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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서사로
(변지연;문학평론가)
왜 ‘서사’인가
20세기 중반을 전후로 나타난 문학 연구의 새로운 징후 중 하나는, 요컨대 그 관심 영역의 학장, 즉 ‘소설’에 대한 관심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후의 여러 문학 유형들 가운데 가장 중심적이고 대표적인 서사 양식으로 간주되어 온 소설이 차츰 그 권좌에서 밀려나 서사(narrative)라는 보다 개방적이고 통합적인 장르 개념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는 물론 문학 연구 내부의 자생적인 계기뿐만 아니라 문학 외적인 요인까지 아울러 작동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R.스콜즈와 R.켈로그가 쓴 서사의 본질(the Nature of Narrative)을 통해 환기하고자 한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불안정성, 그리고 소설을 서사 양식의 최종적 산물로 보는 일반적인 통념의 허구성 이었다.소설은 태생적으로 여라가지 다양한 요소들-이른바 ‘역사적’ ‘모방적’ ‘교훈적’ 요소들-로 구성된 복합적인 장르이며, 따라서 언제든지 이 다양한 요소로 다시 분해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M 바흐친도 정의한 바 있듯이, 소설은 ‘그 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가지지 않은 형식’ 다시 말해 그 장르상의 속성을 확정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움직이는’ 서사 양식인 셈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소설을 고대 설화나 중세 로망스와 같은 미개한 서사 양식에서 진화된 ‘최종적’ 산물로서가 아니라, 다만 다양한 서사 유형 중의 하나에 불과한 ‘과도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실제로 그 장르적 특성을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게 되어버린 현대소설의 혼란스런 양상에 대한 하나의 설득력 있는 해명인 것처럼 보인다. 픽선/논픽선, 순수소설/대중소설, 리얼리티/판타지 등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심지어는 소설과 타 문학 장르, 혹은 문학과 타 예술 장르 간의 관습적인 구분마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오늘의 문화적 현실을 적절히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쨌든 소설의 운명에는 역설적인 데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지속적인 변신과 실험이 가능한 ‘오지랖 넓은’ 장르로 널리 각광받아 왔으나 그 점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더 이상 주장하기 어렵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 연구에 있어서 소설의 위상이 흔들리게 된 보다 직접적인 요인은 역시 문학 외적인 새로운 상황 변화에 있다. 20세기 이후 부단히 개발되어 온 각종 서사 매체와 그에 따른 새로운 서사 장르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주저하는 것처럼 TV, 영화, 컴퓨터, 광고, 뮤직 비디오, 뉴스 기사, 그리고 만화와 에니메이션등 새로운 서사 매체와 장르는, 그 동안 종이책의 형태로 만들어진 소설에만 제한되었던 독자들의 시선을 매우 급격한 속도로 뻬앗아 가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현상이 단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소설이 이야기 예술의 가장 중심지이거나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은 보다 감각적이고 편리한 것을 추구하는 대중문화의 위력과 세련된 현대 문명의 기술력 앞에서 날이 갈수록 독자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들게 되었다. 설령 소설은 죽게 될지라도 이야기에 대한 대중의 본능적인 욕구는 소설 아닌 다른 새로운 서사 매체와 이야기 방식을 통해서 얼마든지 새롭고 간편하게,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는 훨씬 흥미로운 방법으로 대체됨으로써 변함없이 충족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야기 문학의 독자적 장르, 혹은 가장 진전된 장르인 소설의 위상이 흔들리게 되고, 또한 새롭게 등장한 서사 매체의 미학적 가치가 활발히 논의 되기 시작하면서 문학 연구자들은 더 이상 그 연구 대상을 단지 소설에만 한정시킬 수 없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문화적, 인문학적 예술적 경계와 장르 구분이 모호해져 가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새로운 서사 매체의 미학적 가치와 그것의 광범위한 대중적 수용을 외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다라서 이제 그들은 ‘소설’이라는 협소한 영토을 넘어 이야기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호모 나라토아르(Homo Narratoire) 로서의 인간과 서사 연구의 의미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놀랍게도 단 한 순간도 ‘이야기의 세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우리의 모든 사고 과정과 언어 행위, 각종 문화적 산물이 근본적으로 ‘이야기’ 형태로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일상 생활 자체가 이미 무수한 ‘이야기 하기(story telling)’의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가령 저 먼 시대의 동굴벽화와 오래된 설화들, 민요와 판소리, 오페라외 연극, 그리고 소설과 영화와 컴퓨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이야기 하기’의 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런가 하면 모든 철학적 담론과 이론들, 예컨대 의식과 무의식이 관계를 통해 인간이 정신구조를 해명하고자 하는 프로이드의 가설이나, 자본과 노동과 사회구조의 관계를 논의한 마르크스의 사회철학 역시 따지고 보면 삶이 ‘진리’와 ‘본질’을 밝혔다기 보다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펼쳐 낸 셈이다.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이란 언제 어디서나 온통 이야기의 숲 속에 파묻혀 살고 있는 호모 나라토아르(Homo Narratoire)가 되었다고 할까. 그런데 이처럼 인간이 호모 나라토아르로 존재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모든 경험과 인식이 본질적으로 이야기를 이야기 하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이야기하기 행위란 기실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 혹은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수단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이야기와 이야기하기의 방식을 고찰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탐색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예술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서사 구조의 특징과 그 속에 숨겨진 미학적 원리를 밝혀내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를테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소박한 물음을 바탕으로 텍스트 분석을 시도하곤 한다.
이 소설은, 이 영화는, 이 컴퓨터 게임은 어떠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어떤 기법과 방식으로 이야기하기에, 그토록 흥미롭거나 아름답거나 감동적인가? 동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기본 서사구조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어덯게 연극이나 팬터마임이나 발레 등의 다른 서사 매체와 형태로 전이될 수 있는가? 그것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서사 연구의 전개 과정
서사 연구의 시발점을 찾자면 저 멀리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디에게시스(말하기)와 미메시스(보여주기)를 구분해 보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통해 비극의 플롯을 문제 삼은 것은 이야기하기 기법에 대한 그들의 매우 선구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는 언제나 서술자의 중재가 개입한다는 것, 그리고 이야기 하기 행위 속에는 언제나 청자에게 일정한 효과를 미치게 될 특정한 서술기법이라는 것이 작용한다는 인식이 그들에게는 아주 일찍부터 싹텄던 것이다.
서사에 대한 이러한 초기적 관심은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피불라(fabula)와 수제(sujet)의 구분, 그리고 영미 신비평의 ‘스토리와 플롯의 구분’으로 구체화되어 계승된다. 현 시점에서 이 구분은 물론 매우 상식적인 것이지만, 하나의 서사물을 이야기를 구성하는 특별한 질료들과 그것들이 언어에 의해 배열되는 일정한 형식으로 분리시켜 해명하고자 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서사학적 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들의 방법론에는 몇 가지 중대한 결함이 없지 않았다. 자주 지적되어 왔듯이 이들은 하나의 텍스트를 내용과 형식으로 이원화시키고 전체를 몇 개의 구성 요소로 쪼갤 줄 알았을 뿐, 내용과 형식, 부분과 전첵 어떠한 구조와 원리에 의해 유기적으로 짜여 있는지까지는 그다지 고려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는 개별적인 텍스트나 특정 장르를 분석하는 데에만 치중한 점, 그리고 주관적인 인상 비평의 한계를 크게 극복하지 못했다는 문제점도 나타났다.
이 같은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1950년 대에는 영미 비평계에서는 ‘문학 연구의 과학화’와 ‘구조의 탐색’을 표방하는 구조주의적 연구 방법론이 대두하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종류의 문학 양식들 사이에는 서로 간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문학적 관습으로서 원형(archytype)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문학 연구가 보다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개별 장르나 텍스트에 집착하기 보다는 이야기를 가진 모든 텍스트의 공통된 골격을 추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적인 관점이었다. 특히 현대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서사(narrative)이 개념을 처음 등장시킨 N.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1957)는 1950녀대 당시 뒤늦게 알려진 러시아의 민담 연구자 V.프롭의 “민담 형태소”와 함께 프랑스 구조주의 시학이 표방한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제는, 텍스트의 내용을 담은 형식이 아니라 오직 의미가 산출되는 구조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전제에 따르면 모든 서사 텍스트 구조는 편의상 내용의 차원인 스토리(story)라는 국면과 표현의 차원인 담론(discourse)이라는 국면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스토리/담론의 이분법이 기존의 내용/형식과 명백히 구분되는 지점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기존의 이론이 서술자(narrator)의 개입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일어난 사건, 혹은 어떤 현상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구조주의자들은 화자와 청자의 의사소통 행위를 전제한 화자의 구체적 발화 양상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상보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구조’로 일원화하는 태도로 보여준다.
특히 1972년에 출간한 G. 주네트의 서사담론(Discours du recit)은 서사학이 지니는 실질적인 유용성의 정도를 특정 소설 텍스트를 분석해 구체적으로 실증해 보인 매우 중대한 성과물이다. 저자는 이 저서에서 소설 텍스트를 크게 스토리, 담론, 서술행위 등의 세 층위로 나누고, 담론상에 나타난 서술의 순서를 스토리상의 계기적 또는 인과적 순서와 비교한다. 또는 담론의 시간을 스토리의 시간과 비교하고 동일한 사건을 언급하는 ‘빈도’를 측정하는 등 매우 엄밀한 분석을 수행해 보이고 있다. 특히, 이 저서가 전통적인 ‘시점’이론의 한계를 날카롭게 짚어 내고 초점화자(focalizer)와 화자(voice, narrater)를 분리시켜 분석할 것을 제안하므로써 새로운 분석의 틀을 제시한 것은 매우 획기적인 성과라고 평가될 만하다.
이처럼 텍스트의 서술 행위가 강조되고 초점화자와 화자가 분리되면서 주네트 이후의 많은 서사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한층 구체적이고 정교한 분석의 잣대를 마련해 왔다. 예컨대 S. 채트만이 “이야기와 담론”(1980), G, 프랭스의 “서사학(1982)”, S. 리먼 케넌의 “소설의 시학(1983)” 그리고 M. 발의 “서사란 무엇인가(1985)” 등이 바로 그러한 성과물이다.
이 저서들은 기존의 서사학적 성과를 나름대로 효과적으로 종합해 보이는 가운데 스토리와 담론 국면에 해당하는 각각의 제 요소들과, 초점화와 화자의 종류, 그리고 다양한 화법 등에 관한 상세한 예시와 더불어 새로운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가령 S. 채트먼은 영화와 소설이 서사구조 라는 부제가 달린 저서를 통해 기존의 서사학적 논의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특히 동일한 서사구조와 매체의 전이 양상에 관한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한다. S. 리먼 케넌은 화자의 부재 가능성을 내비쳤던 채트먼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설령 순수한 대화나 편지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것일지라도, 모든 서사 텍스트에는 반드시 그것을 기록, 인용하거나 복사한 상위의 서술자가 존재한다 라고 주장하므로서 화자가 모든 서사물의 필수적 자질임을 주장하였다. M. 발은 초점화의 양상을 단계별로 분석한 후 인칭대명사에 근거한 시점 체계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면서 “진정한 화자는 궁극적으로 언제나 1인칭”임을 환기 시킨다. 그런가 하면, 채트먼은 최근 출간된 저서 커밍 투 텀스(coming to Terms(1990))에서 화자의 부재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기존 입장을 철회하는 학문적인 용기를 보여주어서 주목된다. 특히 이 저서에서 그는 “화자”라는 용어에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는 ’‘인격성’과 ‘음성성’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고, 화자 대신에 제시자(presenter)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서사학의 공과(功過)와 국내 서사 연구 현황
서사학의 토대로서의 구조시학의 목표는 본시 개별 텍스트에 대한 주관적 인상비평의 수준을 벗어나 해석과 평가의 객관적인 근거로서의 ‘구조’를 추출해보자는데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은 불가피하게 개별 텍스트가 지닌 고유한 개성과 독창성, 그리고 텍스트와 비문학 텍스트 사이의 차이를 끄집어 내는데 무력하다는 난점을 드러냈다. 더군다나 그것은 현상으로서의 구조 이외에 텍스트에 함축된 또 다른 세부적 국면들, 이를테면 그러한 구조에 필연적으로 관여하고 있을지도 모를 ‘욕망’과 ‘무의식’과 ‘이데올로기’이 문제 등에 대해서 속수 무책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이후의 서사 연구는 서사의 문제를 단지 언어의 기술적 운영이라는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여타 영역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바라보려는 새로운 움직임으로 차츰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시점의 문제를 ‘화자의 젠더(gender)"라는 페미니즘적인 인식의 잣대로 분석하는 S, 랜서의 서사행위(Narrative act(19810), ’플롯‘을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의 결과로 해석하는 P.브룩스이 “플롯을 따라 읽기(1982)”, 그리고 서사학이 결코 정치사회적 현실이나 이데올로기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심지어 ’서사학의 죽음‘마저 선언한 M.커리의 “포스트모던 서사 이론(Postmodern theory of Narratology-1998)"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서사학의 근본 명제-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모든 불분명한 요소를 제거하고 오직 텍스트상에 나타난 ‘객관적’인 언어 구조만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겠다는 -를 깨뜨리는 듯이 보이는 이들의 새로운 움직임이 결코 서사학 자체를 파기하는 행위로만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기존의 방식을 과감히 탈피해 욕망이나 이데올르기 등의 문제와 부단한 교섭을 시도함으로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심화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진행형’의 행위로 읽혀지는 측면이 없지 않다. 더군다나 다중적 매체 환경과 더불어 기왕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이야기 현상이 폭주하는 현 시점이야말로 오히려 서사학적 접근이 긴요하게 요청되는 시대인 것이다.
이같은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최근 한국의 서사 연구는 -물론 현재로서는 아직 개척 단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비교적 활발한 진행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의 소설이론 강의들은 소설에 대해 역사, 전기적으로 접근하던 방식에서 차츰 벗어나 토도로프의 ‘산문의 시학’을 읽거나 주네트식 담론 분석을 시도하는 일이 잦아졌고, 소설의 시점이나 화자의 문제를 보다 집중적으로 다룬 연구 논문들도 심심찮게 발표되어 왔다. 특히 최근에는 서사학에 관심있는 국내의 국문학자는 물론 외국문학, 연극, 영화, 컴퓨터 게임, 만화, 에니메이선 등 여러 서사 분야 연구자로 구성된 ‘한국서사학회’가 발족되기에 이르렀다. 이 학회가 지난 2000년부터 매년 2회씩 꾸준히 발간해 온 서사 연구 전문지 (내러티브)는 서사학에 대한 소수 국내 연구자들의 각별한 관심과 구체적인 연구 방향을 가늠케 하는 유용한 자료로 주목된다. 이 학회지는 매회 “서사물의 작” “서사물의 독자” “매체와 서사” 등과 같은 주제를 정해 심도 있는 논의 공간을 마련하고 각종 구체적인 텍스트를 독창적으로 분석하고 서사학 관련 외국 서적을 번역, 게재하는 등 다양하고도 시의성 있는 연구를 성과를 폭넓게 소개해왔다.
그러나 국내의 서사학적 접근이 보다 의미 있고 생산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제라르 주네트나 채트먼을 이해하고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존에 있던 이론적인 틀을 수정하거나 심화하고 그렇게 마련된 틀을 구체적으로 작품을 분석하는 도구로 삼아 보다 풍부하고 시의성 있는 해석과 평가를 도출해 내는 작업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물론 좀 더 풍부하고 다양한 서사 연구 전문지들이 요구될 것이다. 현재 한국의 서사 연구자들에게도 무엇보다도 ‘도구’ 자체에 대한 부단한 검증은 물론 도구의 생산적인 ‘적용’을 위한 활발한 정보 교류와 논의이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