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주의 사자성어(49)>
가렴주구(苛斂誅求)
사나울 가(苛), 거둘 렴(斂), 가렴(苛斂)이란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것’을 말하고, 벨 주(誅) , 구할 구(求), 주구(誅求)란 ‘시도 때도 없이 백성에게 정당한 근거없이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가렴주구’란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거나 또는 백성을 못살게 구는 혹독한 정치“를 말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가 조폭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 이런 곳에는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아 갈 수 없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 보다 더 무섭다.
이를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라고 한다.
공자가 태산 옆을 지날 때 어떤 여인이 묘에서 구슬피 울고 있었다.
공자가 자로를 시켜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그 여인은 “옛날에 저의 시아버지께서 호랑이에게 죽었는데, 얼마 전에 남편
이 또호랑이에게 죽었습니다. 지금은 내 아들 또한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도
슬퍼서 우는 것입니다”
자로가 말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이곳에는 가혹한 정치는 없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는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명심하거라. 가혹한 세금이나 정치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이러한 가혹한 정치는 당나라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얼마나 혹독한 정치였는 지는 두보(杜甫)의 시에 잘 나타나고 있다.
아들 삼형제를 군대에 보내고 그 중 두명이 전사했다. 나머지가 수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이제는 그 아버지 마저 징용하러 관리가 찾아온다.
할아버지는 담을 타고 도망가고, 대신 할머니가 군대 밥짓는 역할로 끌려가는 참담한 장면을 보고, 두보는 ‘석호리’라는 시를 지었다. 한문공부도 할 겸 두보의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石壕吏(석호리) :杜甫(두보)
날 저물어 석호촌에 투숙하니 (暮投石壕吏:모투석호리)
관리가 나타나 밤에 사람을 잡으러 왔네 (有吏夜捉人:유리야착인)
할아버지는 담을 넘어 달아나고 (老翁踰牆走 :노옹유장주)
할머니가 문에 나와 응대하네 (老婦出門看 :노부출문간)
관리의 호통은 어찌 그리 노여웁고 (吏呼一何怒 :리호일하노)
할머니의 울음은 어찌 저리도 슬픈가 (婦啼一何苦 :부제일하고)
할머니가 관리에게 나아가 하는 말을 들으니 (聽婦前致詞 :청부전치사)
세 아들이 업성에 가서 수자리 하는데 (三男鄴城戍 :삼남업성수)
한 아들이 부쳐온 글에 (一男附書至 :일남부서지)
두 아들이 얼마전 싸우다 죽었다오 (二男新戰死 :이남신전사)
산 놈은 그럭저럭 목숨을 부지하겠지만 (存者且偸生 :존자차투생)
죽은 놈은 영원히 그만이지요 (死者長已矣 :사자장이의)
집안에 다른 남자라곤 없고 (室中更無人 :실중갱무인)
오직 젖먹이 손자뿐이요 (惟有乳下孫 :유유유하손)
젖먹이 있으니 어미는 가지 못하고 (有孫母未去 :유손모미거)
나들이에도 온전한 치마조차 없다오 (出入無完裙 :출입무완군)
이 할미 힘이 비록 쇠했지만 (老嫗力雖衰 :노구역수쇠)
나으리 좇아 밤에 따라가서 (請從吏夜歸 :청종리야귀)
급히 하양 수자리에 대어 간다면 (急應河陽役 :급응하양역)
새벽밥은 지어 드릴 수 있답니다. (猶得備晨炊 :유득비신취)
밤이 깊어 말하는 소리 그치고 (夜久語聲絶 :야구어성절)
흐느껴 우는 소리 들리는 듯 (如聞泣幽咽 :여문읍유열)
날 밝아 길에 오를 때 (天明登前途 :천명등전도)
홀로 할아버지와 작별하였다. (獨與老翁別 :독여노옹별)
석호촌은 지금의 하남성 섬현 동북 70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한 밤중에 관리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잡아가는 참상을 목격하고 두보가 지은 것이다 할아버지 대신 징용에 나간 할머니가 애처롭기만 하다. 당시의 학정(虐政)을 눈으로 보는 듯 선하다.
우리의 경우도 조선 말기로 올수록 학정이 심해졌다. 대표적인 것이 삼정(三
政)의 문란(紊亂)이다. 삼정이란 전정(田政)과 군정(軍政)그리고 환정(還政)
을 말한다.
전정은 논 밭에 매기는 세금인데, 황폐해서 농사를 못짓는 땅에도 부과했다.
심지어 실제로는 토지가 없음에도 가짜로 토지장부를 만들어 세금을 부과하
는 이른바 백지징세(白紙徵稅)까지 횡행했다.
다음으로 군정의 문란이다. 군정은 장정이 직접 병역을 치르는 대신 군포를
내던 것을 말한다. 원래 양반이나 관노는 병역이 면제되는데다 국가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농민들도 세력가에 기대어 군역을 기피하기도 했다.
결국 힘없는 농민들만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유아에 대해서도 군포를 징수했는데 이를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사망자에 대해서까지 세포(稅布) 징수를 하는 수법을 부렸는데 이것을 백골징포(白骨徵布)라 한다. 세포(稅布)의 징수에 대한 책임을 진 지방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렴주구했던 것이다.
환곡은 본래 가난한 농민에게 정부의 미곡을 꾸어 주었다가 추수기에 이식(利息)을 붙여 회수하는 것으로, 빈민의 구제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고리대로 변하여 그 폐단이 삼정 가운데서 가장 심하였다.
관리가 부패함에 따라 가난한 농민은 춘궁기에 환곡을 얻기가 어려워졌고, 그에 따라 환곡의 이자가 높아져 갔다. 결국 봄에 꾸어 가을에 갚되 빌린 곡식의 절반 이상을 이자로 물게 되었다. 6개월 이율이 5할을 넘기는 때에 장리라 불렀으며, 주로 쌀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장리쌀이라는 말도 쓰였다.
지방관들은 그들대로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아전들의 부정부패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아전들은 농민들을 착취하고, 공금(公金)이나 관곡(官穀) 등을 횡령하는 등 온갖 협잡을 하였다. 중앙에서는 암행어사를 보내서 지방관들의 부정행위를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으나, 고질화 된 악습을 제거할 수는 없어 실패하였다. 이러한 학정에 못견디어 농민들은 도망가거나 유랑민이 되었다. 진주농민 봉기와 같이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백성들은 등 따뜻하고 배불리 먹으면 그것이 인생의 행복인데, 가렴주구하에서는 이러한 행복을 추구하기가 어렵다.
지금 우리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물가인상에 실질 소득은 저하되고 있다. 고환율과 고금리는 국가경제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가계에도 주름살을 가게 한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재산세 등 각종 세금의 인상은 국민들로 하여금 한숨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무릇 유능한 정부는 최소경비로 최대행복을 창출해야한다. 공평하고도 적정한 세금이 과연 어떤 것인 지를 심각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가렴주구는 봉건시대의 잔재(殘滓)이다.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마땅히 청산되어야한다(202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