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 유럽에서 터키의 퇴각 이 후 상업적, 전략적 차원에서, 슬라브 국가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서구 열강들의 간섭이 증대되었다. 러시아는 언어, 종교적 일체감으로 세력을 확대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지배 지역에 민족주의 사상이 유입되는 것을 억제시키는 데에 주력하였다. 영국은 터키의 급속한 몰락을 저지하기 위하여, "세력 균형(Status-quo)" 정책을 취하였다.
2) 마케도니아
이 지역은 에게해와 중부 유럽 사이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주변 국가들의 세력 각축장으로 변모하였고, 1890년대 이 후에 "국제 마케도니아 혁명 위원회" 가 창설되어, 마케도니아 독립국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3)보스니아 헤르쩨고비나
19세기 발칸 지역의 역동적인 변화가 이 지역에서 출발하였다. 그 배경으로는 전쟁으로부터 다소 변방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 지역 무슬림들에게는 자치권이 부여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터키 세력의 약화에 따른, 터키 지방 공무원들과 무슬림 지주들의 수탈이 증대되어, 1850년대 이 후에는 무슬림 지주들과 기독교 농민들 사이에 갈등이 증대되었다. 1875년 7월에는 농민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에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 분쟁이 자국 내 피 지배 민족들에게 퍼질 것을 우려하여, 분쟁을 중재하였으나, 진정되지 않았다. 1876년에는 불가리아에서도 폭동이 발생하였고, 압둘 하미드(Abdul Hamid) 2세(1876-1909)는 보스니아에서의 폭동에 대한 진압을 선언하였다. 당시 세르비아의 밀란 오브레노비치는 세르비아 민족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터키의 외교적 압력과 기존의 군사-경제적 손실을 우려하여, 보스니아로 진군하지 않았다.
1877년 8월,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고, 러시아가 승리한다. 이 전쟁의 결과로, 1878년 3월 3일에, "산 스테파노(San Stefano) 조약" 이 체결되는데, 그 내용은 마케도니아가 포함된 大 불가리아 독립국가가 성립된다는 것, 몬테네그로 독립국가 승인 및 영토 증대와 세르비아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이어 1878년 6월에 "베를린 조약" 이 체결된다. 그 내용은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를 분리하여 터키에게 다시 돌려줘야한다는 것과 북부 자치 불가리아와 남부의 동 불가리아 (동 루멜리아) 로 분리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존 영토의 40% 정도가 축소되었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보스니아 헤르쩨고비나의 행정 관할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차지하였고, 영토권은 터키가 차지하였다.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의 마케도니아 영토와 大 불가리아에 대한 애착이 증대되어, 러시아에 대한 우호 또한 증대되었다. 1879년 8월에 노비 빠자르(Novi Pazar)에서 보스니아 문제와 관련하여, 터키와 오스트리아 간에 합의가 있었는데, 그것은 터키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무슬림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지배권의 확실성을 위해 군사목적 하의 철로 개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리고 1908년 10월 7일에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 헤르쩨고비나를 완전히 병합하기에 이르고,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에 영향을 주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