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21세)
1965년 2월 2일 충북 충주 출생
1983년 2월 28일 경복고등학교 졸업
1983년 3월 1일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자연 4계열 입학
1984년 3월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미생물학과 진입
1984년 7월 감리교 자교교회 청년회장
1985년 3월 자연대학생회 부학생회장 및 미생물학과 학회장
1986년 3월 자연대학생회 학생회장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학생회장단 대표
1986년 4월 28일 전방입소 결사반대 및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신
1986년 5월 3일 운명
광주군 노포면 판교공원 묘지에 안장
[故 김세진 열사 16주기 추모시]
그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여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세상을 살다 보면
바람 같은 세월의 모퉁이를 구비구비 돌다
마치 꿈결에서인 듯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하나
기막힌 은총으로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 하나의 기억만으로도
어느 새 시들시들해진 내 삶의 가지에
다시금 생명의 물이 파릇파릇 올라
이렇게 맥없이 살아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명의 기운이 불끈 솟구치는
그런 사람 하나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 하나의 추억만으로도
언제였던가, 내 우직하게 순결했던 젊은 영혼을
한순간에 사로잡아 눈멀게 한
역사와의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이
불현듯 되살아나는
그런 사람 하나 만날 때가 있습니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말씀 한 번 거역하는 일 없이
동무들과 크게 다투는 일 하나 없이
어질게 맑게 무럭무럭 자라
주변 사람들의 기쁨이며 자랑거리였던 그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한결같이 성실한 생활과 명랑한 모습으로
살아 있음의 기쁨을 모두에게 은총으로 베풀며
말없이 빼어난 지도력으로
늘 누구에게나 우뚝 모범이었던 그대
그대는 일찍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바쁜 공부 틈틈이 사회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대는 평소 교회생활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을 즐겨 이야기
했습니다.
그 평등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노라고
까만 밤을 때로 하얗게 지새우던 그대였습니다.
그대는 홀로 비범한 청년이기를
남몰래 꿈꾸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장미나 눈부신 목련이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대는 매사에 소박함을 잃지 않고
자신이 맡은 조그마한 일에 정성을 다하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친절한 미소로 대하려고
애썼던
착하고 순수한 영혼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대의 모습은 가을 들녘의 들국화나 코스모스
이름없는 풀꽃을 쏙 빼닮았습니다.
그대는 남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이따금 엄격하기 그지없는
외유내강의 평범한 기독청년이었습니다.
그대의 사고는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고
그대의 행동은 모난 구석이 없었지만,
그대의 내면 깊은 곳의 보이지 않는 중심에는
정의(正義)를 삶의 좌표로 설정할 줄 아는
매서운 용기가 둥지를 틀고 있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
그대의 삶에는 엄청난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대는 그대 하나의 아늑한 행복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인간과 역사와 세계를 드넓게 고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대의 대학생활은
인간해방과 민중해방, 그리고 민족해방을 향한
끊임없는 고민과 투쟁의 과정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대는 한 깨달음에 가닿았습니다.
이 땅의 일하는 민중들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권력을 소망하며
그 권력을 쟁취하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고,
그것이 역사의 피할 수 없는 합법칙성이라고
믿었습니다.
아, 그대 스물 한 살의 꽃다운 나이에
"전방입소 전면거부, 한반도 미제 핵기지화
결사저지!"를 외치며
부모님이 주신 그대의 성스러운 몸에 불을 당겨
하나님이 베푸신 그대의 고귀한 생명을
불꽃으로 피운 것은 결코 한순간의 영웅심이나
어쩔 수 없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대학에 들어와서 읽은 수백 권의 책과 조국의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며
오랜 시간의 고민 끝에 얻은 눈물겨운 결론이었습니다.
아, 그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여!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몹시 피곤하고 힘들고 바쁜 생활 중에도
여유 있는 마음을 잃지 않고
행복의 미소가 얼굴에서 떠날 줄 몰랐던 그대.
더욱 성실히 고민하겠노라고
아주 열심히 싸우겠노라고 맹세하던 그대.
설령 모든 기득권을 잃게 되더라도
후회 스러울 것 하나 없으리라,
이 땅의 자유와 평등과 해방을 위해서라면
어떤 쓰라리고 고달픈 시련이라도 달게 맞이하리라,
그래서 나의 투쟁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한치는 성큼 앞당길 수 있으리라,
철석같이 믿으며
그대의 몸, 그대의 젊음, 그대의 순결한 영혼을
이 땅, 이 겨레의 역사의 제단(祭壇)에
티없는 번제물로 아낌없이 바친 그대.
그대가 애송하던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신념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각각 그 신념대로 살아가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대에게는 굳은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대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그 신념대로
살아갔습니다
그대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대는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을 하지 않 았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행복했습니다
고단하고 바쁜 삶 속에서도 행복을 느꼈습니다
1986년 4월 28일 아침
서울 관악구 신림동 4거리에서
그대가 故 이재호 열사와 함께
그대의 몸을 불살라 피운 꽃.
아, 그것은
인간사랑 생명사랑 겨레사랑의 눈부신 꽃이
었습니다.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 하나"
(요한 12:24)였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장미와 목련은 피었다가
지더라도
그대가 피운 꽃은 영원합니다
그대가 그대의 몸꽃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준 진실은 역사의 끝날까지 영원합니다.
그대의 몸꽃, 그대의 순결한 정신은
무엇이 역사의 진실이며 거짓인가를 판가름하는
더없이 투명한 거울입니다.
김세진 열사여!
그대가 피운 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그대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대가 걸었던 길을 이제 우리가 걷겠습니다
그대가 품었던 진리를 이제 우리가 품겠습니다.
그대가 보듬었던 생명을 이제 우리가 보듬겠습니다
그대가 피운 한 송이 꽃을 이제 우리가
백 송이, 천 송이, 만 송이, 백만 송이로 수없이 피우겠습니다.
그대가 진정 쉴 곳은 여기 이 자리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골 판교 공원묘지의
한 평의 땅일 수 없습니다.
그대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아들인가를
이제는 가슴 뿌듯하게 느끼시는 부모님의 마음,
그대의 죽음의 의미를 망각하지 않는
이 땅의 사람들의 예쁜 마음,
이런 마음들이 하나 둘 셋 모여
그대의 진정 오붓한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그대여, 우리의 마음 속으로 찾아와 주십시오
우리의 생활 속으로 시시각각 찾아와 주십시오
우리의 삶에 다정히 동행(同行)해 주십시오.
그대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피어났듯이
우리도 그렇게 피어날 수 있도록
우리 곁에서, 우리들 사이에서, 우리 안에서
늘 우리의 수호 천사가 되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