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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핵심, 최상의 경배-주님의 만찬
제가 어려서부터 가졌던 의문은 사람들이 교회에 예배보러 간다고 말하는데, 예배라는 말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것이거나 그분앞에 무릎꿇고 경배하는 것, 등을 연상하는 말인데 반하여 자꾸만 인간이 강단에 올라 무엇을 가르치며 주장하기도 하고, 나머지 듣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 자꾸만 무엇을 요구하는 기도를 하는 순서들이 가득한 시간을 예배라고 부르고 있는 현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가르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께 영광돌린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자꾸만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고 요구하고 주장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저는 교회 안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 생활의 필요를 공급해달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라는 교회의 순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교회안에서는 성경공부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또 기도집회시간을 갖고 기도의 제목들을 모두 모아서 순서에 따라 기도 제목 당 두 세명씩 기도하여 충분히 망라하고 충분히 기도할 사항들을 카버하며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시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시간입니다. 예배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란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며, 그분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경배한다든지, 그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사역을 기억하고 인정하며 믿고 감사드리며 영광돌리는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부족하여 인간들에게 구걸하시는 분도 아니며, 인간들에게 무슨 재물이나 물질을 받으시고자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는 그분께서 아깝고 고귀한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인간들의 죄값을 대신 치루게 하시고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채찍질 당하시며, 침뱉음과 수욕을 당하게 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시고 피흘리고 죽게 하심으로 이루어놓으신 세계 구속의 대역사, 인류 구원의 크신 역사를 기억하고 믿고 감사하며 그 진리대로 인생들이 죄사함의 사실을 믿고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무엇을 가져오는 것보다도, 그분 자신이 이루어놓으신 크신 은혜를 인생들이 믿고 남김없이 받아먹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최우선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어떤 소유물로도,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못미칩니다.
인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서 십자가의 사실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그분을 순종하는 영역은 넓어져서 하나님의 나라는 창대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예배를 설명합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내가 너희를 권면하노니 너희 몸들을 살아있고, 거룩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예배이니라. 2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너희 생각의 새롭게함으로 변형되어져서, 너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함에 이르라.
우리의 몸을 살아있고 거룩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로 드리는 것이 바로 합당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삷 전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모임의 예배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
루카 22장
19 그리고 떡을 받으시사, 감사드리시고 나누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이르시기를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어지는 나의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하시고 20 식사하신 후에 잔도 그와같이하여, 이르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된 새 언약이니, 너희를 위하여 흘려지는 것이라.
이것은 마치 죽음을 향해 가는 어느 어머니가 극진히 사랑하는 아들에게 더 이상 다른 무엇으로도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없어서 내가 너때문에 차마 죽지 못하겠으나 이것으로 네게 나의 피, 나의 몸을 남겨준다 그러하니 너는 나를 기억해다오. 하고 유언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 지시고, 못박히시사 피흘리시고 죽으신 사실을 기억하고 믿으며
감사하고 증거하는 것을 실천적으로 행하는 행사입니다.
주님의 만찬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왜 그것이 중요한가?
주님의 만찬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그들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피흘리시고 죽으셨음을 기억하게 하는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려고 인간들이 달려오려고 준비하던 그 시간에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최초로 실행하셨으며 그 사건은 중요한 까닭에 성령께서는 세명의 복음서 기자들이 이를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마태 26장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감사드리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드리시고 “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가 14장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시사 축복하시고 나누어 저희에게 주시며 이르시기를 “ 받아 먹으라, 이 것은 나의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한 잔을 가지사 감사드리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저희가 모두 그것에서 마시니라. 24 그분이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려지는 나의 피 곧 새언약의 피이니라.
(2) 주님의 만찬은 매우 중요한 행사이므로, 바울에게 직접 주님께서 부탁하셨습니다.
고전 11장
23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을 나는 주께로부터 받았나니, 곧 주 예수께서 넘겨지시던 그 밤에 떡을 가지시사,
바울이 베드로에게서 전해들은 것도 아니고 요한에게서 전해들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명하셨던 것입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인간의 죄를 위하여 부서진 사실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나의 몸이니
이 진리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우리가 못박혔어야 할 나무에 우리 대신 못박히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4)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언약을 갖고 있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앞에 그분께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한 믿음의 언약을 다시 생각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고전 11장
만찬 후에 잔을 가지시사, 이르시기를, “ 이 잔은 내 피로 된 새 언약이라
(5)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행사입니다.
고전 11장
26 이는 너희가 자주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전파하는 것임이라.
(6) 죄를 예방하게 해줍니다.
고전 11장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치 않게 주의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이에 사람이 자기를 시험해보게 하라, 그리고 그와같이 그 떡을 먹게 하고 그 잔을 마시게 하라. 29 왜냐하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을 분별치 아니하고 스스로에 대한 정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라.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자기 스스로를 시험해보게 하여 영적 정결성을 유지하게 도와줍니다.
이러한 원칙을 아는 성도들은 범죄하는 경우 만찬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알고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7)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되었음을 믿고 실행하게 해줍니다.
고전 10장
16 우리가 송축하는 송축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냐? 우리가 나누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에베소서5장
30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로된, 그분의 몸의 지체들임이라.
(8) 성도들끼리 한 떡이 되었음, 한 몸됨, 하나됨을 믿고 마음에 새기게 해줍니다.
고전 10장
16 우리가 송축하는 송축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냐? 우리가 나누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많은 우리가 한 떡이요, 한 몸임이니, 왜냐하면 많은 우리가 그 한 떡을 나누어 먹기 때문이라.
이러한 교제는 다른 어떤 교파 교회들보다도 더욱 친밀한 성도들간의 교제를 가져옵니다.
(9)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앙망하는 행사입니다.
고전 11장
26 이는 너희가 자주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전파하는 것임이라.
히브리서 9장
28 그와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사람들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려지셨다가, 자기를 앙망하는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죄들과 상관없이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이와 같이 주님의 만찬은 주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그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3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으며 바울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명하신 사항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피흘리시고 죽으신 사건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그것을 자주 기념하는 이유는 그분이 또다시 피흘리시고 죽으실 필요가 없이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을 기념하고 기억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를 범할때마다 또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렇게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셨을 때, 그분이 이르시기를 “그것이 이루어졌도다!”하시고, 그분께서 머리를 숙이시며, 영을 맡기시니라.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7 저희 죄들과 무법들을 더 이상 내가 결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8 이에 이것들의 사함이 있는 곳에는, 더 이상 죄들을 위하여 예물드림이 필요 없느니라. 19 형제들아, 그러므로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들의 진입로 안으로 담대함을 갖고서…..
이제 다시 주님의 만찬으로 돌아가서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의 형태요 순서라고 믿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만찬이 어떻게 실행되는 것이 정상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몇가지를 살펴봅니다.
떡 떼는 행사가 음식을 나누는 행사와 구분되는 것은 사도행전 2:46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사도행전 2장
46 날마다 저희가 성전에 한마음으로 헌신하여 모이며, 집을 돌아가며 떡을 부수어 떼고, 큰 기쁨과 겸손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으며
( 떡 떼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을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떡떼는 순서도 있었고, 음식먹는 시간도 있었음을 보시지 않습니까?
떡 부수는, 떡 떼는 행사는 초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음이 분명합니다.
그 주님의 만찬 행사를 초대교회는 < 날마다 > 행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일년에 한번씩 행한다는 교회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고전 11장 25절과 26절에서 < 자주> 라는 단어를 빼버린 것은 초대교회가 보여준 주님의 만찬의 자주 실행을 폐기하도록 한 성경의 가감삭제의 행위가 아닙니까?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정죄와 징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화체설과 공재설(임재설)
로마 카톨릭에서는 그들의 만찬을 유카리스트(영성체 미싸)라고 하여 그들의 사제들이 주관하여 실시합니다. 그들은 이 유카리스트에서 떡(쿠키)이 변하여 살이되고 포도주가 변하여 피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전혀 근거없는 주장으로 그들은 위에 언급된 주님의 첫 성만찬을 근거로 주장하며 요한 복음 6장에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는 말씀(요 6:53-54)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 6장에서 영인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6:63), 그분의 육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카톨릭은 스스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고 주장합니다만 피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4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겨지리라.
따라서 로마 카톨릭이 스스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고 주장하고 고백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서 끊어진 사람들임을 스스로 강력히 주장하는 것입니다.
피는 인간들이 먹도록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피는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예수님이 완성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를 받을 자라는 것을 증거하는 셈이 됩니다.
공재설 혹은 임재설이란 루터파들이 믿고 주장하는 것으로 주님의 만찬의 떡과 잔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임하신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화체설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루터의 교리로서 바빌론의 식인 풍습등에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화체설의 뿌리는 바빌론 종교의 식인 제사장들의 풍습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기념설을 믿어왔습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이러한 화체설 임재설 등은 카톨릭의 성직자 제도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한 화체설이라는 신비스러운 마술을 자기네 사제들만이 행할수 있다 하여 다른 교인들이 카톨릭 교회를 떠나지 못하도록 막는 방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반 평신도들은 떡을 살로 바꾸고 포도주를 피로 바꾸는 마술을 못 행사할 것이므로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들이 행하는 형제단의 예배에서는 성만찬을 실시 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럼에도 신약에 충실했던 알비진 등의 기독교 형제단들은 이러한 화체설을 배격하였습니다.
예배의 핵심, 최상의 경배 – 주님의 만찬
주님의 만찬은 어느 특정 성직자가 피흘려 죽은 것도 아니므로, 그가 마치 피흘리고 죽은 것처럼 주인 행세하고 다른 사람들은 평신도라 하여 그 성직자의 초대에 초대받은 양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만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은, 형제들이든 자매들이든, 어린이든 노인이든, 누구든지 동등한 신분으로, 모두 동등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입은 거룩한 성도들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베푸신 잔치 상에 값없이 은혜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성직자도 있을 수 없으며 참여 성도 모두는 존귀하고 거룩하고 명예로운 손님으로서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만찬을 가장 합당하고 진지하게 자주 실행해온 교회 모임으로는 소위 형제 모임이라 불리우는 모임 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은 매주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주님의 만찬으로 그들의 예배를 시작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은 일요일에 예배라는 이름으로 모이지만 이러한 예배에는 주님의 만찬은 빠지고, 인간의 설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설교의 내용은 주일성수(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는 새로운 십계명), 십일조(연보와 폐해진 십일조를 구분 못하는 설교), 목사숭배(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의 자리에 목사를 올려놓는 행위), 새벽기도(세계 유일의 새벽기도 국가), 성전 건축(건물을 성전으로 착각하게 하면서 성전된 성도들의 몸에 관한 가르침-고전 6:19-을 짓밟는 설교)에다가, 시사평론과 정치 한담, 헌금 많이 내면 축복받는다는 기복신앙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까? 경배입니까?
한 웨슬레는 그가 옥스포드 대학 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만찬이 매주일 실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수많은 고대 학자들의 문헌에는 성만찬을 최소한 1주일에 한번 이상 실시했음을 알리는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1장 25절과 26절에는 호사키스 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 너희가 자주 먹고, 너희가 자주 마실 때마다, 라는 말로 성만찬이 자주 실행되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진정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이루신 위대한 희생제사 곧 십자가의 사실과 진리를 기억하고 믿고 감사드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인생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격도, 가까이 나아갈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효력을 갖는 위대한 희생제사를 드렸으므로 이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믿는 우리 모두는 그분의 피를 기억함으로 아버지께 나아갈 수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초대 교회 제자들은 떡을 뗄 목적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설교를 듣는 목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그 설교는 바로 주님의 만찬을 실시하기 전에 혹은 그 후에 십자가 사실을 기억할 수 있도록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예배행위의 최고봉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예배는 교회에서 매주일 공식적으로 실행하여야 합당하겠으나,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일년에 두 번 정도로 실행하면서 마치 목사가 신도들을 위해 피흘리고 죽었던 양, 목사가 집례하는 방식의 성찬예식만을 시행하므로, 이를 가정에서라도 온전히 실행하고자 한다면 두 어 가정이 함께 모여(마 18:20) 매주 한번씩 실행할 수 있으며,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가정에서 가족들끼리라도 주님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주님의 만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 분별입니다.
주님의 만찬을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낸 교회 벼슬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 것입니다(고전 16:22-23)
자주 이 떡을 먹으며, 자주 이 잔을 마실 때마다
고전 11장
25 그와같이 또한 만찬 후에 잔을 가지시사, 이르시기를, “ 이 잔은 내 피로 된 새 언약이라. 너희가 자주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도록 이것을 행하라.” 하셨으니 26 이는 너희가 자주 이 떡을 먹으며 자주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많은 한글 성경 번역들은 이 중요한 교훈의 말씀에서 < 자주> 라는 단어를 빼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텍스투스 리셉투스
ὡσαύτως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μετὰ τὸ δειπνῆσαι λέγων, Τοῦτο τὸ ποτήριον ἡ καινὴ διαθήκη ἐστὶν ἐν τῷ ἐμῷ αἵματι τοῦτο ποιεῖτε ὁσάκις ἂν πίνητε 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
ὁσάκις γὰρ ἂν ἐσθίητε τὸν ἄρτον τοῦτον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τοῦτο πίνητε τὸν θάνατον τοῦ κυρίου καταγγέλλετε ἄχρις οὗ ἂν ἔλθῃ
KJV
25 After the same manner also he took the cup, when he had supped, saying, This cup is the new testament in my blood: this do ye, as oft as ye drink it, in remembrance of me.
26 For as often as y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e do shew the Lord's death till he come. |
ὁσάκις
as often as, as often soever as
호사키스라는 말은 영어로는 as often as, as often soever as, whenever often
으로 번역되며, 한글로 번역된다면 < 자주 ㅇㅇ 할 때마다> < 자주 xx 할 때는 언제나> 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단어가 들어있는 문자을 번역할 때에는 자주라는 말을 넣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글 번역들은 이 단어를 이 문단에서 빼버렸습니다.
호사키스라는 단어는 모든 사본들에 들어있습니다.
거듭남, 십자가의 진리가 중요하지 의식이 중요하지 않지 않은가?
인류 구속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에 의한 속죄의 진리, 구원과 죄사함,
그것을 믿는 믿음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유언으로 부탁하셨습니다(룩 22:19). 그 이유는 주님의 만찬예배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실물 교본으로 기억하고 기념하며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행사(고전 11:26) 이기 때문입니다.
모임 ( 교회)의 어떠한 예배나 행사들중에서도 이 주님의 만찬 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직접적이고 정확히 실증하는 행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 예배는 기독교인들의 모든 행사들중의 최고봉이며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년중 2-3번으로 줄이고, 인간 목사나 다른 인간들의 행사들로 대체한후에 그것을 예배라고 이름붙인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은 빼놓고
인간의 설교와 인간들을 드러내는 행사로 변환되는 것으로 밖에 볼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주님의 만찬은 다음과 같은 명백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1)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며 그분의 피에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6-17)
2)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가르쳐줍니다. (고전 10:17)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합니다.( 11:26)
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상기시켜줍니다(갈 2:20, 고전 11:24)
5)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에 의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대속되었으며 씻어졌고
죄값이 지불되었음을 기억하고 생각나게 하며 새로이 믿게 해줍니다.(마 26:28, 고전 11:25)
6) 성도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살피고 죄를 짓지 않게 예방시켜줍니다(고전 11:27-30)
7)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로 더불어 먹고 우리는 그분으로 더불어 먹음을 체험하며 가르쳐주십니다.(계 3:20)
주님의 만찬의 범죄 예방효과는 매우 강력하고 실제적입니다.
주님의 만찬을 진심으로 매주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죄를 범하면 다가오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항상 조심하며 자신을 살피게 됩니다.
만찬에 참여하면서도 성경에 명시된 죄를 범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징계가 수시로 있어왔습니다. 또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직전에 그 지역 모임에
소련 KGB 가 들이 닥쳐 그들의 주님의 만찬 상을 군화발로 걷어찼는데 그 사건후 몇주가 못되어 폭파 사고가 났다는 것이 형제모임들에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년에 두세번 실행함으로서 인간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됩니다.
예배란 예의를 갖추어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류 교회들의 예배란 설교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예배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 예의를 갖추어 드리는 것인데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사실을 기억하고 인정하고 믿으며 찬양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류 교단들은 인간 설교가 중심이 되어 성경 몇줄 읽고 해석한다음 그에 맞추어 시사 평론도 하고 격언도 전하며, 헌금 많이 하면 복받는다, 십일조를 해야 등록교인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성전을 건축하도록 성전건축헌금을 내야 한다 등의 설교와, 교회에 열심히 다녀야 한다, 주일 성수 강조와 새벽기도 강조 또는 목사섬기기 강조 설교로 대부분의 시간이 할당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적 모임들은 매주일 주님의 만찬을 한시간 이상 가짐으로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에 집중하며 주목하여 기억하고 감사하며
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죄씻음(계 1:5) 과 영원한 속죄( 히 9:12-14, 10:16-18) 을 중심으로 많은 시간을 예배에 쏟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을 자주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년중 대부분의 집회에서는 인간 설교가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 자주> 라는 단어가 빠짐은 일년중 49-50주간의 예배에서는 주님의 만찬이 실행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성경 번역에서 자주 라는 단어를 빼버림으로서, 일년중 2-3주만 만찬을 실시하고, 49-50주는 주님의 만찬을 매주일 실행하지 않아도 되도록 예배의 형태를 바꾸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만찬예배 대신에 인간 설교 중심으로 예배 형태를 바꾸었으며, 그것은 결국 인간 숭배, 인간 존경으로 향하게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정체제에서, 인간 목사 당회장의 지도체제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됨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속죄와 죄씻음을 매주 재확인하지 못하고, 죄를 예방시켜주지 못하면서, 인간설교로 정치방담, 시사평론, 속담과 격언, 십일조와 헌금, 성수주일, 목사중심체제, 건물중시 체제로 교회가 바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할 모임을 선택할 때에는 바로 이와같은 주님의 만찬이 매주일 실행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고를 때는 고전 11:25-26절에 자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해당되는 성경말씀들을 구절별로 살펴보겠습니다.
고전 10장
16 우리가 송축하는 송축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냐? 우리가 나누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많은 우리가 한 떡이요, 한 몸임이니, 왜냐면 많은 우리가 그 한 떡을 나누어 먹기 때문이라.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놓으신 가장 고귀한 만찬, 가장 값비싼 만찬에 초대받은 명예로운 손님들이며 그 만찬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동등한 손님들이며, 목사가 주관자도 아니며, 집례자도 아닙니다! 목사도 그 분의 피에 의해 속죄함을 입었던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을 나는 주께로부터 받았나니,
(고전 11:23)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만찬에 관한 교훈을 다른 사도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배웠습니다. 그분은 언젠가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가르치신 것으로 분별됩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나의 몸이니, (11:24)
개역한글과 개역개정,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 부서진> 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그들의 바탕원문에 < 클로메논> 이라는 동사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본들, 압도적 다수 사본들에는 그 동사가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은 그 동사 수동태 분사형을 넣은 것입니다.
< 자주> 가 26절에 두번 들어가는가? 한번인가?
원문의 호사키스는 26절에 한번입니다. 그러나 한글로 번역하는 경우 한번만 넣어야 할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호사키스는 < 자주 먹으며> 뿐만 아니라
< 자주 마시는 것> 에도 해당되고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축자역의 원칙과 그것이 낳을 오해의 소지 문제를 감안하여 판단할 문제라 생각됩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영성체는 자주 매주일 먹으면서 잔은 사제들만 마십니다. 평신도들이 마실때도 있는 줄로 아는데 그 경우에는 떡은 자주 먹으면서 포도주 잔은 드물게 마시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의 뜻은 떡과 잔을 함께 자주 실행하는 것을 가르침이 확실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 대학과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주님의 만찬은 매주일 실행함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매주일이라고 성경에 명시하지 않은 이유는 초대교회 당시에는 실제로 매주 일회보다 더 자주 실행한 것도 상당한 이유였다고 분별됩니다. 행 2장 46은 그것을 매일 모일때마다 실행했다는 암시를 가르쳐 줍니다.
사도행전 20장
7 안식후 첫날에, 제자들이 떡을 나누려고 모였더니, 파울이 저희에게 강론하여, 다음날에 떠나려고, 한밤중까지 말씀을 계속하니,
이 구절에 관한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믿어지며, 저또한 바로 몇년전까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그것을 바로잡고 시정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초대교회가 어떻게 교회에 모였는지에 관하여 중요한 정보를 얻습니다.
가) 초대교회에서는 안식일에 기도집회를 가졌습니다( 행 16:13)
나) 안식일에 설교하였습니다(행 13:42, 44, 15:21, 17:2, 18:4)
다) 베뢰아 교회도 안식일에 모였다고 믿어집니다(행 17:10)
라) 고린도 교회도 안식일에 모였다고 믿어집니다(행 18:4)
마) 사도 요한은 안식일을 주의 날로 불렀다고 믿어집니다(계 1:10) 그의 제자 폴리캅은
안식일에 예배한후 오후에 체포되어 큰 안식일에 화형되었다고 알려졌으며 그는 부활절이 아닌 유월절의 기념행사를 위해 마르치온파와 로마에서 쟁론하였고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바) 예수님이 8일 후에 제자들에게 보이셨다는 말씀( 요20:26) 은 유월절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8일후라는 뜻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경우 목요일이든 토요일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날이 일요일이었다는 해석으로 수없이 강조되었던 안식일이 폐해졌다고 해석될 수는 없습니다.
사) 오순절은 항상 일요일이 된다는 계산 방식은 사두개인들의 계산방식으로서
레위기 23장 15절을 잘못 번역 해석한데서 온 산정이지, 실제는 오순절은 어느 요일이든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은 일요일 예배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아) 사도 바울이 행 20장6절에서 빌립보로부터 닷새 동안 항해하여 드로아에 가서 7일을 머물게 된 것은 주님의 만찬 행사를 위해서 일정을 조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바로 무교절 행사를 대도시인 빌립보에서 ( 당시 인구 100만 이상) 행하기 위해 머물렀고 (6절) 그후에 드로아에서 1주일을 머물렀다는 뜻이며 주님의 만찬은 어디에서든지 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반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해중이던 5일중에도 주님의 만찬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자) 유대인들은 두 저녁들 사이( 출 12:6) 를 중요시합니다. 그것은 일몰 시각을 의미하며 특히 안식일의 일몰시각 이후부터는 안식후 첫날 저녁이 되며 한주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가정집에서 초대되어 애찬을 갖습니다(유다서 12절) 이것을 합달라라 하며 행 20장 7절은 바로 그러한 합달라 행사였습니다.
차) 합달라 행사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설교가 있은 후에 애찬을 가졌던 것입니다(행 20:11)
카) 합달라 행사가 아니고 일요일에 가진 주님의 만찬이었다면 어찌하여 일요일 아침에 모이지 않았겠습니까? 어찌하여 사도 바울은 먼저 만찬부터 실행한 다음에 설교를 하였을 것이지 설교부터 오랜 시간 행한다음에 떡을 떼었겠습니까?
타) 그들이 모였던 주 목적은 애찬, 곧 합달라를 나누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파) 떡을 떼는 것이 성만찬이었는가? 아니면 유대인의 합달라였는가?
여기서 사용된 클라오 동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떡을 떼심으로(
부수어 뜨림으로) 제자들의 눈들이 뜨여진 사실(룩 24:30. 31, 35)에서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2:42. 46절에서 사용되었고, 행
20:7절에서, 고전 10:16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에서 다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고전
11:24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나의 몸이니"
( 한글 성경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이 삭제됨)에서 부서지다는 단어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서진 몸을 상징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행 20장 7절에서 사용된 동사
클라오를 통해서 그것이 바로 떡을 떼는 주님의 만찬 행사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타당성 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클라오 동사는 마태 14장 19절, 15장 36절 마가 8장 6절 8장 19절에서도 쓰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일반적인 식사를 하게 하실 때에도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하) 따라서 행 20장 7절은 주님의 만찬이 아니라 합달라였음이 분명해보입니다.
합달라란 바로 한주일을 시작하기 전에, 모임의 믿는자들이 가정집에 초대되어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기) 사도 바울은 다음날 아침 여행을 떠났습니다. 다음날이 월요일이었겠습니까? 일요일 아침에는 무엇했겠습니까? 일요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울이 설교하다가 밤중이 되어서야 주님의 만찬을 시행했겠습니까?
니) 안식후 첫날 저녁은 바로 토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합달라를 가진 다음에
다음날 아침부터 일했던 것입니다.
디) 안식일에는 일반적으로 아침부터 주님의 만찬과 설교와 기도집회를 갖고, 해산한 다음, 저녁에 가정집에 모여 합달라를 가졌다고 해석함이 타당합니다.
당신은 주님의 만찬을 자주 (매주일) 실행하는 모임에 참석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예배의 핵심은 빠진 예배입니다.
당신은 < 자주 이 떡을 먹으며, 자주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라고 고전 11장 26절에 기록된 성경을 읽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의도에 의해 삭제한 것입니다. 그 변경효과는 참혹합니다!
둘다 아닙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신앙생활의 귀중한 부분을 놓치고 계십니다!
2010년 12월 9일 씀,
2015. 6. 29 수정보완 하토브
첫댓글 "주의 첫째날에, 제자들이 떡을 나누려고 모였더니," "이 십자가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초대 교회 제자들은 떡을 뗄 목적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아멘입니다. 이렇게 모이는 예배가 성경적인 예배입니다. 저희도 매주 성만찬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는 대단한 것입니다. 침례와 올바른 성만찬을 실행한다면 갖출 것의 뼈대를 갖추었다고 믿어집니다.
오. 김바울목사님도 매주일 성만찬을.... 형제모임이 아니신데도.
<제자들이 떡을 나누려고 모였더니.>
현대 교회의 병폐는 예배가 주로 목사님 설교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대부분의 교인들이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주변에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알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어 보입니다..많은 교회들이 말로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이것은 교회 강대상 한켠에 걸려 있는 표어에 불과합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은 형식이고 의식에 불과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는데 주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형식, 예식들은 바로 믿음을 크게 향상시키는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의식절차는 단순히 외형적 예식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성경의 골수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증거하고 선포하며 믿는 행사라는 것입니다. 그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화에 크게 기여합니다. 사실 형제모임의 소소한 실행들은 조금 부족하게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바로 이 거대한 성만찬 예식의 효능에 의해 덮어져 버리고 성도들의 성화에 크게 기여합니다.
저는 여기 회원님들이 교회에서 매주일 주님의 만찬으로 기념할 수 없다면 가정에서든지 어디에서든지 기회가 닿는대로(굳이 매주일 일 필요없지만 가급적 매주일) 우선 주님의 만찬을 실행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트를 넣지 않고, 밀가루와 약간의 기름, 소금을 넣은 떡을 번철에 부쳐서 만든 떡과 포도주로 기념하면 됩니다. 물론 개인적 성만찬은 교회안의 성만찬에 못미칩니다만 그래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무시하고 지내는 것보다 엄청 훨씬 낫다고 믿어집니다.
참 좋은 아이디어십니다. 그냥 밀가루 떡이네요. 이스트가 들어가지않은 밀전병을 만들어서 포도주와 함께 준비한 뒤 가족이 모여서 기도하고 먹으면 되겠네요. 물론 먹기전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야겠지요? 순서를 조금 더 자세히 안내해주시면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제가 교회에서 성만찬을 진행할 수 없던 시절에 취했던 방법입니다. 밀가루에 물을 섞고 약간의 식용 기름을 넣고 소금을 칩니다. 그런다음 전병처럼 부치면 손바닥 크기의 전병이 됩니다. 그리고 가족끼리 이므로 포도주 잔 하나면 됩니다. 한국 형제모임들에서는 일부러 한잔만을 사용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분잔을 안하지요.
그런 다음 떡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잔에 대하여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각자가 돌려가며 실행하면 되지요. 그것은 오직 십자가 사실들로만 가득찬 행사입니다. 한번 실행하시면 참 좋습니다. 한가지 꼭 하실 것은 성만찬에 관련된 구절들을 남편님이나 아드님이 꼭 공부하도록 하고 만찬 전에
그냥 읽든지, 혹은 그동안 깨달음이 있었으면 그 깨달음을 전하면서 간단히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들도 그 만찬 예배에 합당한 찬송으로 골라 부릅니다. 예컨대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등은 성만찬에 합당한 찬송입니다. 성경 공부 구절들로는 이사야 53장, 마태 26장 26절 이하, 요한 6장 48절 이하, 로마서 3장, 6장, 히브리서 8장 9장 10장, 계시록 5장 10절 그리고 맨 마지막에 꼭 읽으면 좋은 대목이 바로 고전 11장 23절부터 31절까지 입니다. 그런 다음 떡에 대하여 감사기도 드리고, 떡을 나누고, 잔에 대하여 감사기도 드리고 잔을 돌립니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다른 가족을 초대하여 함께 할수도 있습니다.
성만찬 예배는 십자가 사실들로 꽉 차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이미 이루신 십자가 사실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사함, 속죄, 구속으로 가득차 있으며 바로 주 하나님께 나아가게 인도해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시는 행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