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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便說諸法하여 皆令得歡喜라
그래서 결국은, 참 좋잖아요. 다 하여금 기쁘게 해준다. 환희하게 해준다. 그 나름대로 다 이 불교라고 하는 이 큰~ 숲속에 들어와서 그 나름대로 전부 쉬었다가게 또 기쁨을 얻고 가게 해준다.
105 舍利弗當知 我以佛眼觀 見六道衆生 貧窮無福慧 入生死險道
사리불당지 아이불안관 견육도중생 빈궁무복혜 입생사험도
相續苦不斷 深著於五欲 如모牛愛尾 以貪愛自蔽 盲瞑無所見
상속고부단 심착어오욕 여모우애미 이탐애자폐 맹명무소견
不求大勢佛 及與斷苦法 深入諸邪見 以苦欲捨苦 爲是衆生故
불구대세불 급여단고법 심입제사견 이고욕사고 위시중생고
而起大悲心
이기대비심
舍利弗當知 我以佛眼觀하니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나는 부처의 눈으로써 관찰한다.
見六道衆生이 貧窮無福慧서
육도중생이 빈궁해가지고서 복혜가 없음을 보아서, 복과 지혜가 없다 말이요. 이 빈궁하다고 하는 것이 물론, 물질적인 복도 복이지만은 지혜가 중요한거죠. 지혜없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야. 부처님 눈에는 그러찮아요. 貧窮無福慧라고 했잖아요. 가난해가지고서 복도 지혜도 없다. 그러니까 지혜있으면 복이 따라오게 돼있어.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도 지혜를 첫째 갈고 닦으면은 그 다음부터 서서히 복이 오게 돼있어요. 왜냐? 지혜가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복이 되는 것을 아니까 그럼 복되는 일을 하지. 저절로 복되는 일을 하게 되고 또 지혜가 있으면은 자기가 좀 이제 무슨 뭐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해있다 하더라도 그걸 그렇게 어렵게 생각을 안하게 돼있어.‘아! 이건 당연한 이치고 내가 지어놓은 복이구나. 또 내가 그런 인연을 못 지었구나’라고 이렇게 현명하게 받아들일 줄 알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아. 또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그게 가난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절대, 그러고 또 지혜가 있으면은 그 물질적인 복도 돌아오는 그 길을 알아. 빤히 알아. 눈에 보이니까 그러면 그 길을 가게되면은 저절로 세월만 가면은 복도 돌아오게 돼있어. 그게 안되면 그건 잘못 된거죠. 당연히 그래 돼있습니다. 그래서 貧窮無福慧야. 육도중생들이 그렇다 이 말이요.
入生死險道하야 相續苦不斷하며
생활이라고, 生死라고 했지만은 우리 삶의 험한 길에 들어가가지고서 계속해서 그 고통이 끊어지지 아니하며
그렇죠. 어리석은 사람은 끊임없이 그게 반복됩니다. 요는 지혜가 제일 중요해요. 그 캄캄한 밤 아무 무슨 뭐 등불도 없고 저기 저 심지어 무슨 달빛도 별빛도 없는 그런 그 길을 간다고 하면은, 손에 뭐 후레쉬도 없고, 간다면 밤새도록 캄캄한 길을 갈거 아닙니까? 相續苦不斷이지. 그래서 지혜를 빛에 광명에다가 비유하는 것이 뭐 무수히 많죠. 어디든지 뭐 경전마다 지혜를 광명에다 비유하죠.
그 광명은 다시말해서 빛은 그 어둠을 밝혀주는 그런 그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혜는 우리 어리석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그 불이 있으면은 길 잘 찾아가지요. 아무데나 부딪히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고 그렇게 갈 수가 있잖습니까?
深著於五欲할새
깊이 오욕에 집착할새, 오욕은 안, 이, 비, 설, 신 이 다섯 가지가 뭐든지 자기 이제 편할대로 하고자 하는 거지. 거기에 이제 집착하대
如犛牛愛尾하다
愛尾하여 그랬거든, 犛牛라고 하는 게 이게 검은 소. 소같긴 한데 꼬리가 아주 긴 짐승이라는 뜻입니다. 소같이 생겼다해서 모우라 그래요. 인도에 있는 아마 물소인가봐. 그 소가 꼬리를 상당히 애착하는가 봐요. 그 모우라고 하는 소가 꼬리를 사랑하여, 하듯이, 해서
以貪愛自蔽라 盲瞑無所見이라
貪과 愛 탐욕하고 애착하는 것으로써 스스로를 이제 막아버린다. 차단해버린다. 그래서 그래 뭐 앞을 탁 잡혀 가리고 있으니까 캄캄해가지고 아무것도 보는 바가 없다.
그랬어요. 이게 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으면은, 어리석으면은 그런거에요. 캄캄해가지고 아무것도 못 보면 어떡해? 뒤로 넘어지고 자빠지고 상처나고 뿌러지고 뭐 다치고 하는 거 그것밖에 남은 게 없어요. 길을 가는데, 그 불이 있어야지. 불이 있으면 절대 어떤 험한 길도 다치지 않고 갈 수가 있죠.
그러니까 인생사는 사실은 험해요. 그런데 험한 길이지만은 지혜가 있으면은 오히려 이 사바세계가 살 만한거야. 괜찮다고요. 저 윈드서핑인가 하는 사람들을 보면은 파도가 쎄면 쎌수록 타는 재미가 더 있거든요. 그 세상사가 힘들고 변화가 많을수록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파도타기가 더 재미있는거야. 세상 파도타기가 훨씬 더 재밌는 거라. 그런 그 우여곡절이 없으면은 밋밋해서 별로 재미가 없어. 심심해. 인생사가, 근데 인생사가 우여곡절이 많을수록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없는 사람은 그냥 이리 다치고 저리 뿌러지고 막 그냥 깨지고 피투성이 상처투성이가 되지만은, 지혜로운 사람은 이 사바세계 많고 많은 변화무쌍한 이 모습과 우여곡절이 오히려 아주 재밌는거죠. 훨씬 더 재밌는거요.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 세상 탓할게 아니에요. 절대 세상 탓할게 아니고 나에게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 그 우리는 이제 내가 타고난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를 빌리는 거죠. 좀,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부처님 지혜를 자꾸 이제 내 지혜로 이끌어 오는 거요. 불교공부란 그거에요. 다른 거 없습니다. 다른 거 없어요. 혼자 뭐 끊임없이 앉아가지고 파 봐야 그게 잘 안나와요. 그래서 이 성인의 가르침을 우리가 자꾸 접하게 되는 거지요.
不求大勢佛과 及與斷苦法
大勢佛 아주 큰~ 세력이 있는 부처님. 부처님인데 우리가 부처님에 의지하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면은 거긴 뭐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가 거기에 있는데, 不求大勢佛 큰 세력이 있는 부처님과 그리고 고통을 끊어버리는 法. 불법이죠. 이 가르침이죠. 이 가르침을 구하지 아니해.
그 답답하면 부처님에게로 쫓아가던지 아니면 예배당이라도 쫓아가던지 뭐 그렇게 해야 될텐데 그것마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斷苦法이라고 했잖아요. 고통을 끊어주는 법이다. 불법이, 뭘로 고통 끊어주느냐? 무슨 돈을 한 짐 갖다주느냐? 그게 아니라 지혜를 가르쳐준다. 스스로 지혜를 터득함으로해서, 불법을 공부하면 지혜가 밝아지고 그 지혜가 내 인생이 되고 인격이 되면은 저절로 고통을 해결하는 그런 그 이치를 알게 된다.
그런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深入諸邪見하여
깊이 여러 가지 삿된 소견에만 들어가. 깊이 들어가가지고 잘못 된 거 자기 그 아주 조그만한 좁은 소견에 딱 맞는 그런 아주, 달콤한 소리 들으면 그냥 홀딱해가지고 그게 삿된 것인지? 바른 것인지? 전혀 판단도 못하고 한번 의심도 해보지도 않고 그만 푹 빠져버리는 거지. 深入諸邪見이라. 삿된 견해에 깊이 들어가서, 이거 제일 경계해야 되요. 우리 불자들은, 불교 안 믿는 것보다 불교 믿는 사람들이 삿된 견해에 들어갈 그 소질이 더 많거든요.
以苦欲捨苦야
고통으로써 고통을 버릴려고 한다 이말이여. 고통으로써 고통을 버릴려고 한다. 삿된 소견에 들어가버리면은 고통으로써 고통을 버릴려고 하거든, 그러니까 맞지 않는 일이죠.
부처님은 호위호식하면서 최고의 호화판 인생을 살아봤고 태자시절에, 그 다음에 이제 최고의 고통스러운 고행도 해봤고 그래서 나중에는 그런 그 아주 향락의 삶도 옳지 않다. 고통의 삶도 옳지 않다. 그래서 정상적인 명상으로 딱 이렇게 처녀가 갖다주는 우유죽을 탁 먹고 시원한 강물에 목욕 척 하고 그리고는 시원한 보리수 나무밑에 척 앉아가지고, 그때는 그런데 그늘밑에 앉지 않았어요. 땡볕에 앉았고 가시덩쿨속에 일부러 들어가가지고 몸을 그냥 이렇게 상처를 내면서 그 고통을 가지고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 줄 알았어. 잘못 안 거지.
그래서 나중에 그런 거 다 버리고 시원한 나무그늘 밑에 척 앉아가지고 참선하니 얼마나 잘됩니까? 저절로 되죠. 그거, 고통속에서 하다가 그래서 정상적인 깨달음을 얻고는 중도(中道)를 선언하게 된거죠. 깨달음을 얻고나서는‘향락의 삶도 바람직한 삶이 아니다. 고행의 삶도 바람직한 삶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 그 순리에 맞는 모든 이치에 맞는 중도의 삶을 살 줄 알아라.’하는 것 그것을 이제 선언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삿된 견해에 들어가면요. 이거 참 불자들 주변에 불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참 꼭 이제 가르쳐줘야 할 일인데, 소견이 발라야 된다. 소견이 삿되면은 고통으로써 고통을 버리고자 한다. 할새
爲是衆生故로 而起大悲心하니라
그런 중생들을 위한 까닭으로 大悲의 마음을 일으키니라. 그러니까 결국은 사람을 부처님으로 또 사람의 지극히 고귀한 가치를 제대로 또 1톤이나 되는 다이야몬드소라고 이렇게까지 우리가 이해됐을때, 그러면은 우리가 할 일은 뭐냐? 대비심을 일으키는 거요. 대비심을 일으키는 거라고
그렇게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걸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정말 그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또 도와주고, 물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고 또 지혜로써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또 가르쳐주고 그게 이제 起大悲心이라. 중생을 위한 까닭으로 대비심을 일으키느니라.
106 我始坐道場 觀樹亦經行 於三七日中 思惟如是事 我所得智慧
아시좌도량 관수역경행 어삼칠일중 사유여시사 아소득지혜
微妙最第一 衆生諸根鈍 著樂癡所盲 如斯之等類 云何而可度
미묘최제일 중생제근둔 착락치소맹 여사지등류 운하이가도
我始坐道場하야
내가 비로소 도량에 앉아서, 처음에 도량에 앉았다 그랬잖아요. 이게 6년고행 끝내고 나서 마지막 이제 오늘 지금 7일째 되고 내일 아침에 이제 성도하는 날이라. 이게 아주 마침 이제 잘 맞춰졌네요. 내가 비로소 도량에 앉아서, 그 보리수밑에 앉아서 이 말이요.
그러니까 처녀가 끓여다주는 그 맛난 우유죽을 먹고 목욕 싹 하고 시원한 그런 보리수밑에 앉아가지고서
觀樹亦經行
그냥 뭐 다리만 아프게 오래만 앉아있기만 한게 아니라 숲을 척 나무를 바라보기도 하고 또한 徑行도 해. 다리 아프면 나무밑을 슬슬 거닐기도 하지 뭐. 꼭 그 뭐 앉아있어야 되는 줄 알고 하~ 가부좌틀고 다리가 뿌러지는 지 관절염이 오는지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어리석게 한다고요. 그 부처님은 경행했다고 하잖아요. 경행이 다니는 거요. 나무밑에 왔다 갔다 하는거요. 나무를 쓱 바라보기도 하고, 얼마나 여유롭고 편안합니까? 亦經行하며
於三七日中에 思惟如是事호대
그 다음에 三七日 21일간 이제 이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말이요. 성도후에 여기는, 思惟如是事라. 이치에 대해서 말하자면 깨달았고 깨달음에 대한 내용과 이 깨달음을 어떻게 회향할 것인가? 이런 것을 전부 이제 생각한거요. 그래 21일간『화엄경』을 21일간 설했다라고 하는, 그래 삼칠일기도 하는 것도 이런데서 나온 거요. 그 일주일간 용맹정진하는 것도, 우리가 보통 일주일을 기한으로 잡든지 아니면 삼칠일 잡든지 일주일을 단위를 끊어서 하는 것도 다 불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칠일 가운데서 이와같은 일을 사유하대
我所得智慧는 微妙最第一이라
내가 얻은 바 지혜는, 내가 깨달은 이 지혜는 미묘해서 제일이야. 이 이상 덮을 게 없어. 이 세상에서 최고건마는
衆生諸根鈍하여 著樂癡所盲이라
중생들이 모두들 근기가 둔해가지고서 根鈍해서, 著樂 즐거움에 집착해가지고서 그 어리석음이 눈 먼거와 같다. 눈 먼 바가 되었다. 어리석음에 눈 먼 바가 되었다.
이건 이제 방편설을 설하게 되는 내력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가 왜 방편설을 설하게 됐는가? 사실 방편설 안 설해야 되는데 어쩔수없이 중생들을, 그 근기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방편설을 설하게 되었다. 이렇게 봉사가 되어서 캄캄한 데 내가 어찌 그걸 그냥 두나? 또 거기나 무턱대고 최상승법만 무조건‘사람이 부처님이다.’이 최상승법만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나? 그게 먹혀들면 좋지만은 먹혀들지 않으니까 그래서 보면은
如斯之等類를 云何而可度어뇨
이와같은 等의 일들을 어떻게해야 이 사람들을 제도할 것인가? 저렇게 캄캄한 데“너는 1톤짜리 다이야몬드야!”이렇게 말해도 그게 먹혀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107 爾時諸梵王 及諸天帝釋 護世四天王 及大自在天 幷餘諸天衆
이시제범왕 급제천제석 호세사천왕 급대자재천 병여제천중
眷屬百千萬 恭敬合掌禮 請我轉法輪
권속백천만 공경합장례 청아전법륜
爾時諸梵王과 及諸天帝釋과 護世四天王과 及大自在天과 幷餘諸天衆의 眷屬百千萬이
여기 거 보세요. 그때에 梵王 범천왕과 그리고 天帝釋 제석천왕과 그리고 세상을 보호하는 사천왕과 그리고 대자재천왕 大自在天과 그리고 나머지 모든 天衆들이 또 그 권속들까지 백천만이나 돼. 백천만이나 되는 그런 이들이 그러니까 이건 뭐 꼭 그런 천신들이 그렇게 했다라기 보다는, 말하자면 세상의 아주 가장 지성인들 정말“부처님 열반에 들면 안됩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차원을 낮춰서 저 유치원생들 부터라도 가르치는 그런 입장을 취해서 차츰차츰 성숙시켜서 최상승법『법화경』을 설하시면 될 것이 아닙니까?”하는 그런 그 요청을 이제 하게 됐다 하는 그런 내용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와가지고
恭敬合掌禮하고 請我轉法輪거늘
공경하고 합장하고 예배하면서 나에게 청했다 이말이야. 나에게 법륜 굴리기를 청하거늘,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법을 좀 어떻게 하더라도 좀 굴려주십시오. 轉法輪 좋은 말이여. 전법륜, 법륜 굴리기를 청하거늘
108 我卽自思惟 若但讚佛乘 衆生沒在苦 不能信是法 破法不信故
아즉자사유 약단찬불승 중생몰재고 불능신시법 파법불신고
墜於三惡道 我寧不說法 疾入於涅槃 尋念過去佛 所行方便力
추어삼악도 아녕불설법 질입어열반 심념과거불 소행방편력
我今所得道 亦應說三乘
아금소득도 역응설삼승
我卽自思惟하대 若但讚佛乘이면
내가 바로 그 자리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대 만약 다만 佛乘만 찬탄하면‘당신은 부처님’금년에 최고의 멘트‘당신은 부처님’으하하하 지난해 최고의 멘트가‘당신은 부처님’이라대.‘당신은 부처님’이 소리만 하면은, 그 말이여.‘若但讚佛乘이며’만약에 다만 불승만 찬탄하면은‘당신은 부처님’그 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니나 잘해봐라.”그런거야. 안 먹혀든다 그 말이여. 다 여기는 근기가 성숙돼서 그런 내용 다 알아들으니까 이제 그런 말을 해도 먹혀들지만은, 그래서 若但讚佛乘이야. 만약에 다만 불승만 찬탄하면, 아~ 이런 소리가 집에 가서 쓰고 싶지 않아요? 도대체, 하하하하 얼마나 쓰고 싶어요. 하나하나 한 구절 한 구절. 불승이며
衆生沒在苦야
중생들이 고통에 빠져 있게 된다 이 말이여. 그“니나 잘 해봐라.”하고 도대체 들은 척도 안한다 이거여. 그래 고통속에 그대로 살아간다 이거지.
不能信是法일새
능히 이 법을 믿지 아니할새. 이 봐요. 다 돼있잖아. 내가 뭐 엉뚱한 소리 하나요. 부처님께 배운 소리 백분의 일도 다 못해. 사실은, 대개 아주 선진화된 앞선 소리 하는 것 같지만은, 사실은 이 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한 소리 백분의 일도 표현 못하고 있는 거에요. 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不能信是法일새’능히 이 법을 믿지 아니할새
破法不信故로
법을 파괴해서 믿지 아니한 고로, 안 믿으면 좋지만은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에이 저 사람 외도야. 엉터리 소리야. 불교 아무것도 아니야. 너무 이상한 소리나 해. 구름잡는 소리나 해.”하고 이렇게해서 불교를 아주 온전하게 보지 않는거요. 그래서 그걸 破法이라 그래. 법을 파괴해서 믿지 아니한 까닭으로
墜於三惡道리니
삼악도에 떨어지리니‘정말 1톤이나 되는 다이야몬드 소가 바로 그 자신이다.’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해도“아니야. 뭐 나는 하찮은 존재야.”하고 저기 뭐 인간의 종으로, 하찮은 인간으로 그렇게 사는 거지. 墜於三惡道리니
我寧不說法하고 疾入於涅槃이라하다가
그래서 내가 차라리 설법하지 말고 그만 열반에 들어버릴련다.“에이 뭐 저런 중생들, 무지몽매한 중생들 내가 답답하게 언제 가르키겠노. 나 그만 입 다물고 있다가 그만 죽어버릴란다.”이 소리요. 용어를 아주 고급스러운 열반으로 써놔서 그렇지 우리식으로 표현하면“에이 나 그만 이대로 있다가 그만 마 죽고말지.”이렇게까지 생각했다는 거요.
내가 차라리 不說法하고, 차라리 녕(寧)자 써 놨잖아. 我寧 안녕할 녕자가 차라리 녕자요. 내가 차라리 설법하지 말고 빨리 그것도 빨리 열반에, 빨리 열반에 든단 소리가 뭐요? 자살한단 소리요 뭐요? 아이 깨놓고 이야기하면 그런 뜻도 담겨있잖아요. 그대로 그냥 천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시지 말 안하더라도 疾入於涅槃이라 했잖아. 빨리 질(疾)자요. 이게, 병 질자도 되지만은 빨리 질자라. 빨리 열반에 들려고 하다가
尋念過去佛에 所行方便力하고
마침내 과거 부처님, 과거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가? 이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 그래서 所行方便力이라. 그들이 행한 바 방편의 힘을 생각하고
我今所得道도 亦應說三乘이로다
내가 지금에 얻은 바 道도, 그 과거 방편력으로 과거 부처님이 방편으로 전부 최상의『법화경』의 도리는 제쳐놓고 저『아함경』부터, 아주 소승경전부터 유치원생들 가르치는 수준으로 차츰차츰 이렇게 가르쳐왔다라고 하는 이 이야기에요. 그래서 나도 또한 그들을 따라서 三乘 삼승의 가르침을 설할 것이다. 이렇게 이제 생각을 하게 됐다 이 말이죠.
109 作是思惟時 十方佛皆現 梵音慰喩我 善哉釋迦文 第一之導師
작시사유시 시방불개현 범음위유아 선재석가문 제일지도사
得是無上法 隨諸一切佛 而用方便力
득시무상법 수제일체불 이용방편력
作是思惟時에 十方佛皆現하사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할 때에 시방 부처님이 다 나타나가지고, 과거의 시방 부처님이 다 나타나가지고“옳소! 옳소! 좋습니다! 좋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셨습니까?”하고
梵音慰喩我라 善哉釋迦文
범음으로 아주 그윽한 소리로 나를 아주 위로하고 깨우쳐서, 석가모니도‘선재 선재’소리 들었어. 하하하하 우리만 부처님으로부터 듣는 게 아니고“하~ 선재 선재라 석가모니여!”이렇게 한 거지.
第一之導師여 得是無上法하고 隨諸一切佛하야 而用方便力이로다
제일가는 도사시여! 이 無上法 최상가는 법을 얻고도 모든 과거 부처님의 행적을 따라가지고서 방편력을 쓰는구나. 그 참~ 답답하거든요. 유치원생들 가르칠라고 해봐. 얼마나 답답해. 그 얼마나 이제 부처님의 그런 마음을 딱 먹었으니까, 얼마나 과거 부처님과 온갖 천신들과 주변의 지식인들 훌륭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텐데 그들이 얼마나 마음을 놓았겠어요.‘아 저 분이 열반에 안 들고 그래도 중생을 제도할려고 마음을 먹었구나.’그렇게 해가지고 이제 할 수 없이 이제 과거 부처님이 방편력을 썼듯이 당신도 그렇게 하게됐다 하는 거에요.
110 我等亦皆得 最妙第一法 爲諸衆生類 分別說三乘
아등역개득 최묘제일법 위제중생류 분별설삼승
我等亦皆得最妙第一法이언만은 爲諸衆生類하야 分別說三乘호라
우리들도 또한 다 최고가는 제일법을 얻었건만은 여러 중생의 종류들을 위해서 分別해서 나눠가지고 쪼개가지고 삼승을 설하는도다. 설한다. 이 말이여.
그러니까 나처럼 뭐‘사람이 부처님이다. 사람이 부처님이다.’자꾸 이렇게 쉽고 하긴 하지만은 그래도 아주 미세하게 아주 그 분별해서 그 근기와 그 사람의 성향에 맞춰서 세세하게 그렇게 밟아가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그런 다양한 가르침 많고 많은 학설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그걸 이제 한테 묶은게‘팔만대장경’아닙니까? 팔만대장경은 한 없이 근기따라서 이런저런 그 가르침을 펼쳐놓다 보니까 그렇게 많은 가르침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딱 간단하게 한 마디로 하면‘당신은 부처님’이 한 마디야. 그냥, 최고 제일 이제 너무 수준이 높아서 그렇지. 수준이 높아서 그렇지만은 결론은 그거에요.
111 小智樂小法 不自信作佛 是故以方便 分別說諸果 雖復說三乘
소지락소법 부자신작불 시고이방편 분별설제과 수부설삼승
但爲敎菩薩
단위교보살
小智樂小法하야 不自信作佛일새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은 소법을 좋아해. 즐겨해.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것을 믿지 안해. 자신이 부처란 건 안 믿는다 이 말이여.“아이고 나는 뭐 그런 거 필요없다고, 부처되는 거 필요없다고. 다이야몬드 1톤짜리 다이야몬드 뭐하게 뭐 조그만한 거 그 뭐죠 이제 반지나 할 정도 있으면 되지 뭐할라고 그 1톤짜리 다이야몬드.”이러고 있는거야. 사람 마음이 작으면 그렇게 된 다고요. 참 우리가 그런 상황에 있다손치면은 얼마나 갑갑하고 답답하겠어요. 아 1톤짜리 다이야몬드를 나두고“아 나 그거 필요없다고 조그만한 거 그저 반지 하나 할 정도만 달라고”하면은 참~ 속 터지지 속 터져. 이게 그런 이야기에요. 비유하자면은‘不自信作佛일새’
是故以方便으로 分別說諸果호니
그런 까닭에 방편으로써 분별해서 여러 果를 설하니, 여러 결과 諸果 分別說諸果 분별해서 여러 가지 결과를 설해놨다.‘심중소구소망(心中所求所望)’온갖 마음에 구하는 바 일체것이 다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그런 그 온갖 방편설을 다 펼쳐놨죠.
그래서 기도라는 게 있나하고 내가『대장경』에 찾아보니 기도라는 말이 옛날에는 없었어. 중간에 만든 불교요. 기도불교, 호국불교도 중간에 만든 불교요. 호국불교, 그 중간에 만든 우리가 필요해서 우리 그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진 그런 불교가 많아요. 그것도 필요하죠. 시대에 따라서 사람의 성향이 다르고 요구가 다르니까 그것을 만들어서 자꾸 이제 불교를 내 놓는거죠.
그런데 여기에는 이제 방편으로써 분별해서 이렇게 여러 가지 결과를 설한다 라고 하는 이 원칙에 이제 따라가는 거지. 저절로 또 그렇게 되고요. 시대가 바뀌면은 그 시대의 사람의 성향에 맞게 그런 그 가르침이 존재하게 됩니다.
雖復說三乘이나 但爲敎菩薩이니라
비록 다시 三乘을 설하나 다만 보살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니라.
112 舍利弗當知 我聞聖師子 深淨微妙音 稱南無諸佛 復作如是念
사리불당지 아문성사자 심정미묘음 칭나무제불 부작여시념
我出濁惡世 如諸佛所說 我亦隨順行
아출탁악세 여제불소설 아역수순행
舍利弗當知하라 我聞聖師子의 深淨微妙音하사옵고 稱南無諸佛하며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내가 들으니 聖師子 성사자는 부처님, 깨달은 분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聖師子 성스러운 사자의 깊고 청정한 미묘음을 듣사옵고 듣고 한 번 南無諸佛 南無佛 뭐 같은 사람입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많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여러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라고 이렇게 하며
復作如是念하대 我出濁惡世호니
또한 다시 이와같은 생각을 하대 내가 濁惡世 탁악한 세상에, 탁하고 악한 세상에 나왔으니
如諸佛所說하야 我亦隨順行하리라
모든 부처님이 설한 바와 같아서 나도 또한 이 세상에 나왔으니 어떡해. 저 악한 세상 중생들을 따라서 나도 같이 더불어 살아야지 어떡해 하겠나 이런 뜻입니다.‘我亦隨順行하리라.’나도 또한 수순해서 살리라.
113 思惟是事已 卽趣波羅奈 諸法寂滅相 不可以言宣 以方便力故
사유시사이 즉취바라나 제법적멸상 불가이언선 이방편력고
爲五比丘說 是名轉法輪 便有涅槃音 及以阿羅漢 法僧差別名
위오비구설 시명전법륜 변유열반음 급이아라한 법승차별명
思惟是事已하고 卽趣波羅奈하야
이와같은 일을 사유하고 나서 波羅奈시 녹야원이죠. 베나레스 거기에 이제 나아가지고 그러니까 거기까지 갔잖아요. 거기가서 오비구를 만나서 처음으로 입을 떼기 시작했죠.
諸法寂滅相을 不可以言宣이언만은 以方便力故로 爲五比丘說호니
제법의 적멸한 모습을 가이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지만은 그렇지만은 방편의 힘을 쓴 까닭으로 五比丘를 위해서 설했다.
맨 처음에 같이 공부한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이, 이 사람들은 뭐 출가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부왕(父王) 정반왕이 자기 태자 보호하라고 다섯 명을 그 경호로 딸려 보낸 사람들이 이 오비구입니다. 이 사람들 뭐 출가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에요. 아이 왕자가 출가했으니까 그 경호원이 있어야 될 게 아니야. 처음에는 혼자했지만은 나중에 출가했단 사실을 알고는 다섯 명을 뽑아가지고서“네가 같이 출가하고 같이 수행하고 경호도 해라.”그렇게해서 보낸 사람들이 이 다섯 명이야.
그래가지고 6년간 고행 같이 했는데, 어느 날 싯다르타 태자는 척 가서 말이야 처녀가 끓여주는 우유죽도 막 먹고 또 저기가서 목욕하고, 가시 찔리고 고행하고 아 흙먼지 뒤짚어 쓰고 하는 게 자기들 수행인데 아 그거 다 깨끗이 그 강물에 가서 씻어버리고 깨끗한 몸으로 또 시원한데, 그 앉아있으면 안 되거든요. 고행하는 사람이, 근데 시원한 보리수밑에 척 이렇게 그것도 길상초란 풀을 떡 뜯어가지고 뭐 바위나 모래위나 아무데나 앉지. 풀을 떡 뜯어가지고는 편안한 자리 만들려고, 거기 딱 앉아가지고 있으니까 이 다섯 명이 놀라가지고는‘이 저 사람 변했다. 타락했다. 완전히 이제 수행을 포기한 사람이다.’이렇게 생각하고 이제 떠나버렸죠.
그래 먼저 바라나시 베나레스에 가서 어쩌다보니 거기 있었어. 그리고나서는 이제 부처님은 일주일후에 깨달았고 그리고 삼칠일이 걸렸고 그리고나서 사유하는데 삼칠일이 걸리고 그리고나서 베나레스로 갔어요. 그 이제 은혜가 깊은 사람들이 다섯 비구죠. 왜냐하면 자기 때문에 고생했고 마음에도 없는 출가를 했고 그리고 또 나중에는 이제 이 사람들도 열심히 수행했는데, 제일 생각나는 게 그 사람들이라. 근데 그 사람들은 아직도 고행의 삶이야말로 가치있는 삶이라고 하는 생각에 젖어있는 삶이야. 사람들이라. 그래서 그걸 마음을 돌이켜 줘야되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그 사람들을 찾아 간거야.
또 또 한 가지 베나레스라고 하는 도시는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이 다 모이는 도시야. 그래 거기서 한 번 자기의 깨달음을 선포를 하고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선포를 해서 거기서 인정을 받아야 돼. 그래야 인도 사회에서 종교 지도자로써 말하자면은 큰 소리를 칠 수 있고 제자들을 가르칠 수가 있지. 거기가서 그 기존의 성자들하고 어떤 사상적인 어떤 그 대결이나 사상적인 논란에서 져버리거나 잘못돼버리면은 이거는 이제 명함도 못 내는 거죠. 인도 사회에서, 그래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은,
오비구를 만나러 간 것도 하나의 그 목적이 되고 또 베나레스라는 그 도시에 가서 그 기존의 모든 성자들, 모든 수행자들하고 그 전부 이렇게 서로 깨달음에 대해서, 사상에 대해서 이렇게 토론을 해서 말하자면 거기서 진정한 진리를 깨달았다라고 하는 그런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이제 종교 지도자로써의 행세를 할 수가 있는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그 오비구는 아약교진여라고 들어봤죠? 아섭 바시 그 다음에 발제, 마하남 또 십육가섭 그렇게 다섯 명이고 그 다음에 야사라고 하는 그 야사 아주 그 부잣집 아들이 이제 청년들하고 놀러갔다가 부처님 제자가 된 그런 그 사람 그까지 합하면 육비구죠.
그래서 방편을 쓴 고로 오비구를 위해서 설하시니
是名轉法輪이라
이것이 이름이 전법륜이다. 법륜을 굴린 것이다.
便有涅槃音과 及以阿羅漢과 法僧差別名호라
곧 열반의 소리와, 열반이라고 하는 말도 생겼고 그리고 아라한이라는 말도 그때 생겼고 그 다음에 법이니 승이니 하는 차별된 이름이 있게 되었다.
그렇죠. 부처님이 있었죠. 그 다음에 부처님이 열반을 증득했고 그 다음에 이제 중간에 공부한 사람들은 아라한이다 라고 할 수가 있고 법이다. 가르침을 법이다라고 하고 따르는 제자들은 승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름들이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말입니다.
오늘 뭐 성도재일을 앞두고 부처님 그 생애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나마 다 소개가 되네요.
114 從久遠劫來 讚示涅槃法 生死苦永盡 我常如是說
종구원겁래 찬시열반법 생사고영진 아상여시설
從久遠劫來로 讚示涅槃法하대
옛날 아주 오랜 세월전으로부터 옴으로 열반의 도리를 찬탄해서 보이대
生死苦永盡이라하야
생사의 고통을 영원히 없앤다 라고 이렇게 이제 꼰거요. 워낙 고통스러운 삶을 사니까“생사가 없다. 온갖 고통 다 떠날 것이다.”라고 이렇게 열반을 하나 딱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이제 해서
我常如是說호라
나는 항상 이와같은 이야기를, 열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열반은 이제 불어서 끄다. 활활타는 불이 다 이제 꺼지고 재가 싸늘하게 식어버린거와 같이 우리 사람의 마음도 뭐 고통도 뭐 즐거움도 일체의식까지도 다 싸늘하게 식은 재와같이 그렇게 된다. 그렇게 되도록 어떻게하든 맘을 가라앉히고 가라앉히고 가라앉혀라. 이렇게 가르치는게 열반법이에요.
그게 이제 일시적으로는 가능하지만은 또 어떤 경계를 만나면은 또 마음이 들끓거든요. 그래 마음이 들고 일어나버리면은 또 이제 그게 열반은 무효가 되는것입니다. 뭐 완전하게 증득한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유여열반(有餘涅槃), 무여열반(無餘涅槃) 그래요. 살아있을때 아무리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어도 그거는 아직도 불완전 열반이야. 완전하지 못한 열반이야. 그래 무여열반이라고 하는 거. 죽어야 이제 완전하다 이래요. 그래서 죽음을 갖다가 무여열반 그래요. 남음이 없는 열반이다. 그 죽기전에는 유여열반이야. 남음이 있는 열반. 아직도 불완전하 열반이다. 이렇게 표현을 한다고요.
그래 그거는 아무리 마음을 식은 재처럼 가라앉히고 가라앉힌다 하더라도 이거는 답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그렇게 가라앉히고 있는 동안 좋죠. 일단, 그렇지만 그게 완전한게 아니거든요. 죽어야 완전하지. 그야말로 죽어야 무여열반이 되는 거지.‘我常如是說호라’내가 항상 이와같은 이야기를 했다.
115 舍利弗當知 我見佛子等 志求佛道者 無量千萬億 咸以恭敬心
사리불당지 아견불자등 지구불도자 무량천만억 함이공경심
皆來至佛所 曾從諸佛聞 方便所說法 我卽作是念 如來所以出
개래지불소 증종제불문 방편소설법 아즉작시념 여래소이출
爲說佛慧故 今正是其時
위설불혜고 금정시기시
舍利弗當知하라 我見佛子等의 志求佛道者가 無量千萬億이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내가 보니 불자들의 마음에 불도를 구하는 사람들이 무량백천억이 됐다 이 말이여.
咸以恭敬心으로 皆來至佛所라
모두들 공경하는 마음으로써 모두 내한테 와. 모두 내한테 와서 이르니
曾從諸佛聞 方便所說法이라
일찍이 모든 깨달은 사람으로부터 방편으로 설한 바 법을 들었으니라.
我卽作是念하대 如來所以出은
내가 곧 이러한 생각을 하대. 여래가 이 세상에 오신 뜻은
爲說佛慧故라
부처의 지혜, 내가 깨달은 그 궁극적인 지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거여. 이게 목적이다 이거요. 열반이야기 하려고 온게 아니다 이거야. 내가 깨달은 부처의 지혜를 설해주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今正是其時로다
근데 지금『법화경』을 설한 이 때가 바로 그 때다 이 말이요. 지금까지『법화경』을 설하기 전까지는 전부 방편설이다. 이 말입니다. 方便說 그저 고통스러운 사람들 어쩌면 일시적이나마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까? 그 방법만 이야기한거에요. 나머지 모든 소승의 가르침들은 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이야기가 돼요.‘今正是其時라’지금이야 바로 그때다 이 말이요. 부처의 지혜를 가르쳐줄 그런 때다.
116 舍利弗當知 鈍根小智人 著相橋慢者 不能信是法 今我喜無畏
사리불당지 둔근소지인 착상교만자 불능신시법 금아희무외
於諸菩薩中 正直捨方便 但說無上道
어제보살중 정직사방편 단설무상도
舍利弗當知하라 鈍根小智人과 著相橋慢者는 不能信是法일새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둔한 근기와 지혜가 작은 사람과 相에, 상에 집착한 교만한 사람들은 능히 이 법을 믿지를 못할새.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의 지혜‘사람이 부처님이다.’‘당신은 부처님’하는 그것을 믿지를 못할새
今我喜無畏하야 於諸菩薩中에
지금에 내가 無畏 기뻐하고 두려움이 없어서 이제는 인제 기쁜 마음으로 두려움이 없다 이거에요. 그래서 모든 보살들 가운데서
正直捨方便하고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그래 방편을 쓰는 것은 사실은 엄격하게 따지면은 정직하지 못한거죠. 어머니가 우는 아이 달랠려고 듣도 보던 못한 호랑이가“밖에 호랑이 왔다.”라고 하는 것은, 냉정하게 우리가 이야기하면 정직하지 못한 거잖아요. 아 오지도 않는 호랑이가 왔다니까 부모가 정직하지 못한 거지. 그 방편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그거는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는 사실이 이런데서 들어난 거요. 목적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그런 뜻도 사실은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는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했잖아. 이제는 더 이상 겁낼게 없다. 그리고는
但說無上道호라
다만 無上道를 설한다. 최상가는 도를 내가 설한다. 이제는, 이제는 나도 죽을날 며칠 안 남았는데 이때 바른 말 안하고 언제 바른 말 하겠느냐? 이게『법화경』이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무상도를 설한다.
117 菩薩聞是法 疑網皆已除 千二百羅漢 悉亦當作佛
보살문시법 의망개이제 천이백나한 실역당작불
菩薩聞是法하고 疑網皆已除라
보살들이 이 법을 듣고서는 의심의 그물이 다 이제 제해져서. 다 이미 제해져서.
千二百羅漢도
그래서 천이백 아라한들도, 천이백 늘 따라다니는 상수제자들이죠.‘천이백오십인이’그렇게 돼 있잖습니까? 천이백 아라한들도
悉亦當作佛이니라
다 또한 마땅히 부처를 짓는다. 그 전에는 부처된다는 소리 한 번도 못했어요. 그저 기껏해야 아라한이다.“니는 뭐 잘해봐야 아라한이다.”그랬지만은『법화경』에 와서 부처다라고, 부처가 된다라고 처음에는 그래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저「상불경보살품」에 가면은 바로 부처다라고 막 그렇게 이야기해. 내용은 바로 부처다 이 말이여. 부처가 된단 뜻이 아닙니다. 바로 부처다 이 말이여. 그렇게 이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법화경』의 정신입니다.
참 그래서 이『법화경』을 공부를 해야 불교의 그 경전중에서 완전한 공부를 한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법화경』은 부처님 교설(敎說)의 완성이다. 부처님 교설이 많은데 그 중에 완성판이, 완결판이『법화경』이다. 이렇게 이제 말합니다. 그 틀림없어요.
여기 이제 그동안 쭈욱 오늘 이제 내력을 보면은, 부처님이 처음에 고행하다가 저 보리수아래 앉아가지고 삼칠일동안 어떻게 하고 뭐 방편을 설하게 된 그런 내력들을 쭈욱 이야기를 했잖습니까? 그래 여기와서는 전부 천이백 아라한들이 아라한중에서 대표인데, 그 사람들에게 한 번도 부처된다는 소리는 안 했는데 여기는‘悉亦皆當作佛이라’모두들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까지 돼 있습니다. 이게 아주 그래서 참『법화경』이 경중의 왕이다라고 이야기 할 만 하고 또 그 만한 이제 가치도 있고 그런 그 내용입니다.
그래서 불자가 되어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을 믿고 불교를 믿고하면서 만약에『법화경』을 공부못했다. 그러면은 참 헛수고다. 허 참 안타깝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뭐 꼭『법화경』이 여기서만 공부되는 것도 아니고 책으로도 다 나와있고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속에 감춰져있는 뜻까지 다 들춰내서 이렇게 하는 그 이야기를 반드시 이제 들어야, 이 속에 숨어있는 뜻을 우리가 다 알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여러 가지 인연과 매체를 통해가지고 그 이러한 이치를 좀 듣고 보고 읽고 알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그 길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걸 주위 사람들에게 또 많이 권해야 돼. 많이 권해가지고 뭐 여기에 안와도 얼마든지 그런 길이 있으니까 이런 이치를 알도록 하는 이것도 하나의 자비심이고 이것도 하나의 관세음보살 역할을 하는 거에요. 관세음보살이 자비가 너무 커서 뭐 하~ 별별 인간의 그 잡다한 소원들을 다 들어주는 그런 그 일을 하지만은 우리는 우선 그거는 못한다손 치더라도 이런 그 법으로써의 안내. 법을 나눠주는 그런 어떤 그 관세음보살의 한 백분의 일 정도 되는 그런 역할만이라도 우리가 일단은 해야된다고 하는 거죠. 그래야 이제『법화경』공부한 그런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또 보람이 있는 것이구요. 또 그렇게 회향하는 것이고, 공부한 것을 그렇게 회향을 해야 또 제대로 하는 거죠.
2009년이네 벌써요. 2009년을 맞아서 첫 법문 오늘 이렇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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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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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교설의 완성판인 {법화경}을 새기고 또 새기며 마음도량에 가득 담을 수 있게 해 주신 화풍정 법우님,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이 아침 환희로움으로 시작합니다 ..._()()()_
화풍정님, 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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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是衆生故로 而起大悲心하니라...고맙습니다..화풍정 님! _()()()_
화풍정님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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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나무묘법연화경-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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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來所以出은 爲說佛慧故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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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았읍니다
사람의 존귀한 가치를 이해하고 할 일은 무엇이냐?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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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2번째 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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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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