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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목포나그네 원문보기 글쓴이: 최병두
그가 안내한 곳을 모두 볼 수는 없겠지만 몇 군데는 가 보고 싶었다. 먼저 방생못으로 갔다. ‘이곳 방생못에 방생한 것은 무엇일까? 물만 보고 말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도착한 방생못. 여기저기 무더기로 떠 있는 것은 거북이. 저리도 많은 거북, 자라들을 어느 누가 무슨 기원을 하며 이 연못에 목숨을 놓아주었을까? 등에 등을 타고 하늘에 기도하는 듯한 모습들이 애처롭게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자세히 보니 그 거북떼들 사이에 오리도 보였다. 어쩌면 물 절반 거북 절반인 것 같다. 그런 한편에서는 서너 마리가 한데 어울리며 머리를 맞대고 헤엄하고 있는가 하면 아기 거북을 데리고 사랑스럽게 노니는 모습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아마 물 밑에는 방생한 잉어나 붕어들도 풀어준 사람들의 온기를 잊지 않은 채 물길을 헤고 있을 것이다. 부디 오래오래 주어진 제 목숨이 다하도록 천수를 다하기를 빈다.
방생(放生)은 살생(殺生)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살생을 금하는 것은 소극적인 선행(善行)이고 방생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하는 일로 권장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불가에는 칠종방생(七種放生)이 있다. 자식이 없거나 자식을 잉태했을 때, 기도나 염불을 할 때, 재계(齋戒)를 가질 때나 복록(福祿)을 구할 때 등 이 일곱 가지 경우에는 꼭 방생을 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잡은 생명들을 자유롭게 살도록 놓아주는 것이 방생인데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은 물론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물의 방생보다 자신을 잡고 있는 번뇌와 망상과 욕망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곧 제 마음의 방생이다.
얼마 전에 입적하신 법정스님의 ‘무소유’ 상태 또한 세상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려는 방생의 정신과 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내 것이 나를 구속하니 내 것을 버려야 한다는 그 무소유는 나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바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다른 생명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방생과 무엇이 다를까. 노자의 도덕경에 보면 “성인은 자신을 위해 쌓아두는 일이 없이 남을 위함으로 더욱 있게 되고 남에게 무엇이든 다 주지만 그로 인하여 더욱 넉넉해진다,”(聖人不積 旣以爲人 己愈有 旣以與人 己愈多, 성인부적 기이위인 기유유 기이여인 기유다)고 했으니 예나 이제나 우리의 살아갈 올바른 길은 다를 바가 없다.
37. 방생(放生)
내 탯자리에서 어머니께서 방생한 몸어거니
먼저 가신 어머니께 드리는 못 다한 한일레라.
방 생못 뒤쪽으로 양쪽에 하늘 높이 솟은 두 개의 탑이 있다. 만수탑이란다. 11층이나 되는 탑인데 남아 불교 건물의 풍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 탑 뒤에 한층 가까이 보이는 높은 건물이 나중에 보니 하문대학 본관이었다.
방생못에서 올라와 절 입구에서부터 향을 길쭉한 향을 들고 서서 앉아서들 불공을 드리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매년 음력 2월 19일, 6월 19일, 9월 19일의 관인단[观音诞]이면 많은 신도들이 향불을 피우고 참배를 하는 행사가 있다는데 평상시인 오늘이 이러한데 그때는 아마 인산인해를 이루리라 짐작이 간다. 좌우를 둘러보지도 않은 채 열심히 불공을 드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어렵게 빠져나와 대웅전에 들렀다. 참으로 웅장하고 화려한 대웅보전에는 세 불상이 있었다. 부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낸다고 한다. 과거불인 구나함모니불은 왼쪽에, 가운데는 현세불인 석가모니불, 오른 쪽에는 미래불인 미륵불상이 나란히 자비로운 모습으로 중생을 맞아주고 있었다. 양쪽 복도 벽면에는 '平定台湾二十功臣像赞序(평정대만20공신상찬서)'라고 쓴 비각이 새겨져 있었다. 청(淸)나라 건륭(乾隆) 황제가 쓴 글이라고 한다.
사천왕을 거느린 미륵불이 있는 천왕전을 거쳐 팔각 3층으로 된 대비전에서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을 보고 1만여 권의 경전이 있다는 장경각(藏经阁)을 지나니 과연 커다란 바위에 ‘불(佛)’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아까 엿들은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그 글자의 크기가 4~5m나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불심으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리오만 이 큰 불 아래 설 때만이라도 불심을 다지는 불심을 주시옵소서. ‘亻’ 은 사람 ‘인’이요, ‘弗’은 아닐 ‘불’이니 ‘佛’앞에 서면 사람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이란 말이 아닐까.
38. 부처님께
당신 앞에 서면 모두 당신이 되는 기적이 기적이 아니게 하소서.
당신 앞을 떠나도 당신과 함께하는 기적도 기적이 아니게 하소서.
절 뒷산을 오르면 하문시가 한눈에 보인다 했지만 시간 관계로 오르지 못하고 나무 그늘에서 조금 쉬다가 내려갔다. 가는 길옆에 둥글넓적하게 서 있는 바위에 글자가 새겨 있었는데 거기에 동전을 던져 그 동전이 바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나. 몇 사람이 열심히 동전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전은 바위를 굴러 아래로 떨어지기가 일쑤였다. 부처님이 감동할 만큼 지극정성을 드리지 않고 어디 감히 속된 생각이 이루어지리오?
호리산포대로 가는 길에 잠깐 하문대학에 들렀다. 하문대학 건물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아늑한 호수가 있고 다양한 열대 식물이 있는 정원 같은 캠퍼스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마오쩌둥이 ‘화교의 깃발’, ‘민족의 빛발’이라 찬양한 이 하문대학은 1921년 화교들의 기금으로 창설된 중국의 첫 화교대학이라고 한다. 호숫가 잔디밭에는 둥근 원판을 45°로 비스듬히 자르고 4사성어를 새겨놓았다.
“자강불식(自强不息)”과 “至於至善(지어지선)”
삼경(三經) 중 주역(周易)의 건(乾)괘의 상사(象辭) “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천행건 군자이자강불식)에서 유래한 “자강불식(自强不息)”은 ‘스스로 노력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말로, 천행(天行)이란 춘하추동의 순환을 의미하는 바, 이러한 운행은 건장한 것이므로 군자들은 이를 굳세게 본받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요,
사서(四書) 중 대학(大學)의 첫머리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에서 가져온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자신의 밝은 덕성을 더욱 밝혀서 백성들을 친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지극한 선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니
사서삼경(四書三經)의 본국인 중국 대학다운 말이라 하겠다.
39. 선(善)에 대하여
자연이 어디 제 모습을 바꾸는 일이 있던가.
제 모습 그대로가 선이니 자연으로 돌아가시게.
하문대학을 출발하여 호리산포대(虎里山炮台,후리산파오타이)로 갔다.
이 호리산포대는 하문시의 호리산 해변가에 총 면적이 7만 평방미터에 달하고 성루 면적만도 4.7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큰 포대이다. 전 세계에서 원 위치에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남아있는 포대라고 한다.
이 포대가 완성된 해는 光緖22년(1896년)이지만 언제 시작했는가는 이곳에서도 달라서 종잡을 수가 없다. 왼쪽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포대 입구의 ‘호리산포대소개’ 첫머리에는 왼쪽 사진 위와 같이 분명히 ‘始建于淸光緖二十年(公元1894年)’이라 하였으나 안으로 들어가 이 포대의 주포 앞에서 호리한 포대를 소개한 글에는 왼쪽 사진 아래와 같 이 분명히‘建于淸光緖十七年至二十二年(1891-1896年)’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시작했는가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거리가 떨어진 서로 다른 곳에서 달리 표기되어 있다면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같은 곳에서 이리 달리 표기 한 것이 의외라는 생각이다. 이곳 중국에 오기 직전에 대학 동창들이 청주 부근에 있는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별장이었던 ‘청남대’ 건물 안 벽에 걸린 동양화 아래 소개한 화가 이름과 그림에 쓰인 화가 이름이 다른 것을 발견하고 직원에게 시정을 요구한 일이 생각났다. 청남대 직원은 지금껏 몰랐다면서 곧 시정하겠노라고 약속했었다. 여기서도 누군가가 사무실에 알려줄 수도 있겠지 생각하며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여하튼 이 호리산포대는 그 원형이 오래도록 보존된 포대로 원형이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화강암으로 쌓아올린 돌대문부터 석판으로 된 길 양쪽의 고목이 긴 역사를 증명하듯 나이테를 자랑하고 있었다. 청나라 말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포대는 실제로 청일전쟁시 일본 함선을 격침시켰으며 영국군함을 두 차례나 물리쳤다고 한다. 이 포대의 주포인 극호백(克虎伯)대포는 독일 극호백공장에서 1893년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 13m, 무게 50t, 사격 거리 16km의 대포로 2000년 세계기네스북에 등제되었다고 한다.
내가 근무한 적이 있는 우리 인천 강화군의 초지진(草芝鎭)과 그 주포인 홍이포(紅夷砲)가 생각난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사적으로 지정된 초지진의 홍이포는 조선 영조 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한 포구장전식 화포로, 길이 2.15m, 무게 1,800kg, 구경 100mm이며 사정거리는 700m인 소형 대포로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한 편이지만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미국 아시아함대 침입,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사건 때 큰 역할을 했다.
호리산 포대의 극호백대포는 막상 전쟁에서는 제몫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과대한 사거리 때문이라는데 사거리가 16km나 되어 몇 미리의 오차만 생겨도 목표물 근처에 가서는 수백m의 오차가 생겨 목표물을 제대로 맞힐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대포는 적들에게 심리적 불안감을 주기 위한 과시용이 되고 말았다는 분석도 있다. 이와 비교할 때 우리 인천 강화 초지진의 홍이포는 소형 대포였지만 그 쓰임새는 실질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40. 엄포
쏘지 않고서도 쏘아대는 대포
숨겨 놓고도 숨기지 않는 소리
주포가 그 포구를 바다로 향하고 있는 아래 탄약고나 주둔기지로 사용하던 지하 벙커는 현재 무기와 병기, 갖가지 대포와 관계되는 사진들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꾸미는 등 많은 부속 시설이 개설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실제 대포와 모형 대포들을 배치해 놓았고 거포 옆에는 대만의 금문도를 비롯해 많은 섬들이 보이는 대형 망원경도 사람들의 눈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옆으로 내려오면 수석 전시장이 있는데 산수화가 그려진 대형 자연석과 한자와 알파벳을 새긴 많은 글자들, 돼지고기를 베어놓은 듯한 육석(肉石) 등 볼거리들이 많았다. 기념 조각상을 감상하고 돌아서니 게임을 하는 대포도 있어서 스위치를 당겨 포에서 테니스공을 발사하여 전방의 표적을 겨누어 맞추며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에는 이렇듯 전쟁 유적과 유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가 오래 지속되면 안 된다는 것이 진리라도 되는 듯 전쟁과 평화는 끊임없이 교체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역사가 아닌가. 성당에서는 미사 때마다 ‘평화’를 빌며 인사하는 예식이 있다. 평화야말로 우리 인류가 추구하는 행복의 처음이자 마지막 계단이다. 호리산 포대나 초지진과 같은 유물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쟁이 남겨놓은 아문 상처의 흔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호리산포대를 내려와 점심 식사를 위한 식당으로 가는 길 넓게 펼쳐진 바다의 경관이 좋다. 왼쪽에 아주 큰 글씨로 쓴 “一國兩制 統一中國”이 바다를 향해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바다 저쪽 섬에는 대만에서 써 놓은 “三民主義 統一中國”이라는 큰 글씨가 파도소리와 함께 크게 소리를 친다고 한다. 서로가 통일은 해야겠는데 그 방식이 다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 하겠다.
바닷가 식당으로 들어가면서 진열해 놓은 해산물과 큰 어항 속을 헤는 많은 어류들을 구경했다. 참으로 갖가지 해물들이 있었지만 악어를 통째로 잘라놓은 모습이 식탁에 앉아서도 눈앞을 아른거렸다. 며칠째 중국 음식을 먹어보니 처음보다는 많이 익숙해졌고 어쩌면 오미(五味) 중 한둘쯤은 맛보았다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렸을 적 서당 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벽촌에 있는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당으로 달려갔다. 서당에서 추구(推句)로부터 명문계몽편(明文啓蒙篇),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을 배운 뒤 18사략(事略)의 중간인 춘추전국(春秋戰國)까지 배우다 보니 1년이 다 지나가고 말았다. 한겨울 춘추전국을 배울 때 선생님께서 재미있게 들려주셨던 이야기이다.
오미(五味)는 시고 쓰고 맵고 짜고 단 다섯 가지의 맛을 말한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임금 환공은 대단한 미식가여서 천하의 미식을 모두 먹어 봤는데 사람고기를 먹어보지 못했다는 말을 은근히 흘렸다고 한다. 그러자 간신 중의 한 사람인 ‘역아’가 자기 어린 아들을 잡아 요리를 하여 환공에게 바쳤다. 이때 환공을 보필하던 충신 관중(管仲)[관포지교(管鮑之交)에 나오는 사람]이 죽으면서 환공에게 간언을 했다. ‘역아’를 포함하여 세 명의 간신을 멀리하라고. 환공은 관중의 말을 따라 그 네 신하의 관직을 빼앗고 쫓아내버렸다. 그러나 미식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다시 그들을 등용했다. 그러나 과연 관중이 염려했던 대로 그 네 사람은 반란을 일으켜 환공을 골방에 가둬버렸고 환공은 끝내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음식의 맛이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 아닌가.
41. 오미에 대하여
먹을 때는 시고 쓰고 맵고 짜고 달다고 가지가지이다가
거둘 때는 시고쓰고맵고짜고달고 모두가 한가지인 것을
노자는 “일없는 것을 일로 하며 맛없는 것을 맛으로 한다.(도덕경 63장)”고 했다. 이번 중국 연수에서 공자아카데미나 교육관계자들의 대접은 너무 융숭한 것이었다. 특히 음식에 있어서 특유의 향 때문에 입에 잘 맞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노자의 말처럼 ‘맛이 없어도 맛이 있다.’고 생각하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하며 맛있게 점심을 들었다.
오후는 원래 지메이 관광으로 되어 있었지만 조금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 가까운 공원에서 좀 쉬다가 중산로(中山路)에 가기로 했다.
북경에 왕부정 거리가 있다면 하문에는 중산로 거리가 있었다. 대학생들이 많이 들른다는 청춘의 거리, 연인들의 거리이면서 남국의 정취가 있고, 번화가 옆길로 들어서면 다정다감한 조그만 골목들이 이어지는 거리가 인상적이었다. 낯익은 맥도날드도,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선 좌우에는 은행, 백화점, 크고 작은 상점들이 즐비하고 차 없는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 거리 전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전통 차를 취급하는 전문점을 둘러보았더니 그 값이 여간 비싼 것이 아니었다. 마치 차의 나라임을 과시라도 하는 듯했다.
내게 그래도 관심이 많은 주류를 취급하는 가게에 들러서 둘러보니 중국술은 잘 모르니까 저만 두고 우리나라에도 흔한 양주가 있어서 비교해 보니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훨씬 비쌌다. 독한 술의 나라답다고 해야 할까?
벽도 기둥도 천정까지 울긋불긋 화려하게 장식한 복도 같은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오명가명 몸을 부딪쳐야 했다. 태평로(太平路)를 지나 옆길로 들어서니 육일육미식가(六一六美食街) 높은 문을 들어서서 즐비한 음식점을 눈으로만 스치며 지나갔다. 언뜻 보니 허름한 집 간판에 한국불고기집이라 비틀비틀 서툰 우리 한글이 다정스럽게 다가섰다. 생각 같아서는 불고기 한 접시 하고 싶었지만 저녁에는 하문교육국이 준비한 만찬이 예고되어 있어서 아쉽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오랜만에 거리에서 우리 가이드를 만났다. 여전히 서툰 우리말로 이 거리는 밤거리가 제일 볼만한데 우리는 지금 가야한다며 길을 재촉했다.
중산로를 구경하고 만나기로 한 곳에 왔다. 길 가에 재미있는 동상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아마 이곳 원주민인 듯한 세 사람이 재미있는 포즈를 취하고 서로가 서로를 보며 파안대소 하는 양이 보는 이로 하여금 파안대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우리들도 서로를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한참 그들과 함께 웃다가 뒤를 돌아보 니 바닷가에 선 세 개의 기둥 사이 관광선이 지나가고 그 너머 그림처럼 섬이 떠 있었다. 기둥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그제 하문에 와서 처음 들렀던 섬 구랑위가 분명했다.
41. 웃음에 대하여
웃음은 우리들 삶의 나무에 피어나는 꽃
밤낮이 없고 계절이 없고 너와 내가 없는
저녁은 하문교육국에서 베푼 중국에서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식당 “佳麗海鮮大酒樓”는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술과 즐거운 이야기로 가득 들썩이고 있었다. 하문교육국 부국장님과 그 일행이 우리 식탁마다 돌아다니며 건배 제의를 하고 각양각색의 건배를 외쳐댔다.
건배. 잔을 비우는 것. 비우는 것은 다시 또 채우기 위한 준비가 아닌가. 채워지면 다시 건배로 비워야 하는 것. 우리 인생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노자는 또 말했다. “치허극 수정독(致虛極 守靜篤)”이라고. “욕심을 버려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맑고 고요한 상태를 굳세게 지켜라.” 술잔을 비울 때마다 노자가 말한 바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삶인가를 되새겨 볼 일이다. 오늘 밤에는 이과도주, 죽엽주 등 네 가지의 술을 맛보았다. 지니고 간 우리 소주를 더하면 다섯 가지 술. 술을 채우고 비우고, 비우고 또 채웠다 비우면서 우리들의 욕망도 차면 비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면 술 마시는 보람도 톡톡히 누리는 게 아닌가. 그렇게 거나해진 우리들은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쉬울 호텔로 갔다.
호텔에 와서 오늘 일을 정리해 기록한 다음 텔레비전을 켰다. 어김없이 오늘밤에도 어제에 이은 ‘신비남녀’ 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쩌면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남자로 보이는 준우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미 대신 영지를 택한 결과는 어떻게 이어질까.
밤하늘에는 아직도 둥근 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신비남녀’. 원작 ‘비밀남녀’보다 더 큰 의미를 더한 것 같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 가는 과정과 어려운 선택과 그 선택으로 인한 갈등이 엮는 극적 반전 같은 것이 기대되는 바가 ‘비밀’보다는 ‘신비’가 더 작가의 의도에 가까울 것 같다.
오늘 밤 꿈에 준우와 영지를 만난다면 나는 노자의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
이제 어쭙잖은 글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다.
내일은 아침 공항으로 가서 북경으로 날아가고, 북경에서 다시 인천으로 가야 하니 하루 내내 버스와 비행기 안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솜씨는 서툰 듯하고, 빼어난 언변은 더듬는 듯하다.(大巧若拙 大辯若訥, 도덕경 45장)”는 노자의 말로 감히 위안을 삼으며 앞으로 남은 한평생을 나와 함께 할 두줄시를 곁들인 이 기행문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