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장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선생이 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1938년에 건립된 이 건물의 명칭은 당초 죽첨장(竹添莊)이었으나 김구선생의 거처로 사용되면서 근처의 개울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자유중국대사관 관저, 국군의료진 주둔지, 월남대사관 관저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하1층, 지상2층 규모의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답고 1층의 출창(出窓)과 2층의 들임 아치창을 이용한 단아한 외관이 일품이며, 김해경(시인 이상)이 졸업한 경성고공 출신으로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김세연(金世演, 1897~1975)이 설계하여 1930년대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으나, 건물의 우측면과 후면은 병원의 신축건물과 연결되었으며 내부구조도 병원용도에 맞추어 개조된 상태이다.
백범김구선생의 묘
삼의사의 묘
삼의사묘에는 윤봉길의사, 이봉창의사, 백정기의사 그리고 안중근의사의 가묘가 있다.
백범김구기념관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종교인이며, 한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몰락 양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 때 승려로 활동했으며 이후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임시정부 내 노선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을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정치 자금을 사회주의자들에게만 나눠주던 김립을 암살했고, 자신의 부하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안공근의 암살 배후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해방 후에도 존 하지, 브루스 커밍스 등에 의해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송진우 암살 직후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사건 때는 현장에서 한국독립당원이 검거되면서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1948년에는 반(反)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을 받기도 했다. 또한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이것이 미 군정의 첩보에 입수되기도 했다.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한 개신교 신자였던 김구는,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죽기전에 병자성사를 받았다.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1879~1910)는 독립 운동가, 대한제국 시대 때 교육가, 사상가, 의병장이다.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 자신도 천주교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소년 시절 때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 청인 난타 사건 등에 참여했었다.
성인이 돼서 대한제국 시대 때 학교 설립, 교육 운동, 계몽 운동, 국채 보상 운동, 의병 활동 등에 참여해서 좀 더 크게 활동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05년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의 속국으로 만든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사상적으로 보면 동양평화론자라고도 한다.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인재 양성 교육에 힘썼다.
1907년에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했다.잊지 못할 사건 중에 연해주로 망명해서 1909년 10월 26일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암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다.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암살 사건은 의병장들의 거사에 영향을 주었다.
탑골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도시공원으로, 현재 서울 종로에 있다. 조선시대에 원각사가 있던 자리였던 것을 광무 1년(1897)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이 공원으로 설계해 꾸몄다. 1919년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 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주요 시설로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지 10층석탑과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손병희 선생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조선시대 원각사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파고다 공원이라고도 불리운다. 원각사는 고려 때 흥복사라 불린 절로, 조선 전기에 절을 넓히면서 원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으로 인해 연산군과 중종때 절이 폐사되었다. 그 후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이곳에 서양식 공원을 세웠으나, 그 이유와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공원 안에는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과 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있다. 또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팔각정·독립만세 부조판·손병희 선생의 동상들도 있다. 1919년 3월 1일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출발지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원각사지10층석탑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대원각사비
답사를 시작하면서 근현대사에 대하여 공부를 하게 되는데 근현대사....참 힘들고 어렵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