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백제유적지와 무량사를 다녀와서!
연꽃 구경(賞蓮)
곽예(郭預,1232-1286)
賞蓮三度到三池(상련삼도도삼지) 세 번이나 연꽃 보러 삼지를 찾으니
翠蓋紅粧似舊時(취개홍장사구시) 푸른 잎 붉은 꽃은 예전과 다름없네.
唯有看花玉堂客(유유간화옥당객) 오직 꽃을 바라보는 옥당의 손님만이
風情不減檳如絲(풍정불감빈여사) 마음은 그대론데 머리털만 희어졌구려.
<지은이 소개>
곽예는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 초명은 왕부(王府). 자는 선갑(先甲).
1255년(고종 42)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되었지요.
원나라에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돌아오던 도중에 55세로 죽었지요.
문장 잘 짓고 서법(書法)에도 능해 독특한 서체를 이루었다합니다.
부여 궁남지(宮南池)
궁궐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어서 ‘궁남지’라고 부르는데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해마다 궁남지 주위에 조성한 연꽃 밭의 연꽃들이 활짝 피는
여름(보통 7월 중순~8월 초)에는 부여군에서 연꽃 축제를 연다.
궁남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인공조원 중에서 최초의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
에는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 리나 되는 긴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으
며 연못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가운데는 방장선산(方杖仙山, 도교에서 신선
이 노는 산을 일컫는 말)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당시의 수로나
연못의 형태, 그리고 연못 속의 섬의 모습들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궁남지의 조경
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궁남지에는 백제 무왕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궁남지 옆에 살던
무왕의 어머니가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
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결혼한 서동이고 후에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왕이 천도를 계획했던 전라북도 익산의
마룡지에도 똑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현재 궁남지에 있는 포룡정이라는 정자와 정자를 연결하는 다리는 1971년에 만든
것이다. 궁남지는 사적 제135호이다.
부여읍내에는 백제에 관한 볼거리가 많다. 부소산성, 백제왕릉원, 정림사터, 백마강,
부여박물관, 백제역사 재현단지 등과 연계하여 둘러볼 수 있다.
(대한민국 여행사전, 2009. 3. 20., 터치아트)
부여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부소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개설
사적 제5호. 부소산성은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으며,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둘레는 2,200m이고, 지정 면적은 98만3900㎡이다.
내용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성은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
다. 성내에는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
·낙화암(落花巖)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
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
’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1978년 금강상수도사업 공사로 인하여 성벽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성벽 내부는
잡석으로 적심석(積心石)을 넣었음이 확인되었고,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목책지
(木柵址)와 수혈식(竪穴式)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을 위한
기초조사에서 4층의 토층단면이 확인되었다. 1982년부터 부소산성 일대를 충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
(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
(北舍)라는 명문이 출토되었다.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부소산성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호(壕)를 만든 한편
, 그 파낸 흙을 내벽에 보축(補築)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基盤土)를
마치 판축(板築)하듯이 황색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놓았고,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
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
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 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창지와 영일루가 있는 부근의 표고는
전면 70m, 후면 90m의 등고선을 따라 둘레 1,500m의 성벽을
거의 토축(土築)으로 축조하였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 때 토성의 단면을 자른 결과 대개 아래로부터 A·B·C·D의
4층을 확인하였다. 맨 아래층인 A층은 붉은색의 진흙으로 판축하여 하부를 축조
하였는데, 토층의 높이는 1.9m이며, 토루 바깥면에는 토루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4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 B층은 황갈색토층으로 북반부는 A층 위에 퇴적
되었고, 남반부는 A층과 같이 아래서부터 쌓아올렸는데, 이는 A층을 고쳐쌓기
위해 B층이 축조되었음을 알려주며, 생토층으로부터 B층까지의 높이는 3.2m
이다. 이곳에서는 연질의 백제시대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C층은 황갈색사질토
로 판축기법을 사용하여 두께 3∼6㎝로 축조되었는데, B층의 바깥쪽 경사면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석재는 6합식(合式) 5단으로 쌓여
있는데 높이는 103㎝로 이 층에서도 B층과 같이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맨 위층인 D층은 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부소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축·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이용편년을 증명하는 것으로 판단
된다. 전체성벽의 높이는 내면의 높이가 7.6m, 외면 높이가 3.4m, 너비는
8.6m이다. 한편,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의 사비루 부근의
산봉우리 중심으로 약 700m의 테뫼형 산성이 있는데, 크기가 50×50㎝,
70×60㎝ 되는 백제시대 초석이 많이 흩어져 있다.이 산성은 위의 두 산성이
연결되어 백제시대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양식을 하고 있다. 성안에는 동·서·
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대형철제 자물쇠가 발견되어
문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으며, 남문지에는 아직도 문주(門柱)를 받쳤던
초석 2개가 동서로 나란히 있다.
의의와 평가
백제의 왕궁으로서 사비시대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로서 부소산성의 성격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부소산성의 성안에 군창지와 건물지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나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는 비원으로서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부소산성은 사비천도 이후 백제멸망
시까지 국도의 중심산성으로, 인근의 청산성(靑山城)·청마산성
(靑馬山城) 등의 보조산성 등과 함께 왕도 방어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문화재대관』(충청남도, 1985)
『문화재대관』사적편(문화재관리국, 1976)
「부여부소산성의 고고학적 조사현황과 분석」(여홍기, 『박물관지』7, 1998)
「부소산성의 성벽축조기법 및 변천에 대한 고찰」(김용민, 『한국상고사학보』26, 1997)
「백제사비도성연구」(성주탁, 『백제연구』13,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82)
「백제사비성연구」(홍재선, 동국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2)
「백제성지연구」(홍사준, 『백제연구』2,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7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
개설
사적 제301호.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
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석탑이
지만, 초층 하부에 있는 소정방(蘇定方)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 즉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새긴 글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렸다
. 그러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조사하여 가람(伽藍)의 규모와 배치, 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이 드러났으며, 다수의 소조인물상편(塑造人物像片)과 백제시대·
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 및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三足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2008년∼2010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사역(寺域) 전체를 다시 발굴하여
기존의 조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회랑 북단의 동서승방지와
강당지 뒤편의 북승방지를 확인하였다
의의와 평가
백제 사비시기의 대표적인 사찰 터인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의 가람배치와
건물기단·기초, 석탑 조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부여 정림사지 발굴조사보고서』(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정림사』(윤무병, 충남대학교박물관, 1981)
「부여 정림사지 출토 소조상의 제작기법과 봉안장소」
(이병호, 『미술자료』 72ㆍ73, 국립중앙박물관, 2005)문화재청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무량사(無量寺)
신라시대에 창건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重修)하였으나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주위의 산림(山林)이 울창하여 거찰(巨刹)의 면목을 유지하고 있는데,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드물게 보는 2층 불전(佛殿)으로 내부는 상
·하층의 구분이 없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서, 당시의 목조 건축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극락전 내에는 거대한 좌불(坐佛)이 안치되었는데
중앙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좌고(坐高)가 16자, 가슴둘레 24자이며 좌우의
관세음(觀世音)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각 좌고가 16자에 가슴둘레가
18자이다. 또한 여기에는 석가불화(釋迦佛畵)가 있는데 길이 45자 8치, 폭이
25자 2치나 되는 조선 인조 때의 불화로 기구(機構)가 장대(壯大)하며 묘법
(描法)도 뛰어나고 채색도 선명하다.
이 밖에도 경내에는 보물 제185호로 지정된 5층석탑, 보물 제233호인 석등,
지방문화재인 당간지주(幢竿支柱), 김시습 부도(金時習浮屠) 등이 있다.
이 절은 또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있다가 죽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반월정(半月亭)에서 바라본 부여읍 전경
백마강 (1970)
앨범 : 대힛트송 제3집 추억의 노래
대한음반 (LD-209) / 1970. 08. 08.
손로원:작사
한복남:작곡
허 민:노래
1.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고나
아 ~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2.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맺혀 울면
계백장군 삼척검은 님사랑도 끊었구나
아 ~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2018-07-26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