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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남양서씨강화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시기
아래의 내용은 전주이씨 덕양군 파의 가문에서 매년 출간하는 정희(靖僖)라는 정보지에 써 보낸 원고로 출간돠었기에 보내드립니다.
아름다운 초원의 나라 몽골 (사 진)
북방농업연구소 연구위원 徐 完 洙
(전 관동대 경상대학장)
몽골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필자가 퇴직하기 1년 전 ‘한·몽 연구회’에서 몽골 사막화방지 식목을 하려고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03년 퇴직하고 나서는 곧 울란바타르대학에 가서 ‘한국경제론’을 강의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2003년 10월에는 몽골정부 청사에서 ‘몽골발전포럼(MDF2003)’을 열고 여러 가지 정책건의를 하는 자리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2012년에는 농업투자 가능성 조사로 7년 만에 다시 몽골을 가게 되었지요. 여기선 그동안 얻은 지식과 경험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몽골은 국토 전체가 풀밭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여름의 초원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산위에는 어쩌면 저리 나무가 하나도 없을까 신기했습니다. 몽골의 겨울 산야는 눈으로 덮여 황량하기 그지없습니다. 적게 내리는 눈이라도 녹지 않고 겨울 내내 쌓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내 길거리도 계속 쌓이기만 하여 빙판 길로 인한 자동차의 접촉사고가 많아 성한 차가 별로 없을 지경이지요.
국토면적은 1,564천 km2로 한반도의 7배 이상 넓은 땅이지만 인구는 284만 명으로 대부분의 인구가 수도인 울란바타르(Ulaanbaatar: Ulan Bator라고도 씀: 붉은 영웅이란 의미)에 102만 명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국민은 몽골족 95%, 카자흐족 5%로 구성되었고, 언어는 몽골어를 사용하지만 문자의 표기는 고유한 몽골문자를 버리고 1946년 이후 러시아와 동일한 키릴문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라마교(티베트 불교)가 대세를 이루고 회교도와 기독교 신자도 있습니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2011년 1인당 GDP는 3,056달러입니다. 주요 수출품은 동, 석탄, 캐시미어, 의류가 주를 이루고 수입품은 석유제품, 기계류, 전기 기기와 식료품 등 입니다. 몽골은 광물자원이 많아 세계 7대 자원 부국입니다. 그러나 사회간접자본 시설이 부족하여 도로, 비행장, 저장시설 등은 아주 빈약합니다. 인구가 적어 내수시장이 좁고 항구가 없는 내륙국이어서 물류 수송이 열악한 것은 경제적 큰 약점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전임 바가반디 대통령은 ‘금방석’을 깔고 앉아 밥을 굶는다며 자원개발과 경제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최근의 연 경제성장률은 10% 전후로 빠르게 성장하며 주로 광산업에 집중 투자되고 있습니다.
2.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1271-1368)입니다. 지금의 중국 땅은 물론 아시아와 유럽까지 원정하여 97년간 광활한 면적의 땅을 지배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 한족을 부리고 ‘아랫것’들로 삼았던 것이지요. 이 거대한 원나라가 안휘성 사람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무너지고 277년간 지속한 한족의 명(明)나라를 세웠습니다.
명나라는 만주족(여진족) 누루하치가 세운 후금(後金)의 융성으로 사라지고 1616년 청(淸)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청나라는 명나라가 지배한 지역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지역, 위구르(신강자치구), 티베트(서장자치구)를 모두 정복하여 이민족으로써는 가장 오랜 296년간 중원 땅을 지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만주족의 청나라는 완전히 한족문화에 흡수되어 지금은 고유의 말과 글까지 잃고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2011년 통계로 만주족은 1,039만 명 정도입니다.
몽골족이 다시 독립을 쟁취하려는 운동은 1921년 수흐바타르(Sukhbaatar)가 몽골인민당을 창당하고 소련과 연합하여 외몽고 지역에서 중국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선포한 것이 지금의 몽골입니다. 1924년에 몽골인민공화국으로 선포되었고 세계 두 번째의 사회주의 국가로 구소련의 첫 번째 위성국가가 되어 소련을 ‘큰 형님’으로 삼았던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당시 중국을 대표하던 장개석 정부와 스탈린은 대일본 전쟁을 위해 외몽고를 끌어들이고, 그때 대장정(1934-36년 장개석 군대에 쫓기어 30만 명이 강서성 정강산에서 섬서성 연안까지의 이동)을 마치고 섬서성 연안(延安)에 머무르고 있던 모택동은 일본의 점령지 내몽고에 대해서 이후 자치구로 인정할 것을 약속했고 이 약속은 지켜져 1947년 5월 1일 내몽고가 중국에서 첫 번째 자치구가 되었습니다.
55개 소수민족을 거느리는 중국은 92%가 한족이고 8%정도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소수민족의 감정을 무마하고 고유의 독립성을 인정하여 자치를 인정하는 제도는 내몽고 외에도 서장, 신강, 광서, 영하자치구가 있습니다.
1946년 중국은 외몽고를 몽골인민공화국으로 인정하였고 몽골지역은 결국 남북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내몽고가 지금의 이름을 가진 것은 1636년 청나라가 내몽고 지역을 실질적으로 점령하면서 부터입니다. 그러나 고비사막 이북 외몽고(지금의 몽골)지역은 1691년 청나라가 자신의 영역으로 편입하였지만 한족의 이주는 정책적으로 금지하였답니다. 20세기 초, 청나라의 멸망을 틈타 내·외몽고의 통합움직임도 있었지요. 그러나 당시 중국을 감싸고 있던 러시아와 만주·내몽고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일본 사이의 갈등과 협정으로 인해 1921년 외몽골만이 독립적인 정부를 수립하게 된 것입니다.
몽골(mongol)과 몽고(蒙古)는 무엇이 다른가? “몽고”란 중국인들이 주변국을 비하하는 뜻으로 써왔습니다. 몽골은 “용감하다”는 의미의 몽골어입니다. 몽골인들은 몽고란 말은 싫어합니다. 우리는 독립국 몽골과 내몽고를 혼동하지 말아야겠지요.
2011년 몽골인구는 284.4만 명이지만 내몽고에 사는 몽골족은 441.6만 명으로 중국에 사는 몽골족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내몽고가 중국으로 편입된 후에 한족이주가 정책적으로 강력하게 권장되어 오늘날 내몽고자치주 인구 2,800만 명중 약 80%는 이미 한족이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 한민족 남·북한간의 통일문제와 몽골족의 중·몽골간의 통일은 닮은 듯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13-14세기에 걸친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침략과 지배 이후로부터 20세기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몽골은 그 교류가 끊어진 상태에서 각기 6-700년간 긴 역사를 달려 왔습니다. 1992년 사회주의 쇠퇴와 민주화 물결을 타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현재의 몽골을 성립시켰지요. 한국과 몽골이 다시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엄청난 시간적 공백을 지나고 나서야 가능했습니다. 한국과 몽골은 1990년 3월 정식으로 수교한지 22년이 되었습니다.
중국국적의 내몽고 인들은 몽골어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 중국기업체 직원으로 몽골에 들어오거나 무역과 식당 등 자영업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억양과 어휘의 차이는 있지만 내몽고 몽골족과 몽골 사람사이의 의사소통은 어려운 점이 없지요. 다만 변화된 생활양식과 두 국가 간 인식차로 이질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은 우리 남북한과 닮아 있습니다. 몽골사람들은 내몽고의 몽골 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간에도 붙고 쓸개에도 붙는 이중적인 인간들이라는 것이지요. 몽골사람들의 중국인들에 대한 반감은 우리의 일본에 대한 감정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오래전 몽골에서 북경을 거쳐 인천으로 오는 미아트(MIAT)몽골비행기를 탔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기내에는 중국인들이 반 이상인데도 기내방송은 몽골어, 한국어, 영어로만 방송하고 중국어는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을 그처럼 싫어하면서도 중국과는 지리적 인접성으로 무역이나 인적 교류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
몽골의 농업환경은 결코 좋은 조건이 아닙니다. 연중 강우량(울란바타르 연 300mm)이 적으며 기온이 낮고 무상(無霜)기간이 짧아 작물생육 기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발할 농지만은 풍부해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합니다. 한반도의 7배가 넘는 넓은 토지와 초원이 발달되어 있어 목축을 하기에 적합합니다. 주로 면양, 산양, 소, 말을 방목하는 유목형태의 축산업이 발달되었습니다. 2011년 가축 수는 3,634만 마리로 몽골인구의 13배나 되고 주로 염소와 양이 87%로 그들의 주식이 되며 소득원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식탁은 육류, 감자, 보쯔(몽골식 만두), 빵 등으로 서양인의 식단과 아주 닮아 있지요. 그들의 우유소비량은 1인당 년 평균 150kg(한국 42kg), 육류 소비는 91kg(한국 40kg)로 우리나라 보다 훨씬 많이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체구는 남자건 여자건 몸집도 크고 아주 근육질로 건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채소를 별로 즐겨 먹지 않는 이들의 평균수명은 66.4세로 크게 뒤떨어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인병이 많아 기대수명이 짧은 것입니다. 몽골에 파견된 한국 선교사들이 채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채소를 재배하여 나누어 주었으나 이들은 가져가기는 했지만 먹지 않고 가축에게 주었습니다. 사람이 왜 짐승처럼 채소를 먹느냐면서-.
그러나 채소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민간 투자에 힘입어 재배면적이 크게 늘어나고 생산량도 크게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한국의 지방 자치단체나 선교사들이 몽골에 들어와 온실 농업을 시도하고 있으며, 상당한 정도로 수량을 거두고 있습니다. 노지의 채소로는 무, 배추, 양배추, 당근, 부추, 마늘 등이고 온실재배 채소는 오이, 방울토마토, 참외 등의 과채류와 상추 등입니다. 그러나 채소를 그리 많이 소비하지 않는 몽골사람들의 소비 패턴으로 녹색채소의 공급에는 한계가 있어 정부차원의 채소 먹기 캠페인이 필요한 나라입니다. 특히 김치의 보급은 겨울이 긴 몽골의 식생활에서 빼 놓을 수없는 식품이라고 여겨집니다. 한 선교사는 김치의 보급을 위해 20년간이나 채소의 재배, 김치 담그기, 교육 등을 통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치 kg당 값이 노동자 하루 품삯의 반이나 되니 고급식품에 속합니다. 아직 김치의 식용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고 부재료나 배추와 무의 공급이 부족 때문이지요.
몽골농업의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농산물 생산의 일반적인 특징이긴 하지만 우연적인 재해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는 점이지요. 특히 강우량의 부족과 냉해는 심각하고 바람과 우박과 같은 예기치 않은 재해가 많다는 점입니다. 8-9년마다 주기적으로 오는 쥿드(dzud)라는 무서운 추위는 영하 4-50도까지 내려가므로 수백만 마리의 가축을 일시에 동사시키고 맙니다. 유목민에게는 어마어마한 손실을 가져다주고 빈곤층을 양산합니다.
둘째, 지력만을 이용하는 자연농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료나 농약을 생산하지 못하는 몽골에서는 모두 수입품목으로 최소의 사용량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지요. 밀이나 유채재배에서 1-2년 경작한 다음 1년 동안 휴경하며 돌려짓기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밀과 감자 중심의 농업생산이며 그 수량은 국제적인 평균 수확량에 크게 못 미치고 있습니다. 밀의 경우 ha당 수량은 중국의 40%정도입니다. 넷째, 넓은 농지에 비해 노동력 부족으로 대농이며 회사 영농이 많아 자본집약적인 경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형기계가 많으며 물을 주기 위해 몇 백 미터의 긴 살수기를 이용, 물을 뿌려주어야 하기도 합니다. 정부는 밀재배의 장려를 위해 보조금으로 ha당 약 7만 원 정도를 지급하고 있었습니다.
2011년부터 밀의 자급이 이루어지고 있어 몽골정부는 밀의 수출을 계획하며 한국이 수입해 줄 수 있는가, 쌀과 구상무역은 어떤가, 육류 검역의 완화, 김치산업의 육성 등 방문 중에는 식량농업경공업부 차관과 논의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육류와 유제품이 식사의 주류를 이루었던 몽골의 식탁이 이제는 지방자치단체(강원도, 경북), 선교사, KOICA 등의 채소 재배기술 보급으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채소의 대부분이 몽골에서도 생산되고 있습니다. 몽골의 동쪽 도르노트지역에는 이미 한국의 농어촌 공사가 27만ha를 개발하고 농업기술 전수를 시작한 곳이기도 합니다.
4.
몽골사람들은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릅니다. ‘무지개 뜨는 나라’란 뜻이지요. 그렇게 부르게 된 연유는 원(元)나라가 정벌한 고려에서 아름다운 공주를 왕비로 데려 오면서 황제가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어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 몽골 인들에게 ‘솔롱고스’는 아주 친근한 나라 이름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고려사를 전공한 교수님 왈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기간부터 조선왕조 중기까지 수만 명의 여인이 중국으로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소위 공녀(貢女)로 기록에 남아있는 것 만해도 고려 때에만 80여 년간 50회에 걸쳐 처첩, 궁녀, 잡역부로 끌려갔고 이런 일을 담당하는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追考別監)이란 부서가 있었답니다. 13-16살의 여자는 나라의 허락을 받고 혼인하라는 왕명이 내려질 정도였고 공녀로 보내지 않으려고 12-3세의 어린 딸을 시집보내는 조혼의 풍습도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역사가 오늘날 ‘솔롱고스’란 이름으로 환생하여 우리에게 다가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몽골은 ‘여인천국’ 같아요. 남매 중 누구를 먼저 대학을 보낼까 물었더니 당연히 딸을 먼저 보낸다고 하네요. 왜? 딸은 공부도 잘하고 취직을 잘 할 수 있지만 아들은 가축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오늘날 학교나 연구소에 여성인력이 상당 히 많은 것은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과객혼(過客婚)이란 말을 들어 보셨나요? 드넓은 초원에서 생활하는 유목민은 가까운 혈족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아 우수한 혈통을 얻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시절 먼 곳에서 온 외간 남자와의 동침은 여인으로 하여금 우수혈통의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본 것이지요. 이는 부족 이외의 혼혈을 통한 우수한 DNA(유전자)를 얻으려는 유목민의 지혜가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보면 초기의 징기스 칸(Genghis Khan)이 부족 간의 싸움에서 적장에게 약혼자를 빼앗겼으나 나중에 찾고 보니 적장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징기스 칸은 아내와 아이를 버리지 않고 모두 거두었습니다. 이를 보면 유목민의 성 풍속은 개방적이고 합리적이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이러한 풍습은 전설처럼 먼 이야기로만 남아 있습니다.
몽골인들은 대머리가 없고 안경을 쓴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연 환경적인 요소와 유전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푸른 초원과 하늘, 그리고 멀리 보면서 생활하기 때문에 시력이 2.0까지 나가는 우리가 보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습니다. 중년 남자의 체구는 일본의 스모선수를 연상시키는 거구가 많습니다. 또 보드카(vodka) 독한 술을 많이 마십니다. 중년이 넘은 남편은 고주망태로 부인에게 구박받는 알콜 중독자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의 젖으로 만든 ‘아이락’으로 불리는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한 색깔과 맛을 가진 술도 있습니다. 2차 증류로 맑은 소주모양을 한 것은 도수가 높고 유제품으로 만들어 특이한 향이 있습니다.
5.
한국의 힘은 바로 시내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물결에서 느끼게 합니다. 승용차, 봉고, 버스가 온통 한국산인데 대부분 중고차로 수입된 것들이지요. ‘의정부행’ ‘추월금지’ ‘과속금지’ 등 한글 안내문이 그대로 붙어있는 것도 있어요. 아마 60% 이상의 차량이 한국산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한국 자동차가 이처럼 많은 것은 울란바타르 시내에 현대자동차 수리센터를 세우고 신속한 정비와 부속품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방송의 연속극과 노래는 시차만 있을 뿐 거의 다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몽골에서 통용되고 있는 휴대전화는 거의 대부분 한국 중고제품입니다. 몽골의 이동통신 개통서비스는 한국기술이 제공하였고 오늘날 이동통신 가입자는 225만 명으로 보급률은 85%에 달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달리 가입자의 대부분이 선불요금제를 이용하고 요금이 떨어지면 통화는 할 수가 없고 또 지불해야 합니다. 몽골 인터넷 가입자 수 및 이용자 수는 e-Mongolia 추진에 힘입어 35만 명으로 크게 증가 추세지만 인터넷 속도는 우리와 비교하여 크게 뒤떨어집니다.
몽골 인들은 ‘솔롱고스’ 드림을 찾아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싶어 합니다. 많은 몽골인들이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근로자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대학에는 한국어과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일반적입니다. 2011년 한국에 살고 있는 몽골인은 28,000여명으로 몽골국민 약 1%가 한국에 살고 있지요.
몽골인들은 한국말을 아주 잘 합니다. 문법과 어순이 같아서이기는 하지만 발음, 어휘선택, 말의 리듬에서 거의 완벽해서 정신을 차려야 한국인이 아니라는 눈치를 챌 정도입니다. 몽골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외국인과 이야기한다는 긴장감이 풀어지고 의사전달이 잘 되고 있다는 느낌과 상호이해가 빨라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상사에 대한 존경과 복종심,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것, 외국인에 대한 친절, 솔직성, 가족중심의 공통점 등은 우리와 크게 닮아있어요.
몽골 국립박물관에는 쿠빌라이 칸 시대에 원나라가 지배했던 제국을 그린지도가 걸려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불가리아 평원에 걸친 제국’이라는 표현이지요. 그랬던 나라가 지금은 불안한 세계화의 막차를 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의 흥망성쇠를 대조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세계 강국의 건설은 군사력 하나만으로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국방 외에도 경제, 기술, 문화의 수준, 외교력의 집합이 국력이 아닐까요?
학교에서 강의하고 몽골사람들과 접촉하며 생활해 본 인상은 사람들의 바탕이 착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마워해야 할 때 고마워하고, 미안해해야 할 때 미안해하며, 수줍어해야 할 때 수줍어하는 인간의 기본 도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려는 사람들 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은 대단히 강한 민족이란 것이었습니다. 2012년 여름에 가서 보니 울란바타르 공항 이름이 ‘징기스 칸 공항’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MDF2003 발전 포럼에서 논의 되었던 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여서 흐뭇하였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