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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손으로 물건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과 ‘예술 작품 만드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영암의 고즈넉한 한옥에서 80종에 달하는 식초, 산야초로 냄새를 잡은 장 등을 옹기에 담아 정성껏 발효시키는 김명성 소장을 보고 있노라면 ‘장인’이라는 단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발효방식에 자신의 노하우를 더해 새로운 발효의 장을 연 김명성 소장을 만나기 위해 ‘김명성 발효 연구소’를 찾았다. 전통적이면서도 새로운 김명성 소장의 발효법에 대해 들어봤다.
서울에서 차로 다섯 시간을 내리 달렸다. 발효를 연구하기 위해 도시에서의 삶을 접고 영암으로 내려와 ‘김명성 발효연구소’를 차린 김명성 소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저 멀리 가파른 월출산이 보인다. 넓은 평지에 홀로 우뚝 솟은 월출산의 기세를 감탄하려는 찰나 수많은 장독에 둘러싸인 커다란 한옥 앞에 차가 멈춰 선다. 기존에 장원(장을 만드는 곳)이라 하면 쿰쿰한 메주 냄새가 나야 정상이건만 이상하리만치 산뜻한 공기 내음이 놀랍다. 마당에는 장독이, 뒤편에는 아궁이와 땔감이 있는 발효연구소에 들어서니 생활한복을 입은 정갈한 인상의 남성이 우리를 반긴다. 바로 김명성 소장이었다.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우선 밥부터 먹자며 뜨겁게 달아오른 아랫목을 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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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조용한 마을에 ‘김명성 발효연구소’가 있다. 연구소는 전통적이면서도 깔끔한 한옥 건물이다. 곳곳에 놓인 옹기는 도예가인 정희창 선생의 작품이다. |
김명성 소장의 발효에 대한 관심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1993년도 군 제대 후부터 쭈욱 ‘김치’에 관한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 내 사무직으로 일하게 되면서 계획은 무기한으로 미뤄졌다. 그러던 2007년, 김명성 소장은 문득 아내에게 직접 김치를 담가줘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김치를 배우려고 셰프, 요리연구가, 전통요리전문가 등을 찾았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형식적이고 전통에 의존한 요리과정만 알려줄 뿐 각 재료가 요리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문만 남은 김명성 소장은 직접 공부해서 김치를 담그자는 결론을 내고 본격적으로 김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김치를 공부하며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소금이었다. 제대로 된 김치를 만들기 위한 기본은 단연 소금이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주말마다 전국을 누비며 소금을 찾아 헤맸다. 온 지방을 찾았지만 만족스러운 소금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민하던 김명성 소장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신안 군청에 전화를 걸어 값은 얼마라도 좋으니 제대로 만든 소금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소개받고서야 마음에 드는 소금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정성으로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를 수소문했고, 각종 강연과 강사를 찾아 헤맸다. 4년간 동분서주 한 김명성 소장은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발효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조용한 고향 마을 한쪽에 발효연구소를 내고 이 길을 걸은 지 5년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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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종기 모여있는 장독대 뒤로 위엄을 자랑하는 월출산이 보인다. 김명성 선생은 사람이 만드는 음식이지만 결국엔 신선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이 장과 식초를 완성한다고 말한다. 맛있는 음식이 탄생하기 더할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
전국을 누비며 발효음식을 배우고 많은 의문이 들었다. ‘왜 장을 담글 때 고추, 숯, 웃소금, 대추를 넣어야 하는 것일까’, ‘왜 그렇게 염도가 높은 소금물에 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발효액(재료와 설탕을 넣고 발효시킨 액체)은 꼭 재료와 설탕의 비율이 1대 1이어야 하나’ 같은 질문이었다.
김명성 소장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기로 한 것이다. 오직 잡균이 아닌 발효에 필요한 미생물이 발효작용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발효액의 경우 재료와 설탕의 비율을 1대 1로 넣어야 부패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였다. 김명성 소장은 적은 설탕에서 부패 없이 미생물이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재료와 설탕을 비율별로 넣고 발효시켜 보았다. 많은 시도 끝에 김명성 소장은 재료 중 설탕 비율을 2~5%까지 낮췄다. 일반 발효액의 설탕 비율이던 50%를 1/50 수준으로 낮춘 것이다.
장에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민속신앙적인 요소를 모두 뺐다. 고추, 숯, 웃소금 등 미생물 발효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재료들은 생략했다. 오직 메주와 소금, 물을 기본으로 했다. 실용적이면서 발효에 충실한 장을 만들었다.
음식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만든 모든 것’이다. 그는 먹고 마시도록 만드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직접 운영 중인 발효음식 수업에서도 절대 레시피를 먼저 수강생에게 주지 않는다. 수강생이 수업을 들으며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실습과 시식을 모두 마친 후에야 레시피를 나눠준다. 아무리 레시피가 있다고 해도 발효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음식을 만들 수 없다.
많은 장점을 가진 우리 장이 공격받는 몇 가지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과한 염도다. 전통장은 보통 18~19%에 달하는 소금물로 만든다. 높은 염도는 현대인을 위협하는 성인병을 유발한다. 두 번째는 유해곰팡이다. 전통방식에서 메주를 띄우다 보면 좋은 곰팡이가 피기 마련이지만, 그만큼 나쁜 곰팡이도 함께 필 수 있다. 학계에서 우리가 장을 먹는 것은 암 덩어리를 먹는 것과 같다는 주장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쿰쿰한 냄새다. 청국장이나 된장찌개를 끓이면 온 집안에 퍼지는 냄새 때문에 대중화의 걸림돌이 되곤 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된장이 아닌 일본의 미소가 더욱 사랑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명성 소장은 우리 장에 대한 문제제기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문제점이 있다면 고치면 되지 않을까? 장류의 단점을 고민하며 직접 장을 담그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높은 염도는 논리적으로 접근했다. 전통 장이 18~19%의 소금물에 담그는 이유는 장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염도를 낮춰도 장이 상하지 않는다면 굳이 높은 염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 김명성 소장은 상대적으로 염도가 낮은 일본의 나토와 미소를 발효시킬 때 약간의 곡물을 이용한다는 데에 주목했다. 우리 밀과 보리의 수분을 제거해 장과 함께 곡물발효시켰고 염도를 10% 수준으로 낮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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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농사지은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성이 들어있고 믿을 수 있는 재료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 가족을 먹인다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다. |
두 번째인 유해 곰팡이 역시 왜 유해 곰팡이가 피는지 고민했다. 곰팡이는 생육 조건이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피지 않는 특성이 있다. 김명성 소장은 발효에 필요한 곰팡이만 필 수 있는 환경에서 메주를 띄우기로 했다. 단순히 뜨거운 온돌방에 메주를 모두 넣어두고 무작정 땔감을 때서 메주를 띄우는 것이 아니라 시간마다 메주를 체크하고 유해 곰팡이가 아닌 필요한 곰팡이만 필 수 있는 환경에 적합한지 확인한다. 보통 시골집에서 볼 수 있는 검은색, 흰색, 푸른색 등 각양각색의 곰팡이가 핀 메주와 다르게 김명성 소장의 깨끗한 메주를 보면 발효 과정에서 차이점이 확연히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장의 쿰쿰한 냄새를 해결한 것은 산야초였다. 수없이 많은 산야초를 넣고 콩을 삶는 과정에서 딱 한 가지 콩의 냄새를 잡을 수 있는 산야초를 찾은 것이다. 이 산야초에 콩을 삶으면 메주를 띄울 때도, 장을 발효시킬 때도 쿰쿰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의 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맛을 보면 여느 장보다 진하고 풍부한 풍미가 난다. 지독한 냄새로 유명한 청국장 역시 산야초를 이용해 냄새를 잡으면 찌개를 끓여도 쿰쿰한 냄새가 남지 않았다.
오직 전통이란 이유로 의문이나 변화의 여지 없이 답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하여 새것을 아는 ‘온고지신’은 김명성 소장이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다. 전통장의 기본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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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 중인 황칠나무 식초(왼쪽)와 포도 식초(오른쪽). 아낌 없이 재료를 넣어 처음부터 함께 발효시킨다. |
연구소 마당에서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숨 쉬고 있는 옹기 속에는 장과 식초가 들어있다. 80종에 달하는 다양한 식초는 누가 뭐래도 연구소의 자랑거리다. 각종 재료로 만든 식초는 세 가지 종류로 나뉜다. 황칠나무, 가시오가피, 울금 등 각 약재를 넣고 발효한 약재식초와 딸기, 바나나, 배, 감 등 과일로 만든 과일식초, 그리고 누룩을 발효해 만드는 곡물식초(막걸리식초)다. 간혹 시중에 식초에 재료를 넣고 숙성시켜 ‘OO식초’라고 판매하는 경우가 있다. 김명성 소장은 그것은 발효식초가 아니라며 일축했다. 전 단계부터 각 재료와 함께 발효되면서 식초가 돼야 진정한 발효식초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재료가 가진 약성이 식초에 작용해야 한다. 앞서 말했던 설명 가능한 음식에 대한 고집이 여기에도 닿아있다. 식초를 만드는데 ‘왜 그 재료를 함께 발효시켜야 하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은 직접 농사지은 콩을 이용해 손수 메주를 띄워 발효시키기 때문에 많은 양을 생산하진 못한다. 보통 장독대를 임대해 장을 담가주기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메주는 대두, 서리태, 청태, 쥐눈이콩으로 각각 만들고, 이것을 고루 섞어 장을 담근다. 된장에는 메주와 물, 소금이 들어가는데 법제한 우리 밀과 보리도 발효를 위해 함께 들어간다. 이외에도 햇간장임에도 맛이 깊은 간장과 매운맛과 단맛의 조화가 잘 어울리는 고추장을 만든다. 그는 각종 발효액으로 만든 달콤한 음료, 조청이나 엿기름 같은 감미료 등도 손수 제조한다.
반나절에 걸쳐 연구소를 구경하고 차분히 앉아 음료를 마시며 김명성 소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좀 더 생산량을 늘리고 홍보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소장은 단칼에 말을 잘랐다. 시간이 걸리는 발효처럼 모든 일에도 순리가 있다는 얘기였다. 자신은 묵묵히 할 일을 할 것이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온 기회라면 얼마든지 반기겠다고 말했다. 최종 목표를 묻자 연구소 곳곳에 놓인 옹기를 만든 도예가 정희창 선생과 손잡고 작은 마을을 만들어 온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진짜배기 음식과 음료를 만들어 방문객에게 대접하고 여유로운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한다.
돌아오는 차 안, 온고지신의 정신에 걸맞게 흔들리지 않는 기본 위에 새로운 기둥을 단단히 세우고 있는 김명성 소장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숙연해졌다. 아마도 기존에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변화시키려는 그의 태도를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