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한복음 9:1-12) 2012. 10. 7.
구약 전도서에 보면“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바닷물을 신발에 담아 부지런히 모래밭으로 옮기는 한 어린 아이에게 뭐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지금 저 바닷물을 땅으로 다 퍼 옮기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깨달으려고 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비로서 깨달았다는 어느 교부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세상의 모든 일을 우리가 만든 공식 속에 다 집어 넣고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끔 해석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서는 뭔가 해석이 잘 안되기에 지금 예수님께 묻는 것입니다.“이 시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요. 인과응보라는 인간의 도덕적인 공식의 잣대로 재려다 보니, 죄 때문에 맹인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태어난 후가 아니라 날 때부터 맹인이었으니 혹 부모의 죄 때문은 아니었겠나 다소 헷갈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뜻밖이었던 것입니다.“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요. 물론 이 말씀은 인간의 원죄나 자범죄를 도외시함이 아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죄가 없는 듯이 여기면서 타인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무조건 당사자의 죄에 결부시키려는 외식적인 소행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 궁극적인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된 이 사람을 통하여,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신 표적을 나타내기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4-5절에“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무슨 신학논쟁이나 거대담론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맹인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 맹인은 가서 씻고 말씀대로 밝은 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주로 말씀으로만 기적을 행하신 일이 많습니다.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풍랑도 잔잔케 하고, 문둥병도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맹인은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는 한참 떨어져 있는 실로암 못까지 가서 씻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우선 무엇보다도 맹인의 연약한 믿음을 도우시기 위한 조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맹인은 예수님께 대하여 사전에 아는 것이 없었으며, 그러니 믿고 찾아온 것도 아니며 고쳐 달라고 청한 것도 물론 아닙니다. 맹인의 입장에선 어쩌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맹인은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침과 진흙이 눈에 직접 발라지고 있을 때에 뭔가 혹시하며 잔뜩 호기심과 치유에 대한 기대를 지니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처음에는 반신반의한 마음에서 멋 모르고 선생님의 말씀이고 하니 순종하여 실로암 못을 더듬더듬 찾아갔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맹인으로 하여금 그같은 과정을 통하여 점차 믿음을 지닐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비록 처음에는 믿음이 시원찮았는데도 단지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뜻하지 않던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뒤늦게 믿음을 지니게 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아람의 나아만 장군도 분둥병에서 고침을 받을 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병을 고쳤듯이 말입니다. 신약의 가나 혼인잔치에서도 하인들이 돌항아리 여섯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지친 몸이지만 멀리 깊은 곳까지 순종하여 가서 그물을 내렸다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는 기적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순종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순종하였더니 체험하였고, 체험하니 믿음과 확신에 이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큰 믿음을 지니기 위한 비결이‘말씀과 기도’에 있는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순종’이 중요함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제자들이 언젠가 주님께“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17:5)라고 청하였을때, 필요한 예를 드신후 결론으로 이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눅17:10)고요. 마찬가지로 이 맹인도 실로암 못에 사서 씻었더니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주님의 침으로 이겨 바른 진흙이 특효를 발휘하였을까요? 아니면 실로암 못의 물에 무슨 효력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자연히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어집니다만, 반대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역시 말씀에 대한 확신과 믿음에 이르게 되더라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삼상15:22중) 하신 줄 믿습니다.
한가지 또 소중한 영적인 은혜를 본문을 통해 깨달게 됩니다. 7절을 보시면 괄호 부분에서“(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의 식수원은 실로암 못 말고도 구약에 나오는 엔로겔 우물이 있고, 또 식수용은 아니지만 양이나 제물을 씻는 용도로 이용되었다고 보여지는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지만,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맹인을 어찌 실로암 못으로 보내셨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원래 실로암 못은 없었던 것인데 전에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산헤립의 침공을 대비하여 성 밖에 있던 기혼 샘을 메워버리고 대신 바위 밑으로 500여m 터널을 뚫어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실로암 못을 만든 것입니다. 즉 솟구치는 기혼 샘물을 성 안으로 흘려 보냈으니 여기서‘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실로암’못이라 이름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4절에도 나옵니다만“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표현이 성경에 수없이 나옵니다.“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지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눅4:18)”,“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등등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기혼 샘을 하나님 아버지에 비유한다면, 실로암 못은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바로 이 실로암 물을 마시므로 생명을 얻듯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맹인된 자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서 죄 씻음을 받고 생명을 얻으라는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본문 뒤 9장35절 이하에 나옵니다만, 맹인으로 있다가 나은 사람이 후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비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이심을 바로 깨닫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9장 끝에 나옵니다. 맹인이었던 자의 신앙고백 직후인 39-41절 말씀입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 말씀을 볼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죄악의 어둠 속에 처해 있는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 광명의 빛, 생명의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육신적으로 맹인된 자가 광명한 빛을 보게되듯이, 우리 주님은 죄로 어두워진 영적으로 맹인된 자들을 생명의 빛으로 고침을 받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는데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며 믿지 않은채로 있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심판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명한 찬송가 작가 중에 크로스비(Fanny J. Crosby 1820-1915)라는 분은 앞을 못 보는 맹인으로서 9,000여편에 달하는 수많은 찬송시를 작사한 여인입니다.‘나의 갈 길 다가도록’(384장),‘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288장)이 그것입니다. 그는 어렸을때 가정부의 불찰로 그만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다행이도 믿음의 가정에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를 듣고 영의 눈이 열려서 기도하는 중에 그같은 신령한 노래들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가 열 살때인가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하나님, 만약에 하나님이 저에게 다시 보게 해 주신다고 해도, 저는 안 받겠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텐데,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천국에 가서 가장 먼저 우리 예수님의 얼굴을 보겠어요!’ 크로스비야는 비록 육적으로는 맹인일지라도, 그는 참으로 영안이 열린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하루에 25,000번 이상을 깜박이므로써 눈을 보호하며 청결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영적인 눈 또한 항상 영적인 청결을 유지하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믿음을 힘써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