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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윤호진*1)
【국문초록】
이 논문은 洪履祥의 13대 후손 洪基弘씨가 소장하고 있는 輓詞․祭文에
드러나 있는 慕堂 洪履祥의 여러 가지 모습과 인식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홍이상은 慕堂集이란 문집을 남기고 있는데, 그 안에는 홍이상이 세상을 떠
났을 때 지은 만사와 제문 특히 만사가 극히 적은 양이 수록되어 있었다. 동시대
인물들의 문집을 검색하여 보아도 홍이상의 만사는 몇 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홍기홍 씨가 소장하고 있는 만사․제문에는 만사가 71제 83수가 수
록되었고, 제문이 13편 수록되었다. 여기의 만사는 모당집에 거의 실리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며, 특히 만사 작자의 문집에도 수록되지 않은 것이 대다수이다. 따
라서 이 만사들은 홍이상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당대 만사 작자들
의 작품을 추가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만사에는 貞明公主의 커다
란 도장이 앞 뒤에 찍혀 있고, 정명공주가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도 한 수 실려
있어 이 책의 가치를 더해준다.
이 논문에서는 만사․제문에 수록된 만사를 중심으로 홍이상의 만사를 지은
작자들이 홍이상을 생각하는 모습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는 홍이상의 죽음에 대한 생각인데, 대체로 그의 죽음을 보고 매우 애석해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다만 죽음에 앞서 그가 고양으로 물러나 은퇴하였다가
병이 들어 돌아가게 된 과정을 묘사한 부분도 죽음을 읊은 것과 관련지어 애석해
하는 마음을 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홍이상이 학자로서의 자질과 학문적 성과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끝난 것
* 경상대
200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을 아쉬워하는 내용이다. 이에 겸하여 문장도 뛰어나다고 하였고, 특히 그는 효성
으로 대표되는 훌륭한 행실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셋째는 그가 과거시험에서 합격한 것에 대한 것이다. 당시 과거는 한 사람의 인
생을 결정짓는 커다란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특히 홍이상이 세 차례의 장원 급제
를 하는 등 두드러지게 뛰어난 모습을 보인 것과 이러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한 슬픔을 노래했다.
넷째는 자손의 번성함을 통하여 고인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이다. 홍이상에게는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뛰어나 옛날 진나라 때 謝氏 집안의 뛰어난 사람
들, 荀氏의 여덟 아들들에 비유되었고, 또한 용봉, 난옥 등 고귀한 사물로 표현하
며, 이들이 집안을 일으키고 가업을 이어갈 것이라며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이상에서 이야기한 것 이외에 다른 다양한 것에 대한 예찬 및 평가이
다. 타고난 성품이라든지, 뛰어난 능력,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경로연을 베풀었던
일 등 여러 가지와 혹은 평생의 많은 일을 한꺼번에 시에 소개해 놓은 것 등이다.
핵심어:慕堂, 洪履祥, 輓詞․祭文, 慕堂集, 貞明公主, 죽음, 은퇴, 슬
픔, 자질, 성과, 효성, 행실, 과거시험, 장원급제, 자손, 번성함, 성품,
능력, 경로연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01
차례
1. 머리말
2. 輓詞․祭文이란 책에 대하여
3.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哀悼의 感情
3.1. 臥病과 죽음에 대해 哀悼
3.2. 學問과 行實에 대한 評價
3.3. 壯元과 벼슬살이에 대한 羨望
3.4. 子孫의 번성함을 통한 慰勞
3.5. 기타 平生의 行蹟에 대한 稱頌
4. 輓詞․祭文의 學術的 價値와 意義
5. 맺음말
1. 머리말
慕堂 洪履祥은 개성유수로 나갔다가 임기가 끝나 그만 두면서 고향인
고양으로 물러나 살다가 병이 들어 이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돌아갔을 때 수많은 사람이 만사와 제문을 지었다.
대개의 경우 만사와 제문은 문집의 부록으로 실려 전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고인의 만사와 제문을 참고할 경우 우선적으로 문집의 부록으로
실린 만사와 제문을 참고하고, 혹시 누락된 것이 있는가 확인할 경우는 그
시대 인물들의 문집을 검색하여 찾아내기도 한다.
홍이상의 경우도 모당집에 만사와 제문이 실려 있는데, 만사가 대략
4제 8수, 제문이 10편이다. 이처럼 문집에 부록으로 수록된 것 이외에 개별
문집에서 검색하여 찾기도 하여, 이들을 모아 모당집을 번역해 낸 바 있다.
하지만, 慕堂의 14代孫이며 홍이상의 장자인 芝溪의 私派宗孫인 洪起
弘 님이 소장하고 있던 책에는 홍이상에 대한 만사가 71제 83수가 수록되
었고, 제문이 13편 수록되었다. 여기에는 이뿐만 아니라, 홍이상의 모부인
202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인 문경 백씨에 대한 만사와 홍이상의 부인인 안동 김씨에 대한 만사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홍이상의 만사는 문집에 수록된 것과 중복되는 경우
도 있으나 이는 아주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문집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며, 작자의 문집에도 수록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에서는 이처럼 홍이상에 대한 만사가 다수 새로 발굴됨에 따라 이
를 통하여 당대 문인들이 홍이상이 돌아간 뒤에 홍이상에 대해 주로 어떠
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좀 더 구체적
으로 말하자면, 이 논문에서는 만사․제문이란 책에 실린 것 가운데 홍
이상에 대한 만사를 중심으로, 그 만사에 드러난 홍이상의 여러 가지 면모
와 그에 대한 만사 작자의 감정 등을 자세히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2. 輓詞․祭文이란 책에 대하여
이 책은 홍이상의 장자인 芝溪 洪霶의 후손으로 홍이상의 14대손인 홍
기홍 씨 家藏本이다. 이 책에는 慕堂 洪履祥의 모부인 聞慶 白氏에 대한
輓詞, 慕堂에 대한 輓詞와 祭文, 홍이상의 부인 安東 金氏에 대한 만사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책 표지 外面에 輓詞 祭文이라고 세로로 두 줄로 쓰여 있으며,
표지 내면에는 낙서가 되어 있다. 두 번째 장에는 모당 홍이상의 손자인
洪柱元에게 시집온 貞明公主의 인장이 찍혀 있다. 가로 세로 대략 5센티
정도의 큰 도장이 붉은 인주로 짙게 찍혀 있다. 이 책은 한 면이 20자 10행
으로 정갈한 행서로 되어 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필체로 필사
되어 있다.
이 책의 첫 장에는 洪霙澤芳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는데, 이는 정명공주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03
의 시아버지인 홍영의 인장으로, 홍영의 자가 택방이다. 이 책의 내용에
32인이 지은 모당 홍이상의 모부인 문경 백씨에 대한 만사가 실려 있고,
이어서 71인이 쓴 홍이상에 대한 만사와 제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맨 뒤에
41인이 쓴 안동 김씨에 대한 만사가 실려 있다.
뒷 표지 내면에는 초서로 쓴 시 한 수가 있고, 앞표지에 있는 것과 같은
정명공주의 인장이 찍혀 있다. 이 시는 5언율시의 작품인데, 누구의 시이고
누가 썼는지는 분명히 그러나 있지 않다. 그런데 정명공주의 인장이 바로
그곳에 찍혀 있으며, 만사․제문의 글씨체와 달리 초서를 섞어 또박또
박 격조 있게 쓴 것으로 보아 정명공주가 직접 짓고 쓴 것일 가능성도 배제
할 수는 없다. 시는 다음과 같다.
풍우가 아 어찌하여 이르렀는가? 風雨嗟何及,
부생이 깃털 하나처럼 가볍다. 浮生一羽輕.
푸른 산에 몸소 산소자리를 정하였는데, 靑山躬卜兆,
흰 얼굴로 아직 이름을 이루지 못했네. 白面未成名.
아낙은 살아남아서 해로를 걱정하는데, 婦在患偕老,
아이가 어지니 뒷날의 명성 의탁해도 되겠네. 兒賢托後聲.
해마다 한강 가에서는, 年年漢江上,
봄풀에 마음을 이기지 못하네. 春草不勝情.
이 시의 내용은 대략 아낙이 집안일을 걱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成名
을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뒤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아이
들이 훗날 명성을 드날려 주기를 바라는 심경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집안
의 어른으로서 일찍 가장을 잃은 아낙을 위로하는 글로 생각되는데, 아마
도 정명공주가 자신의 아들을 일찍 잃고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정명공주(1603~1685)는 선조의 첫째 딸로, 어머니는 領敦寧府事 延興
204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府院君 金悌男의 딸 仁穆王妃이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영창대군을 역모죄
로 사사하고 계비 인목대비를 폐출시켜 西宮에 감금할 때 공주도 廢庶人되
어 서궁에 감금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면서 공주로 복권되고,
1623년(인조 1)에 동지중추부사 洪霙의 아들인 洪柱元에게 시집을 갔다.1)
정명공주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洪萬容이고 둘째는 洪萬
衡이었는데, 바로 홍만형이 37살의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정명공주가 가장을 잃은 둘째 아들집에 기거하며 집안을 돌보았다고 한다.2)
그리고 정명공주는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대필에 뛰어났다고 한다. 이 시의
내용과 서체, 그리고 홍만형의 요절 등의 여러 가지 사실은, 이 시의 작자가
정명공주일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는 단서가 되는 것들이라 하겠다.
이 책의 첫 장에는 ‘聞慶白氏位輓’ 이라는 조그만 間紙가 있고 이어서
만사라는 말이 있고, 같은 행에 이어서 의정부 영의정 李德馨의 만사가
실려 있다. 그 아래에는 洪英澤의 인장이 찍혀 있다. 그 다음 시는 又라는
제목 아래 작자를 관직명과 함께 소개하였다.
여기에는 의정부 영의정 이덕형, 의정부 좌의정 李恒福, 의정부 우의정
沈喜壽 등 삼정승을 비롯하여 당시의 이름난 인물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
는데, 만사를 지은 사람과 수록된 시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작자의 관직 작자 시형식 작품수
議政府領議政
議政府左議政
議政府右議政
淸平府院君
海平府院君
晉原府院君
李德馨
李恒福
沈喜壽
韓應寅
尹根壽
柳根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1
1
2
1
1
1
1)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이는 문중 사람들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05
行兵曹判書
議政府右贊成
行禮曹判書大提學
行吏曹判書
議政府左參贊
議政府右參贊
工曹判書
行司直
同知中樞府事
司憲府大司憲
同知中樞府事
工曹參判
同知中樞府事
行護軍
吏曹參判
行護軍
弘文館副提學
成均館大司成
行護軍
行榮川郡守
戶曹參議
司憲府執義
奉常寺僉正
吏曹正郞
弘文館副修撰
成均館典籍
朴弘耈
鄭昌衍
李廷龜
李尙毅
李準
姜紳
徐渻
許筬
吳億齡
鄭賜湖
申湜
許晉
韓述
李尙信
宋諄
朴而章
崔瓘
鄭曄
李睟光
姜綖
洪慶臣
李廷馦
郭說
蔡慶先
睦大欽
郭止善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1
1
2
1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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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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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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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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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1
1
1585년(선조 18) 11월 7일 홍이상 61세 때 그의 어머니 문경 백씨가 돌
아가자, 그에 대한 만사는 32인이 지었다. 모두 한 수씩 지었는데, 沈喜壽
와 李廷龜만이 두 수씩 지었다. 따라서 시는 모두 32제 34수이다. 시는 鄭
思湖의 5언 배율을 제외하면 모두 율시이다. 그리고 5언율시가 7수이고,
나머지는 모두 7언율시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34수 가운데 5언율시가 5제
7수, 5언배율이 1제 1수, 7언율시가 24제 26수가 된다.
지은 사람으로는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모두 포함되어 있
으며, 이름난 인물로는 이덕형, 이항복, 심희수, 韓應寅, 尹根壽, 柳根 등
당대의 명사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 아들 홍이상은 이때 사헌부 대사헌으
206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로 임명되었다가 문경 백씨가 위독하자 체직을 청하여 그만두었다.
바로 직전에 그만 두기는 했지만, 아들 홍이상이 대사헌이란 중앙관서의
권요직을 맡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좌의정 이항복과는 매우 가까웠으며,
이정구와는 사돈관계에 있었으므로, 이처럼 많은 명사들이 만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의 삼의정이 동시에 한 사람에 대해 만사를 지은 것
은 그리 흔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구나 지금까지 작품이 한데 이처럼 모아
져 전해지는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을묘년(1615) 9월에 홍이상이 돌아갔을 때 지은 홍이상에 대한
만사를 모아놓은 것인데, 여기에 수록된 인물과 관직은 모부인 때와 마찬
가지로 대단한 인물들이 모두 홍이상에 대한 만시를 지었음을 볼 수 있다.
작자의 관직 작자 시형식 작품수
鰲城府院君
議政府領議政
領敦寧府事
海平府院君
議政府右議政
唐興府院君
延原府院君
晉原府院君
行兵曹判書
文昌府院君
議政府左贊成
行吏曹判書
行戶曹判書
行工曹判書
行漢城府判尹
判敦寧府事
行京畿觀察使
吉昌君
晉興君
行議政府右參
海昌君
知敦寧府事
李恒福
奇自獻
沈喜壽
尹根壽
鄭昌衍
洪進
李光庭
柳根
朴承宗
柳希奮
朴弘耈
韓孝純
李廷龜
李尙毅
李準
閔夢龍
盧稷
權悏
姜紳
李慶全
尹昉
金尙容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5언절구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배율
7언율시
1
1
4
1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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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1
1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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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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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07
知中樞府事
光城君
義寧君
凝川君
知中樞府事
驪城君
戶曹參判
同知中樞府事
行司直
行司果
韓昌君
前禮曹參判
行副護軍
福川君
行司直
行司勇
行司勇
行司直
同知中樞府事
兵曹參判
行靑松府使
行司丁
行判決事
同知敦寧府事
漢城府左尹
晉寧君
同知中樞府事
禮曹參議
行司直
承政院左承旨
分兵曹參議
分兵曹參議
弘文館直提學
司僕寺正
議政府舍人
司果
右通禮
前府使
前府使
前正郞
前郡守
弘文館副校理
吏曹正郞
李時彦
鄭賜湖
宋諄
朴震元
申軾
李志完
張晩
權憘
鄭曄
沈惇
李慶涵
辛慶晉
崔瓘
吳百齡
許晉
金尙寯
金尙寯
韓德遠
宋馹
李沖
朴而章
柳永詢
李順慶
金玄成
曺倬
姜弘立
宋英耈
柳澗
任章
金止南
李廷馦
金湧
柳希發
柳希亮
丁好善
李忠養
韓懷
李忔
朴孝生
郭說
金昌一
金質幹
朴鼎吉
7언절구
7언배율
5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5언배율
5언배율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배율
7언율시
7언절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배율
5언배율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배율
5언율시
7언배율
5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배율
7언율시
5언율시
5언율시
5언배율
7언율시
7언배율
7언절구
7언율시
7언율시
1
1
1
1
1
1
1
1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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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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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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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1
1
1
1
1
2
1
1
208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兵曹正郞
兵曹正郞
前正言
前佐郞
前典籍
承文院正字
承文院正字
高用厚
南以雄
李涏
李楘
洪千璟
辛慶衍
南溟羽
7언율시
7언절구
7언절구
7언율시
5언배율
5언배율
7언절구
1
1
1
1
1
1
2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홍이상에 대한 만사는 모두 71제 83수가
수록되어 있다. 모두 1수씩 지었는데, 南溟羽 2수, 金昌一 2수, 金湧 2수,
金止南 2수, 姜弘立 2수, 宋馹 2수, 金尙寯 2수, 崔瓘 2수, 심희수 4수를
지었다. 김상준은 2수인데, 7언율시 1수, 7언절구 1수이다.
시형식으로는 절구는 모두 6제 8수인데, 오언절구는 1제 1수뿐이다. 배
율은 모두 10제 10수이고, 나머지는 5, 7언 율시이다. 율시는 모두 39제 50
수이다. 5언율시가 11제 14수이고, 나머지는 7언율시이다. 배율은 10제 10
수인데, 모두 5언배율이다.
벼슬아치는 의정부 영의정, 우의정 등이 지었고, 좌의정이 빠진 대신에
부원군이 모두 여섯이나 된다. 만시를 지은 유명한 인물로는 이항복, 奇自
獻, 심희수, 윤근수 등이 있다. 홍이상의 모부인이 돌아갔을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만사를 지었음을 볼 수 있다. 지방관을 지낸 사람도 있으나,
대부분 중앙의 현직 관료이거나 관료를 역임한 사람들로 당대 권력의 핵심
부에 있던 인물들이 거의 망라된 느낌이다.
홍이상의 부인 안동 김씨는 홍이상이 세상을 떠나자 슬픔이 지나쳐 건
강을 해친 탓에 겨우 1년만인 1616년 연상練祥을 지나자 운명하였다. 홍이
상이 돌아간 뒤 치른 홍이상의 부인 상사에 몰려든 만사는 그 이전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빛나는 관직에 있는 쟁쟁한 사람들이 만사를 지었다. 특
히 이항복, 심희수, 이안눌 등은 이번에도 빠지지 않고 시를 지어 보냈다.
홍이상의 부인에 대한 만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09
작자의 관직 작자 시형식 작품수
延陵府院君
晉原府院君
行同知中樞府事
驪川府院君
吉昌君
海昌君
帶原君
知中樞府事
行司直
戶曹判書
行護軍
行副護軍
行司直
戶曹參判
同知敦寧府事
完崇君
同知中樞府事
行護軍
行護軍
行司直
吏曹參議
行副護軍
軍器寺正
司憲府執義
前府使
前掌令
前郡守
刑曹正郞
咸鏡都事
京畿都司
前判官
行司果
行司果
行司果
前佐郞
前縣監
承文正字
前正字
戚姪
鰲城
一松
李好閔
柳根
朴弘耈
閔馨男
權悏
尹昉
尹孝全
申湜
鄭曄
李沖
沈惇
金尙寯
權憘
崔瓘
金玄成
李順慶
李德馨
金止男
李安訥
睦長欽
柳希發
柳希亮
南以俊
金質幹
李忔
姜弘重
郭說
郭天豪
穆取善
申得淵
趙緯韓
南以雄
李景稷
睦叙欽
李楘
許宲
李明漢
南溟羽
宋淵
5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배율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5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5언율시
5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율시
7언절구
5언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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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홍이상의 부인에 대한 만사는 전체 41제 42수인데, 7언 절구 1제 1수,
5언 배율이 2제 2수이고, 나머지는 모두 율시이다. 율시 가운데 5언율시가
13제 13수이고, 나머지는 모두 7언율시이다. 작자로 이름난 사람은 오성,
일송, 이호민, 유근 등이다. 만사를 짓는 데 참여한 벼슬아치는 이번에는
의정부에서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고, 다만 부원군이 3명이 있다. 전체적으
로 이전의 홍이상의 장례 때는 물론 홍이상의 모부인이 돌아갔을 때 보다
도 훨씬 만사를 지은 사람도 적고 고급 관원도 빠져 있다. 만사 가운데 7언
절구도 있고, 5언율시도 없지 않으나, 칠언율시가 압도적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이상과 같이 홍이상의 모친, 홍이상 자신, 홍이상의 부인에 대한
만사를 수록한 것이다. 돌아간 시기가 각기 다르므로, 만사가 지어진 시기
도 달랐을 것인데, 이 책은 이 세 분에 대한 만사를 한꺼번에 정리하여 책
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일단 홍이상의 부
인인 안동 김씨가 돌아간 뒤인 1616년 이후가 될 것이다.
편자가 드러나 있지 않아 누가 모아서 책으로 냈는가도 알 수 없다. 다만
정명공주의 커다란 인장이 이 책의 앞뒤에 있고, 정명공주가 직접 지은 것
으로 보이는 시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을 정명공주가 역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정명공주가 편찬한 것이라면 1623년 자신이 홍씨 문
중으로 시집오기 훨씬 이전 1585년 시증조모 문경 백씨가 돌아갔을 때의
만사와 시조부모인 홍이상과 그 부인 안동 김씨가 각각 1615년과 1616년
돌아갔을 때에 지은 만사를 모두 모아 하나의 책으로 엮어서 간직하여 후
손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인다.
만사의 주인공 세 분이 돌아갈 때는 정명공주가 홍씨 집안에 시집오기
훨씬 전이었지만, 시댁의 시증조모와 시조부모 때 들어온 만사가 당대 최
고의 지위에 있던 명사들에 의해 지어진 것을 보고 뒤늦게 정리하여 한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11
책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3.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의 面貌와 그에 대한 哀
悼의 感情
3.1. 臥病과 죽음에 대한 哀悼
만사는 대개 고인의 평생을 추념하며 애도의 심정을 읊는 것이 일반적
이다. 만사 가운데에는 이상에서 살필 바와 같이 어떤 개별적인 사안에 중
점을 두어 강조하거나 특정한 부분을 강조한 것이 있다.
홍이상은 임자년(1612) 9월에 64세의 나이로 개성유수로 나갔고, 66세에
임기를 끝내고 고양으로 돌아갔다. 홍이상의 죽음에 대해 읊은 시는 개성
유수를 끝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고향인 고양으로 은퇴하여 강호를 벗
삼아 살던 것에 대해 읊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兵曹正郞 南以雄은 이에
대해 “적막한 고양은 오늘부터 시작이니, 孤峰의 눈 위에 뜬 달이 분신이
라네. 寂寞高陽從此日, 孤峰雪月是分身.”이라 하며, 홍이상이 돌아가니
고양이 적막해 질 것이라 하였다. 行戶曹判書 李廷龜는 두 번째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성에서 속절없이 삼 년의 교화 남겼고, 畿輔謾留三載化,
강호에서 물러나 겨우 한 해 봄 보냈어라. 江湖纔卜一年春.
삼년 간 개성유수로 지내다가 고향인 고양으로 돌아온 지 일 년 만에
돌아갔음을 애도하며 이렇게 읊었다. 그는 은퇴하면서 아예 은거할 생각을
하였는데, 前典籍 洪千璟은 “蛇浦에서 푸른 들에서의 계획을 경영하였고,
212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은퇴해 있기도 잠시 돌아가는 슬픔을 당했네. 蛇浦方營綠野計, 菟裘俄夢
白鷄悲.”라 하였다. 홍이상이 벼슬을 떠나 은거할 계획을 세웠다가 갑자기
돌아갔음을 말하였고, 知敦寧府事 金尙容도 “한평생의 세상일이 부질없
이 지나가니, 만년에 전원에 살려는 계획 이루지 못했네. 百年世事粱初熟,
晩歲郊扉計未成.”라고 하여, 만년에 전원에 살고자 하였으나,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돌아갔음을 애석해 하였다.
그는 갑인년(1614)에 은퇴한 지 1년만인 을묘년(1615) 그의 나이 67세
때에 병이 깊어져서 4월에 서울 집으로 돌아갔고, 9월에 돌아갔다. 홍이상
이 병이 들었을 때, 承文院 正字를 지낸 辛慶衍은 이렇게 읊었다.
많은 병에 필요한 것은 옛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多病所須還舊宅,
어진 이를 빼앗음이 어찌 그리도 빠른지 하늘이 원망스럽네.
奪賢何速怨蒼穹.
어진이가 오래 사는 법도 어그러져 70에 차지 못하고,壽仁猶欠七旬滿,
덕을 비교하여 누가 팔좌보다 우뚝하다 하였던가? 較德誰言八座嵩.
신경연의 이 시는 홍이상이 오래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애석함으로 꽉
차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 것이지만, 그래도 70도 되지 못하고
돌아가니 애석하다는 것이다. 行司直 任章은 “임금께서는 바야흐로 주즙
으로 쓸 것을 기약하셨고, 친한 벗들은 문득 기둥과 들보가 부러졌다고 슬
퍼하네. 聖主方期舟楫用, 親朋忽悼棟樑摧.”라고 하여 홍이상이 세상에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였고, 知敦寧府事 金尙容은 “친구들이
요즈음 영락하여 모두 죽으니, 늘그막에 어느 곳에서 남은 인생 의지하나?
知舊向來零落盡, 暮途何處托餘生.”라고 하여 자신의 벗들이 모두 죽어
자신이 의지할 바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이처럼 홍이상에 대한 만사는 홍이상이 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기까지인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13
고양으로부터 은퇴했던 일에서부터 관심을 보였으나, 주된 내용은 그의 죽
음에 대한 것이다. 만사가 고인을 애도하는 글이니, 너무도 당한 것이지만,
만사의 주된 내용은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중심이다. 홍이상이 돌
아간 뒤에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느낌은 매우 다양하다.
대개의 경우 애석함을 드러내거나 아쉬움을 나타낸 것이 많으며, 슬픈
마음을 읊은 것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에는 마치 홍이상의 죽음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읊어 고인에 대한 슬픔을 드러낸 것도 있다. 行戶曹判
書 李廷龜가 지은 것으로 그는 그의 만시 첫 번째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인생 백년이면 누군들 죽지 않을쏘냐, 人生百歲誰無死,
돌아갈 곳 얻은 그대가 몹시 부럽구려. 深羡吾君得所歸.
이정구는 이 시에서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어 있는데, 돌아갈 곳을 얻은
고인이 부럽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의
슬픔을 반어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정구는 이에 이어 바로 두 번
째 시에서 “새벽 별 묵은 풀에 벗들은 사라져 가니, 눈 덮인 외로운 집에서
눈물로 수건 적신다 晨坐宿草交遊盡, 雪裏孤齋淚滿巾.”라고 애석함과 슬
픔을 동시에 드러내었다. 이러한 감정이 만사의 내용에서는 일반적인 서정
의 표출양상이라고 하겠다. 行兵曹判書 朴承宗도 자신이 지은 첫 번째 시
에서 이러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조 때에는 훌륭한 선비가 많았는데, 先朝多士美,
금일에 몇 사람이나 남아 있는가? 今日幾人存.
三事를 마치기를 기다리다가, 佇待終三事,
도리어 九原으로 떨어지니 마음 아프네. 翻傷隔九原.
214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선조 대의 선비들이 하나 둘 떠나가 자신의 시대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하며 마음 아파하였다. 특히 홍이상이 개성유수에서 물러나 이제
삼사를 기다리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매우 슬퍼하였다. 知中樞府事
李時彦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벼슬은 2품에 이르고 여섯 아들이 있는데, 官資二品六男兒,
나이도 칠십에 이른 것은 세상에 드므네. 七十年齡世並稀.
고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경우에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한
사람의 동일한 죽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마음에 와닿는 부
분에 대해 나름 슬퍼하였다. 晉興君 姜紳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위가 덕에 차지 않은 것 모두 명으로 말미암았고, 位非滿德皆由命,
나이가 칠십도 안됐으니 누가 하늘을 어질다 하랴? 壽欠稀年孰謂仁.
술동이 놓고 웃으며 이야기하던 일 모두 꿈만 같고, 樽酒笑談渾似夢,
부유한 세상일은 이미 먼지가 되어 버렸네. 浮休世事已成塵.
강신은 강홍립의 아버지로서 홍이상과는 어머니를 위한 잔치를 베풀 때
함께 했던 사람으로 특별한 인연이 있던 사람인데, 그의 시에 다양한 슬픔
과 느낌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다. 義寧君 宋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를 읊조리며 항상 평상을 함께 사용하였고, 吟詩常並榻,
학문을 강론하며 거의 방석이 닿게 했네. 講學幾連茵.
蘭堂에서 늦게까지 동이의 술을 마시고, 樽酒蘭堂晩,
봄날 거리를 수레타고 관복입고 지나갔네. 軒裳綺陌春.
함께 어울려 노닐던 옛날의 일들을, 遊從昔年事,
그대 떠나가면 누구와 더불어 다시 하랴? 君去與誰申.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15
송순은 주로 과거를 회상하며, 그대마저 떠나가면 자신은 누구를 믿고
의지하여 살아 갈 것인가 하고 슬픈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고인에 대한
슬픔을 나타낸 것으로 평생의 지기였던 鰲城府院君 李恒福이 지은 시에
는 더욱 서글픈 마음이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늙은 나이 겨우 육순을 조금 지났을 뿐인데, 衰年纔過六旬強,
옛 친구들은 지금 반쯤 세상을 떠났네. 舊友如今半在亡.
나는 한가함을 얻어 조금 위로가 되었는데, 我偶得閑差慰意,
그대가 먼저 세상을 떠나니 마음이 아프네. 君先去世益摧腸.
동서로 강호의 흥을 나누어 차지하고서, 東西分占江湖興,
모두 풍월을 즐기며 휘파람부는 사람이 되었네. 風月俱爲嘯傲郞.
이 일은 인간세상에서 함께 있기가 어려운데, 此事人間難傡美,
하늘이 두 마리 새가 마주 나는 것을 싫어하였네. 天憎雙鳥對翺翔.
당시 육십이면 그리 적은 나이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곁은
하나 둘 떠나가는 벗들을 보며 홍이상마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슬픔을
드러낸 시이다. 홍이상의 모부인 상사 때에는 우의정으로 있던 沈喜壽는
연로하여 실직을 떠나 領敦寧府事로 있으면서 네 수를 시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세 번째 시에서는 “달이 少微星을 범하니 조야가 마음 아파하고,
뜰에 가득한 훌륭한 자제들은 집안 이름을 떨쳤네. 月犯少微朝野痛, 滿城
蘭玉振家聲.”라고 슬픔과 그 슬픔을 달래주는 일에 대해 읊었다. 홍이상은
비록 저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그 자제들이 모두 훌륭하여 집안의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시에서는 홍이상이 만년에 개성에서의 벼슬을 끝으로 고향에 은
퇴하고자 했으나, 일년 만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가게 된 것을 애도하는
내용이 담긴 만사를 살펴보았다. 이들 시에는 홍이상이 벼슬에서 벗어나
216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뜻한 바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3.2. 學問과 行實에 대한 評價
홍이상은 「行狀」에서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나서 사우의 도움이 없었지
만 예닐곱 살 때부터 이미 책을 읽을 줄을 알았고 나이 일곱 여덟 살이
되어서 참판 李栻이 見達山 아래에서 여묘살이를 하니 곧바로 가서 절하고
배우기를 청하였다.”3)라고 한 데에서 보듯 어려서 이식에게 배우고 뒤에는
“늘 새로운 것을 듣기를 원하는 뜻이 있어서 마침내 習靜 閔先生을 杏村으
로 가서 뵙고, 사서 및 선유들의 성리학에 관한 책을 강론하면서 오묘한
뜻을 연구하고 의리를 탐색하며,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면서도 마치 부족할
까 두려워하는 듯이 하였다.”4)라고 말한 것처럼 민순에게 나아가 본격적인
공부를 하였었다. 그러나 만년에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스스로 기약한 바가 있었으나, 중년에 벼슬하느라 공부를 전일하
게 하지 못하고 늙어버려 이룬 것이 없으니, 이것은 학자들이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5)라고 했다고 전한다. 어려서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하
다가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서 평생을 보낸 뒤 회한을 담아 한 말이다.
홍이상에 대한 만사에서도 홍이상의 학자로서의 자질을 아까워하며, 그
가 이룩한 학문에 대해 칭송하는 등의 감정을 드러낸 경우도 많다. 이에
대해 前佐郞 李楘은 “태산처럼 높은 이름 후대에 드러날 것이고, 연원이
3) 洪방, 「行狀」 (洪履祥, 慕堂集 附錄) (문집총간본) “生於窮僻之鄕, 顧無師友之益,
而自在髫齡, 已能讀書, 年甫七八, 聞李參判栻居廬于見達山下, 卽往拜願學焉.”
4) 洪방, 「行狀」(洪履祥, 慕堂集 附錄)(문집총간본), “常有願聞之志, 遂往拜習靜閔
先生於杏村, 講論四書及先儒性理之書, 硏窮奧旨, 探索義理, 孶孶爲學, 如恐不及.”
5) 洪방, 「行狀」(洪履祥, 慕堂集 附錄)(문집총간본), “吾少好學問, 有所自期, 而中
年仕宦, 用功不專, 以致老而無成, 此學者所當深戒也.”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17
깊은 학력도 전현과 딱 들어맞네. 泰嶽高名傾後代, 淵源學力契前賢.”라
고 높이 예찬하였고, 光城君 鄭賜湖는 “일찍부터 성리서로 드러났고, 영화
가 환하게 빛났다네. 早闡性理書, 英華燁然光.”라고 하여, 그가 성리서에
밝았음을 만시에서 예찬하였다. 同知敦寧府事 金玄成은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스승의 문하에서는 깊이 통서를 탐구하며 주고받았고, 師門授受深探緖,
천인에 대한 책문을 몸소 써서 시험장을 압도하였네. 親策天人獨擅場,
김현성은 홍이상이 스승 민순의 통서를 이어받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그
러한 면모가 책문을 써서 시험장을 압도한 데서 드러났다고 제시하였다.
홍이상이 과거에 장원하였던 바탕은 바로 習靜齋 閔純에게서 배운 학문이
라는 것이다. 海昌君 尹昉도 홍이상이 민순에게 학문의 깊은 정수를 전수
받았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즈음의 이름난 학자 習靜齋는, 近時習靜齋,
학문이 조화옹의 영역을 넘본다네. 學窺造化窟.
문하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넘치니, 門下多其人,
공은 이에 홀로 세상에서 뛰어났다네. 公乃獨超越.
커다란 도를 일찍부터 들어 알았고, 得聞大道早,
조예는 실로 뛰어나고도 우뚝하였네. 造詣實卓絶.
여기에서는 홍이상의 스승인 민순에 대해 그의 학문의 수준이 매우 깊
었음을 말하여 조화옹의 영역을 넘볼 정도였다고 극찬하였다. 그리고 그
제자인 홍이상은 민순의 문하에 모여든 수많은 뛰어난 인재들 가운데에서
도 두각을 드러냈고, 조예가 깊었음을 말하였다.
이처럼 문하에서 우뚝한 모습을 보였던 홍이상이 세상을 떠나자, 민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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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조차 쓸쓸하게 되었다고 사람들은 인식했다. 行議政府 右參贊 李慶
全은 “슬프다! 우리 학문이 적막하게 바뀌어서, 杏翁의 문과 거리에 풀만
이 우거졌도다. 怊悵斯文轉寂寞, 杏翁門巷草芊芊.”라고 하여, 홍이상이
학문을 하지 않아 행촌 민순의 문하가 적막하게 되었음을 안타까워하였다.
領敦寧府事 沈喜壽은 세 번째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杏村의 당일에 문생이 몇이나 되었던가? 杏村當日幾門生,
성품이 민첩해도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 겸하기 어렵다네.
性敏難兼好學誠.
박약하는 공부는 깊지만 躐等하지 않았으니, 博約功深無躐等,
성현의 우뚝한 계단이 앞 길에 있었다네. 聖賢階峻有前程.
홍이상은 학문과 동시에 문장을 잘한 선비로 평가를 받았다. 학문은 그의
인품과 덕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문장은 그 재주를 보는 것이다. 홍이상이
학문과 문장 모두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인품과
재주 모두 뛰어났음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 홍이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行戶曹判書 李廷龜는 두 번째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술과 문장으로 일찍 벼슬길에 올랐나니, 經術詞華早致身,
그 화락한 풍모가 조정에서 환히 빛났어라. 雍容風裁暎簪紳.
이정구는 홍이상이 경술과 문장 모두 뛰어나 벼슬길에 올랐을 뿐만 아
니라, 조정에서도 횐히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하였다. 行兵曹判書 朴承宗
도 첫 번째 작품에서 “詞華는 진실로 전아하였고, 학문은 연원을 얻었도다.
詞華眞典雅, 學問得淵源.”라고 하여 홍이상이 사화와 학문 모두 뛰어났음
을 말하였다.
학문과 재주를 바탕으로 그의 실제 행동이 아름답게 드러날 때 사람들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19
은 그 인물을 높이 평가한다. 承政院左承旨 金止南은 홍이상의 내면과 외
면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선비들이 전배로서 추중하였고, 士類推前輩,
시험장에서는 홀로 실력을 발휘했네. 名場擅獨鳴.
높은 벼슬하면서 보무를 따르고, 靑雲隨步武,
한낮에도 承明殿 가까이에 있네. 白日近承明.
출입함에 모두 남은 칼날이 있고, 出入俱餘刃,
나아가고 물러남이 문득 법에 맞네. 行藏動合程.
충담하고 온화한 것 누가 지적했던가? 冲和誰指摘,
온자한 것은 덫과 구덩이를 멀리하네. 蘊藉遠機坑.
명망은 이러한 훌륭한 행실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다. 兵曹正郞 高用
厚는 홍이상이 명망이 높았음에 대해 “이생의 향기나는 덕을 어찌 다시
얻으랴? 삭운과 한설이 흐르는 눈물을 돕는다. 薰德此生寧復得, 朔雲寒雪
助沾纓.”라고 홍이상의 향내나는 덕을 잃은 슬픔을 말하였다. 議政府舍人
丁好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봉황과 같은 거동은 유림에서 성가가 중하였고, 鳳擧儒林聲價重,
붕새가 날개를 치듯 벼슬길은 명예와 높음을 기대했네.鵬搏雲路望譽尊.
두 사람 모두 홍이상의 학덕이 조정에서 빛을 발하였음을 밝힌 것인데,
특히 정호선은 홍이상의 덕이 있는 모습을 봉황과 붕새에 비겨 그 우뚝함
을 기렸다.
이러한 행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점이 홍이상은 효성이 지극하였다는
점이다. 홍이상의 효성은 그의 호에서도 이미 드러나 있으며, 삼년상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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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뒤에도 어린 아이가 부모를 사모하듯이 하는 마음을 그칠 수 없어 자호
를 慕堂이라고 하여, 영원히 사모한다는 뜻을 담았다.”6)라고 하여, 더욱
자세히 호를 홍이상이라 한 까닭을 밝혀 놓았다. 이러한 홍이상의 효성은
평소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前典籍 洪千璟은 다음
과 같이 말하였다.
응당 순임금과 같은 효성으로 평생 사모하고, 應將舜孝平生慕,
반여에게 분부하여 가르침을 후예에게 드리웠네. 分付潘輿後裔垂.
홍이상의 효성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계모까지 감동시켰던 순임금과 같
음은 물론, 어머니를 수레에 모시고 다녔던 반악과 같다고 하였다. 前正郞
郭說은 “학력은 이미 마음 속에서부터 얻었고, 충성은 또한 효 가운데에서
나온다. 學力已從心上得, 忠誠亦自孝中來.”라고 하여, 그가 충성했던 것
이 효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海昌君 尹昉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버이를 모심에 정성을 다 하여서, 奉親極吾誠,
늘상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네. 常得親心悅.
홍이상의 효심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임금을 모시고 피란을 가있던 상황
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자 임금께 바로 아뢰고 어머니
를 찾아나서서 결국 안전하게 모시고 왔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러한 홍이
상의 효심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굳이 효자문을 세우지 않아도 될 정도
라고 생각했다. 行兵曹判書 朴承宗은 그의 첫 번째 작품에서 “울울한 고
6) 李峻, 蒼石文集 卷16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行嘉義大夫, 司憲府
大司憲洪公墓誌銘」 “六月, 丁外艱, 另加恩賻, 人皆榮之. 執喪過制, 服闋, 孺慕不
已, 自號曰慕堂, 以寓永慕之意.”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21
양리를, 당시에서 효제문이라 일컫네. 鬱鬱高陽里, 時稱孝悌門.”라고 하였
다. 홍이상이 살고 있는 고양리 자체가 효자문과 같다는 것이다. 박승종이
얼마나 홍이상의 효심에 감동을 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3.3. 壯元과 벼슬살이에 대한 羨望
홍이상의 손자이며 정명공주의 남편인 홍주원은 할아버지의 「墓表陰記」
에서 홍이상에 대해 소개하면서, “공은 嘉靖 기유년(1549)에 태어나 계유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무인년 庭試에서 장원하여 곧바로 문과를
볼 수 있는 은전을 하사받아서 기묘년에 또 殿試에서 장원하였다.”고 세
번 장원했던 것을 드러내어 기록하였다.
옛날 한 개인의 생애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과거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합격여부에 따라 그의 생애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여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도 있지만, 전통시대에 과거를 통하지 않고는 입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行戶曹判書 李廷龜는 그의 첫번째 시에서 다
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범이 되는 조행은 포의 때부터 이름났고, 模範高名自布衣,
장원급제의 그 명성은 대궐을 진동하였었지. 壯元聲價動宸闈.
장원급제를 하는 경우 대개 그러했겠지만, 발표되는 순간은 물론이고 일
정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그치지 않았을 것인데, 홍
이상의 경우도 궁중에서 임금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前正郞 郭說은 “대단했던 성명은 팔해를 진동시켰고, 어린 나이에 場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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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문과에 장원하였네. 藉甚聲名動八垓, 早年場屋冠文魁.”라고 하여
그가 어린 나이에 문과에 장원하였음을 기렸다. 과거에 합격하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더구나 장원을 차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장원을 세 번씩이나 차지하였던 일은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당
시 사람들에게 매우 높이 평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8장원이니 하여
보는 시험마다 장원을 놓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극히 드문 일이었
다. 홍이상이 장원을 한 것에 대해 만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언급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弘文館直提學 柳希發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장은 두 번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하였고, 文章再首龍墀策,
벼슬은 무성한 군영을 거듭 열었다네. 仕宦重開蔽芾營.
장원을 한 뒤에는 바로 벼슬에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비록 말단이지만
실질을 받음으로써 다른 사람보다도 한 발 앞서 높은 자리를 향하여 나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議政府左贊成 朴弘耈는 그가 장원을 한 뒤에 옥당
에 가서 함께 일하였던 사실을 추념하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재주 있다는 이름이 장원방에 매우 크게 났는데, 才名藉甚壯元坊,
이십년 전에 함께 옥당에 들어가 일했네. 二十年前共玉堂,
그가 재주가 있어 이름이 크게 드러났다는 것과 이십년전 옥당에서 함
께 일한 것을 매우 잊지 못하는 추억으로 말하였다. 홍이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은은히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홍이상의 일생 가운데 장원급제를 하였던 일은 자신에게 영광이고 출세
의 지름길이기도 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 만
사에서 장원급제를 하였던 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읊고 있는 사실을 통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23
해서 이를 감지할 수 있다.
과거합격한 뒤에 주로 청요직을 거쳤는데, 선조와 광해 두 임금 때에 무
난히 벼슬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弘文館 直提學 柳希發은 “이십년 동
안의 남다른 은혜 경악에서 총애했고, 두 조정에서의 특별한 대접은 죽든
살든 영광이다. 卄載異恩經幄寵, 兩朝殊遇死生榮.”라고 하였고, 前正郞
郭說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西掖에서 임금의 뜻을 기록함에 健筆을 휘둘렀고, 西掖演綸揮健筆,
東銓에서는 지론으로 여러 인재를 선발하였네. 東銓持論揀群材.
두 조정에서 가까이 모심은 明主 때문이고, 兩朝侍幄緣明主,
백리에 符節을 나누어 간 것은 봉양하기 위함이네. 百里分符爲養陔.
이처럼 그가 글 짓는 신하로서 당시에 높이 평가되었고, 이조에서는 인재
를 선발하는 일을 잘 하였다고, 높이 평가를 받았다. 그가 글을 잘 지었다는
것은 光城君 鄭賜湖가 만시에서 “청쇄문에서 비영을 발휘했고, 채봉이 아침
햇살에 빛나네. 蜚英靑瑣闥, 彩鳳輝朝陽.”라고 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홍이상의 벼슬살이에 대해 行兵曹判書 朴承宗은 다음과 같은
개괄적인 평가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시에서 “대
각에서는 풍재를 지녔었고, 경연에서는 격언을 올렸었네. 臺閣持風裁,經筵
進格言.”라고 하여, 그가 대간으로서 활약하였던 것을 읊었다. 晉興君 姜
紳도 이에 대해 “조정의 끝에 고니가 선 듯 제일가는 사람이 되었고, 玉堂
과 金馬門에서 옛날 글 짓는 신하였네. 鵠立朝端第一人, 玉堂金馬舊詞
臣.”이라 하였다.
그런데 한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 제일가는 사람이라 하기가 쉽지 않으
며, 그렇게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공감과 인정을 받아내기가 또 어려운 법
인데, 홍이상에 대해서는 모두 제일가는 사람이라 평하고 있음을 볼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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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吉昌君 權悏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재일우의 만남으로 총애와 영광이 넉넉하였고, 遭逢千載寵光優,
鑾坡에서의 재주와 명망은 제일가는 부류였네. 才望鑾坡第一流.
行司果 沈惇은 “높은 재주 세상에 으뜸인데 경륜마저 온축하였고, 문아
한 것도 맑은 때에 제일가는 사람이었네. 高才絶世蘊經綸, 文雅淸時第一
人.”라고 하였고, 行議政府右參贊 李慶全은 “두 조정에서 經幄의 제일가
는 사람이라 손꼽고, 중세에는 의론으로 가장 共益의 편에 들었네. 經幄兩
朝推第一, 議論中歲最公便.”이라 하였다.
광해군 시절 아무도 광해군에게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홍이
상은 서슴치 않고 광해에게 직언을 하였다. 위 시들은 광해군은 홍이상에
게 어찌 하지 못하고 오히려 ‘諫官第一人’이라고 칭송하여 마지 않았던 일
을 읊은 것이다. 그래서 또 많은 사람들이 홍이상이 백부 즉 사헌부에서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고 직언을 하였던 일을 기렸다. 行司直 許晉은 이에
대해 “柏府에서 일찍이 삼엄하게 법을 집행하였고, 송도에서는 또한 한선
하게 정신을 길렀네. 柏府森嚴曾秉憲, 松都閑善亦頤神.”라고 하였고, 分
兵曹參議 李廷馦은 “난파에서는 일찍이 임금을 설득함 있었고, 백부에서
는 옛날 천리마를 탔었지. 鑾坡曾納約, 柏府舊乘驄.”라고 하였다.
그는 이처럼 뛰어난 면모가 있었고,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고 하겠으나,
평소의 언행은 매우 겸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同知中樞府事 宋
英耈는 “과거에 합격함에 용방에서 으뜸을 차지하고, 반열을 따르면서도
들에 나는 쑥을 먹었네. 登第首龍榜, 隨班食野苹.”라고 하여, 그가 남에게
자랑하고 과시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홍이상은 매우 겸손
하고 검박하였음을 이렇게 읊었다.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25
홍이상은 주로 중앙관서에 있었고 평생 지방직으로 안동부사, 경상감사,
개성유수 등 그리 많지 않은 관직을 지냈는데, 홍이상에 대한 만사에서는
다른 지방직에 대해 언급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行兵曹判書 朴承宗은
그의 두 번째 시에서 “대장기를 나누어 옥절을 세웠고,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했네. 分麾杖玉節, 憂國愛黎元.”라고 한 것처럼 어쩌다 지방
관으로서의 홍이상에 대해 읊은 것이 있으나 그리 많지 않다.
홍이상은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경상도관찰사를 맡아 영남지역에 흩
어져 있던 왜적의 잔당을 물리치고, 영남지역을 정비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러나 만시에서 홍이상의 영남관찰사 시절을 읊은 것도 거의 없
다. 다만 前正郞 郭說이 지은 시에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있다.
영남의 백성들 오랫동안 덕정을 베푸는 사랑을 받았고, 嶺民久結甘棠愛,
조정의 의론은 조서를 쓸 재주라고 길이 생각했네. 朝議長思詔草才.
영남 사람들은 훌륭한 감사로 인식을 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지방관으로
지내기보다는 조정의 중앙관서에 있어야 할 재주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
다. 이처럼 지방관으로서의 홍이상에 대해 읊은 시는 많지 않은 가운데,
개성유수를 지냈던 일을 언급한 것은 매우 흔하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벼
슬이었고, 임기를 마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병이 들어 별세하였기 때문
이었다. 兵曹正郞 高用厚도 이에 대해 “몇 년이나 길이 채찍을 잡는 정성
을 가졌던가? 일찍이 송도를 지나며 비로소 이름을 들였었네. 幾年長抱執
鞭誠, 曾過松都始納名.”라고 읊었다. 承文院正字 辛慶衍은 이에 대해 다
음과 같이 말하였다.
직임을 맡기니 부지런히 정치하여 새 은혜가 무겁고, 圖任政勤新渥重,
한가함을 빌어 유수가 되니 故都의 으뜸이라. 丐閑留守故都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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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그만 두고 이미 三逕을 널리 다스리고, 休官已博治三逕,
낙양으로 돌아오니 쓸쓸히 두 아이만 있네. 歸洛蕭然有二童.
개성유수가 된 것도 중앙직에서 한가한 틈을 타서 하게 되었다고 하였
다. 그러나 그는 개성유수 임기를 마치면서 고양으로 돌아가 은거하게 되
었음을 노래하였다. 議政府 右議政 鄭昌衍도 40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홍
이상을 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 잘하는 아름다운 명망 세상에서 다투어 전하고, 圭章令望世爭傳,
임금께서 사랑하신 지가 지금 40년이 되었네. 親愛今垂四十年.
과거에서 장원하실 때에 나도 그 아래를 차지하고, 擢冠龍頭駑忝下,
이조에서 이름을 날릴 때 내가 그 앞에서 지냈네. 歷敭銓席粃居前.
호당에서의 옛 자취가 모두 어제 일과 같은데, 湖堂舊迹渾如昨,
송악에서 떠난 뒤로 영원히 생사가 나뉘었네. 松嶽行旌永隔泉.
정창연은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생전에 홍이상과 함께 하였던 여러 가지
일을 회상하며 조상하는 가운데, 개성 유수로 있다가 그만둔 뒤로 영원히
생사가 나뉘었다고 애닯아 하였다.
이상에서 살피 바와 같이 홍이상에 대한 만사 가운데에는 그가 과거에
합격한 뒤로 청요직을 거치며 선조와 광해 두 임금을 섬겼으며, 지방직으
로는 주로 경상관찰사와 개성유수 특히 개성유사를 지낸 것에 대한 언급이
많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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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27
3.4. 子孫의 번성함을 통한 慰勞
홍이상의 13대손 통정대부 敦寧府 都正 洪重寅이 찬한 「始祖國學公墓
表陰記」에 홍이상의 자손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 그는 여기에서 여러
파별로 그 후손 가운데 드러난 인물을 정리하였다.
홍이상은 아들이 霶, 雴, , 霙, , 등 여섯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여섯 아들이 모두 훌륭하여 당대의 사람들이 謝氏 집안의 자제들, 혹은 荀
氏의 여덟 아들들에 비겨 이야기하였고, 만사에서도 이에 대해 많이 읊었
음을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슬픔과 아쉬움을
달래려고 하는 것이 만사의 기본 속성이라 할 것이다. 만사는 고인의 행적
이나 품평 등 여러 가지 생애사를 두고 읊다 보니, 포폄이 분명하게 나뉘는
경우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홍이상의 죽음에 대해서 슬픔이나 아쉬움을 드러낸 것도 많으나,
사실 위로의 감정을 드러낸 것도 많이 보인다. 고인의 죽음을 두고 위로
내지는 위안을 삼거나 위안을 삼도록 한다는 것이 얼핏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홍이상에 대한 만사에는 이러한 위로의 감정을 표출해 낸 것이 매
우 많다. 위로를 삼는 기준도 매우 다양할 수 있겠으나 홍이상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자손을 통하여 위로를 삼으라 고인에게 뜻을 전달하는 것이
다. 前典籍 洪千璟의 시를 보기로 한다.
여섯 용은 순가의 여덟 용 적대할 만하고, 陸龍可敵荀家八,
아름다운 나무에서는 사씨의 가지가 많이 나네. 瓊樹多生謝氏枝.
위의 시는 홍이상에게 여섯 아들이 모두 훌륭하니 위안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홍이상의 자제들에 대한 칭찬은 봉황, 용, 난목, 고양의 팔현, 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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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여덟 용, 사씨의 가지 등 매우 다양한 비유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兵曹
正郞 高用厚는 “謝氏 집안의 뜰처럼 난옥이 많다고 사람들이 다투어 말하
고, 韓愈와 같은 문장에 세상에서는 이미 놀라네. 謝庭蘭玉人爭道, 吏部文
章世已驚.”이라 하여, 사씨 집안의 뜰에 가득한 난옥과 같이 뛰어난 자제
들이라고 하였다. 弘文館直提學 柳希發은 홍이상의 자손을 봉황이라 일
컬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봉황의 굴에 남은 털이 있으니, 卽今鳳穴遺毛在,
다른 날 벼슬길에서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리. 雲路他年不墮聲.
이 시에서는 봉황같은 자제들이기에 벼슬길에서 홍이상이 쌓아온 명성
을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자제들에 대한 이런 칭찬
은 어떤 측면에서 이루어졌던가? 分兵曹參議 金湧은 “여러 자제들은 뜰
에 가득한데 발탁된 사람이 많고, 兼金을 허리에 둘러도 더욱 청빈하다네.
群玉滿庭多妙選, 兼金橫帶益淸貧.”라고 하여, 뜰 가득한 자제들 가운데
발탁된 사람이 많다고 했다.
晉寧君 姜弘立은 두 번째 시에서 “순씨의 아손같은 아들은 모두 시원한
기상이 있고, 영공의 가법이 모두 좋은 규율이 되었네. 荀氏兒孫皆爽氣,
榮公家法盡良規.”라고 하여, 홍이상의 가법이 좋은 규율이 되었기 때문이
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홍이상의 자제들이 훌륭하게 되었던 까닭은 대부분의 사
람들이 바로 홍이상이 적선을 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前府使
李忔과 議政府舍人 丁好善도 각각 적선을 하였기 때문에 자제들이 훌륭
하며 여경이 이어진다고 하였다.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29
蘭玉의 경사가 이어지는 것은 적선으로 말미암았고, 蘭玉慶綿由積善,
임진년 세월이 가까우니 어진 이에게 곡하네. 龍蛇歲逼哭賢人.
積善하여 바야흐로 여경이 길이 있을 것을 아니, 積善方知餘慶遠,
아름다운 난초의 빛나는 잎이 높은 문을 빛내네. 猗蘭奕葉賁高門.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뜻을 만사에 담아 고인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한 것인데, 이는 홍이상의 자제들 여섯이 모두 훌륭한 실상이 있었기에 가
능한 것이었다. 行京畿觀察使 盧稷도 “모름지기 적선의 효과를 알아야 하
니, 세상에 있을 때 여섯 아이 어질도다. 須知積善效, 在世六兒賢.”라고
한 내용도 이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모강의 자제들을 높이 칭찬하고 홍이상에게 위로를 하도록 한
것은 자제들이 단순히 뛰어나다는 것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사실 자제들이 집안의 명성을 이어가거나 더욱 빛낸다는 믿음과 가능성
때문이었다.
承文院正字 辛慶衍도 “오직 絲綸을 관장하여 세상의 아름다움에 능하
였고, 난옥과 같은 자제들 모두 보니 가풍을 이을 만하구나. 繼掌絲綸能世
美, 摠看蘭玉續家風,”라고 하였고, 承政院左承旨 金止南은 “문과 뜰 안에
용과 봉 같은 아이가 있어, 응당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리. 門庭龍
鳳在, 應不墮家聲.”라고 하였다.
이 시들에서는 모두 홍이상의 자손들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집안의 명
성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라 읊고 있다. 禮曹參議 柳澗의 시를 보면 “청
전은 이을 사람이 있음을 아니, 여러 아들은 모두 구슬 반지와 같네. 靑氈
知有繼,諸子盡瑤環.”라 하였으니, 여기서는 다른 표현 즉 청전을 이을 것
이라 하며, 집안의 명성을 이어갈 것을 말하였다. 同知中樞府事 宋馹이
다음에서 말한 것을 통해서도 이러한 것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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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가르침은 여러 아들들이 있어 이을 수 있고,趨庭賴有諸郞在,
오히려 다행히 靑氈의 舊業을 새롭게 할 수 있네. 猶幸靑氈舊業新.
吏曹正郞 朴鼎吉은 “경서를 전함에 후손이 있는 것에 힘입으니, 고양의
팔현이라 일컫는 이와 더불어 머무네. 傳經賴有後昆在, 留與高陽稱八人.”
라 하였다. 이처럼 자손들이 훌륭하게 되어 궁극적으로 고양의 팔현과 같
이 일컬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했다. 고양의 팔현은 고양을 대표하는
인물 여덟 사람으로 홍이상도 여기에 속해 있다. 同知中樞府事 宋英耈은
이에 더하여 아들들뿐만 아니라 딸 셋까지를 포함하여 모두 훌륭하여 위안
을 삼을 수 있다고 하였다.
딸 셋이 스스로 집안 일을 잘 하고, 三女自家道,
여섯 아들은 모두 세상의 영웅이라. 六男皆世英.
지란 같은 아이들에게 후사가 남았으니, 芝蘭留後事,
바람과 눈에도 선영으로 향한다. 風雪向先塋.
이상의 내용은 홍이상의 여섯 자제가 모두 훌륭하여, 용과 난, 난과 옥,
사씨 집안의 여러 자제들, 순가의 여덟 아들들에 비유되었는데, 이러한 것
은 적선을 많이 하였기에 자제들이 이처럼 훌륭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리고 자제들은 모두 훌륭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가르침을 이었고 가업
을 이어 집안의 영화나 명성을 추락시키지 않을 것이며, 더욱 나아가서 청
전의 구업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하여 집안의 명성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
라는 점을 말하였다.
3.5. 기타 평생의 행적에 대한 칭송
홍이상이 돌아간 뒤 평생의 행적을 추념하며 읊은 시는 홍이상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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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시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홍이상의 만사에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이상의 평생이 대략 네 부분으로 나뉘어 이야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네 가지에 대한 언급 이외에는 그의 성품에 대해 언급한
것, 경로잔치를 벌였던 사실 등에 대해 읊은 것이 많다. 하지만 이에 그치
지 않고 생애의 전반적인 내용이나 평생의 행적을 말한 경우도 매우 흔하
다. 홍이상에 대한 만사도 예외는 아니다. 우선 성품에 대한 것을 살펴보기
로 한다. 承文院正字 辛慶衍은 그의 성품을 봉황에 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맑은 성품 모인 바가 우리나라에서 으뜸인데, 淸淑攸鍾挺我東,
봉황이 천길을 날아올라 오동나무에 앉았네. 鳳翔千仞止梧桐.
신경연은 홍이상이 보여준 인품의 특징으로 맑은 성품을 지적하여 드러
내고, 봉황이 천 길을 날아올라 오동나무에 앉은 것 같다고 하였다. 行司正
柳永詢도 “우리 장원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타고난 바탕은 순수하고
따듯하셨네. 云亡吾壯元, 天質粹而溫.”라고, 홍이상이 돌아왔다는 말에 이
어 바로 그의 타고난 바탕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타고난 바탕이 순수하고
따듯하였다고 묘사하였다. 行靑松府使 朴而章도 우선적으로 홍이상의 성
품과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상하신 성품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고, 慈詳天所植,
온자하신 모습을 세상에서 모두 말하네. 醞藉世皆云.
성품은 자상하였다고 하며 이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라 했고, 모습은
온자하였는데 이는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
그렇게 일컫는다고 하였다. 이것들에서는 주로 성품에 대해 여러 가지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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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에서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자상하고 온자한 성품과 모습에 걸맞게 그는
교우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도 한 번 맺은 우의를 바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光城君 鄭賜湖가 지은 시에 드러나 있다.
늘그막에도 절조를 바꾸지 않았고, 末路不變調,
朱絃에서 峩洋曲을 들었네. 朱絃聽峩洋.
홍이상은 젊었을 시절은 물론이고 늘그막에 이르러서도 절조를 바꾸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주현은 조정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말하니, 두 번째 구
절은 임금으로부터 절친한 친구처럼 지우를 받았음을 말한 것이다. 선조는
물론 광해군에게까지 신임을 받았던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타고난 성품을 바탕으로 관직생활도 원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의 능력에 비추어 높은 지위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청반에서
명예를 지키고 이름을 날렸다. 行司直 許晉은 이에 대해 “청반을 두루 역
임하여 명예는 흘러넘치고, 재상의 반열에 번듯하게 있으니 총장이 새롭도
다. 歷遍淸班名譽洽, 端居宰列寵章新.”라고 한 바 있다. 福川君 吳百齡
도 홍이상이 평생동안의 관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은하수에 날아오른 지 36년 동안에, 雲漢飛騰卅六年,
조정을 누른 명성 누구에게 선두를 허락하랴? 壓朝聲價許誰先.
모두들 유아로는 금세 최고라 일컫고, 共稱儒雅推今世,
또한 마음의 근원이 옛현인에 닿았음을 아네. 却識心源遡古賢.
오백령은 홍이상이 벼슬길에 나선 지 36년이라고 정확한 숫자까지 제시
하며 그가 그 오랫동안 조정에서 청명을 드날렸다고 하였다. 海昌君 尹昉
도 이와 비슷하게 숫자까지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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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33
조정에서 벼슬한 지 사십년 동안에, 立朝四十秋,
기본이 되는 행실을 조금도 잃지 않았네. 素行無少闕.
명예와 명망이 한 때에 높이 드러나, 譽望著一時,
높은 벼슬아치들이 모범으로 삼았네. 縉紳取爲律.
오백령과 윤방의 시는 전혀 다른 시이지만, 그 구조에 있어서는 매우 유
사하다. 첫 구에서 벼슬살이한 햇수를 말한 것도 그렇고, 2-4의 구절의 내
용도 서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홍이상의 생애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효성이 깊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위해 잔치를 벌였다. 따라서 그의 만사에는 벼슬하
던 일 다음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 잔치를 베풀었던 것이 많이 묘사되고
있다. 홍이상과 관련된 잔치 그림으로는 장원계회도 등 벼슬하던 때의 것
과 평생도 등을 비롯하여 李蘧의 어머니와 함께 잔치를 하사받았던 일, 그
리고 안동에서 잔치를 베풀었던 일 등이 그것이다.
만사 가운데에는 특히 그가 어머니를 위해 경로잔치를 벌였던 것에 대
해 이야기 한 것이 많이 보인다. 行司直 鄭曄은 이에 대해 “옛날 상 아래에
서 절하던 일 생각하니, 눈물과 콧물이 저절로 줄줄 흐르네. 憶曾床下拜,
涕淚自潛然.”라고 하여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
을 나타내었다. 戶曹參判 張晩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옛날 당에 오르던 날을 생각하니, 却憶升堂日,
모두 몸에는 채색 옷을 입었었지. 俱爲彩服身.
십년의 세월이 며칠 지난 일 같아, 十年如宿昔,
이 일 저일 모두 마음만 아프네. 萬事只傷神.
장만은 십년 전인 을사년(1605) 홍이상의 나이 57세 때 李蘧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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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100세가 넘어 잔치를 베풀었을 때, 당에 올라 인사를 하던 일을 회상하
며 지은 것이다. 다음 시는 이러한 홍이상의 평생에 대해 전체적으로 평가
를 한 내용이다. 文昌府院君 柳希奮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높은 벼슬길에서 붕새가 날개치듯 羽儀를 이루었고, 雲路鵬搏作羽儀,
두 조정의 성가는 蓍龜처럼 믿을 만하였네. 兩朝聲價愜蓍龜.
평생의 전아한 덕망은 사람들이 허물하지 못하고, 平生雅望人無間,
晩節을 보인 속마음은 내가 홀로 아노라. 晩節襟期我獨知.
廊廟에서 진언하지 못함에 격식에 맞는 의를 먼저 드리고,
廊廟未陳先格義,
강호에서 자주 얼굴 찡그리지만 근심스런 눈썹을 물리친다.
江湖頻蹙退憂眉.
이상과 같이 홍이상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면모에 대해 슬픔의 감정
을 담아 표현한 것을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에는 그의 일생을 회상하며 이
처럼 종합적으로 홍이상의 모습을 읊은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홍이상의 특징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고 여기에 자신
의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노래한 것이 많다.
4. 輓詞․祭文의 學術的 價値와 意義
만사․제문와 제문은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비전되어 오
다가 최근에 공개하여 소개가 된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세 사람의 만사
그리고 약간의 제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 홍이상에 대한 만사와 제문, 특히 만사를 다수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홍이상 홍이상의 시문집인 홍이
輓詞․祭文에 드러난 慕堂 洪履祥의
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35
상집 부록에 만사가 수록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만사․제문 가운데
이 책에 수록된 것은 대부분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작자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대개 작자의 유작이라 하겠는데,
이 가운데에는 다른 곳에서는 일체 볼 수 없는 사람의 작품이 수록된 경우
도 있다. 예컨대, 강홍립은 광해군 때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금에게 투항했
던 인물로 역사의 평가는 상반된다.
그런데, 그는 본래 무인이 아닌 문인이었으며, 과거출신자로서 시문에
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적에게 투항했다는 것 때문에 그의
문집은커녕 그가 남긴 어떠한 글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책에
는 강홍립의 7언율시 두 수가 실려 있다. 아마도 강홍립이 남긴 유일한 작
품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이 홍이상에 대한 만사 두 수를 통하여
비운의 주인공인 강홍립의 한시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한 수씩 남아 있는 것은 매우 많은 것으로 보이고,
단편도 있지만 비교적 장편으로 수록된 것도 제법 많이 있다.
둘째, 만사․제문의 작자들이 모두 당대 최고의 벼슬아치이며, 문장
가들이었다는 점도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다.
맨 앞에 수록된 홍이상의 모친인 문경백씨에 대한 만사를 모아놓은 곳
에는 의정부의 삼정승을 포함하여 모두 32명의 벼슬아치들이 시를 지었는
데, 이들은 당대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당시 議政府의 領議政이었던 李德
馨은 칠언율시 1수를 지었고, 議政府 左議政인 李恒福으로 5언율시 1수
를 지었고, 議政府 右議政이었던 沈喜壽는 7언율시 2수를 지었다. 이밖에
도 해평부원군 윤근수, 진원부원군 유근, 의정부 우찬성 정창연, 행예조판
서대제학 이정구 등 많은 사람이 있는데, 거의 모두 중앙직이고 행영천군
수인 姜綖만 유일한 지방직이고 나머지는 모두 중앙직이다.
홍이상에 대한 만사를 지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이름난 인물들 72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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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지었다. 오성부원군 이항복, 의정부영의정 기
자헌, 영돈령부사 심희수, 해평부원군 윤근수 등이 있다. 이항복, 기자헌,
윤근수는 칠언율시 1씩 각각 지었고, 심희수는 칠언율시를 4수 지었다.
홍이상의 부인인 안동김씨에 대한 만사는 모두 41수인데, 이때도 높은
벼슬아치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오성 이항복, 일송 심희수, 연릉부원군 이
호민, 진원부원군 유근, 행동지중추부사 박홍구 등이 있다. 오성은 오언율
시 1수, 일송은 칠언율시 2수, 이호민과 유근은 오언율시 각각 1수, 박홍구
는 칠언율시 1수이다.
이것을 보면 만사․제문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진 것인지 알 수 있
을 것이다.
셋째, 이 책에는 앞 뒤 표지 안쪽에 모두 커다란 정명공주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첫 장에는 홍영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명공주는 홍이상의 둘째 아들인 홍영의 아들인 洪柱元에게
시집온 사람이다. 당연히 이 책은 홍이상의 부인이 돌아간 뒤에 지어진 것
이므로, 홍이상의 둘째 아들인 홍영이 보관하던 책에 정명공주가 홍주원에
게 시집을 온 뒤에 자신의 도장을 찍어 잘 보관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조
선 중기 공주의 도장이 앞뒤로 찍인 책은 지금 그리 흔한 것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
넷째, 이 책의 맨 뒷면에는 공주의 도장이 찍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정명공주의 자필 자작으로 보이는 시 한 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
시가 정명공주의 시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도장과 함께 있는 것으
로 보아 정명공주의 것일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고 하겠다. 만약 이것이 정
명공주의 시라고 한다면, 정명공주의 귀한 작품을 이곳에서 볼 수 있으며,
정명공주가 시댁의 상사에 모여들었던 만장을 정리하여 한 책으로 만들었
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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面貌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哀悼의 感情 237
5. 맺음말
이 글은 만사․제문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는 모당 홍이상의 만사와
제문, 특히 만사를 통하여 만사의 작자들이 홍이상의 어떠한 모습에 대하
여 어떠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홍이상에 대한 자료는 이미 모당집 상, 하권에 출판이 된 바 있으나,
만사․제문이란 이 책에 수록된 내용은 싣지 못하였다. 만사․제문은
홍이상의 후손인 홍기홍이란 분이 비장하고 있다 최근에 공개하여 알려졌
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당시 벼슬하던 많은 사람들이 지은 만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오성 이항복, 한음 이덕형 등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는데, 만사․제문에 실린 많은 사람들의 만사를 통하여 그들
이 홍이상에 대해 가지고 있던 다음의 몇가지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홍이상의 죽음에 대한 생각인데, 대체로 그의 죽음을 보고 매우
애석해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다만 죽음에 앞서 그가 고양으로 물러나
은퇴하였다가 병이 들어 돌아가게 된 과정을 묘사한 부분도 죽음을 읊은
것과 관련지어 애석해하는 마음을 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홍이상이 학자로서의 자질과 학문적 성과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끝난 것을 아쉬워하는 내용이다. 이에 겸하여 문장도 뛰어나다고 하였고,
특히 그는 효성으로 대표되는 훌륭한 행실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셋째는 그가 과거시험에서 합격한 것에 대한 것이다. 당시 과거는 한 사
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커다란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특히 홍이상이 세 차
례의 장원 급제를 하는 등 두드러지게 뛰어난 모습을 보인 것과 이러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한 슬픔을 노래했다.
넷째는 자손의 번성함을 통하여 고인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이다. 홍이상
에게는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뛰어나 옛날 진나라 때 謝氏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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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뛰어난 사람들, 荀氏의 여덟 아들들에 비유되었고, 또한 용봉, 난옥 등
고귀한 사물로 표현하며, 이들이 집안을 일으키고 가업을 이어갈 것이라며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이상에서 이야기한 것 이외에 다른 다양한 것에 대한 예찬 및
평가이다. 타고난 성품이라든지, 뛰어난 능력,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경로
연을 베풀었던 일 등 여러 가지와 혹은 평생의 많은 일을 한꺼번에 시에
소개해 놓은 것 등이다.
만사는 고인을 위해 짓는 시인만큼 고인에 대한 감정의 표현 등이 매우
제한적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인에 대한 생각이 작자마다 다르기 때
문에 고인에 대해 인지하는 다양한 모습과 그 모습에 걸맞는 감정이 드러
나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輓詞․祭文(洪基弘 소장본).
洪履祥, 慕堂集(대제각 영인본).
洪履祥, 慕堂集(한국고전번역원 문집총간본).
尹浩鎭 譯, 역주 모당선생집 상․하, 민속원, 2013.
李峻,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行嘉義大夫, 司憲府大司憲洪公墓誌
銘」, 蒼石文集 卷16.
논문투고일 : 2014. 10. 30. 게재확정일 : 2014.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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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Review on the figuration and cognition of Ohodo(Jeonhengdo)
that are expressed in it's poetry
Yun, Ho-jin*
7)
Koreans’ perception and embodiment of Ohodo(Jeonhengdo) of China were examined
in prior part. Ohodo was geographically close to Korea, and it was a seaway to China.
Because historic events related with Ohodo matched with Chosun gentry’ ideological
intention, Ohodo drew attention from gentry and writers from earlier time.
Geographically Ohodo had beeline distance on the same latitude as Hongseong,
Korea. Though there were inaccurate knowledges that Ohodo was brought up in
Buan, Chonnam and seen from Baengnyeongdo, natural climate and folklore at
Ohodo were specifically described by visiting there, including especially temples,
portraits of the deceased, and sacrificial tables at Jeonheng. It was revealed that in
late Chosun dynasty groundless stories about this island were approached thorough
historical research.
From the earlier time, poems were written about Ohodo, stories and people
related with this island. Specifically in late Koryo Dynasty shifting to Chosun
dynasty people had higher concern about Ohodo. Prominent scholars, writers, and
politicians , such as Jeong Mong-ju, Lee Sungin, Jeong Do-jeon, Lee Cheom at that
time composed various poems about this island. Since then poets and calligraphers
had written Ohodo poems in which Jeonheng and his family were consoled and their
rightous deaths were compared to Noh Jungnyeon or Hakui and Shukusei, the loyal
brothers of Chinese lore.
Among those poems, Lee Sungin’s Ohodo poem was given a glowing account by
his master, Lee Sek and roused his alumnus, Jeong Do-jeon’s jealousy, which
caused various affairs and stories. Seo Geojeong mentioned this in his book Dongin
Sihwa. This story regenerated interests from Yun Geun-su, Yang Gyeongwoo, and
Heo Gyun. This content was reproduced in Seungsu Sihwa, Jaeho Sihwa. Kim
* Gyuongsang National Univ.
240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Suhang achieved recognition with his Ohodo poem from a writer, Taekdang Lee Sik
at that time. Taking this oportunity, his literary talent was recognized and became
a foundation for his successful life.
key words Ohodo(Jeonhengdo), Jeonheng, Hongseong Korea, Koryo Dynasty,
Chosun dynasty, Lee Sek, Jeong Mong-ju, Lee Sungin, Jeong Do-jeon, Lee
Cheom, Seo Geojeong, Yun Geunsu, Yang Gyeongwoo, Heo Gyun, Lee Sik,
Kim Suh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