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사'는 월붕산 망부석 향가이며, '정읍'은 연주고 향악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888년의 신라 향악 '정읍'은 최치원이 지은 삼대목이다. 향악이란 말을 처음 기록한 사람은 최치원이다. 고려사악지에 따르면 정읍사만은 향악으로 연주한다 하였다.신라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최치원은 당대에 정읍군수(태산태수) 재임시(887) 칠보에서 연행되던 놀이 다섯가지를 주제로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라는 시를 지었다. 향악의 의미 이시기에 최치원은 당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기에 신라의 전통예술을 향악이라는 애국적 이름으로 표현하였다 . 이 시는 금환(金丸) -산예(산猊)-월전(月顚)-속독(束毒)-대면(大面) 등 다섯 수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금환은 여러 개의 공을 양손으로 던지고 받는 도칠환(跳七丸)이라는 공놀이로서 백제와 고구려에 유행하던 것으로 한나라 때부터 전래된 것이다. 산예는 일명 사자기(獨子技) 라고 하는 서량의 춤이며, 월전은 중앙 아시아의 우전(于關, kothan) 지역의 놀이로서 여러 선비들이 술잔을 다투며 노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대면은 일종의 가면무인데, 채찍으로 귀신을 몰아내는 북제의 대면(代面)과 유사하며, 속독은 중앙아시아 속특(粟特)지방의 춤으로 현재까지 일본에서 전승되고 있는 무악(舞樂) 쇼쿠톡구(宿德) 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서역전래의 놀이를 주제로 한 최치원의 시 향악잡영오수는 모두 외래의 놀이를 노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최치원이 '향악'이라 지칭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신라에 당악이 수용되면서 전래의 향악은 물론 그 이전에 소개된 외래 음악을 한데 아울러 향악이라 불렀을 가능성을 암시해주기 때문이다. 향악잡영오수는 탈춤, 농악 사자무, 유상곡수 등의 놀이이며, 특히 신라에서 처음 발생한 유상곡수로 '월전'은 중앙 아시아의 우전(于關, )지역의 놀이로서 여러 선비들이 술잔을 다투며 노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칠보에서 지은 작품으로 현재까지도 전하는 '향음주례' 풍속이 전하는데 유교적 예로 변질되었지만 다른 곳에는 없다. 대면 역시 일종의 가면무인데, 채찍으로 귀신을 몰아내는 북제의 대면(代面)과 유사하며, 1940 년대에 칠보면 검단마을의 최진사 장례행차에 떠돌이 각설이패 흥복이가 대면(代面)인 방장쇠 탈잽이로 상여 앞에서 귀신을 쫓은 풍속행위로 칠보에서 다 아는 사실이다 그 가면은 아주 큰 대소쿠리에 창호지를 바르고 색칠하고 눈.코.입을 만들었고, 칠보지역의 모든 농악대들은 반드시 탈 가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나라 사신이 줄포항에 정착하여 고부, 칠보, 남원, 운봉, 산청, 대구, 경주로 행차하는데 그곳 수령들의 접대 가무기예 성적은 출세의 기회가 된다. 여기서 가장 풍요하고 섬진강과 동진강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 인 풍요한 칠보지역이 가장 성대한 가무잔치를 벌여 사신을 맞은 지역이다. 그래서 군산이 고향인 최치원을 이곳으로 부임시켰다. 줄포항에서부터 고부, 정읍. 칠보, 남원의 도로변에 걸쳐 산신제사가로 불리던 선운산, 방장산, 월붕산(정읍승부리), 지리산, 무등산가 등 소리를 모아서 이두문으로 제정하여 당나라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란 뜻에서 관현악으로 연주하게 하였다. 이미 당나라에는 하-은-주 3국의 음악이라는 공자가 만든 아악(당악)이 있어 고향의 음악이라는 의미에서 향악이라고 이름을 지어 연주했다. 정읍사에 삼대목의 모든 소리가 들어있다 최치원이 창조한 단어 향악으로 반주되는 삼대목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박혁거세 탄생음악 말소리, 석탈해 탄생의 까치소리, 김알지 탄생의 닭 울음소리, 백제단군(단골)의 호랑이소리, 고구려 고주몽을 도와준 비들기 우는 소리,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에서 나오는 꾀꼬리소리와 뻐꾹(쑥국)새소리 등 묘사소리가 그대로 정읍사에 들어 있다 진성여왕이 김알지 혈통이므로 위의 순서는 말소리를 닭소리로 바뀌었다. 시조 혁거세 상징의 말울음소리가 구테타를 일으킨 김알지 상징의 닭소리에 처음자리를 내준게 되었다. 이로써 신라왕족 정치투쟁사를 알 수 있기도 하다. 이시기는 새, 짐승을 신으로 신봉했으니 그 소리는 곧 찬송가였다. 이것을 현재 정읍농악에서는 청영소리, 또는 처용굿 이라고도 하는데 그 소리가 "술령수...."구령으로 유사하게 진행되는데 이는 동물의 소리를 음으로 노래한 것이다. 새마을노래도 유신 구테타로 홍연식 작곡이 박정희대통령 이름으로 작곡이 변경되었듯이 888년에도 역시 말단 군수인 최치원의 작품은 각간 위홍의 이름으로 진성여왕에게 바쳐진다. 그 후에 이 곡은 후백제에서 궁중악으로 사용되고 고려 혜종때에 고부(영주)관찰사 음성부곡(삼산동 서신초등학교터)에서 연습하고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고려3대 임금 정종과 왕식렴의 구테타로 나주 고부, 전주세력이 숙청되고 청주와 평주세력이 등장, 정읍사 음악은 버려졌다. 1010년 거란 침공으로 고려 현종이 정읍으로 피난했던 때에 최치원의 삼대목 예술이 뛰어남을 알게 되었다. 최치원을 문창후로 추증하고 태인허씨, 태인 유씨(유금필 후손)등을 등용하여 이후 10여분의 왕은 태인허씨 후손이 고려 왕비가 되었다. 백제 연주곡 '정읍'과 장사꾼의 노래 '정읍사'는 구분되어야 한다 고려시절의 고부관찰사소속의 음성부곡은 후에 정읍현이므로 '정읍향악'을 '정읍'이라고 축소하고 생략하여 부르고 유별나게 '정읍'사만은 향악으로 연주한다고 고려사악지는 전한다. '정읍'은 최치원의 향악이며 '정읍사'는 월붕산 망부석(북면, 승부,점촌마을)의 명칭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정읍은 백제가요가 전체 연속된 연주곡 향악이고 정읍사는 장사꾼아내의 노래로 향가 한수로 해석해야 한다. 정읍사가 향악이라고 하니까 삼국시대 말기부터 고려 초까지 존속하였던 향찰(鄕札)로 표기된 말을 향가라고 부른다고 한다. 최치원은 태수시절 속현 부성현을 '무성현(武城縣 )'이라는 중국 음악의 도시이름으로 지었다. 그 유적으로서 무성서원에 걸린 현판은 삼국지 제갈양의 음악연주 터 '현가루( 絃歌樓)'를 의미하고 있다. 현가루는 최치원때부터의 건물양식을 대대로 중수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최치원은 화랑도적 음악가이지 유교적인 문구는 없다고 볼 수 있다. 불교사찰에는 환웅을 의미하는 대웅전(환웅전 )이라 쓰고 무속 신전에서는 석가모니상을 모시고 있다. 공자의 사당에서는 석가모니를 연상시키는 석전제(釋奠祭)라고 불당을 상징하는 건물에서 문묘(文廟)라는 반불교인 본래 공자(孔子)에게 지내는 제사를 일컫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최치원의 사당도 공자사당 풍으로 무성서원에 현재 남아 있으나 이름만은 향악 삼대목을 만든 '현가루', 삼국지 제갈양의 음악학교 터로 현판을 건 채 남아 있다. 정읍(수제천)으로 부르는 소리 역시 곡명은 백제시대와 똑같아도 소리는 조선 유교의식의 소리로 진성여왕이 들으면 전혀 관심도 없었을 아악소리이다. 8월 10일 무성서원에서 백제의 소리 울린다 세계제일의 문화 유산 백제가요 삼대목이 8월10일, 백제시대의 씩씩하고 흥겨운 소리로 복원되어 국악관현악단의 연주를 통해 888년 당시로 되돌려 느낄 수 있도록 한다고 한다.그 날 최치원이 외치고 싶은 '향악의 한'을 1027년만에야 무성서원에서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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