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의 『떨림과 울림』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는 가끔 텔레비전에서 물리학을 아주 간결하고도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물리학을 그저 골치 아픈 학문이라고 치부하다가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물리학이 친근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주는 중압감이 무시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책의 서문을 읽는 순간 이미 물리학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중압감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는 떨림이다. 정지한 것들은 모두 떨고 있다... 빛은 떨림이다... 세상을 떨림으로 가득하다. 인간은 울림이다.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서문을 보자 나는 수전증인지 뭔지 모를 나만의 은밀한 떨림의 실체를 확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망을 품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떨림에서 나름의 울림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잘못 집었다. 잘못 집어도 단단히 잘못 집어 들었다. 책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의 울림은 허공으로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허무했다.
책은 물리학의 역사적 궤적을 따라 기술하고 있다. 우주의 대폭발, 즉 빅뱅으로부터 출발하여 뉴톤이며 아인슈타인 같은 물리학계의 조상들을(?) 비롯한 온갖 과학자들의 이론이며 법칙들로 자연 현상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설명은 마침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전자 운동으로 이어졌다.
물리학에 문외한인 내 입장에서는 다양한 사례로 설명을 해도 따라가기 힘든 판에 듣도 보도 못한 인물들이 이름에 그들이 이룬 업적까지 도무지 입에 가시처럼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고등학교 시절 물리시간에 졸면서 겨우 귓등으로 들은 것이 전부인 내게 저자의 이야기는 거의 외계인의 언어처럼 이야기들의 앞뒤를 서로 연결 짓기가 힘들었다.
저자는 과학자답게 인문학적 상상력을 거부하고 오로지 과학이 밝혀놓은 바를 따라 담담하게 독자를 안내한다.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나 같은 물리학 문외한들이 인내심을 잃고 방황하거나 책을 팽개칠까 싶어 구어체를 동원하여 더러 웃음기를 집어넣기도 하고, 문장을 간결하게도 해놓았지만 워낙에 배경 지식이 일천한 까닭에 자주 책을 덮으며 눈을 비벼야했다.
거기에 특정 이론을 설명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일상의 사례를 양념처럼 곁들이기도 했지만 책장을 넘기면 바로 앞에서 읽은 이야기도 벌써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너무 방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저자의 물리학적 지식에 경탄을 보내야하는지 소위 요즈음 젊은이들 말처럼 저자의 <자뻑>을 경탄해야 하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겨우 200쪽 남짓한 분량에 그 많은 물리학 이야기를 담으려다보니 이야기는 축약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독서는 전문성 향상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교양을 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리학도에게는 온갖 이론을 간략히 요점 정리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책이 그들의 전문성 향상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떨림의 실체는 모든 물체의 가장 기본 단위라 할 전자의 움직임에 있다. 전자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그러한 전자로 구성된 것이 삼라만상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모두가 떨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물론 빛도 당연히 떨림인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책을 모두 읽고도 떨림의 실체가 잘 와 닿지 않는다. 떨림이 아련하니 울림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저자의 의도가 물리학의 대중화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예를 다 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내게는 적은 이야기를 풍부한 사례로 설명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저 책 서두의 두어 줄만 머릿속을 윙윙거리며 날아다니고 있다.
“어둠으로 충만한 우주에 빛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빅뱅 직후 초기 우주는 너무 뜨거워 오늘날 물질이라 부를 수 있을만한 것이 존재할 수 없었다.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 온도가 낮아졌고, 물이 얼음이 되듯 물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빅뱅 이후 38만 년쯤 지나 수소, 헬륨 같은 원자들이 생겨났고, 이때부터 빛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빛이 탄생한 것은 138억 년 전이지만 우리는 불과 150년 전에 빛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를 빛을 통해 얻는다.”
결국 삼라만상의 떨림을 느껴보고 그 떨림으로부터 미미하지만 울림을 얻으려던 기대는 내 짧은 물리학적 지식 탓에 무의로 끝난 것 같아 아쉽다. 오히려 저자의 놀라운 물리학 지식에서 떨림이라기보다 전율 같은 것을 다소간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생소한 것이어서 울림으로 이어지지 못해 끝내 아쉬웠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원자며 전자 이야기가 머릿속을 그야말로 카오스 상태로 몰고 간다. 그것이 울림이라면 울림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물리학이 어떤 학문인가를 언뜻 밝혀놓았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책은 기본입자에서 분자, 인간을 거쳐 태양과 은하에 이르는 우주의 모든 존재와 사건을 훑어봤다. 결국 물리학이 우주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물리는 한마디로 우주에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해 준다.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까 물리학은 그저 우주의 법칙을 규명하고 설명하고 마침내 이를 활용하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하는 학문으로 읽힌다. 거기에 생명체는 정교한 분자화학기계에 불과하다는 말은 오싹하기도 하다. 마치 초기 공산주의자들의 유물론을 환기시켜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록에 매달린 이야기 한 도막. 유발 하라리는 그의 역저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농업을 택한 것이 아니라 농작물이 우리는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여기에 대해 그저 농업혁명이 사기라는 말과 함께 이런 주장을 과학적으로 가릴 수 없다고 했다. 과학자라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히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상상력은 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영감을 불어넣어준다. 조금 건방진 일일지 모르지만 내친김에 슬그머니 내 나름의 상상을 해 본다.
과일나무는 과일 속에 자신의 후손인 씨앗을 숨겨놓았다. 새들이 과일을 먹고 멀리 날아가서 배설을 함으로써 씨앗이 비로소 그 곳에서 자리를 잡고 싹을 틔운다. 새가 과일을 택한 것이 아니라 과일나무가 새를 택해 먹이를 보상으로 주고 씨앗의 운반을 맡긴 것이다. 이런 식물들의 사례는 흔하다. 인간은 밀을 먹기 위해 대량으로 경작한다. 밀 입장에서는 힘들이지 않고 자손을 퍼뜨릴 수 있으니 이만한 장사도 없다.
인간이 개를 사냥터에서 잡아와서 길들인 것이 아니라 개가 인간을 택한 것이라는 가정이 설득력이 있다. 모든 가축이 그럴 것이다. 가축은 스스로 인간을 택함으로써 다른 육식동물로부터 보호받고 먹이 걱정을 하지 않으며 안전하게 자손을 퍼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축들은 어느 야생동물들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축들은 훌륭한 선택을 한 셈이다. 이것 또한 공진화가 아닐까 싶다. 재래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언뜻 내비친 말에 살을 붙여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유발 하라리의 생각과 재래드 다이아몬드의 생각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제 그걸 명증하게 확인하는 것은 과학자의 몫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과학자가 꼭 물리학자여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저자가 한 말이 멋지다. 과학은 무지를 기꺼이 인정한다는 부분이다. 과학은 물질적 증거에 입각하여 결론을 내리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들었으면 참으로 좋아했겠다 싶다.
소크라테스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모르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적어도 그보다는 하나 더 아는 셈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물리학자가 취할 태도는 아닐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물질적 증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논리적 추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책뚜껑을 덮으면서 여전히 드는 생각은 머리가 어지럽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에 비추어보면 그래도 나는 이 책이 내게는 버겁다는 것을 아는 셈이다. 과학이 무지를 기꺼이 인정한다면 나는 그저 그런 내 무지를 확인한 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소득일 것 같다. 아! 이런 내 무지를 어이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