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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다 원문보기 글쓴이: 여행자
날이 무척 춥습니다.
이렇게 추운날 너무나도 더웠던 지난 여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행(旅行) [명사]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굳이 국어사전에 있는 여행의 정의를 차치하더라도 "여행이란 무엇이다." 라고 말하는 것들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여행을 학문으로써 전공하고, 여행을 업으로 살아온 지 어느덧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의 경우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보지 못 한 아쉬움은 있을지 몰라도 다른 나라 어딘가를 가보지 못한 아쉬움은 그다지 크지 않다.
야자수와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휴양지에서부터 히말라야 네팔의 어느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까지, 그리고 고대의 유적지에서 최신 유행의 현대적인 대도시까지. 때로는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박물관에서 미술관으로...
나와 함께 했던 그 여행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오신 분들이었고, 농사짓는 할아버지에서부터 시장의 할머니까지 그리고 신혼여행가는 깨소금 부부에서 도전 골든벨 학생들까지...대통령과 거지 빼고는 정말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의 여행은 나의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의도에 의해 준비된 대로 그저 그들을 안내하는 가이드로서의 보조적이고 제한적인 여행이었다. 앞에서 여행자를 안내하는 가이드는 여행의 보조자일 뿐 여행은 여행자의 것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나에게 과연 진정한 의미의 여행은 언제 어느 곳 이었나 하는 것을 생각 해 보면 그리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여행은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주체가 될 때 그 여행은 참다운 의미를 갖는 것이고 나의 여행이 되는 것이다.
무더위가 사상 최고라던 지난여름.
나는 생애 가장 아름답고 기억에 남는 소중한 여행을 하였다.
<걸어서 고향가기>
이 아름답고 소중한 여행은 나의 파트너이자 사랑스런 우리 아들 박정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여행이었다.
나 혼자였다면 감히 엄두도 나지 않았을 여행이었고, 나 혼자였다면 너무도 심심하고 힘든 그저 한낱 노동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계절이 또 바뀌고 어느덧 겨울이 찾아오는 요즘 지난 여정을 뒤 돌아보며 아들에게 다시한번 고마움을 전해본다.
<나는 단지 아빠의 말에 "예"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이거 정말 미친 짓이야... >
우리 아들의 푸념은 여행 내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미친 짓 중에서도 밝게 웃으며 어느새 자라버린 아들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족에게 이번 여름휴가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집사람<방은희>과 초딩 5학년 딸<박정안> 그리고 늦둥이 18개월 막내딸<박정연>은 육상 교통수단 중에 제일 빠르다는 KTX타고 여수엑스포에 가고...
중학교2학년 15살 아들과 저는 ...
서울 상계동에서 충남 공주<정안>까지 걸어서 고향가기.
한마디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자동차로 가면 2시간 많으면 3시간 걸리는 거리를 3박4일 동안 정말 *나게 걷고 또 걸었습니다.
대략 걸은 거리가 2백 50 Km정도는 넘을 것 같습니다.
자동차로 고속도로 통해서 가면 140키로 정도 되는데 구불구불 국도를 타고 길이 없으면 무단횡단도 하고, 논두렁으로도 걷고...
휴가 첫날 8월2일 오전 11시경에 좀 늦은 출발을 했습니다.
중랑천을 걷다가 군자교로 올라와서 어린이대공원을 지나 건대를 통과 했습니다.
군자동에 처가가 있는데 점심을 장모님 밥상으로 해결할까도 생각 했지만 걱정하실까봐 들르지도 못하고 시장에서 콩국수를 사먹었습니다.
구의역에서 잠실대교를 건너고 잠실롯데월드를 거쳐서 계속 직진....
석촌-가락시장-가든5 지나서 이제 겨우 서울을 빠져나온 안도감.
원래는 탄천을 따라 분당으로 가려 했으나 중랑천을 걷다보니 작열하는 태양을 피 할 곳이 너무 없었고,
중랑천이 이러하면 탄천변도 그럴 것 같아 잠실을 거쳐 가기로 했습니다.
복정-가천대-모란-분당 들어서는데 어두워지고 얼떨결에 분당에 사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오길래 걸어서 공주까지 간다고 하니까 놀라면서 어이없다는 말투였습니다.
저녁 사줄테니 밥은 먹고 걸으라는 친구의 말에 아들이 더 반가워 하더군요 .
냉모밀 정말 맛있게 먹고 바로 윗 동서 집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수내동 벽산아파트입니다.
다음날 아침8시 반쯤 출발하여 멀리 좌측으로 서울대병원을 보면서 다리를 건너 계속 남쪽으로 남쪽으로...
미금역 오리역 죽전역...
보정역 뭐 이런 역들을 지나고 드디어 용인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원래는 첫날 기흥까지 가려고 했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늦게 출발 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신갈오거리인가 어딘가에서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먹고 콜라 리필을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중2 아들은 <아빠, 한국민속촌은 계속 이정표가 나오는데 도대체 어디쯤 가야 되는거야~> 라며 투정했습니다.
한참 걷다보면 걸어갈 수 없는 곳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럴때면 무단황단도 하고 길 바깥쪽으로 바짝 붙어서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습니다.
신갈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은 좋은데 너무 더웠습니다.
저수지를 건너니 <강동냉장> 회사가 크게 보이더군요.
버스정류장에서 쉬면서 베트남에서온 아저씨와 얘기도 하고...
그 길이 317 지방도로 였습니다.
고매농협이 보이길래 아들에게 가서 물 좀 떠오라고 했더니 한참만에 온 아들은 종이컵을 양손에 들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그렇게 생각했죠.
물 한병 받으러 갔을 뿐인데 그것도 허락하지 않고 종이컵으로 물을 떠가게 하는 야박함...
근데 미소를 지으며 종이컵을 주는 아들이 하는말은...
<아빠! 매실차 드세요>
얼굴이 벌겋게 익은 학생이 물병으로 정수기 물을 받고 있으니 직원분이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본 모양입니다.
서울 상계동에서 공주까지 아빠랑 걸어간다고 하니 대견하다며 시원한 매실차를 따라 주시더랍니다.
덕분에 시원하게 잘 마셨습니다.
이번 일정이 유난히 더운 한여름인지라 더위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힘든 여정에 정말 고마움을 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보이는 주유소마다 들러 화장실에 가서 얼굴에, 머리에 물을 끼얹고 수건에 물을 적실 수 있었습니다.
은행이며 파출소 등에도 여러곳에 들러 찬물을 물병에 받아 마셨습니다.
처형님 내외분께서는 매일전화로 위치와 안부를 물으면서 무리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번 여정동안 아들의 휴대전화에선 정말 지겹도록 <강남스타일>이 나왔고 아들과 나는 걸으면서 <아빤! 충남스타일>이라고 웃으며 개사해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수에 가 있는 아내와 두 딸을 생각하며 <여수밤바다>도 불렀는데, 이를테면 이런식의 개사였습니다
<이 거리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오산 길바닥... 동탄 길바닥> ♬♪♩
집에선 시끄럽다고 못부르게 했던 휘파람도 맘껏 불고, 개콘 <용감한 녀석들>의 노래도 아들과 함께 부르니 그동안 시끄럽다고 핀잔을 하던 제 모습이 너무도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아들과 저는 같이 걸으며 함께 힘들어하고 함께 견디면서 이렇게 하나가 되어갔습니다.
동탄 2기 신도시 공사장는 정말 광활하였습니다.
가도가도 끝없고 오산에 다 와서야 동탄이 끝나더군요.
오산에 와서 삼겹살에 공기밥 먹고 모텔에 들어갔습니다.
샤워를 하고 아들의 다리를 주물러 주는데 어느새 어른의 다리를 한 아들이 너무도 대견스러웠습니다.
에어컨을 켜고 자는데도 얼굴이며 팔뚝이 후끈거렸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컵라면이 테이블이 두개 있길래 그걸로 대충 때우고 물을 챙겨서 나왔습니다.
짐을 챙기면서 보니 가방엔 집사람이 챙겨준 쵸콜렛이 다 녹아있고 혹시나 해서 싸온 오징어채는 정말 짐스러웠습니다.
<비타민C나 뭐 이런 걸 챙겨왔어야 했는데 그 무더위에 뭘 먹겠다고 오징어채를 넣었는지..>
공사하는 도로들을 지나 하북을 거치고 진위를 지나는데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내리쬐는 태양의 뜨거움과 함께 아스팔트의 복사열은 숨이 턱 막히더군요.
걷는 길이 대부분 아스팔트이다 보니 여정 내내 복사열을 고대로 다 받아야 했습니다.
송탄을 지나는데 예전에 1년여를 살았던 곳이라서 그런지 그나마 친근감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걷고 있는데 동탄에 사는 고등학교 때 친구가 위문 격려차 온다고 하여 지산사거리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먹고 ...
<근데 왜 맥도날드는 리필이 안 되는거야 ??? 증말 짜증 지대로...>
고마운 친구는 멀리와서 시원한 냉커피도 사주고 아들에게 용돈까지 주고 갔습니다.
분당에서 그리고 송탄에서 아빠 친구들의 도움과 응원을 받는 것을 본 아들은 <친구가 좋긴 좋네> 라면서 웃었습니다.
예전에 맛있게 먹은 그 유명한 송탄 부대찌게 <최네집>도 지나고 평택시청 송탄출장소 앞에서는 사진도 한장 찍었습니다.
출발하면서부터 이정표나 거리 이름이 보이면 인증샷을 한두장씩 찰칵 박기도 하였습니다.
길가에 보이는 홈플러스에 들러 방울토마토와 음료수도 보충하고...
평택까지 가는 길은 너무도 멀었습니다.
예전에 주변이 다 논이었는데 이젠 아파트 숲이 대단하였습니다.
평택역엔 AK백화점이 들어서고...
그나저나 천안까지 가야 하는데 영 속도가 나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들이 일사병의 전조증상이랄 수 있는 어지럼증을 보이고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더구나 평택에서 출발해서 성환까지 가는 길은 걷기에 최악이었습니다.
차도 옆에 전혀 보도가 없었고 차들은 씽씽 달리고...
<여기서부터 충청남도입니다.>라는 안내판을 보았을 땐 드디어 충남이구나...안도감이,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한참 후에 저 멀리 성환읍의 건물들이 보이길래 길에서 내려가 논두렁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보행자 도로가 없어서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논으로 내려가다가 정강이에 상처도 입고..
논두렁과 뚝방길을 걷는데 노을이 참 멋있었지만 오래 감상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성환에 도착했는데 시간은 이미 저녁 8시가 넘었습니다
힘들다는 아들을 달래고 달래 걷고 또 걸었습니다.
아들이 너무 힘이 들었는지
<아빠 너무 힘들어, 나 울고 싶어...울어도 돼? >라고 하는데 너무 미안하고 제 자신이 눈물이 나려고 하더군요.
아들을 꼭 껴 안고 한참을 있었습니다.
<북한이 중2 무서워서 못쳐들어온다> 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그 때의 중2 아들은 한없이 순수하고 작은 아이 같았습니다.
<직산 인디안> 매장 앞이었습니다.
힘들다고 보채는 아들과 <양평해장국> 집에서 열시가 다되어 저녁을 먹었습니다.
잘 먹어야 걸을 수 있는데 걷다보면 물이 최고였습니다.
밥맛도 없고 ...
그래도 선지해장국은 아들이 금새 해치우더군요.
공주대학교 천안캠퍼스 앞을 지나고.. 그 때가 밤11시 20분 드디어 천안시내에 도착하였습니다.
손아래 동서가 불당동에 살고 있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데리러 좀 나오라고...
불당동까지 걸어갈 수 있는 상황은 도저히 아니었습니다.
아침8시 반쯤부터 밤 11시 20분까지 정말 길고 긴 하루였습니다.
어쨌거나 천안까지는 왔으니까...
샤워후에 먹는 냉동수박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과일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늦은 시간이라 얼마 후에 영국과의 축구경기가 있었지만 피곤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아침 8시 진수성찬 처제의 아침 식사를 받아서 맛있게 먹고 또다시 출발.
천안-공주는 너무도 잘 알고 많이 다녀본 곳이라 자부했지만 체력이 고갈 될 대로 고갈된 상태인지라 발길이 무거웠습니다.
더구나 오른쪽 발바닥에 생긴 물집은 자꾸만 커져가는 것 같았고...
23번 국도를 따라 가려고 했지만 어제 평택 성환구간의 국도변 걷기 힘든 악몽에 코스를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불당동에서 나와서 서부대로를 지나 남부대로와의 사거리를 지나 신방동으로 쭉~~~
다리를 건너 쉬면서 바로 앞에 보이는 친척 형님께는 전화로만 안부를 전했습니다.
남관리 지나서 풍세 면사무소도 지나고...
매당교차고 - 보산원 초등학교도 보았습니다.
갈래길에서 유구/공주 방향으로 틀었습니다
곡두터널 못 미쳐서 로드킬 당한 고라니 한마리가 있어 길가 저 너머로 치워주고...
터널 입구에 오니 고향의 이름이 보였습니다.
<정안> 입니다.
너무도 감격스러웠습니다.
고향이름이면서 둘째아이의 이름이기도 한 <정안>...... 내 너를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터널을 지나면 바로 산성리인데 친구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전화를 하니 친구는 홍성으로 볼 일이 있어서 갔다네요.>
문천리에 이르러 정자에 어르신들이 쉬시고 계시길래 인사를 하고 잠시 쉬었습니다.
옥수수에 보리감자까지 잘 대접받고 다시 출발.
월산을 지나 대산 - 광정
정말 이 소랭이 계곡은 너무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휴가철을 맞아 나온 가족 친구들끼리 노는 모습이 얼마나 부럽던지...
내촌 - 보물 - 운궁 - 장원
중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종종 걸어 다니던 길이었는데 아들과 함께 30년 전을 회상하면서 걸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서울에서부터 걸어왔다고 하면 어른들이 걱정하실까봐 고향집 2킬로미터 정도 전, 운궁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드디어 도착
충남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 아~ 드디어 미친짓이 끝났다. >
아들의 한탄스런 한마디에 눈물이 울컥하려 하였습니다.
마당으로 뛰어나오신 부모님을 꼭 껴 안았습니다.
< 쇠 지팽이 3개를 갖어야 한양까지 간다는데 거기가 어디라고 걸어서 오느냐?> 고 하시는 어머님의 지청구는 함께 걸어와준 파트너인 아들에게 주는 훈장같은 칭찬이었습니다.
시원한 - 정말 깨질 듯한 차가움 - 지하수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그곳이 바로 천국이더군요.
모두 다 마치고 난 감격스런 감정은 지금도 이루 다 표현 할 수도 없습니다.
어머님께서 해주신 맛난 강낭콩 밥을 먹고 8시 고속버스 타고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버스를 타고 올라오면서 피곤에 지쳐 잠이 든 아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삼년 전부터 말로만 준비했던 걸어서 고향가기는 이루기 어려운 희망사항에 불과 했지만,
-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제 자신에게 다짐시켜 주고 싶었고,
아들에게는 추억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워주고 싶었던 바보 아빠의 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엔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 할껄... 했었으면 좋았을껄?
이렇게, 후회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주영회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죠?
<해봤어?>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 안될거야 불가능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
< 해봤어? >라는 물음은 <할수있다>는 또다른 물음이고 대답입니다.
이것이 이번 여행의 계기였습니다.
지난여름에 저는 해봤습니다.
사랑하는 그리고 대견한 나의 인생동반자인 아들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