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땀(In Tam: 1916.9.22.-2006.4.1.)은 캄보디아의 총리였다. 그는 "크메르 공화국" 시대인 1973년 5월 6일부터 1973년 12월 9일 사이에 총리로 재직했고, 캄보디아 정계에서 오랜 기간 활동했다.
정치적 경력
인 땀은 캄보디아 동부지방인 껌뽕 짜암(Kampong Cham) 도, 스떵 뜨라잉(Stung Treng) 군의 쁘렉 깍(Prek Kak) 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스떵 뜨라잉 파고다"(Stung Treng Pagoda)에서 빨리어(Pali)를 공부한 후, 프놈펜의 명문 중고교 리셰 시소왓(Lycee Sisowath)에서 수학했다. 이후 도 지방 민병대 감사를 맡았고, 종국에는 명예장군(Brevet-General) 계급을 받고 따께우(Takéo) 도지사 직에 올랐다.
1960년대 인 땀은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공이 조직한 "성꿈 리어스 니욤"(Sangkum Reastr Niyum)에 합류하여, 특히 1964-1966년 사이에는 내무부장관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우파 반군인 "크메르세레이"(Khmer Serei) 멤버였던 사촌 쁘리업 인(Preap In)이 반-시하누크 모의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자, 그 역시 투옥되었다. 쁘리업 인은 후에 처형되었다.

(사진)1970년 쿱테타 다음날 모습을 보인 지도부 3인방. 좌로부터 시릭 마딱 왕자(좌측), 론 놀 총리(중앙), 그리고 인 땀(우측).
비록 인 땀이 이전에 노로돔 시하누크에게 충성을 바치긴 했지만, 1970년의 쿱테타에서 그는 이 사건의주모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쿱테타는 시하누크의 외유 중 국회의 투표를 통해 시하누크를 국가수반에서 실각시키는 조치였다. 이후수립된 "크메르공화국" 정부에서, 인 땀은 점차로 쿱테타 지도자였던 론 놀(Lon Nol)과의 갈등의 골이 깊어져만 갔다. 결국 론 놀은 1971년 10월에 국회의 입법권을 정지시키고, 크메르루즈와 내전 중이란 이유를 들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사태는 인 땀과 400인 승려들의 항위시위를 불러일으켰다.(주1)
1972년에 실시된 "크메르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인 땀은 론 놀 및 께오 안(Keo An)과 경쟁하는 대선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미국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NSC)의 한 보고서를 보면, 인 땀을 청렴하며 겸허한 생활태도를 가진 인물로 묘사하고, 당시의 캄보디아 정치인들 중 가장 경륜을 갖춘 정치적 성숙도가 높은 인물로 평가했다.(주2) 그는 대선에서 24%의 득표율로 론 놀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아마도 선거가 공정하게 치뤄졌으면 인 땀이 승리했을 것이란 의견이 중론이었고, 수도 프놈펜 선거구의 경우 심지어는 부정투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 땀이 승리했다.(주3) 이어 그 해 치뤄진 국회의원 총선에서는 시소왓 시릭 마딱(Sisowath Sirik Matak) 왕자가 이끌던 "공화당"(Republican Party)과 인 땀이 이끌던 "민주당"(Democratic Party)은 선거 참여를 보이콧하고, 론 놀 대통령 및 그의 동생인 론 논(Lon Non)이 이끌던"사회공화당"(Socio-Republican Party)에 편향적이라 여긴 법률에 대한 저항을 시작했다.
이듬해 인 땀은 론 놀 행정부에서 7개월 간 총리를 지낸 후, 공산당원들을 항복토록 선무하는 국가기관의 장을 맡는다.
1975년 4월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함락하고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뽀이뻿(Poipet)에 있던 자신의 농장에 체류 중이었다. 처형될 것이 거의 확실시되자 그는 태국으로 탈출한 후 국경근처에서 크메르루즈에 저항하는 반군조직을 건설했다. 하지만 태국 정부가 그를 국외로 추방하여 이 저항은 글 오래가질 못했다. 인 땀은 처음에 프랑스로 떠났고, 이후 197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주1) Sorpong Peou, Intervention and Change in Cambodia, 2000, p.52.
(주2) Shawcross, W. Sideshow: Kissinger, Nixon, and the Destruction of Cambodia, New York: Washington Square Books, 1981, p.232.
(주3) Clymer, K. J. The United States and Cambodia, 1969-2000, Routledge, 2004, p.55. |
망명생활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한 후 베트남의 위성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과 대치하던 시기에, 인 땀은 노로돔 시하누크 공 및 그의 정파인 "푼신펙"(FUNCINFEC)을 지지했지만, 여러 차례 캄보디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시하누크의 푼신펙과 손 산(Son Sann)의 "크메르민족해방전선"(KPNLF), 그리고 크메르루즈가 연합하여 결성한 "민주캄푸치아연합정부"(Coalition Government of Democratic Kampuchea: CGDK)에서, 그는 3인의 공동 국방부장관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됐다.(주4)
1993년 평화정착 과정으로 UN 주도의 최초 총선이 실시되자, 그는 자신의 독가적 정당인 "캄보디아 민주당"(Cambodian Democratic Party)을 창당했지만 선거에서 단 한 석의 의석도 확보하지 못했다. 1997년 총선에서는 현 여당인 "캄보디아인민당"(CPP)과 공조하기도 했다.
인 땀은 2006년 4월 1일 미국 남서부의 아리조나 주, 챈들러(Chandler)에서 사망했다.
첫댓글 캄보디아 정치를 보면 한마디로 이합집산 같습니다. 오늘의 정적이 내일은 서로 협력하고, 정당의 안정성을 찾아 보기가 힘들군요.
예, 캄보디아 현대사는 정말 20세기판 삼국지였던 것 같네여. 원수와 동지가 될 수 있는 크메르인들의 실용주의적 사고관이 놀랍고 무서운 측면이 보입니다. 아마도 오랜 고대기부터 상업국가로 성장해보았던 문화적 경험때문인듯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