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출일 과목명 교수명 | 2023.4.3 설교의 역사와 신학 정인교 | 학 번 과 정 제출자 | 신학전문대학원 박사과정(Th.D) 1차 김상수 |
정빈(鄭彬)의 생애와 설교
- 정인교, 100년의 설교산책,한국성결교회 100년사,pp.94-101 요약 -
1. 정빈의 생애
정빈은 김상준과 함께 성결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그는 1873년 해주에서 출생했으며, 8살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외국어 등 다른 신학문을 습득하는데도 열심을 보였다. 정빈이 기독교에 입교한 것은 10살 때쯤이다. 그는 20세가 되던 1893년 선교사 모삼열(Moore)과 조사 김영옥, 천광실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청년시절의 신앙을 닦아갔다.
정빈은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기 몇 달 전인 1905년 7-8월경에 당시 일본에서 귀국한 어느 한국인 의사를 통해 일본의 동경성서학원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그 후 그는 김상준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동경성학원에 입학하였다.
동경성서학원에서 유학하는 동안 정빈은 두 가지에 큰 매료되었다. 그것은 사중복음과 교파를 만들지 않고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하려는 동양선교회의 전도방침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토록 사중복음을 전하는 순수 복음전도자로 살기로 굳게 결심했다. 이 결심대로 그는 목사 안수를 받지 않고, 무명의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정빈은 관서지방의 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태극학회와도 관계를 맺었다. 이 단체는 표면적으로는 유학생들의 친목과 학술연구였지만, 사실은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고 구국방안을 모색하려는 애국단체였다. 이곳에서 정빈은 기독교를 알기 원하는 유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러나 정치적인 활동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성결의 복음을 접하면서,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1907년 5월 2일 정빈은 김상준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에 경성 종로 염곡에 다 쓰러져가는 기와집 몇 칸을 세내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개설하였다. 정빈은 처음부터 교파의식을 갖지 않고, 일본에서 익힌 대로 악대와 가두전도연설, 호별방문 등을 통해 전도했으며, 결신자들은 인근 교회로 보냈다. 이들이 밤중에 장등(長燈)을 들고 북을 치면서 “믿기만 하오 믿기만 하오”라고 외치고, 찬송을 부르면서 전도했다. 그 때, 그것을 구경하려고 왔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 구원을 체험했다. 이 당시 이들의 전도로 3개월 만에 구도자가 36명, 6개월이 지난 연말에는 272명의 결신자가 나왔다.
그런데 이 당시에 눈에 띠는 것은 전도관의 주임교역자는 정빈이었고, 김상준은 부교역자였다는 것이다. 또한 1911년 3월에 무교정 전도관 안에 임시로 성서학원이 개설되었을 때에도 한국인 최초의 성서학원 교수는 정빈이었다.
그런데 1914년 정빈과 김상준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 이일로 인해서 정빈은 사직서를 내고 북간도 전도를 위해 떠났다. 정빈은 북간도로 떠난 지 3년 후에 다시 돌아와서 안성교회를 개척했고, 이후에는 인천교회에서 3년간 목회했다.
그러다가 1921년 9월 복음전도관이 폐지되고, 교회 조직으로 개편될 쯤에, 정빈은 인천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북간도로 떠나 동아기독교의 일원이 되어서 전도에 힘쓴다. 북간도에서 정빈은 용정교회에서 사역했으며, 만주 종성동에 세워진 종성동 성경학원의 교수로 사역하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서 사역하다가 60이 넘은 노년에 무명의 전도자로 소천 했다.
정빈은 평생 동안 최소한 두 가지 원칙에 근거해서 사역했다. 첫째는 어떠한 새 교단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곳에 가서 직접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빈의 생애에 대해서 서울신학대학교의 정인교 박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정빈은 어떤 인위적인 교파에 미련을 두지 않고 순전한 복을 전하는 것을 존재의 의미로 삼았던 인물이었고, 이와 배치되는 것들과는 일체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민족의 해법을 복음으로 제시하면서 구습의 미몽에서 개화의 길로 나와야 한다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 였다”
2. 정빈의 설교
정빈의 관한 기록은 의외로 만지 않다. 그러나 그는 매우 능력 있는 전도자였으며, 설교자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김상준과 함께 전도관을 이끌면서, 불을 뿜는 듯한 설교로 회개를 촉구하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알려진다.
현재 정빈의 설교 가운데 유일하게 전해오는 것은 “면면(面面)의 그리스도”이다. 이 설교는 태극학보 4호(1906년11월 24일 동경발간)에 실린 것이다. 이것을 최래옥 장로가 발굴하여 현대어로 표기하여 활천에 기고하였다(활천, 418호, 1986년 pp 38-42).
이 설교에서 정빈은 그리스도를 두 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째 대지에서는 그리스도를 주(主)로 강조하면서 병아리 대신 희생한 암탉의 예를 통해 그리스도를 설명한다. 두 번째 대지에서는 그리스도가 참 자유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설교에는 초기 기독교의 근본적인 핵심인 죄로 부터의 자유와 구원을 다룬 것으로 죄인과 그리스도가 대조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정인교 박사에 의하면, 이 설교에는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먼저는 연역적인 대지설교를 구조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선교사나 사역자들의 일반적인 흐름이었으므로, 정빈은 이를 보고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두 개의 대지를 전개함에 있어서 각 대지마다 각기 다른 본문을 동원했는데, 이 또한 그 당시 사역자들의 설교구성의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마지막으로 암탉의 예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설명했는데, 이는 당시 선교사들이 설교에서 예화를 많이 사용하지 않은 것에 비추어 볼 때, 약간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3. 면면의 그리스도 - 정빈의 설교원고(첨부 파일 참고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