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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타고 장가들고 트럭타고 시집 왔었네
내가 26세 되던 1956년 1월 24일에 정읍군 영원면 운학동의 라씨(羅氏)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다. 내 밑으로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보다 2년 전에 뉘 바꿈으로(차례를 바꾸는 일) 먼저 시집을 보낼 때부터 집안에서는 역혼(逆婚)이요 도혼(倒婚)이라며 말들이 많았었다. 나는 아직 학생임을 내세워 버티었지만 선친의 엄명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이제는 직장도 있고 봄에 졸업만 하면 되는 것이니 더이상 고집할 수가 없기도 하였다. 그 시절만 하여도 우리 집안에서 자녀들의 혼사는 당연히 부모님의 절대 권한에 속했으며 20세 전후면 만혼이라며 서둘러서 입장을 시켰으므로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형편도 아니었다. 더욱이 내가 25세 노총각(?)이고 여학교의 총각 선생이라는 것도 조심스러웠던 것 같았다. 일요일이면 말만한 여학생들이 너도나도 모산의 비좁은 산직 집 누옥으로 찾아오니 선친께서 눈살을 찌푸리곤 하여 몹시 민망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나를 미남이라며 여학교에서는 각별히 조심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었기 때문에 더 서둘렀던 것 같다.
내가 부안여중 교사로 취업이 되고나서부터는 여기저기에서 혼담이 곱절로 들어왔었다. 가난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직장이 있어 굶지는 않을 것으로 여겼던 것 같았다. 가난하다고 마다고 했던 집에서도 은근히 혼사할 뜻을 전해 왔었다고 하며 그래서 이제는 어머니께서 튕겼다고도 하였다. 읍내의 몇몇 집안에서도 청혼이 들어왔지만 부모님에게는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읍내 S씨나 K씨 고부의 E씨 집안등과 인척을 맺는 것은 행세하는 집안의 큰 수치로 여겼는데 이는 조선시대 이래로 신분 계층을 가려서 혼인하는 혼맥 풍습의 뿌리 깊은 폐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교장선생님이 교무실에 나와 앉아 있다가 몇가지 일상의 말을 내게 건넸다. 그 때 옆에 웬 손님이 앉아 있었는데 그 분이 뒷날 둘째 처남 된 라종현(羅鍾玹)이었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도둑 선을 보고 간 것이다. 라종현은 은성갑 교장의 고부초등학교 시절 제자였다고 한다. 은교장 선생님은 영원면 운학동의 라씨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어서 명문가임을 극구 말하고 운계(雲溪), 운강(雲岡) 부자분과 그 형제들이며 특히 백봉(白峰) 라용균(羅容均)과는 고부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하며 그런 혼처 쉽지 않은 자리니 행여 놓치지 말라고 권고까지 하였다. 듣기 싫은 말은 아니지만 “교장선생님! 요즈음도 누가 사람보다 가문에 장가듭니까?” 하고 웃어버렸다. 그러나 당시만 하여도 우리 집안의 혼사에서 첫째 요건은 가문으로 어떤 가문과 인척을 맺는가가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중신에 나선 분은 순천할머니라는 분이다. 이 분은 창동 우리 집안의 할머니뻘 되는 어른으로 그 남편 순천부사(順天府使) 영감이(金洛龜) 189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고산현감, 장흥군수, 순천부사를 지냈으므로 우리 집안에서는 부사영감. 또는 순천할머니라고 불렀었다. 울산김씨 집안에서 오신 분으로 여자로는 드물게 유식하여 사돈서도 잘 쓰고 전라도지방의 양반가문의 내력도 잘 알고 있으며 육갑은 물론 사주와 궁합도 잘 보는 분인데 내 어머니와는 나이 차이를 넘어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이른바 양반집 내방마님들과 교유가 잦았으므로 운학동 라씨 집안의 여인들과도 내왕이 깊었던 분이다.
이리하여 어머니께서 선을 보고 오셨다는데 “이쁘던 안히어도 여인동 허고 피부랑은 곱더라”고 하시고는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혼사는 급진적으로 추진되어 사주단자가 가고 연길(涓吉 :혼인일의 택일)이 오고하여 겨울 방학 중에 대례일(大禮日)이 잡히니 그날이 1956년 1월 24일이다. 당시만 하여도 신혼예식은 드물었으며 신혼예식의 문화는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때로 전주에 봉래원예식장이 하나 있을 뿐 부안이나 정읍에는 혼례식을 전문으로 하는 예식장이 하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신부를 맞을 방 한 칸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혼사는 치르기로 하고 신부는 한 해를 친정에 묵혔다가 신부 맞을 집을 마련한다는 아버지와 형님의 계획이고 신부 집과도 이미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미 양가의 어른들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니 따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신부를 묵힌다는 것은 혼례만 치루고 신부를 신부집에 일정기간 묵혀 두었다가 대개는 1년에서 3년 정도 후 택일하여 신행하는 옛 혼례풍습의 한 방식이다. 조선조 시절의 양반가에서는 묵히는 것이 상례였으며 아이를 낳아 서당에 다니는 5~6세 될 때까지 묵혔다가 신행을 하는 풍습도 한때는 성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집이 무슨 양반가의 흉내를 내자는 것은 아니요 당시의 우리집 형편이 어려운 처지였는데도 무리를 하며 혼사를 서둔 까닭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나는 장가갈 당사자인데도 신부의 선은 어머니가 보고 혼사의 주도권은 선친과 형님이 행사하고 나와는 한마디의 상의도 없으며 신랑노릇만 하여야 하는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어서 너무나 억울하였다. 그래서 만만한 매파 순천할머니더러 “신부될 아가씨 눈코가 이마에 붙었는지 턱에 붙었는지도 모르고 장가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하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겁이 많은 그 할머니가 말뜻을 알아차리고 어떻게 은밀하게 주선을 하여 둘째 처남 라종현의 집에서 차 한 잔 나누는 형식으로 얼굴이나마 보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운학동에 간 나는 라씨 집안의 여인들이 방안에 가득한 가운데 오빠 되는 분의 안내로 신부될 처녀와 마주 앉게 되니 숫기 없는 나는 말 한 마디 자유롭게 건넬 수도 뱃장 있게 신부를 요모조모로 뜯어볼 수도 없어 오히려 내가 선을 보이러 간 꼴이 되어버렸다. 아무튼지 그렇게라도 보기는 본 셈인데 차라리 안본 것만 못했다. 내가 마음 속으로 상상한 여인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가씨가 다담상을 들고 들어와 조용히 앉는데 얼른 보니까 눈이 약간 짝눈인 것 같고 목은 짧은 자라목인데 어머니 말씀대로 피부색만 뽀얀하였으나 내 눈에는 여인동(女人同 :보통의 여자란 뜻)에도 미치지 못하는 함량 미달의 겨우 면추나 한 여인 같았다.
사실 그 때 나는 상당히 고민스러웠다. 최소한의 내 기준치에도
결혼 당시의 김형주 부부
크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얼굴 예쁜 여인 얼굴값 한다”는 속담도 있고 “얼굴 예쁜 마누라 얻어서 술집 할래!” 하기도 하지만 얼굴 반반하고 몸매 날씬한 여인 바라지 않는 남자가 있으랴. 내가 마음 속으로 그리던 여인상이 아니어서 실망이요 마음이 떨떠름하였으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이것이 연분이요 팔자인가 보다 싶어 부모님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좀 심하게 말하여 “미인 퇴박은 있어도 박색 퇴박은 없다”는 속담이 맞는가 보다고 하였다. 이제 와서 파약하기에는 양가에서 진행하여 온 혼사의 일이 너무 깊게 진행되어 온 것도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부로 결합된 것은 요즈음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바탕이 되어 단순하고 경박하게 맺어지는 결합과는 거리가 먼 고색이 케케한 가문의 무게에 부모님들의 뜻이 바탕을 이루고 의무와 처신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부부인 셈인데 그래서일까 항시 주변을 의식하고 배려하면서 무게 있는 노력으로 평생을 무난하게 살아왔다.
혼인날 아침은 간밤 새벽에 발자국 눈이 살포시 내려 순백의 비단이 산하를 아름답게 덮었고 김형주 장가드는 날의 아침 햇살은 은세계에 찬란히 빛났었다. 신기근 교감이 버스 한 대를 내주어서 아버지와 형님을 모시고 초등하교 5학년인 막내 동생 형부와 함을 짊어진 중방(함진애비) 구홍복씨, 부안의 친구들 수 명과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 몇 명이 탔으며 전날 이리에서 온 대학의 친구들 10여 명도 분토동 재실에서 자고 합류하였다. 나는 한복으로 신랑의 위의를 갖추고는 버스 한 대에 모두 타고 라씨 집안으로 장가 길을 떠났다. 그 당시의 혼인식에 신랑의 친구들이 이렇게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폐습이 한동안 유행처럼 번져 있었는데 이와같은 폐습은 1960년대 이후부터 시나브로 없어졌다.
운학동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라씨 집안에서 나온 몇 사람이 마중하는데 어떤 젊은 분이 나서며 다소 빳빳하고 거만하게 반말로 “신랑이 누군가?” 한다. 내가 앞으로 나서며 “내가 신랑 될 사람이네!” 하였더니 그 분이 말을 못하고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
장인 학촌공 라팔균
몹시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마땅히 “어서 오십시요. 오시느라고 수고들 하셨소. 나는 신부의 4촌 오빠 되는 사람이요! 신랑 될 분이 뉘신가요?” 했어야 예의에 맞다. 나는 아직 대례를 행하지 않았으니 남이요 손님이다. 그런데 두루마기 소매 속에다 두 손을 찌르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서서 “신랑이 누군가?” 하니 이런 무례한 사람이 있나 싶기도 하고 도도하고 거만한 부잣집 라씨들 콧대가 아니꼽기도 하여 나도 조금 드세게 “내가 기네!” 한 것이다. 그는 그날의 신랑 접대를 맡은 대반으로 신부의 4촌 오빠인 라종태(羅鍾兌)였다. 나중에 이 첫 대거리의 기 싸움 문제가 화제가 되었는데 내가 조목조목 따져 그 결례를 말하니 라씨들이 모두 잘못된 일이라며 기가 꺾이어 이후부터는 나를 가볍게 대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대례를 행하기 전 사랑채 주점방은 상객과 신랑의 대기소이기도 하지만 양가의 혼주와 어른들이 서로 인사도 나누고 대례를 준비하는 동안 잠시 다과를 나누며 담소하는 곳이다. 우리 큰 외숙께서(靜軒 :林鍾元) 이미 주점방에 와 계셨다. 큰 외숙은 이때 고부 입석리에서 한약방을 하셨으며 라씨들의 큰 어른이요 오늘의 혼주인 운강공(雲岡公) 라홍균(羅鴻均) 처 백부와는 오랜 친구요 주치의여서 부친께서 현장으로 바로 오시라고 한 것이다. 운강공은 운계공(雲溪公. 士一)의 큰 아들로 인물이 출중하고 문필이 장한 분으로 위당(爲堂 :鄭寅普)과도 교유가 깊었다. 장인인 학촌공(鶴村公) 라팔균(羅八均)은 5년 전 6·25 때 이미 작고하였다. 이때 처 계부 정암공(正菴公 :羅宰均)과 처 고숙 김철중(金徹中)씨도 자리를 함께 하였는데 정암공이 나를 보더니 “신랑이 준수하구나. 우리 정애는 이뿌지 않은데!” 하셨다. 내가 속으로 인품이 청아하게 생긴 이 분이 누구일까? 하고 궁금했는데 내 장인의 바로 아래 동생 되는 처 계부며 라종한(羅鍾漢) 형의 부친이었다. 이 분은 1928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 활동하다 옥고를 치룬 항일지사요 좌경적인 분인데 후에 내가 찾아뵈올 때마다 매양 귀여워 하시었고 나와 담론하기를 좋아하였다.
대례는 신부 집 너른 마당에 두 대받이 큰 차일을 치고 양가의 어른과 친척, 친구들이 가득한 가운데 처 고숙인 김용태(金容泰)씨가 홀기를 읽으며 전통적인 유교의식으로 행하였다. 혼례의식이 끝난 후 그 자리에 신랑 신부를 나란히 세우고는 축사와 축문 등을 낭독하였는데 당시에는 이같은 변형된 혼인풍습이 한동안 유행했으니 과도기적인 신구의식의 습합된 혼례의식이다. 신기근 교감에 이어 친구들 몇이 축사를 읽었고 학생대표로 3학년 김종란이(김방희씨의 큰딸) 축사를 읽었으며 친구들이 조작하여 만들어 온 축전, 축문 등을 사회자가 읽어 한바탕 허장성세를 부렸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부측에서 인사말을 했는데 귀골형으로 생긴 4촌 처남 라종한(羅鍾漢)이 했다. 그는 나와는 동갑이어서 이후 평생을 지기(知己)의 벗으로 서로를 존중하면서 지내오고 있다.
이날 혼인잔치에서 과하게 술을 드신 박종용 선생이 약간의 주사를 부렸는데 몸을 가누지도 못하게 마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거 다 머야! 만석꾼 라사일이네! 이게 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우리 김형주 선생! 절대로 기죽지 마라!”는 등 동내 고샅에서 소리를 질러대니 구경하던 어떤 분이 “저 분도 라사일씨네 혹독한 도조에 원한이 깊었었나 보구먼!” 하더라고 하였다. 이에 신기근 교감이 매우 난감하고 민망해 했는데 그 후 학교에 돌아와 박선생에게 금주령을 내렸다고 하였으며 후에 박선생은 내게 거듭하여 사과하였으나 그날 그 주사는 오히려 혼례잔치의 애교였다.
그 후로도 박선생의 주사는 심심치 않게 있었다. 어느 때던가 박선생이 술이 만취하여 밤에 교장 사택을 찾아가 사모님과 따님들이 있는 안방에서 교장선생님과 대담 중 거침없이 옷을 내리고 방바닥에 오줌을 철철 싸 큰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사람 좋은 교장선생님은 너그럽게 이해하여 주었다. 평소에 말수가 적고 조신하신 분으로 매우 겸손하고 점잖은 분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후에 박선생은 해성고등학교를 거쳐 전주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정년할 때까지 나와는 우의의 정을 나누며 지냈다. 대례의식이 끝난 직후에 영산포 사는 윗동서 이사형(李社炯) 내외분이 도착하였는데 36세로 당시는 전라남도 도의원이라고 하였다.
나는 부안의 우리 식구와 친구들이 모두 떠난 뒤 나만 남아 이른바 <앉은 재행>을 하였으니 옛 혼인 풍습에 있는 것은 다 해보는 셈이다. 신부를 친정에 묵히기 때문에 새삼 재행인사를 올 것 없이 그대로 몇 날을 계속 처가에 있다가 신랑만 돌아가는 것을 <앉은 재행>이라고 했다. 앉은 재행 중에 내가 의도적으로 술을 과하게 마시어 장모님을 울린 작은 사고가 있어서 이 또한 두고두고 이야기 거리였다.
운강공 라홍균께서 필자의 선친에게 보낸 편지
이른바 신랑 다루기의 통과의례(東床禮) 때에 내가 일부러 술을 많이 마셔 쓰러져버린 것이다. 대취하여 방 네 구석을 인사불성으로 헤매니까 장모님이 놀래서 우리 사위 죽는다고 울면서 밤중에 사람을 정읍의 병원으로 보내는 등의 소동이 일어났었다 하는데 한바탕 소동 후 결국은 시원한 동치미국물에 살아났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랑을 다루기 위하여 방안 가득히 모였던 처족들이 모두 가버렸다.
이일로 하여 그 후 나는 처가에 가면 술을 못하는 사람으로 아예 술상이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가와서 장모를 울린 못된(?) 사위 녀석이 된 것이다. 이는 신기근 교감이 혼례식에 참석했다가 가면서 내게 발바닥 안 맞는 비법으로 술을 먹고 곤드레만드레 되어버리라고 은밀히 가르쳐 준 묘책인데 내가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착실하게 실천한 데서 생긴 소동이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술을 많이 못하는 편이다.
나는 이해 3월 26일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농학부 농업경제과를 졸업하였다. 참으로 무리한 입학이요 어렵게 학교를 다녔으며 당시로는 운좋은 취업이었다. 졸업도 했고 마침 학년 말 방학이어서 친정에 묵혀둔 아내와 신혼여행 겸하여 기차를 타고 영산포 동서 집에 갔었다. 당시만 하여도 일부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 외엔 신혼여행은 꿈도 못꾸던 시절이었다.
영산포역에서 내리면 강을 건너기 전 역전에 동서 집이 있었는데 정부양곡의 지정도정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부유한 집이었고 과수원과 극장과 주조장 외에도 많은 전답 등을 소유하고 있는 토박이 부호로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지였다. 큰 딸 경녀(京余)는 여중 2학년이고, 개만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며, 은경이는 떡애기인데 경녀와 경순이가 “우리 이모부! 우리 이모부!” 하며 졸졸 따라다녔었다. 동서는 도의회가 개회 중이어서 바빴는데도 나와 함께 하려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이때 영산포를 다녀 온 3일간의 여행이 우리 부부에겐 추억에 남는 즐거운 신혼여행이 된 셈이다.
그리고 그 해 늦은 봄부터 나는 신부를 맞아들일 집을 큰집 옆 채마밭에 짓기 시작하였다. 말이 집이지 방 한 칸에 부엌 하나인 오두막집인데 목재값이 금값이었던 당시 먹고 살기도 힘이 드는 형편에 내 월급으로 얼기설기 겨우 집이라고 지어 늦은 가을 어느 날 아내가 3·7일을 겨우 넘긴 민철이를 안고 트럭타고 신행하여 왔다. 내가 버스타고 장가드니 아내는 구색을 맞추느라고 부와 복을 상징하는 돼지새끼 한마리를 보듬고 트럭 타고 시집을 오니 피장파장인 셈인가 하였으나 후에 들으니 신행날이 다가오니 주변머리도 요량도 없는 큰처남이 어디로 숨어버리고 신행날 아침까지도 나타나지 않아서 장모님이 애를 태웠다고 하며 기다리다 못하여 졸지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나 아무튼지 기대에 부풀어 구경나온 마을 사람들 앞에 만석꾼의 손녀딸 신행모습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