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기념물 제 75호
벼루고 벼루었던 독립운동가이시며 불교시인이셨던 만해 한용운선생의 생가지를 찾아 길을 나섰다.
서둘려 찾아왔지만, 이곳 역시 늦은시간에 도착하여 만해 체험관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기에 건물만 담아 올려봅니다.
▲ 萬海韓龍雲之像(만해한용운지상) © 박태선기자 | | 체험관 앞에 세워져 있는 만해선생의 동상
체험관 앞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생가지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생가지 가는 왼쪽옆에 있는 관리소. 여기서 조금 더 앞쪽으로 가면 생가지가 있으며, 저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만해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승려이며 詩人(시인)인 韓龍雲(한용운, 1879∼1944)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호는 卍海(만해)이다.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 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가가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에 복원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만해선생의 친필 轉大法輪(전대법륜) 편액이 생가 방문위에 걸려 있었으며, 옆에는 님의 침묵 시가 적힌 액자가 놓여있었다.
생가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위패와 영정을 모신 卍海祠(만해사)가있으며, 사당 삼문인 茶門(차문)을 담아올려봅니다.
6세부터 성곡리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워 9세에 문리를 통달, 신동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26세에 강원도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 삼일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1926년 시집 '님의 沈默(침묵)'을 내면서 저항 문학에 앞장섰는가 하면, 불교개혁운동에일생을 바쳤으며 1944년 6월 69세의 나이로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했다.
▲ 사당 삼문에서 바라본 만해처험관 전경 © 박태선기자 | | 저서로 '님의침묵', '불교대전'등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建國功勞勳章(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卍海 韓龍雲(한용운, 1879-1944) 선생의 生家址(생가지) 뒤쪽 언덕에 '민족시비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민족시비공원으로 오르는 산책로 입구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詩(시) '복종'을 선두로 양쪽으로 오솔길따라 민족시인들의 시비를 세워 두었다.
시비공원 좌우로 갈라지는 입구에 세워놓은 만해선생의 '복종' 부터 올려봅니다. 그리곤 왼쪽 산책로를 택하여 한국문인협회 홍성지부로부터 추천받은 시인들의 詩(시)를 만해시비를 비롯해 백석, 정한모, 이육사, 김달진, 신동엽, 김남주, 유치환, 김소월, 조태일, 김수영, 이상화, 조지훈, 윤동주, 박두진, 정지용, 구상, 심훈, 변영로, 김광섭, 시인 20명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몇편만 올려봅니다.
시비공원 중간쯤 지점에 잠시 머물며 쉬다갈 수 있는 만해정이 있다.
만해 체험관과 생가지 민족시비공원 내의 넓은 뜰에는 어록비와 시비가 세워져 있기에 함께하기 위에 올려봅니다.
나룻 배와 行人(행인) 나는 나룻 배 / 당신은 行人(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음니다. /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감니다. /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깁흐나 엿흐나 / 급한 여울이나 전거감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마지며 / 밤에서 낫가지 당신을 기다리고 잇슴니다. /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 도러보지도안코 가심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 오실줄만은 아러요 /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 날마다 날마다 낡어감니다.
나는 나루ㅅ 배 / 당신은 行人(행인)
▲ 韓龍雲(한용운)과 金東旭(김동욱) 詩碑(시비) © 박태선기자 | | 선생은 세상을 마칠 때까지 佛敎(불교)를 통한 靑年運動(청년운동)과 日帝(일제)에 항거하는 獨立運動思想(독립운동사상)을 고취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선생의 愛民(애민). 愛國精神(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곳에 標石(표석)을 설치하였다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