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4장14-17절 만남의 축복2 260510(어버이주일 오후) 원주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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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정이 세워지는 원리: 둘이 하나 되고, 하나가 다시 둘 되는 축복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4장 14절에서 17절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복음으로 낳은 자녀'임을 강조하며 영적 아비의 마음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가족 상담을 공부하며 인생의 관계를 정의하는 한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둘이 하나 되는 가정이, 하나가 둘 되는 가정을 세워 갑니다"라는 명언입니다.
부부는 본래 남남이었으나 만나서 '둘이 하나'가 되어 화목한 가정을 이룹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 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반드시 '분화(Differentiation)'가 일어나야 합니다. 한 몸처럼 붙어 있던 관계에서 자녀가 독립된 인격체인 '둘'로 나뉘어 나가는 축복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 분화가 안 된 가정이 참 많습니다. "무능한 남자와는 살아도 마마보이와는 못 산다"는 말이 왜 나옵니까? 무슨 일만 생기면 부모에게 묻고, 스스로 자기 삶을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가정이 이 건강한 분화의 원리 안에서 대대로 복을 누리길 축복합니다.
2. 어른, 스승, 그리고 아비가 되는 삶
인생을 살면서 '좋은 어른'으로 세워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른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요즘 말로 '꼰대'입니다. 꼰대는 "나 때는 말이야"를 입에 달고 살며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다음 세대를 몰아세웁니다. 그러나 참된 어른은 품어주고 길을 제시합니다. 나이가 든다고 누구나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노인은 많아도 어른은 드문 시대입니다.
또한, 인생에서 좋은 스승(멘토)을 만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저에게는 김덕신 목사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저를 잘 모르셨지만, 저는 4년 동안 그분의 철야 예배를 사수하며 성경을 읽고 목회의 자양분을 얻었습니다. 좋은 부모를 만난 사람은 좋은 스승을 알아보고 그 밑에서 양육 받을 줄 압니다. 만남을 발전시켜 영적 지도를 받는 은혜, 그것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3. 나의 '모판' 이야기: 권위자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어린 시절
하지만 저에게도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좋은 스승을 멀리서 존경만 했지, 살갑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돌아보니 저의 '모판(어린 시절의 가정환경)' 때문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막내로 태어나 대가족을 부양하느라 무척 바쁘셨고, 엄한 분위기 탓에 자녀를 안아주거나 표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셨습니다. 특히 저는 위아래 형제 사이에 낀 중간 아들로서 소외감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고팠지만, 실제로는 아버지가 계신데도 없는 듯한 '부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상처는 제가 성인이 된 후 권위자를 대하는 방식에 그대로 투영되었습니다. 부목사 시절, 담임 목사님이나 장로님들께 미주알고주알 상의드리는 것이 너무나 어색했습니다. 늘 결론만 적은 페이퍼를 들고 가서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통보하듯 보고했습니다. 김덕신 목사님께도 "이것이 궁금합니다"라고 묻지 못한 채 '가깝지만 먼 당신'으로 4년을 지냈습니다. 제 안의 결핍이 권위자와의 깊은 소통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4. 관성을 깨고 권위자와 가까워질 때 누리는 복
어느 날 장우석 목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 관성이 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목사님들이 집회 후 찜질방에 가자고 하셨을 때, 저는 개척 교회 형편에 돈 걱정부터 하며 뒤로 빠졌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 등을 밀었습니다. "따라가서 얘기 나누면 좋은 것 얻는다."
벌거벗고 앉아 땀을 흘리며 목회의 고민과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저는 비로소 권위자와 가까워질 때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늘 '비주류'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그것이 편안하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상담을 공부하며 깨달은 것은, 좋은 부모 밑에서 사랑받은 사람이 가지는 자신감과 긍정적 태도가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권위자에게 상처받은 사람은 상사에게 대들기 마련이지만, 사랑받은 사람은 상대를 존중하며 함께 성장할 줄 압니다.
5. 예화: 상처받은 아들과 아버지의 극적인 회복
어느 시골 교회 목사님의 아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난한 목회자 밑에서 자란 아들이 배고픔을 못 이겨 사탕 하나를 훔쳤습니다. 이 사실을 안 목사님은 마을 이장에게 사대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은 뒤, 분노에 휩싸여 아들을 몽둥이로 실신할 때까지 팼습니다.
그날 이후 아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말을 잃었습니다. 바보처럼 공부만 해서 대학을 나오고 신학교까지 갔지만, 그에겐 감정도 열정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은퇴하며 교회를 물려주었지만 교회는 부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상담 공부를 하게 된 아들이 '아버지 치유' 시간에서 억눌린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어느 주일, 아들은 축도하러 나오신 아버지 목사님 앞에 서서 물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랑하시기는 한 거예요?" 아버지는 울음을 터뜨리며 대답했습니다. "이 녀석아, 내가 새벽마다 너를 위해 얼마나 울며 기도했는데." 부자가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로 화해했을 때, 온 교회가 함께 울었습니다. 그날 이후 막혔던 복음의 문이 열리고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관계의 매듭이 풀린 것입니다.
6. 인생의 만남을 교정하는 십자가의 은혜
우리는 좋은 부모, 좋은 어른을 만나는 복을 구해야 합니다. 혹여 부모님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더라도, 인생의 여정에서 할아버지, 삼촌, 혹은 훌륭한 스승 한 명만 제대로 만나도 인격은 교정됩니다.
제주도 해녀 출신 이복수 권사님의 이야기도 감동적입니다. 남편 남용훈 집사님은 새엄마의 구박에 상처 입고 떠돌던 분이었습니다. 권사님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처지였음에도, 남편의 전처 딸을 수소문해 찾아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해녀 일로 번 돈을 털어 그 딸을 결혼시키고 외손주 대학 등록금까지 대주었습니다. 상처 입은 남편에게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어주어 인생을 완전히 세워준 것입니다.
만남에는 '관성의 법칙'이 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새로운 좋은 만남이 찾아와도 의심하고 탕진해버립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저주의 대물림을 끊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모든 상처를 정결케 하고 관성을 뛰어넘게 합니다.
7. 이해하고 이해하면 사랑할 수 있다
관계를 회복하는 비결은 '이해'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배우자, 자녀의 성장 과정을 이해해보십시오.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면 용납의 문이 열립니다. 이해는 사랑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입니다.
또한 인생을 교정하기 위해 회개와 용서가 필요합니다. 종이 한 장을 꺼내 내 인생의 굴곡을 적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미주알고주알 고백하십시오. 내가 하는 회개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성령께서 이끄시는 회개로 바뀝니다. 영화 '밀양'에서 보여주듯,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나는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참된 회개는 상대에 대한 긍휼과 화해로 이어집니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기적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8. 결론: 만남에도 심고 거두는 원리가 있습니다
만남에도 심고 거두는 영적 원리가 작동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어려운 배우자, 힘든 동료를 "내 본분이며 소명이다" 생각하고 믿음으로 잘 '심는 만남'을 가지십시오. 그렇게 사랑으로 심은 사람은 다음 세대에 반드시 '거두는 만남'의 복을 누립니다.
만남의 축복이 넘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로 관계의 관성을 뛰어넘으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만남의 복을 누리며, 누군가에게는 '복음으로 낳은 스승'이 되고 '아비'가 되어주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비틀어진 관계의 모판을 복음으로 수리하여 주시옵소서. 과거의 상처와 관성에 매여 좋은 만남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자녀들의 앞날에 좋은 스승과 동역자의 복을 부어주셔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평강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