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살자 (33)
제 2 하사관 학교
따블빽을 매고 우리가 기거할 2층 신축 막사 앞 연병장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향도(내무반장 겸 조교) 앞에서 4열 횡대로 집합을 하고 임시 선임자가 인원 보고를 했고 우리는 그 날카롭게 생긴 우리들의 향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따블빽을 입으로 문다 실시" 그 명령대로 우리는 우리들의 따블빽을 입에 물었다.
"저 앞에 보이는 농구 꼴대를 우에서 좌로 선착순 다섯 명 출발"
그 무거운 따블빽을 입에 물고 우리는 무게에 고개를 재대로 들지도 못하고 달렸다.
과연 하사관 학교의 군기는 무섭긴 무서웠다.
다섯 명, 또 다섯 명 이런 식으로 우리 36명은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다시 "엎드려 뻣쳐 풋샾 이십 회 실시를 한다, 하나에 정신 둘에 통일 실시." 아~ 무섭고도 싫었다, 그리고 어떻게 여기서 훈련을 받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한참을 시달린 후에 우리는 내무반에 들어 갈 수 있었고 자리를 정한 후에 관물(군인들의 옷)을 두부를 칼로 자르듯 정리를 하고 밥을 먹은 후에 내무반장이 우리들에게 나누어준 신상 명세서를 작성하여 제출한 후에 우리는 각자에게 지급된 총을 닦기 시작했다.
그동안 한 명씩 향도에게 불려가 개인 면담을 했는데 나는 중간쯤 내 앞에서 면담을 한 전우가 나를 향도 실로 가보라고 해서 나는 향도 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하게 생긴 향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볼 수 있었다.
얼굴에는 장난 끼가 섞여 있었고 낮에 보다는 목소리가 착 갈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자네 신상 명세서를 한번 엮어봐."
"저는 1951년 O 월 X일 경북 영덕군 영덕 면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 부산으로 이사를 했으며 다시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를 하여 국민학교 5학년까지 거기에서 살다가 다시 남양주 덕소로 이사를 하여 시온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를 했으며 지금은 향도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 향도는 목소리를 더 깔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요즈음 그 사람(박 장로)이 무슨 설교를 하시는가?" 나는 이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면 혹시 전도관에 다니십니까?" "그렇다네 나는 부산에서 전도관엘 다녔으며 우리누나는 덕소 xx공장에 다니고 있는데 기장으로 공장이 옮긴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후 소식은 아직 모르고 있다네."
아~~신앙촌, 전도관, 나는 너무 감격하고 말았다 .그리고 너무 고마웠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됐어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까 앞으로 자네와 이야기 할 시간을 많이 만들어 보겠네, 그리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찾아오게 그리고 참 진리는 항상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그 신앙을 계속 유지하게나, 그러면 나가 보게.":
향도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 어려운 훈련도 그렇게 힘들지가 않았다.
우리는 보통 사열 종대로 이동을 했으며 훈련도 그렇게 받았고 또는 사열 횡대로도 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우리들이 줄을 서는 자리는 정해져 있었어 다른 누구도 그 자리에는 설수 없었으며 바로 내 앞줄에 서면서 잠자리도 나와 같이 하는 류 광현이라는 전우가 있었는데 이 전우는 서울 대학 법대를 다니다 입대를 한 전우였으며 지식이 많고 또한 사람 좋은 전우였다.
하사관 학교에서 8주간 보병 하사 교육을 받고 16 주간은 특과 학교에 가서 자신들의 병과를 공부하는 우리들은 기술 행정 하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도 덕소 신앙촌에서 경비로 있던 사람을 만났으며 우리가 4주째 교육을 받고 있을 때 나와는 동창생이었던 김 기성이라는 친구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8주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시 특과 학교를 가기 일주일 전 우리는 야간 행군을 하여 유격 훈련을 받을 장소로 이동을 해야만 했다.
우리 동기들 중에는 하사관을 지원한 전우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우리들 보다 나이가 2~3세 정도는 어린 전우들이었으며 행군 도중에 우는 전우들도 많이 있었으며 아직도 부모님 생각을 하면서 우는 전우들도 많이 있었다.
특히 아침 기상을 하고 목청껏 구령을 한번하고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고향에 대한 묵념을 할 때는 여기 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유격 훈련을 받으며 훈련 때의 땀 한방울은 실전에서의 피 힌 방울과 같다는 일념으로 착실히 훈련에 임했다.
한 여름에는 훈련소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맨발에 우리에게 지급된 반바지 하나만 입고 교육장 내에나 취사장을 그렇게 다녔다.
우리는 가끔 내무 검열을 받았는데 이 때는 우리 중대 내무반장이 아닌 다른 중대에서 내무 검열을 취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쉽게 넘어 가는 법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지적 사항이 생기면 그 날은 죽지 않을 만큼 기합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밤이 9시가 넘은 시간에 우리 향도는 밖에서 그 당시에 그렇게 유행했던 "머나먼 고향" 제목은 생각이 나질 않지만 멀리도 가까이도 아닌 저만큼에서.... 이 노래를 구슬프게 하모니카로 부르면 우리는 저절로 눈에 눈물이 맺히곤 했다.
특히 토요일 오후 그리고 공휴일에는 밝은 달을 쳐다보며 우리들은 사람들이 그리워서 울었다. 부모 형제 그리고 복 싶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 더운 7~ 8월을 제2 하사관 학교에서 보내며 온 몸이 까맣게 타 들어갔으며 두 눈만 빤짝 거리는 군기가 바짝 들은 정말 군인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토요일 점심 전에 우리는 각 중대 별로 사열을 받는 일이 있었는데 한 줄에 8명씩 걸어 가며 손과 발을 맟추어 행진하는 국군의 날에 행진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여기서 잘못해서 검열에서 지적이 되면 우리는 그 날 점심도 거르며 훈련을 해야 하는 그런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다.
그렇게 힘들게 훈련을 받고 있을 때 우리 큰 형님이 나에게 보내준 편지 한 구절이 나에게 그렇게 힘이된 구절이 있어서 소개를 할까 합니다.
" 이더운 날씨에 고생이 많겠구나
이순신 장군의 고뇌를 배우고
예수님의 인내를 깨달으면서
나는 우리 동생 병철이가
훌륭한 한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
흘리는 땀 한 방울이 귀하고 귀하다고 생각한다."
그 편지를 받아들고 나는 가슴이 얼마나 뿌듯했던지..
그리고 우리는 유격 훈련을 끝으로 강경 읍에서 다시 군용 열차를 타고 어디 어디를 거쳐 남한 산성이 있는 육군 종합 행정학교에 도착했다.
육군 종합 행정학교 정훈 하사관 후보생 허병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