯 째지. 내 밑으로 둘이 있었고. 먹고 살기가 힘들였어요. 아버님은 고생을 많이 하셨지. 다들 굶고. 하루 세 떼라는 걸 못 먹으니까. 아침 먹고 나면은 그냥 일하고, 일하다가 또 그냥 점심은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거니까.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더 말할 거 없지. 어른들이야. 그래가지고 사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겨울이면 동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되고. 낮에는 하루 종일 나가서 동산에서 나무하고, 저녁에 들어오시면 저녁이라고 한 숟갈 드시고, 죽도 없어서 못 먹을 때니까. 그 동네가 그랬어요. 옛날에. 그때는 다 힘들었어요. 거기 뿐이 아니라, 다 그렇게 살아왔어. 농촌에서도 옛날에 지금처럼 농사지었나 못 지었지. 그 사람들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 그래서 보릿고개라고 하잖아. 보리 심어 놓으면은 그게 빨리 나야 먹는데 그게 5월 돼야 나잖아. 그 보릿고개가 힘들다고 그러지. 보리가 누렇게 익으면은 말려다가 그걸 털어서 죽쒀 먹고 밥 해먹고 혀허허.
어떡하면 남들보다 더 벌어서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나. 먹고 사는 거 그거니까. 벌 거 없어. 다른 뭐 재주가 있나. 에휴. 나도 거기서 먹고 사는 제 힘드니 에라 나도 육지 나가서 육지 생활 한번 해보자 나와 가지고 한 2년 육지 생활을 해 보고. (그게 언제인가요?) 군대 가기 전에. (인천에 계셨어요?) 어. 인천에. 나두 그때 처음에 나와서 서울 가서 있다가 거기(인천) 있다가 대구 가서 있다가. 이 자체가 큰 공장이라든가 이런 거 짓는 데 쫓아다녔기 때문에. 기술은 없었고. 그러다가 에라 나도 인제 집에 가 있다가 군대 간다 엄마. 그러고. 군대나 갔다 와서. 형님들이 다 또 떠나요. 어머님 아버님 계신데, 두고 형님들은 따로 살러 다 나가니까, 어머님 아버님을 누가 모실 사람이 있나. 없잖아. 같이 살 사람이 없어요. 결국은 내가 모시고 살았지. (형님들께선 주로 어디서 사세요?) 다 인천에 나가서 살아. 현재 사는 사람들이 죽으면 여기 땅속에 묻힐까 격정이 되고. 아마 밖으로 나가서 화장해야 될 거야. 불 속에 들어가야 될 거야. 옛날에 이 어른들은 여기 땅 속에 묻혔지만. 우리 5대가 여기 묻혔어. 내가 6댄데, 나는 이제 여기서 떠나면 이제 끝나는 거야 혀혀. 우리야 뭐 어쩔 수 없이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사는 거지. 나가봐야 뭘 해. 할 일도 없고. 시내 가서 집에 틀어앉아 있어봐야 괴롭고. 살면서 여기 있으니까 일도 하고 배에도 댕기고 조개도 잡고.
(2) 옛날엔 없어도 풍성했고, 여기 들어와봐야 천상 어업이고
옛날엔 여기가 좀 사람도 많이 살았고, 여기가 좀 살기가. 뭐 없이 살기는 했지만, 고기가
없어지고 그렇게 되다 보니까. 양반들 다 돌아가시고 뭐 우리 밑에 사람들은. 현실이 다 비어 있잖아. 역사라는 게 해 아무것도 없어.(역사가 없다는 그의 말은 실제로 역사가 없다기 보다는 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낮온 평가이다. 그의 면담을 해나가면서 동네 이야기와 고기잡이 이야기. 고사와 당제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며. 그가 20대가 되기 이전 시기에는 마을에 인구도 많고 고기잡이도 잘 됐고 당제도 지내는 등 마을의 문화도 풍성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먹고 살기는 지금이 낫지. 지금은 먹고 사는 건 걱정 안 해요. 옛날엔 고기를 그렇게 많이 잡고 그래도, 그거 잡아가지고 일 년 열두 달 먹고 살기가(힘들지). 식구는 많지. 배에서 잡아가지고 먹고 사는데. 값이 싸고 그러니까. 에휴. 먹고 살기 에휴.
겨울엔 텅 버어요. 저 양반(옆에서 같이 이야기를 듣던 동네 사람)이 겨울에 여기 혼자 지킬 때도 있어요. 그러니까 다 인천에 다 집들이 있으니까 나가 있다가 날 풀리면 또 들어
오고. (섬 인구가)내가 살 때만 해두 많이 살았지. (최대인구가?) 액 한. 이삼 십 명. 유권자가 90여 명이 됐으니까. 올해 서른 여섯 명(2007년 대선 당시). 사람이 자꾸 들어오고 그래야 되는데, 죽지 않으면 나가니까. 옛날에는 여기 호수도 뭐 40호 됐었고. 옛날엔 식구도 많았잖아요. 열 식구 뭐. 다 한 군데 살다보니까 동네가 북적대고. 다 나가살다 보니까 다 버어 있어요. 뭐 개발이 돼가지고 다시 들어와 살까. 현재로서는 희망이 없어요. 우리 죽으면은 모르지 뭐. 또.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살까.
여기 들어와봐야 뭐 천상 어업이고. 천상 배훈 거 뭐 그거 가지고 먹고 사는 거지 뭐. 여기는 (벼)농사도 없고 바다로 먹고 살아야 되는데. 뭐 옛날에 여기 보리농사는 조금씩 지어먹었지만 그게 식량이 되나 안 되지. 조개 같은 거 많이 잡아가지고 그거 팔아서 뭐 벌이도 하고, 쌀도 바꿔먹고. (옛날엔 조개잡이랑 고기잡이 비중이 반반 정도 됐나요?) 그럼. 조개, 옛날 양반들은 조개 엄청 잡았지. (요즘엔 조개가 별로 안 나서..) 조개 거 안 나나마나 그거 가지고는 생계가 안 되지. 뭐 옛날엔 조개가 많았어요. 뭐 여기 지금은 눈에 잘 안 띄지만 조개가 많았어요. 옛날에 조상들이 정착했을 때 조개 때문에 들오지 않았나. 뭐, 조개가 여기뿐이 아니고, 인천 앞에까지 조개가 많았어요. (조개 잡으시고 낚시도 하시고요?) 그럼. 영업이 꾸준했지. 봄에 이제 한 음력으로 따지면 2월 달부터 시작하연은 계속 추워질 때까지 바다 영업을 했어요. 거 여기 뭐 새우잽이 준치잽이 민어잽이 농어잽이 숭어잽이.. 이 바다에도 고기가 엄청났죠.
옛날엔 참 어촌이 재있었어요. 없어도 풍성했고. 거 뭐 바다에서 기분 좋으면은 기껍고, 뭐 배에서 고사도 지내고 바다에서 그랬어요. 바다에서 많이 잡으면은 기(깃발) 꽂아 놓고. 바다에 기 달고 있는 거 보면은 그 기분 제대로 그냥. 바다에 배에 잔뜩 달이놓고 고사도 지내고 그러잖아요. (고기가 점점 없어지면서)재미가 없는 거야. 아 이거 뭐 한 달 두 달 지내봐야. 우리는 아니지만 큰 배 가지고 나가는 사람들윤 기름값도 안되게 먹고 자고 들어오는데 그제 쉽지 않지. 아 옛날 같으면 참 수협이다 저 나가면은 굉장하지. 쓸쓸한 거야 이제. (옛날이라는 게 언제 정도인가요?) 옛날이라는 게 다 우리 20대 전이야. (60년대요?) 그렇지. 50년대 말 60년대 중반.
(3) 평생 살면서 참 많이 변했어
여기는 기간이 많아요. 시월달부터 놀면은 이월말까지 노는 거나까.(10월부터 2월까지는 밭농사도 거의 없고 잡을 수 있는 고기도 없기 때문에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이것도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십대 이전이었을 때에는 직접 만들어 쓰는 어구가 많았기 때문에 겨울에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두어야 했다. 예를 들면 낚시 줄이나 낚시 바늘은 인천에서 구입해 사용했지만 그물은 따로 팔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에는 한 집에 모여서 인천에서 사올 목줄(거친 연)로 그믈을 짜고, 낮에는 숲에 가서 땔감 나무를 모으는 것이 주된 겨울 일이었다. 이제는 겨울에는 섬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고 난방비도 많이 들기 때문에(석유나 땔감 사용) 인천 등도 시의 가족 집에서 지낸다. 이로써 그들에게 세어도는 고기잡이 철에만 사는 곳이 되었다. 활동과 생활 근거지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업(고기잡이)도 한철 벌어서 한철 먹고 사는 거예요. 그나마도 그 농어도 잘 안 잡히지. 값도 싸고. 져금몰 그련
대로 값이 올라야 하는데. 이 낚시를 해도. 그냥 우리 나가서 뭐 하루 못잡으면은 뭐 못잡
는 거고. 할 수 없지. 먹을 거 해야 되고. 낚시 거 영업이 아니야 영업이. 놀러댕기는 거지.
할 거 없고 그러니까 몇 시간 놀다.
지금은 고기가 없어요. 아. 이 바다에도 고기가 뭐 많았지. 거 다 잡기 싫어서 안 잡을 정
도였는데. 이 농어 새끼 하나 잡을려면 신경도 써야 되고. 그게 어제는 여기서 몰고 내일은 저기서 물고 왔다갔다 쫓아댕기는데. 없으니까 재미가 없지. 근래 지금은 없잖아. (언제부터 안 잡혔나요?) 한 그 10년 후로. 고기가 일방적으로 한 해 안 잡히는 게 아니라. 꾸준히. 뭐 그렇게 그렇게 고기가 줄어드는 거지, 갑자기 줄어드는 건 아니거든. 내가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그 이후를 내가 군대 갔다 오니까 고기가 없어진 거야. 연평도도 그렇고 조기도 그렇고, 민어도 그렇고. 고기가 없어졌어요. 그때부터 없어진 거야. 우리 어렸율 때만 해도 고기가 흔했지. 그게 지금같이 고기를 그렇게 안 잡아냈잖아. 잡는 사람도 적고 어구도 그렇게 고기 잡는 어구가 안 나왔고. 지금은 뭐 벌 거 다 있는데 뭐. 고기 잡기 위해셔.
김일성이. 육이요 전쟁 이후로 고기가 없어졌어요. 바다에 오염이 많이 되고, 바다에 뭐 사방에 또 틀어막고 이 물이 변해가지고 바닥이 변해버려요. 바닥이 빠지는 데 빠지다가 뻘이 없어지는데. 그러니까 조개가 앉을 자리가 안돼요. 바다가 썩지 뭐. 물 잘못 댕기니까 바다가 변하지. 여기 그렇게 많던 조개가 그냥 뭐. 할 얘기가 그것뿐이에요. 여기 주로 옛날에는 바지락도 많았고 물도 많았고. 뭐 해물 있는 거 다 있었는데. 바다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없어져, 생기는 게 아니라. 사람 살기가 어려워. 지금 이 바다를 막아서 육지 많이 만들잖아. 물이 갈 데가 없어. 다른 데로 들오니까 바다가 변하는 거야. 뻘이 생기고, 얕은데 깊어지고. 그렇게 변하니까 고기가 안 댕기는 거야. 바다가 변하니까.
(변하는 게 보이나요?)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 우리가 보지. 그전에는 요렇게 깨끗하고 좋았는데. 어느 때 보면 여기가 산이 그냥 산이 될 수가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조류가 세게 들어가니까 파나갈 수가 있고. 그러니까 옛날 그 깨끗한 바닥이 없는 거야. 패여 나가고 미어지고 하니까 고기들이 그 자리에 들 수가 없는 거지. 뻘이 변하는 거지. 들어와 봐야 먹을 게 없지. 조개라든가 낙지라든가. 다 조개들이. 낙지고 뭐고 내가 들어가서 살만하다 해야 들오는 거니까. 뻘이 변하니까 (일하다 보면 뻘이 변하는 게 보이시나요?) 그걸 모를 수가 있나. 그전엔 배 가지고 골을 왔다갔다 했는데 이제 변했거든. 이게 얕아 가지고. 옛날 같이 생각하다가 가다보면 배가 얹힐 수도 있고. 그게 변하는 거지. 상당히 변하고 있어요 지금. 바다골도 변하고 육지도 변하고. 없던 거 생기고 그제 변하는 거지 뭐. 이 지금 뻘 막 어 바다 막어 사방에 막고. 이렇게 흘러가던 게 저렇게 가고.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많이 변했지. 그런데 내가 평소에. 평생 살면서 참 많이 변했어.(그는 옛날부터 고기잡이를 위해서 배를 타고 골을 다녔기 때문에 갯벌들이 만들어내는 골의 모양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섬과 육지간 다리 건설이나 간척 사업 등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배를 타고 골을 다니다보니 물의 모양이 바뀌더라는 것이다. 결국 골이 바뀌는 이유는 다리 건설. 간척 사업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고기잡이를 하지 않았고 골로 배를 타고 다니지 않았다면 그러한 사업을 통해 바다의 흐름이 바뀌고 골이 변화하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거 공항 생겼지 공항. 지금이 김포공항 같은 것도 영종도 다 바다란 말아야. 그러면 이 바다를, 이 영종도가 이렇게 있는데 다 막았단 말이야. 여기도 막고. 인천 바다가... 옛날에는 인천에도 육지가 별로 없었어요. 인천 시내에 육지가 별로 없었다고. 인천 시내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다 바다에요. 주안, 제물포. 다 배가 들어왔어요. 우리 어렸을 때 가보면은 제일 변화했던 데가 동인천에서 신포동 거기가 변화 혔고, 치금은 다 막혀서. 중앙시장이 물이 들어와 차고 다 그랬어요. 많이 변하고 있잖아. 신도시 들어오고. 그게 변하는 거지. 인천도 옛날엔 아주 뭐 별 볼일 없었어요. 뭐 바다에 사방에 바다고, 사방에 배... 들어가는데(였는데). 송도 쪽으로 다 배 들어가는 데야. 지금은 뭐 개발이 되고.
(옛날에는 인천에 배 댈 떼가 많았나요?) 배 댈 떼가, 이 선창은 별로 없고 아무데나 그냥 갖다 대는 거야.(아 댈 수가 있어요?) 어. 지금 만석 부두 거기도 선창 이름이 없어요. 그냥 사다리 갖다 놓고 내리고. 그리고 거기하고, 월미도 그쪽으로 이제 댕겼지. (지금은 아무데나 댈 수 없는 거죠?) 그럼. 이제 여객부두도 기종이 다 있고 하니깐 다흔 데로 못내리지.
그전엔 또 객선이 없으니까 거기서 배를 가지고 댕겼어요. 풍선을 가지고 노를 저어서.
인천 월미도지금 거기가 다 육지가 되고 그게 다 변하는 거지. 월미도도 옛날에는 참 좋았던 데에요.〈많이 가보셨어요?) 거 우리 초등학교 내가 4학년 다니다가 말았지만. 참 좋았지. (배타고 몇 분 걸려요?) 여기서 뭐 몇 분 걸리나. 거기 가서 놀다가 저녁에. 참 월미도가 정말 좋았어요. 경치 좋고. 근데 육이오 전쟁 때 빨갱이가 들어갔지. 그래도 여기 세어도에는 그런 일들이 없었으니까. 근데 이쪽으로 가면은 인제 주문도가 있고, 연평도가 한참..이여기인천이 이렇게 있는 거지. 영종도 이렇게 있고, 여기가 이렇게 보면 월미도가 이렇게(지도를 보면서 이야기 하는 중, 옛날엔 참 좋았지. 경치가 그렇게 좋았고, 월미도 사꾸라가 참 좋았어요. 꽉 들어차가지고 참 좋았어. (월미도에 사람들이 많이 찾았어요?) 살았지.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별로. 저쪽으로 바닷가로. 유람선 댕기는데 많이 살지. 예전에는 뺑 돌아가면서 다 잘았지. 육이오 전쟁 나고 월미도가 아주 잿더미가 됐지. (그 이후로는 별로 못 가보셨어요?) 그 후론 어디 우리가. 군부대가 그 안에 있고 그래가지고(관광지는?) 관광지로 개발한다더니 그것도. 지금 저쪽으로 가면은 바닷가로 선창 있는 데로 가면은 놀이터도 있고 그렇지 뭐. (어리실 때 그럼 거기서 배타고 놀이하셨어요?) 그럼. 거기서 언제 그때 객선이 없으니까, 풍선 노 젓는 배 타고. 이제 국민학생들 한 삼사십 명 댕기니까 그거 타고. (누가 태워줘요?) 어른들이. 동네 어른들이 태워다 주고, 아침에 가서 놀다가 저녁에 가니까. 물때 따라서.
4.3. 어부 김호준의 이야기
(1) 나이 먹어보니까 여기 잘 태어난 것 같아
지금이 더 살기 좋지. 교통 좋고. 그전에는 행정선(서원호)도 없었지. 지금 뭐 먹을 것도 많고. 어디나 다 먹을 게 많지만. 옛날엔 배고픈 시절이 많았잖아요. 우리나라 어디든 다 변했지만, 예전에 힘들었던 시절에 비하면 천국이에요 천국. 전기 들어오지, 집에서 수도꼭지 들면 물 나오지 허허허. 나가고 싶으면 인천 가고 싶으면 지금 배가 빠르니까 한 십여 분이면 날라가고. (나는)섬지기로 남은 건데, 어느 세월엔 우리가 더 보람을 느낄 때가 와. 난 그렇게 생각해요. 부러운 게 많잖아요, 부자도 많고. 우리 대에라도 그런 날이 한번 올 거에요. 그런 보람도 한번 가져야지.
섬을 지금 지켜가고 있는 건데. 나름대로 여기셔 사는 것도 재있어요. 여기 고향이고. 도시에선 어떻게 사나 싶어. 소음 많고. ·애들한테 가도 얼른 와. 여기 오연 얼마나 좋은지 몰라. 거치적거리는 거 없고. 세상 편한 데가 여기에요 여기. 부러운 제 없어요. 나이 먹어 보니까 여기 태어난 게 잘 태어난 거 갈다는 생각이 들어. 밖에 생활이, 얼마나 호화스럽게 사는 사람도 많지만은 난 반대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봐요, 난 그렇게 생각해. 거기 비하면 우리도 잘 사는 거야. 그런 데 긍지를 갖고 사논 거지. 인생사가 그런 마음이 없으면 못살잖아.
근데 내가 보니까, 애률 공부시킬 때가 제일 재밌었어. 돈 걱정, 애들 걱정 그거 지나니까
할 일이 없잖아. 그게 인생이 다 그때가 제일 좋은 땐 거야. 지나고 보니까, 그때는 참 짜증나고 그랬는데. 지금 보나까 아, 그때가 좋았구나 싶어. 인생사가 그래요. 엄마가 고생을 많이 했지. 가서 애들 살림살이 해주고 와야 되고, 와서 또 여기 생활해야 되고. 엄마가 고생이 많았지 뭐.
(예전에는 사람들이 인구가 더 많았나요?) 많았지. 예비군 창설 당시에 거 73년든가 아니
야 그건 새마을·사업이고. 하혼 예비군 창설 당시에 예비군이 30명이 넘었어요. 예비군만.
그러면 마을인데 젊은 사람이 거의가 없어. 인구가 한 40명 되나. 상주하는 사람이 스무 명이 안돼. 혀혀.. 다 떠나고. 어디나 다 그런데. 이제 다시 사람들, 애들 다시 들어와서 살도록 터전을 만들어 놓을려고. 여기가 살기 좋아지면 살 여건이 되면은 밖에서 고생할 필요가 없어. 젊은 사람이 또 들어오게 되면은 학교도 시설될 거고. 학교가 철거돼가지고 ... 그게 우리 할 일인데.
겨울에는 세상 없어도 한 3개월 먹을 식량을 구해놔야 돼. 혀혀혀. 이전에 (한강)다리 없을 적이니 한강 하류에는 바닷물이 들어갔다 나왔다 한단 말이예요. 바다가 어는 게 아니라 유빙이 밀려와가지고 떠내려와가지고 얼음 조각이. 일단 바닷물에서는 얼면은 뜬단 말이야. 그게 쪼개져가지고, 떠내려오면서. 날이 그땐 좀 춥나. 지금은 영하 10도면 춥다고 벌벌 떠는데, 그전엔 (영하)20도, 30도까지 내려가는데. 그러면 인제 떠다니면서 물이 찰랑찰랑 해가지고 얼음이 뜨면 위는 요만해도 밑은 이렇게 깊어요, 집채만씩 해. 그럼 배 뭇 다니지. 그래서 겨울 양식을 제일 많이 사다 놓는 집이 제일 부자야. 혀혀혀... 거기서 얻어다 먹고 갚고 이렇게. 3월 보름 지나면은 이제 폴리더라고. 한두 달 정도 배가 못다니지. 그 우리가 (왜)돈을 못벌고도 풍족하게 사냐. 여긴 돈 쓸 얼이 없잖아. 쌀만 사오면 되니까. 다른 건 다 자급지족이 되니까. 돈 쓸 일이 없잖아요. 시내에서는 대문 열면서부터 돈 써야되잖아 허허허... 여건 그런 게 없으니까 살아요. 그러니까 부차가 부럽지 않아요. 허허허...
(2) 여기 조상들이 다 선업으로 살아왔어요
고기잡이는 열 여덟 살부터. 애득적에야 뭐 그냥. 그땐 고가가 많았으니까. (바다에 그냥
들어가서 고기를 잡아요?) 그럼. (그냥 들어가서 어떻게 잡아요?) 손으로 잡고 그물로 잡고 그러지. 그땐 고기가 많았어요. 우리는 생전 농어를 잡아먹다 말 세대에요. 다른 사람들 다 이리로 오는데, 우리 세청 앞에만 농어가 있어. (세청 앞에요?) 이 바로 앞에. 생전 낚시만 하고 사는 거야. 그러니까 크게 못살아 혀허허혀. 큰 영업을 해보고 그래야 되는데, 난 맨날 쪼맹이 낚시질을 하니까 못살아 허허허. 낚시질 이게 밑천이 안들어가요. 밑깝 잡아쓰지. 낚시·줄 한번 사면 몇 년을 써, 허허허.
여기 조상들이 다 배로 선업으로 살아왔어요. 여기서 선대가 어떻게 들어와 살게 됐는지는 모르지만은. 여기가 그 바지락 알죠. 바지락이. 캐보면은 엄청 깊어. 지금 저 흙이 덮혀서 그러는데, 버린 껍데기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장술이라 그래 장술. 조개 껍대기가 하얗게 그냥 앞뒤로다가. 오염되고 그래가지고 다 없어지고 그랬는데. 그 정도로 많아요. 그 밑에 깊이가 포크레인으로 파대니까 혀혀... 한 1미터 덮여있는데 그게 다 조개 껍데기야. 바지락 껍때기. 얼마냐 저놈들을 파먹고 살았는지 몰라. 그렇게 조개가 많았어. 지금 그 한 3변 전까진 바지락을 굵었는데, 이제 지질이 변해가지고 다 언제 폐사가 되다시피 했는데. 하루 일당이 한 10만원, 15만원씩 했는데. (하루에요?) 어, 하루에. (바지락은 일년 내내 나나요?) 일년 내내 거기 있는데, 거 언제 먹는 시기가 있어요, 밖의 사람들이. 젓갈 담글 적에. 지금(5월) 한창 캘 때구만. 지질이 변하니까 생태가 달라지는 커지. (그제 매일 보시다보면 느껴지시나요?) 보이지, 눈에 보이지. 모래가 저기 없던 거에요, 저기 노란 모래가. (김호준의 집 마당에서는 섬 뒤쪽 해안가 갯벌이 보이는데 그 끝쪽에 황색 모래가 쌓여있다. 저 모래가 없던 건데 생겼잖아. 어디서 밀려 와가지고. 지질 변화가 생겨셔 그런 거지. (이런 건 언제쯤부터 생겼나요? 인천공항에 생긴 후에 그런가요?) 그렇지. 3~4변 됐어.
(요즘 고기가 잘 안 잡힌다고 하시는데, 옛날에 좀 잡힐 때는 언제였나요?) 한 십년.. 칠팔 년(전)? 작년 보다 올해 또 덜 잡혀. 그 이유는 뭐냐면 공해도 있겠지만은 그거보다 자꾸 간척사업을 하니까 이 큰 고기들이 먹이사슬이 형성이 돼야 되는데, 자꾸 간척사업을 하니까 갯고랑이 없어지는 거야. 이련 게 있음으로 해서 새우가 들고, 먹이가 많아야 큰 고기들이 먹고 산란하고.. 이런 간척사업 공사를 자꾸 하니까 갯벌들이 자꾸 없어진단 발이야. 왔던 고기들이 이제 거기 갔더니 먹을 것도 없고 내년엔 다른 데로 갑시다, 이련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 내 생각에 그런 것 갈아. 그리고 잡는 어구가 자꾸 고속화 되기 때문에 고기가 견eu내질 못해. 배도 좀 빨라? 한 20년 전만 해도 여기서 인천 갈려면은 여섯시간 갔다가 여섯시간 와야돼. 노젓는 배로. 요즘은 5분이면 가. 10분이면 왔다갔다 해. 그렇게 고속화되니까. 여기 뿐이 아니라 이 연안바다가 다 그렇단 말이야. 결국은 언제 어종이 멸종이 되는 거야. 난(고기) 이 정도로 와주는 것도 고마운 줄 알아.
요즘은 뭐 낚시하고 밭농사 짓고 그러고 사는 거지.(고기잡이는)워미업으로 농어가 사월서부터 시월까지. 육 개월 벌어서 육 개월 사는 데에요. 겨울엔 아무 것도 못해. 어종이 없어가지고. 그러니 여기 천국이에요. 일 안하고도 먹고 사니까. 겨울에는 나무나 좀 하고 보일러가 있는데 비싸잖아요. 겨울에 뭘 해, 그냥 나무나 때면은 돈 안틀어가고 좋지, 온돌방에----
4.4 소결
어부 정진수와 검호준의 살아온 역사 고기잡이, 세어도와 동네 사랍들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힘들고 고생했던 옛날 이야기, 세어도는 고기잡이로 먹고 사는 동네이며 고기와 조재가 아주 많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제 고기가 잘 안 잡혀서 희망을 가지기 힘들다는 이야기. 그리고 한편으로는 세어도 개발사업으로 사람들이 더 들어오고 살기 좋은 동네가 될 거라는 버릴 수 없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 등이 이들의 삶과 지역에 대한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겠다.
어부 진견수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는 가난하고 어려웠으며 세상도 많이 변했다는 것이 주요한 주제이다. 산다는 것이 결국 ‘먹고 사는 일’이라면서 어떻게 하면 고기를 많이 잡아서 잘 살까 하는 것만 고민했다. 그는 20대 초반 군대를 가기 전 약 2년 동안 도시의 건설현장에서 노동일을 하였으며, 군대 3년을 다녀온 후에는 세어도에 정착하여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오고 있다. 최근에는 농어가 잡히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세어도에 머므르면서 물때에 맞춰 고기잡이를 하고 바지락이나 낙지를 잡고 밭농사를 한다. 이 중에서 판매를 하는 것은 농어만이며 나머지 조개나 밭작물은 자급용이다. 원래 바지락도 판매롤 하였지만 십여 년 동안 개체수가 크게 줄어 이제는 마을사람들이 먹을 만큼만 캐낸다. 농어잡이 철이 끝나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겨울이 되면 인천 등에 있는 가족의 집에서 2월까지 지낸다. 겨울 동안에는 특별한 생업이 없고 난방연료비가 높아 섬사람들 대부분이 겨울에는 도시의 가족들 집에서 지낸다. 그는 도시화가 되고 고기가 잘 안 잡히게 되면서 섬사람들이 떠나가는 현실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 크지는 않다. 현채 섬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 개발사업이 잘 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으로 사람들이 섬으로 다시 돌아올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있어서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의심스러워한다. 정진수가 세어도와 관련하여 가장 높이 두는 가치는 사람과 고기잡이임이 그의 첫 번째 면담, 첫 번째 마디에서부터 드러났다.
옛날엔 여기가 좀 이렇게 사람도 많이 살았고, 여기가 좀 살기가. 뭐 없이 살기는
했지만, 고기가 없어지고 그렇게 되다보니까 양반들 다 돌아가시고 뭐 우리 밑에
사람들은 .현실이 다 비어 있잖아(정진수).
사람과 고기잡이에 대한 그의 가치관을 연구자와의 면담과정 전체를 통해 계속 드러났다. 고기가 없으니까 사람이 없고, 고기도 사람도 없으니까 재미가 없다, ‘삶 맛이 없다’는 것이다. 세어도의 개발사업에 대해서도 경제적인 소득 증가와 관련시키기 보다는 그 사업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들어올까 걱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바램과 의구심은 어부 정진수의 삶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다. 정진수의 삶에 있어서 세어도는 참 많이 변했다’ 이러한 변화도 결국은 고기와 사람이다. 많았던 고기가 없어지고, 섬에 살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새로운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고 바다는 흐름도 바뀌고 바닥도 썩어 오염되는 등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옛날보다 살기는 좋아졌다. 전기도 들어오고 먹고 살 일을 걱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기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세어도에서 사는 재미가 없다. 즐겁고 재미있는 시절로 기억하는 옛날(1960년 전후시기) 고기 많이 잡힐 때는 참 재미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정진수가 바라보는 세어도는 ‘천상 어업으로 먹고 사는 곳’이다. 그는 인천에 있는 아들의 아파트에 가면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고향을 지키면서’ ‘고기도 잡고 조개도 잡고 일을 하면서’ 세어도에서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김호준은 고기잡이 기솔과 세어도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높은 자긍심을 가져고 있다. 그는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농어잡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통하며 부지런하고 고기잡이를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옛날에는 세어도에서의 삶이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세월이 지나고보니 섬을 지켰다는 보람도 생기고 이제는 세어도에 사는 것이 도시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한다. 앞으로 더 살기 좋아질 것이고 그러면 인구도 늘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희망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세어도가 살기 좋아져야 자신의 후대들이 들어와 살 수 있다는 소망으로부터 비롯한다. 살기 좋아져야사람들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들어와야 더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본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현재에 대한 평가에서 두 사람의 평가가 조금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과 고기잡이에 대한 가치 부여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정진수는 지금 섬에 사람도 없고 고기도 없고 앞으로도 희망이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하고 있고, 김호준은 앞으로 잘 돼서 섬에 사람들도 들어오고 더 잘 살게 될 거라고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세어도에서의 삶의 보람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마올 사람들, 즉 지역 공동체가 개언적인 삶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고기잡이 이야기에서도 드러나지만, 이들에게 의미 있는 세어도는 고기가 많이 나는 바다와 사람 많은 동네로 표현될 수 있다.
지금까지 어부 정전수와 김호준의 삶과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살펴보았다. 이들의 삶과 지역 이야기는 앞으로 살펴보게 될 고기잡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과 분석의 방향을 도출할 근거가 되었다. 일반척인 고기잡이가 아니라 세어도라는 지역에서 살고 있는 정진수와 김호준이라는 사람이 평생 생업으로 삼고 살아온 고유하고 구체척인 맥락 속에서의 고기잡이와 바다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들의 삶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였다. 또한 이 연구 결과를 다른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전이가농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