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업으로 일어선 석화리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석화리 새마을지도자 하 상 돈
성공내용
미호천 범람으로 인한 수해와 흉작이 계속되고 있었던 영세한 부락이 지도자 하상돈 씨를 중심으로 한 제대군인으로 조직된 "상조회"의 상전개발운동에 의하여 62년에는 5정보의 개간과 63년에는 3만주의 식상 그리고 67년에는 15만주의 식상을 하여 정성된 비배관리를 통하여 연간 소잠량 300여 상자의 실적을 올렸으며 잠업시설의 증설 등으로 현재 86호의 농가 중 74%인 64호가 양잠 농가를 이루어 잘사는 부락으로 발전 했다.
마을현황
○ 가 구 수 : 90호(농가 86, 비농가 4)
○ 인 구 : 513명(남 272, 여 241)
○ 경지면적 : 호당평균 1.2ha
벽해상전의 푸른 꿈을 키우고
뽕나무 밭으로 둘러 싸여 벽해상전을 이루고 오늘도 푸른 꿈속에 알차게 풍요를 심는 새마을 석화리가 있다.
뒷산 여들 벌판에 너울진 뽕잎은 보기에도 소담스럽거니와 오렌지 빛, 연두색 지붕으로 경관을 조화하고 번듯하게 세워진 치참 공동사육장을 향하여 확 트인 직선농로, 쭉쭉 뻗은 마을길을 따라 옹기종기 들어선 잠업 마을 석화리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우리나라 전 농촌이 모두 이만큼만 가꾸어 졌으면 할 정도로 현저하게 앞서고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이 마을 뒷산 줄기를 돌아 유유히 흐르는 미호천, 홍수기마다 수침의 상처를 입고 한숨만 짓던 이들에게 자연을 방관하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다듬고 가꾸어 살기 좋은 터전을 닦도록 시련을 주느라 그리 홍수가 잦았는지도 모른다.
석화라는 일명 "돌꽃"이라 부르고 청주에서 조치원 쪽 국도변 12km지점, 우측 야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충북선 열차가 동리 앞을 지나간다. 10개 성상을 "잠업증산"이란 슬로건을 산허리에 아로 새겨 놓고 밤낮 가림 없이 전 주민이 땀 흘려 개척하여 놓은 저습지에 상전은 방수제도 되었고 나무뿌리를 캐내어 일구고 정지한 오늘의 푸른 상전은 이 마을의 보고로써 농가 소득증대는 물론 외화 획득에 기여하고 있는 잠견생산의 밑천이 되고 있다.
일찍이 이 마을에는 소득과 직결되는 새마을운동이 내실화를 기하였고, 선진국에 눈을 돌려 낙향한 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아래 잠업으로 일어난 마을이다.
수해와 흉작을 연례행사처럼 하던 석화리
이 마을이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갖은 사연이 많았다. 미호천의 범람으로 수해와 흉작이 계속되어 왜정 말에는 일본, 만주등지로 정든 고향을 떠나는 이농가가 50여 가구나 속출 하였던 것이니 집 주인을 잃은 초가지붕에 망초가 우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과 더불어 고향을 찾아온 마을주민들은 스스로의 살길을 찾지 못하고 퇴폐풍조에 휩쓸려 나태하였고, 부락발전에 저해요인이 되는 씨족간의 고루한 반목만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거기다 음주, 도박, 낭비의 폐습으로 매년 부채는 누적되어 당시 81가구 중 요 구호 대상자 23가구와, 대여 양곡으로 연명하는 농가만도 45가구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을이 협동이 될 리 없고 자조정신이 깃들 리 만무하였다. 남의 도움만을 의지하며 침수 지역에 살게 된 자신들의 불우한 숙명만을 자탄하며 조상들을 원망할 뿐 수마가 할퀴고 간 앞들을 바라보며 한숨만 짓곤 하였다.
의지에 찬 지도자
이토록 가난과 무지로 낙후된 석화리 마을에 나는 21년간 객지생활을 하다 돌아왔다. 나는 16대의 선조가 묻혀있고 자신의 잔뼈가 굵어진 고향이 이토록 퇴폐하여진 원인을 살피기에 서울에 두고 온 가족들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향리 개발에 몸 바쳐 일하여 보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무지하여 현실을 허송하는 석화리에서 앞장서 일하기로 한 나는 농촌에서 농민들이 할 수 있는 잠업부터 시작하여 문화농촌을 건설해 보겠다는 신념으로 마을의 미래상을 설계하고 협동체제 강화책을 마련하였다.
첫째, 미호천 연안 침수 지역에 상전조성
둘째, 제대군인을 중심으로 한 청년 상조회 조직
셋째, 정신개발과 주민 공동의식 제고를 위한 마을회관 전립
넷째, 야산 개간으로 상전확장
다섯째, 농가 지붕 개량사업으로 간접소득을 올리기로 하고
마을주민의 의견을 모우는 한편, 청년 상조회 활동지표를
1) 마을 협동 단결의 모체가 되자.
2) 마을 건설 사업의 전위대가 되자.
3) 봉사 활동에 솔선수범하자로 정하고 나는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우리 선산이 있는 뒷산 5정보를 개간하였다. 집안 노인들의 책망과 원성을 들었지만 내일의 우리 자손들이 잘 살 수 있는 터전을 닦는 일이라고 오히려 괭이에 힘을 주고 굴하지 않았다.
이토록 마련한 개간지에 상묘를 못 받아 식상을 하지 못하고 콩을 심게 되었을 때 아픈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추수라고 한 것이 콩 5가마로 종자 값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에 굴함이 없이 누에를 쳐서 시범을 보이기로 결심하고 상묘업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양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상전을 조성한 마을 안 독농 양잠가 청년 6명의 도움을 받아 잠종 20상자를 소잠하였다.
당시 강내면내의 연간 소잠 량이 18상자였던 터라 마을 주민들은 의아 해 했다. 양잠에 대한 체험도 없고 시설도 없는 나의 소잠은 너무도 모험적이어서 갖은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한 칸 방에서 누에가 한잠을 자고나니 잠박 수는 걷잡을 수 없이 늘기 시작했다.
이때 뽕잎을 미처 대지 못하여 아주머니들에게 통사정을 하여 도움을 받았고 자라나는 잠박을 들고 이집 저집 옷 방을 찾아 헤매다 원두막 같이 간이 잠실을 짓고 여기에서 누에를 쳤다.
허술한 잠실에는 쥐가 들어 피해를 주고 개구리마저 뛰어들어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굳건한 집념에 감동된 청년상조회는 자기 일을 제폐하고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 이에 힘입어 다행히 누에치기에 성공을 하였다.
총수입액 75,000원으로 상자 당 6,000원의 수입이었지만 당시 송아지 한마리가 4~5천원 했으니깐 뽕 값, 간이잠실 건축비, 인건비등 45,000원을 제하더라도 순수익 30,000원을 한 달 만에 벌었으니 송아지 6마리 값을 번 셈이었다.
이러한 순 소득을 본 마을주민이 이때서야 잠업만이 우리가 해야 할 농사라고 의욕을 갖게 되었다.
잠업 붐 조성
해는 바뀌어 63년 춘기식상으로 들어갔다. 상전조성에 마을 주민 반수이상이 열을 올려 30,000여주를 식상케 되었다. 청년상조회에서는 상전 비배관리에 정성을 다하였고 들판에 나가기를 꺼려하던 아낙네들도 뽕밭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뽕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나 7~8척이 되었다.
아래 방을 빌려 소잠한 수입이 연년이 늘어나 누적되었던 빚도 갚고 지개 목발이나 두들기던 아이들도 진학의 길을 찾게 되었다.
오랫동안 비난 받기만 했던 석화리가 누에고치 지어지듯 굴레를 벗어나기 시작할 때 이듬해 64년에는 이 마을이 양잠특설지구로 지정되었으며 66년에 이르자 대통령각하께서 이곳을 친히 찾아주셨고 또한 각하께서는 인근 야산을 개발하여 상전조성 잠업 주산지를 조성하라는 분부가 계셨다.
이에 67년 농특사업 잠업 청원지구로 지정 석화리를 중심으로 각 인근 마을마다 식상계가 조직되었으며 상전조성 농가는 매년 격증 일로에 있어 50여 정보의 논과 밭, 산지에까지 일대 상전 붐으로 번져갔다.
67년 추기 식상만도 15만주가 넘었으며 연간 소잠 량 300여 상장 이상으로서 주민들의 자율성과 의욕적인 영농의 개혁을 유발시켰다. 이 마을 주민들은 협업영농에서 공동의식을 익혔고 또한 공동 소유의 애착심이 발로되어 계층별 조직체를 통해 부락 공동기금조성에 힘을 기울였던바 2년 동안에 마을회관 건립기금과 치잠공동사육장(온상식 잠실) 건립을 추진케 되었다.
상조회원 들은 공동작업으로 마련한 26,000원의 기금으로 앰프와 전선을 구입하여 각 가정에 스피카를 설치, 마을이 하여야할 매일의 상황 통지와 서로의 뜻을 모우는 길을 찾았다. 또한 상전 비배 관리에 역점을 두고 지붕개량을 실시 180여동의 전지붕이 완전 개량 되었다.
여기서 얻어진 볏짚은 퇴비, 연료, 축산사료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소득증대에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67년도의 호당소득은 전국평균 15만원에 비하여 12%가 높은 169,000원이 되었으며 이것은 61년의 전국 평균 호당 69,000원에 비하여 오히려 14%가 낮은 59,000원의 소득을 올리던 때와 거꾸로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석화리의 호당소득은 67년도의 169,000원에서 70년에 350,000원으로 207%가 늘어나 전국 평균보다 37%나 높아졌다.
협동으로 새마을 사업
석화리는 생산소득사업에서 환경개선사업으로 새마을사업을 실시하였다.
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 나무 섶이나 수수대로 둘러싸인 울타리를 시멘트 블록 담장으로 아담하게 가꾸었으며, 지원 시멘트 335대를 받아 교량 1개소를 설치하는 한편 액비통 50개소를 만들어 메탄가스시설을 하여 연료대책과 일손이 바쁜 부녀자들의 노력 절감에 큰 도움을 주었다.
석화리는 환경개선 사업설계를 조밀하게 짰다. 자연부락 3개 마을에 골고루 사업이 이루어지도록 계획을 하고, 우선순위를 엄격히 구별하여 사업을 착수키로 하고 자체적으로 규약을 정하고 "200일 새마을 작전"을 개시하고 엄동설한 겨울철에 뒷산 너머로 가는 500m의 상전 농로를 뚫기 시작하였다. 이장은 새벽 6시에 주민소집과 당일 하여야 할 일을 앰프를 통해 통지하였고 용지타협에 부심하였다. 협동된 마을주민이라 시간관념에 투철하고 맡은바 작업분담을 완수하는 능률을 올렸다.
아껴오던 뽕나무도 농로를 내는 데에 일부 뽑아졌으며 딴 마을주민과의 토지 문제도 진실 된 협조심으로 해결되었다. 20여일의 땀 흘린 보람으로 500m 농로가 말끔히 닦아졌다. 농로사업 완결을 본 마을 주민들은 자신을 갖고 새마을 사업을 시작하였다. 마을에 보유한 리어카, 우마차가 총 동원 되고 남녀노소 전 주민이 참여하여 꼬부라진 마을안길 넓히기, 하수구설치, 담장개수 등 4개월 만에 깨끗이 탈바꿈하였다. 집안 가꾸기도 공동작업으로 변소개량, 부엌개량도 실시하여 보건 위생 관념도 고취하였다. 이렇게 하여 석화리는 깨끗하고 알찬 마을이 되었다.
오늘도 뽕밭 속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은, 잠업으로 일어서 부자 마을로 살찌우고 살기 좋은 마을로 키워가는 굳건한 의지가 역력히 보여지고 있다. 연 참여 인원 3,400여명이 72년 11월부터 7개월에 걸쳐 놀라우리만큼 가꾸어 놓은 석화리는 새마을운동의 영속화와 내실화를 기하기 위하여 새마을 농사대를 조직하고 새마을 청소년소녀회를 조직하여 영농의 공동작업과 조기청소, 오물 줍기 운동을 생활화하고 있다.
석화리 주민들은 "전원도시형 이상농촌건설"이라는 지표를 내걸고 잠업증산, 축산장려, 식량증산, 치산녹화, 생활개선 등 갖가지 사업에 자진 참여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
협동 자립정신에서 개미나 꿀벌처럼 묵묵히 일하여 시범마을이 된 석화리는 전원도시형 이상농촌으로 건설하는 목표로 74년까지 공동기금을 200만원 조성하여
1) 대규모 잠실 2동(400평)을 건축하여 양잠의 협업화를 도모하고자 하며
2) 전천후 수리시설과 마을 안 농경지 3ha를 정리하고
3) 양잠 부산물을 이용한 잠분 가공공장 건설로 농외소득 증대와
4) 기계화 영농으로 노동력을 절감할 것이며
5) 농촌문화 복지시설(상하수도, 전화가설)등을 완비하고, 80년대의 농가소득 목표를 76년도로 앞당겨 달성하고자 조상육 공동치잠 기술습득에 전력할 계획이며 생활환경의 개선으로 마을모습의 근대화를 기하여 잘사는 석화리를 이룩할 계획이다.
자료출처 : 새마을운동 시작에서 오늘까지(내무부)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