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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매듭장식 같은 양달사 정신을 엮다
중앙일보에 실은 이어령 교수의 말을 빌어본다.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요.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다. 품었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의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왜 그런지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렇게 기술했다.
양달사 의병장에 관한 을묘왜변과 영암대첩 (?), (!), (,), (.) 등 던져보면서 뒤져보고 확인해보고 인정해주는 이런 문장부호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봤다.
2021년은 신축년 소의 해이다. 소가 한 마리면‘소원’이라고 합니다. 소원성취하길 바랍니다. 소가 두 마리면‘투우’라고 합니다. 소처럼 앞 만보고 달려갔으면 합니다. 소가 세 마리면‘우하하’라고 합니다. 한해 내내 함박웃음 짓는 기쁜 소식이 있고 여유로움을 찾는 희망찬 한해가 됐으면 합니다. 소가 네 마리면‘우지마라 우지마라’고 합니다. 울어버릴 만큼 그런 고통스럽거나 힘든 세상이 아닌 웃어보는 세상이 됐으면 합니다. 소가 다섯 마리이면‘우리’라고 합니다. 사회는 공동체 사회입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함께했을 때 더 좋아집니다. 나가 아닌 우리, 이로움이 아닌 의로움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소가 여섯 마리이면‘소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장 듣고 싶은 건 좋은 소식이 아닐까합니다.
2021년 기쁜 소식만 전해들길 바랍니다. 소가 일곱 마리이면 어떻게 될까요? 농장으로 말하면‘소천지’일 겁니다. 소들이 많아 요란해진‘소리’라고 하네요. 소의 음매소리, 되새김하는 소리, 워낭소리 등 소리에는 자연의 소리, 음악 같은 소리, 사람의 소리 등 우리 귀에는 소리공해가 있습니다. 자연의 소리 들으면 심신이 편안해지듯이 소리로 안정을 찾았으면 합니다. 소음공해만 빼면 일곱 마리의 소라도 기르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의 우울 속에서도 웃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려는 내 이웃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기보다 마음이 울컥해지더라고. 글 쓰는 사람은 한 줄 쓰고 마침표를 찍어야 새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매 순간도 마침표 찍듯‘매듭’을 지어야 비로소 새 삶을 살 수 있겠지요. 우리 모두 이 코로나 시대를 큰 마침표 하나 찍어 보내고,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기를 기원합니다.
매듭을 진다는 것은‘끝낸다. 마친다’는 뜻이 아닌 한 단락을 매듭짓지만 그 매듭은 잠시 쉴 뿐 또 다른 더 나은 일로 이어간다는‘진행형’의 매듭이요‘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매듭이요‘아름답게 장식’하겠다는 매듭이다.
매듭짓다. 매듭 잇다. 매듭 엮다. 매듭을 짓다의 결정의 매듭을 짓다. 결판의 매듭을 짓다. 마무리 매듭을 짓다. 일의 매듭을 짓다. 마음에 매듭을 짓다. 첫사랑의 매듭을 짓다. 풀어 매듭을 짓다. 마지막 매듭을 짓다의‘매듭을 짓다(be decisive of 또는 tie something up)’와 전통의 매듭을 짓다 등의‘매듭을 짓다(make a knot)’와 매듭을 잇다의 전통의 매듭을 잇다. 다짐의 매듭을 잇다. 인연의 매듭을 잇다. 사랑의 매듭을 잇다. 사업의 매듭을 잇다. 정신의 매듭을 잇다. 선교의 매듭을 잇다. 협력의 매듭을 잇다 등의‘매듭을 잇다(join, connect)’와 인연의 매듭을 엮다. 한국 얼의 매듭을 엮다. 의미 잇는 날 매듭으로 엮다. 시간의 매듭을 엮다. 삶의 매듭을 엮다. 첫 번째 매듭을 엮다. 인생의 새 매듭을 엮다 등의‘매듭을 엮다(plait knot)’등으로 영암대첩에 희생정신을 발휘한 양달사 의병장에게 매듭을 짓고 잇고 엮어 보고 싶습니다.
양달사 의병장은 영암대첩에서 기록으로 보듯이 그는 역사적인 가치성을 띤 위대한‘승리’란 결정체를 매듭지었습니다. 또한‘결판(決判)’의 매듭을 분명히 해보였습니다. 깔끔하게‘마무리’로 매듭지었습니다. 모든‘일’을 매듭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싸우면서 의병들과 또는 상관들과의 서운한 관계에 대해‘마음’의 매듭을 깔끔하게 지었습니다. 훌훌 털듯이 다‘풀어’매듭지었습니다. 양달사 의병장은 관계를 정신을 사명감을 앞으로도 이어가도록‘연속(連屬)’의 매듭을 이었습니다.
그는 또 보다 더 끈끈한 관계와 정신을 보여주기 위한‘협력(協力)’의 매듭을 엮었습니다. 인연을 엮었고 한국의‘얼’을 매듭으로 엮었습니다. 의미 있는‘날(日)’을 매듭하며 엮어갔습니다. 그리고‘시간(時間)’의 매듭과‘삶’의 매듭도 단단히 엮었습니다. 양달사 의병장은‘인생길’을 새롭게 매듭으로 엮었습니다.‘짓다 잇다 엮다, 양달사 세상을 아름답게 매듭하다’이런 슬로건으로 왜구를 물리치려 했고 정신을 가꾸어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영암대첩은 짓고 잇고 엮은 그런 매듭이었습니다. 금실과 비단실, 끈 줄은 나라를 백성을 세상을 아름답게 멋지게 보여주기 위한 매듭 장식이었습니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인연이라고 합니다. 끈을 엮어 줄을 만들고 다시 끈을 꼬아 매듭을 만듭니다. 끈이 이어지는 것은 사람의 인연과도 유사합니다. 그래서 매듭은 끈의 문화로 상징되는 한국인의 마음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통매듭을 보면‘국화매듭, 매미매듭, 나비매듭, 잠자리매듭, 벌매듭과 안경매듭’등 곤충이나 꽃을 닮은 정겨운 매듭들이 많이 있습니다. 매듭들마다 다 의미가 담겨있는 가치성(價値性)과 조화성(調和性)과 아름다움을 띠고 있습니다. 사람이 입는 도포(道袍)나 허리띠나 모자에 매듭장식을 합니다. 거기에 알맞게 또는 그 사람의 인품에 걸맞게 매듭 장식을 합니다.
또한 그런 매듭이 있는 반면 어떠한 일이나 문제를 두고 매듭을 풀었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의 일을 여러 가지 일로 만드는 것을 두고 엮었다고 합니다.
매듭,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글을 써보면서 느낀 것은 역사 기술들이 참참 많이도 매듭을 풀어났구나 엮어났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봤습니다. 근데 매듭을 풀기만 했지 멋지게 장식하는 데는 아직 멀었고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듭은 어떤 일을 결판을 내거나 해결을 하거나 마무리를 하거나 끝낸 의미로써의 매듭도 있지만 어떠한 물체를 묶는데 또는 장식하는데 또는 이은데 사용하려고 한 목적을 두고 만든 끈이기도 합니다. 실용성의 매듭, 장식적인 매듭의 끈목의 한 끝을 매어 매듭을 짓거나 끈목과 끈목의 끝을 서로 맞잇는 또는 끈목의 끝을 다른 물체에 잡아매는 또는 그 물체를 늘어뜨리거나 또는 끈목의 길이를 단축시키기 위하여 그 중간을 맬 때나 생활 속에 꼭 필요한 매듭처럼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역사매듭을 묶어보든 풀어보든 사용해봤으면 합니다.
매듭이 입체조직으로서 명주실을 소재로 하여 색감이나 조형미에서 특이한 예술성(藝術性)을 나타내듯이 매듭을 잘 엮어서 장식하는‘노리개, 유소, 주머니 끈, 도포 끈, 허리띠’등에 사용하듯이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매듭도 맺고, 엮고, 짜서 멋진 장식을 하는 아름다운 스토리로 엮어냈으면 합니다.
매듭은 한자의 뜻이 말해주듯 매(編)는‘가닥을 엮어 모은다’는 뜻으로 하나의 끈을 가지고 세 마디 이상의 교차점을 이루며 중복 형태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매듭은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어떻게 끈목을 조여 주느냐에 따라 매듭의 아름다움이 결정되므로 차례대로 질서 있게 주여 주며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끈목 자체를 염색해서 제작하기 때문에 매듭의 색상은 오색(五色)이 화사하게 표현되어 나타난 것이 특징입니다. 가닥은‘사(絲), 근(筋), 경(莄), 루(縷), 근(根), 도(道), 사(絲)’입니다. 엮다는‘서(緖), 편(編), 기(寄), 연(緣)’입니다.
매듭에는‘생쪽매듭, 병아리매듭, 나비매듭, 잠자리매듭, 매미매듭, 벌매듭, 도래미매듭, 동물형매듭, 식물형매듭, 안경매듭, 사색판매듭, 가지방매듭, 귀도래매듭, 단추매듭, 가락지매듭, 장구매듭, 국화매듭, 콩매듭, 방석매듭, 날개매듭, 장자매듭, 거북매듭, 박쥐매듭’등 여러 종류의 매듭이 있습니다.
양달사 의병장의 끈은‘학문(學文), 효심(孝心), 우애(友愛), 덕장(德長)’입니다. 줄은‘혈맥(血脈), 인맥(人脈), 학맥(學脈), 지맥(地脈), 연맥(緣脈)’입니다. 매듭은‘충정(衷情), 양명(揚名), 영웅(英雄), 명예(名譽), 영예(令譽)’입니다. 그는 좋은 끈으로 튼튼한 줄을 이었습니다. 그런 줄로 멋진 매듭을 짓고 잇고 엮었습니다.
조선최초 의병장,
영암대첩 일등공신,
을묘왜변 천하평정 꾼,
남암공(南巖公) 양달사(梁達泗) 의병장(義兵將),‘국화매듭’을 엮고 싶습니다.
국화는 가을 무서리를 견디면서 그 청초(淸楚)한 모습을 잃지 않는 상태로 유지합니다. 국화는 길상(吉祥)의 징조(徵兆) 또는 상서(祥瑞)의 상징뿐만 아니라‘은군자(隱君子), 은일화(隱逸花), 영초(齡草), 옹초(翁草), 천대견초(千代見草)’등 고상함과 품위(品位)와 장수(長壽)를 의미합니다.
국화를 보기를 양달사 의병장을 보는 듯합니다. 나타날 때는 화려하게 피어보이고, 조용히 있을 때는 말없이 군자다운 모습으로 향기를 뿜어내어 보이고, 어떠한 모진 풍상에도 지지 않고 의젓한 자태를 해 보이는‘국화(菊花)’가 아닌가합니다.
국화를 표현하기를
사시가 건듯 건듯 철이 바뀌니
봄.여름 온갖 꽃들 시드네
국화야 너는 맨 끝에 처음 피어서
맑은 향내 뼛속까지 스며드누나
만장 홍진이 눈물 흐르고
된서리가 머리칼에 날아들어도
너는 끝내 향기를 그대로 지녀
밝은 달에게 그윽한 정을 부치는구나
강희맹(姜希孟)의‘우구재부(友菊齋賦)’에 나온 시조이다.
아 일찍 심었는데도 늦게 피는 것은 덕이요
아 홀로 깨끗한 것은 절개요
아 맑고도 높은 것은 서리 아래 호걸이로다
이형상(李衡祥)‘몽설찬(夢說贊)’과‘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에 나온 시조이다.
이 두 시는 모두 풍상(風霜)이 칠 무렵에 고이 피어있는 국화(菊花)의 자태를 노래한 것입니다. 서리가 내린 후에 절개(節槪)를 안다고 했던가요, 늦게 피었으니 은은한 향기로 고고한 기상을 떨치는 국화의 모습 속에서 선비의 고고함과 절개를 지키는‘군자(君子)의 덕(德)’을 보는 듯합니다.
또한‘매미매듭’을 엮고 보렵니다.
매미(蟬)는 여름 한 때를 울기위해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매미는 대략 6~7년간 땅속에서 살며 수차례 탈피(脫皮)를 하다가 성충(成蟲)이 되어 땅 위 나무로 올라와 우화(羽化)합니다.
수차례 탈피한 매미는 재생(再生)과 때론 탈속(脫俗)의 상징으로 여겨져 신선(神仙)으로 비유되며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매미를 가장 이상적으로 미화시킨 사람은 동양의 선비들이었습니다. 진나라 육운(陸雲.262~303)은 그의 한선부(寒蟬腑) 시문에서 매미가‘문(文), 청(淸), 염(廉), 검(儉), 신(信)’등 오덕(五德)을 갖추었다고 봤습니다.
매미는 관(冠)의 끈이 늘어진 형상이기에‘글(文)’을 읽어야하고 이슬을 먹기에 선비의‘청(靑)과 렴(廉)’을 지녔고 거쳐할 곳을 마련하지 않기에‘검소(儉素)’하고 때 맞춰 죽음을 맞기에‘신의(信義)’를 지녔다고 했습니다.
매미의 삶의 형태와 그 생김새로부터‘군자지도(君子地圖)’를 읽어낸 선비들은‘청고(淸高)’한 군자의 덕(德)을 상징하는 초건(貂巾)을‘초선(貂蟬)’또는‘초선관(貂蟬冠)’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군자(君子)를 상징하는 매미는 많은 시문(時文)과 그림의 소재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됐던 매미, 그런 매미 같은 양달사 의병장이기에 관심을 가져보게 됩니다.
또한‘나비매듭’을 엮고 보렵니다.
나비(蝶)는 생태적(生態的) 특성과 문화적(文化的) 상징을 하고 있다. 나비는 생물학적으로는 변신(變身)과 생명을 부화(孵化)시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고 문화적으로는 행복한‘결혼(結婚)’이나‘인연(因緣)’및‘장수(長壽)’의 상징과 영혼의‘부활(復活)’의 상징으로써 우리나라 민속 문화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에서도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나비는 알에서 고치로 고치에서 애벌레로 초월하여 나비가 되는 것이 마치 내담자(來談者.심리적인 문제나 어려움을 혼자 해결하는데 어려움을 느껴 상담자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가‘자기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찾고‘자기실현(Self Expression) 또는 자아실현(Seif Realization)’을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켜가는 과정으로‘나비’와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비는 자기의 정체성을 찾고 자기통합을 이루어가는 개성화의 상징입니다.
행복의 날개 짓 나비, 나비는‘탈피(脫皮), 변화(變化), 성장(成長)’의 의미와‘불멸(不滅), 재생(再生), 부활(復活), 영원(永遠)’을 상징합니다. 또한‘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꽃과 나비는‘금술’을 의미합니다. 특히 모란과 나비는‘부귀영화(富貴榮華)’를 말합니다. 덩굴식물과 나비는‘자손 번성’의 기쁨과‘장수(長壽)’의 기쁨을 기원하는 일입니다.
협력자, 행운을 의미하기도 한 나비, 특히‘파란나비’는 자신의 분야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배워 큰 발전을 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도와줄 사람을 만나 일이 잘 풀리게 하거나 자신이 남의 어려운 일에서 구해낸다고 합니다.
나비는 아름다움과 신비(神秘)의 상징으로 꿈의 세계, 무의식(無意識)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누에고치에서 나비가 될 때까지의 자아실현을 위한 성장의 과정과 시련과 고난 그리고 환희(歡喜)라는 연결고리가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사계절의 기후풍토 속에서 나비의 삶이란 고생과 어려운 역경을 딛고 자아의 모습을 찾듯이 본인의 삶을 반추(反芻)해 볼 수 있는 곧 양달사 의병장의 삶이 나비의 일생이 아닌가합니다. 농촌에서 태어나 급제(及第)하여 현감을 하고 현감(縣監)을 하다가 시묘(侍墓)살이를 하고 그러다가 전쟁터(戰爭터)에 나가 싸우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면서 생(生)을 마치는 자신의 인생살이가 나비의 일생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양달사 의병장은 형제간의‘우애(友愛)’가 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에게‘효심(孝心)’이 깊었습니다. 그는‘의리심(義理心)’이 강했습니다. 또한 나라에‘충성심(忠誠心)’이 높았습니다. 그런 양달사 의병장이기에 인연(因緣)을 상징한‘나비매듭’을 엮어 보면 좋을 듯합니다.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글을 끝맺음하며 매듭짓지만 끝마침 한 것이 아니라 이어지고 만들어지게 하는 매듭으로 엮으렵니다. 더 멋진 장식(裝飾)으로
매듭 지어봅니다. 이어봅니다. 엮어보고자 합니다.
신(神)의 한수를 보여줬던 양달사 의병장
애향의 신, 공경의 신, 공부의 신, 직장의 신, 싸움의 신, 애족의 신, 나라의 신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뛰어난 행동과 생각과 판단을 했던 양달사 의병장이었습니다. 그는 상대가 어떤 수(數)로 응수를 하든지 절대적으로 유리한 수를 보여줬습니다. 바둑처럼 초반 포석에서는 둬야할 곳(손을 써서 지키고 차지해야할 곳)이 너무 많아서 신의 한수는 없었지만 중반이후부터는 전투가 벌여졌을 때 한수로 상대방의 목을 치거나 포로로 잡는 수나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하게 한 수, 신의 한수를 썼던 양달사 의병장이었습니다.
또한 바둑에서 중반 행마(바둑을 두는 것)를 할 때처럼 상대방의 집(군사력, 점령지 등)을 줄이면서 아군의 집(군사력, 방어망 등)을 늘어나게 하는 수를 바둑처럼 대세점(大勢點.대세의 중심점으로 바둑 전반의 형세를 결정짓는 요처)을 키우는 양달사 의병장의 지략(智略)이었습니다. 신의 한수를 두기위해‘수읽기와 형세판단’능력을 키웠던 그였기에 남들이 아마도 신의 한수의 보여준 양달사 의병장이었다고 극찬하고 추앙하며 그를 영웅(英雄)이라고 여길 것 같습니다.
양달사 의병장은 바둑의 대세관처럼 대국자가 지닌 철학적 안목을 갖춘 균형감각, 형세판단, 기풍(스타일) 등을 잘 갖춘 대세관이 뛰어났습니다. 그가 보여준 영암대첩에서의‘전투 조화’를 보여준 면은 폭넓은 대세관과 자신만의 전투 철학을 갖고 있었기에 대승(大勝)을 거둘 수 있었다고 봅니다.
자신의 틀에 갇혀 있으면 다양한 사고를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투(戰鬪)의 고수(高手) 양달사 의병장은 바둑기사들이 기보(棋譜)를 통해 고수들의 안목과 대세관을 익히고자 부단히 노력을 하듯이 그도 또한 군보(軍譜)를 통해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바둑에서 창의적 대세관을 확립하는 것은 바둑의 고수가 되는 지름길이듯 양달사 의병장도 그런 고수가 되기 위한‘대세관’을 확립했습니다.
바둑의 기술 중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분야이면서 그 난해함과 심오함이 끝이 없는 영역이 바로‘수읽기’이듯이 수읽기는 기본적으로 초반, 중반, 종반 어느 한 분야의 고유 영역이 아니며 수읽기는 바둑의 기초적인 기술이면서 동시에 두 대국자의 역량을 가늠하는 초석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양달사 의병장은 이미 탁월한 기술과 능력과 지략으로 대세관의 수를 두었습니다.
수의 가치 판단, 국면을 전체적으로 고려하고 우세와 열세를 가늠하는 것이 형세판단임을 알고 전투에 나섰던 양달사 의병장 영암국수전(영암대첩)에서 불계승(不計勝.대국 도중 한쪽이 패배 의사를 표명하면 계가까지 가지 않고 상대방의 승리를 선언하는 대국), 신의 한수는 찬사를 받을만한 합니다.
신의 한수, 굿패거리들의 창우대(倡優隊) 조직, 진흙구덩이로 유인하여 적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수(결정판)를 두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강개(慷慨)하고 힘이 좋고 계략(計略)이 뛰어난 무사다운 무사(武士)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흥부 원벽에 붙은 시(詩) 속에 한 줄만이 남았지만‘여지도서, 호남절의록, 영암읍지, 영암군 향토사, 송천유집, 남암공의 출정시, 전주향교 통문 및 좌승지 추증 승정원일기’에는 그의 인물과 공적을 기록해났습니다. 그런 기록들을 읽어보면 정말 양달사 의병장이 결정적인 신의 한수를 두었구나하는 것을 깊이 알게 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암전투 승리는 왜구들보다 병사나 무기가 열세였다. 그럼에도 왜구들을 물리쳤던 것은 양달사 의병장의 탁월한 전략이었다. 분산 배치한 일본과는 달리 병사 투입을 집중해 공격력을 극대화했다. 선택과 집중을 적절히 구사했다.
양달사 의병장 일생,
신의 탄생, 신의 응시, 신의 명령, 신의 눈물, 신의 한수, 신의 부름
인간세상으로 탄생, 배움과 응시와 직책의 역할, 어머님의 사망, 전쟁 승리, 세상 떠남 신의 계시에 의해 그의 일생이 살고 죽고 했다. 오신, 인간세상의 가장 의미 있고 아름답게 승화(昇華)시키지 않았는가한다.
조선최초 의병장 양달사,
영암성을 지키고 을묘왜변을 종식시켰던 양달사,
그는 그저 시골아이였고 농촌 청년이었고 군자다운 충신(忠臣)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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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골품제(骨品制)에 있어서 성골(聖骨)도 진골(眞骨)도 육두품도 아니고‘향.소.부곡’출신일 정도였다. 일반적인 양민과 달리 노비.천민에 유사한‘열등계급’이었다.
다른 충신들은 자리에 연연하려고 오로지 명예만 생각하며 나라에 충성을 했지만 양달사 의병장은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오로지 나라를 위하겠다는 정신으로 그는 자신을 희생시켰다. 남들처럼 권력이 욕심났다면 자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명예만 생각했다면 양달사 의병장은 부모, 형제, 국가, 고을 이외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진정한 마음으로 일을 선택했고 맡은바 임무에 충실했다.
특히 그는 부모를 공경(恭敬)하는 일에는 소홀함이 없는 공경심이 컸다. 부모와 직장을 선택하라고 하면“난 부모를 선택하겠다.”이런 정신에 불사르는 그였다.
양달사 의병장이 작고한지가 400년이 넘었다. 503주기(2021년) 탄신을 기려주고 싶다. 그러면서 그의 영혼이 다시 깨어나 대한민국과 영암군을 그때보다 더 위대하게 평화롭게 하도록 우리의‘정신기조’가 되게 하고 싶다.
왜란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을묘왜란, 여러 지역의 성들이 함락되고 영암성은 온전하게 지켜냈던 영암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양달사 의병장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이다. 뼛속까지 무사였다고 할 정도로 그는 진정한 군자로서의 충신이었다. 그는 40대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발자취는 담백했다. 전라좌우우후를 거쳐 진해현감과 해남현감을 했다. 그리고 의병장으로서 나라와 고을을 구해냈다. 또한 그는 전쟁 상황에서도 부모, 형제와 이웃을 버리지 않았다.
양달사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단 말인가?
부모보다 나라를 선택했고 직업보다 부모를 선택한 사람이 아니던가? 진정한 충신(忠臣)이 아닐 수가 없다.
그의 업적은 행정, 정치와 군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다. 무과와 중시에 응시해 급제하여 첫 부임을 절도사를 도(道)와 군기(軍機)에 참여하고 군령을 전달하며 군사를 지휘하는 외에 절도사를 대신해 군사 훈련이나 무기.군장 점검을 위한 도내 순행을 한‘전라좌우우후’였다. 그는 고을을 책임지는 고을수령의 원님인‘현감’에 임직했다. 진해현감과 해남현감을 하면서 고을의 안녕과 부흥에 정진했다. 그러다가 을묘왜란이 터져 영암성을 지키기 위해 상중의 시묘살이에서도 영암전투에‘의병장’으로서 참여를 하는 등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모든 분야를 터득한 양달사 의병장은 이제는‘완전함’을 추구하지 않고‘원만함’을 추구하지 않을까한다. 완전함은 쫓는 사람은 틈이 생길 때마다 매워야하지만 틈을 수용하여 원만함이 생기는데 이제는‘틈’을 그냥 두고 즐기려고 하리라 본다.
틈 속에 여유, 틈은 공간의 연속성을 추구하고자 함이며 틈이 있기에 그 틈을 통해 다른 공간으로 이동을 하거나 공기, 바람 등이 들어오게 하는 소통의 틈이다. 틈이 있기에 또 다른 물체를 보게 된다. 완전하다는 것은 틈을 보여주지 않아 공간의 형성이 안 된다는 뜻이며 원만하다는 것은 틈을 보여줌으로 인하여 공간 형성으로 사람과 자연, 자연과 사람 또는 지구와 우주 또는 전쟁과 평화, 사랑과 연인, 남자와 여자, 인간과 짐승, 밤과 낮, 도시와 농촌, 과거와 미래, 나라와 백성 두 관계는 틈이 없으면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그가 틈을 보여줬기에 효(孝)와 충(忠)이 동시에 나타났고 전쟁과 평화는 조화롭게 일어났다. 어떤 한가지의 고집이었다면 영암전투는 승리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그는 적들한테 틈을 보여줬다. 적들을 생각한척하다가 틈을 조였다. 창우대, 진흙탕 싸움은 틈을 보여준 전술이었다. 꾀(術)를 보인다는 것은 틈을 보여준다는 일이다. 만약 영암전투에서 그가 시묘살이만 고집했다면 기존의 전력만 고수했다면 과연 영암성은 온전했을까?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의문점이 남는다. 원만한 틈이 있었기에 전쟁터에 나가야겠다고 결심했고 왜구들이 패배하게 만들었다.
양달사 의병장이 권력에 욕심이 커 시묘살이에 임하지 않고 다른 장수들처럼 야욕을 키웠다면 그의 일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삶은 모나지가 않았다. 완전함은 모나다. 딱딱하다. 차갑다지만 원만함은 둥글고 부드럽다. 따뜻하다 이다. 그가 거친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양달사 의병장은 다른 평가를 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남자, 따뜻한 사람, 이름다운 인간 바로 양달사 의병장이 보여준 참됨이다. 양달사 의병장 같은 멋스러운 청년은 없다.
그는 그랬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기심과 물질적 잣대로 가족 간의 이웃 간의 사회 간의 서로 다투며 괴로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행복의 첫발은 가장 가까운 부모형제 사이에 효도와 우애, 공경과 사랑을 회복하려했고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물질적인 효보다는 정신적인 효를 인간의 도리라고 봤기에 정신적인 효를 더 중시했다. 효를 단순히 부모의 몸을 봉양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의식주만 챙기려는 현상에서 그는 정신주의에 더 치중을 했다.
양달사 의병장은 자라면서 매일 대하는 부모의 언행을 보고 듣고 배운 대로 행동을 했다. 부모의 솔선수범이 자식을 사람답게 길러냈다.
효(孝)와 충(忠) 동등한 관계로 본 양달사 의병장의 부모형제와 인척들 핏줄은 못 속이는 법, 그도 효를 중시했고 효만큼 충도 중요시했다. 충효일체(忠孝一體), 이런 말은 양달사 의병장의 가슴에 문신으로 새겼을 법도하다. 가훈(家訓)이었다. 양달사 의병장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인척 등 훌륭한 분들을 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그도 군자다운 선비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었고 어떤 선비보다 갖춤에 있어서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그의 효심의 봉양(奉養)은 지금 이 시대에도 본받을 만한 존경할 만큼 시사점을 많이 낳고 있다. 그는‘효충신용(孝忠信勇)’을 잘 겸비했고‘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과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잘 실천한 선비답다.
어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멈춤의 시간이 길어지고 찾아오는 인적도 드물어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만 크게 들린다. 그래서일까? 우울한 날은 문득 예고 없이 찾아온다. 해마다 아무렇지 않게 보낸 명절이 올해만큼 유난히 쓸쓸하고 떠나온 지 30년이 넘은 고향 하늘도 마음에 붉은 노을을 드리운다.
우리 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살아계셔야 뭐라도 해볼 텐데 황천길로 떠나간 지 너무나 오래돼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다.
얼마 전 어머님 기일이었다. 회귤유친(懷橘遺親)이라 했던가? 중국 오나라의 여섯 살 난 육적이란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원굴에게 갔다가 귤을 대접받고 몰래 귤 두 개를 챙겨 오다 들켰다.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어머니가 좋아하셔서 가져다드리고 싶어 그랬다고 한다. 어린아이의 효성이 가득해 원술은 귤을 더 주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지의‘회귤유친’이다.
아마 양달사 의병장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귤이 아닌 사람들의‘사랑(愛)’을 훔쳐가지 않았을까한다. 효심이 깊었던 양달사 의병장도 회귤유친의 같은 이야기가 나올 법도하다.
시대전환,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꾸는 일을‘전환(轉換)’이라고 한다.
양달사 의병장은 400년 전 한 시대를 바꾸어났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장수로서의 기질을 보여주면서 전쟁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전술(戰術)에 있어서 힘이 아닌‘지혜(智慧)’로 전략을 세웠다. 영암성이 함락되지 않았던 것은 그의‘지략(智略)과 계략(計略)’이 뛰어났기에 온전하지 않았는가본다. 조선중기의 시대는 어느 시대처럼 보수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시대였다. 혁기적의 혁명가나 혁신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도를 바꾸려고 건의를 하면 일부 반대파로 인하여 결국 부딪쳐 변화를 요구하는 자를 유배 보내거나 처형을 했다.
그런 면을 볼 때 양달사 의병장은 본인만의 철학과 사고를 주장하고 관철하고자 당당하게 소신을 펼쳤다. 만약 영암전투에서 상관들의 판단과 주장으로 전술과 전략을 펼쳤다면 과연 영암성을 지켜낼 수 있었겠는가하는 의문점을 갖게 된다. 신의 한수라 할 만큼 양달사 의병장의 지략과 계략의 작전술은 시대를 새롭게 한 정신사고의 전환이었다.
역사전환,
시대를 앞서게 하는 참신한 사고로 인한 영암전투의 전쟁사가 가치성과 역사성을 낳게 했으며 이는 곧 을묘왜변에 대한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역사의 변천을 가져오는 정치, 경제, 문화와 군사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 일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을묘왜변 이후 조선시대의 가장 치열한 전투요 기나긴 침략으로 인한 많은 피해를 가져왔고 결국 일본의 야망을 키워주는 슬픈 역사의 시대로 발전시키는 또 하나의 사건을 불러왔다. 을묘왜변을 치르면서 조선의 군사전략이 얼마나 잘 못 됐는지 절실히 느꼈던 전쟁이었다. 그러함에도 조선군은 군사력을 더 강화하고 보강을 하거나 전환을 하지 못하고 하다가‘임진왜란’에서 크나큰 피해를 불러들이는 등 호남 지역의 성이 10개 함락이 될 정도로 을묘왜변 때 왜구들한테 약점을 보여준 일로 인하여 임진왜란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면을 볼 때 양달사 의병장 같은 호국정신과 애민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군대를 이끌었다면 중앙에서 근무를 했다면 전쟁의 아픔은 더 커지도 안했을 것이며 또 다른 왜변이나 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어났어도 크게 진행되지 않고 바로 섬멸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충효일체(忠孝一體),
충효(忠孝)는 충성(忠誠)과 효도(孝道)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즉, 군왕(郡王)을 성심(誠心)으로 받들고 지성(至性)으로 모시는 유교사상에서 바탕을 둔 덕목(德目)이다. 충(忠)은 역사적으로 볼 때 종족(種族) 또는 족장(族長)과 국민(國民) 또는 군주(郡主)와 군국(君國)을 위하여 자기를 바치고 시종 그 절조(節操)가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봉건적 군신관계(君臣關係)의 근본윤리로 발전한 충효, 중(中)과 심(心)으로 이루어진 글자의 형태가 나타내듯이 인간의 내면적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실한 마음을 뜻하며 그것에 의하여 남을 이해하는 것이 서 그것에 의하여 거짓 없이 언행 하는 것이‘신(臣)’이라고 했다.
효(孝)는 부모를 봉양(奉養)하고 섬기는 덕목의 하나이며 효경(孝敬)에서는 인간의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다. 효는 가족 간의 단결을 굳게 하고 가장의 권위를 강화 및 세우는 동시에 손위 사람에 대한 복종이 요구되고 마침내는 효 사상이 생선된 것으로 여겨진다. 효를 인간행위의 근본으로 삼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부모와 자식 간의 자연스레 애정이 왜곡되는 폐단도 없지 않았으나 동양에서는 효 사상이 깊이 그리고 오랫동안 뿌리박혀왔으며 한국도 예로부터 효를 인간생활의 바탕으로 삼아왔다. 부친은 작은 천하의‘임금’이요, 군왕은 대가족의‘아버지’라는 논리에서 충효일치(忠孝一致)라는 사상적 개념이 이루어지기도 한다고 고찰하고 있다.
양달사 의병장은 해남현감을 하다가 모친이 사망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탈상할 때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산소를 돌보고 공양을 드리고자 시묘(侍墓)살이 또는 여모(廬墓)살이에 들어가고자 가감하게 관직을 던졌다. 관직보다‘부모의 공양’이 더 중요했던 그였다.
남이 흉내낼 수 없는 충효를 앞세워
또한 시묘살이를 하다가 을묘왜변으로 인한 달량성 및 영암읍성이 왜구들에 의해 함락 직전의 상태이고 그들의 무차별적인 약탈과 방화 그리고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또한 갈등과 고민을 하게 했다. 양달사 의병장은 이 문제에 대해 양응정과 의논을 하여 충효일체라는 편지를 받아보고 무사답게 효보다‘충(忠)’을 앞세워 영암전투에 임했다. 이런 이야기는 감히 남이 흉내를 낼 수 없는 진정한 충성심이 깃들지 않으면 충신의 모습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고 찾아보기 힘든 매우 드문 일로 여겨진 면이다.
사람은 어떤 갈등상황에서 우리보다는 자신을 선택하는 경향이 대체적이다. 하지만 양달사 의병장은 어떠했는가? 그는 무엇을 우선해야하는지를 안 현명한 사람이었다. 상중이라도 나라에 변고(變故)가 생겨 나라가 패망하면 상중(喪中)이라도 공양(供養)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충효일체에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나라에 대한 충성은 곧‘부모를 공경하는 일’이라는 그의 정신은 영암전투에서 가장 의미 있게 남는 전쟁이야기의 소재에 핵심적인 줄거리였다.
화려했지만 눈부시지 않은 은은함
양달사 의병장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금수저’는 아니었다. 금수저는 부모가 부유해서 부모세대는 물론 앞으로 살아가는데도 금전적인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자제를 일컫는 신조어다.‘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his mouth)’라는 오래된 영문 관용구가 기원이다. 귀족의 집안의 자식들에게 유모가 은수저로 우유를 떠먹이던 데에서 비롯된 것 중의 유래의 하나이지만 금수저라 여긴 부귀, 권력, 학력의 부자인 사람, 배경이 좋은 사람,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많이 배우는 사람 등의 경제적 풍요와 권위적 행세와 학문적 우위와 그리고 특혜, 수혜자, 우월함, 우수한 인맥 영향, 사치, 특권 등의 삶을 누리는 사람, 즉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들을‘금수저 또는 은수저’라고 말한다. 양달사 의병장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는 안았다. 그렇다고 나무 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은.동의 수저정도 되는 숟가락을 물었다.
양달사 의병장은 학식과 지위가 높은 훌륭한 할아버지,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또한 덕망이 높은 인척들을 두었다. 그런 배경으로 그도 또한 학식을 쌓고 사회적인 명예를 얻었다. 남들은 금수저라는‘잘 산다고 해서 배웠다고 해서 인맥이 넓고 단단하다 해서 백이 있다고 해서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해서’그런 배경으로 특권층으로서의 몇 대에 누릴 정도로 사회적 행세를 한다. 하지만 양달사 의병장은 화려한 듯했지만 그 빛은 눈부시지 않은 은은했다.
효를 행한 충을 보여준 진정한 선비정신 빛나
시골 조그마한 농가에서 태어나 좋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덕에 또는 훌륭한 인척을 둔 덕택으로 그는 학문을 수행하고 급제해‘우후(虞侯)와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는 장수로서의‘의병장(義兵裝)’으로 나서 고을 수호에 헌신했다. 그런 그가 다시 평범한 가정으로 돌아가는 일은 빛나도 빛나보지 않는 것처럼 그는 겸손한 자세를 취한 참된 선비였다. 양달사 의병장은 야욕이 있었다면 배워서 나라를 지키고 평화 속에서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남들은 자신의 영화로움을 누리려고 권위만을 생각해 권력을 탐냈지만 양달사 의병장은 그런 욕심보다는 오로지‘효(孝)와 충’(忠), 효는 부모를 공양(供養)하는 일이었으며 충은 나라를 사랑(愛)하는 일이었다. 순수함, 진솔함, 단백함, 정직함, 성실함, 온화함 그 단어로 효를 행했고 충을 보여줬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 대한 공로패나 명예상장과 추서(追書)로 남기고 하는데 양달사 의병장은‘창(槍)과 칼(刀)’의 자국을 몸에 남겼다.
양달사 의병은 사슴, 내 마음은 녹용
양달사 의병장은 사랑하는 가슴을 가진 사람이요.
양달사 의병장이 우리의 마음을 녹여준 사람이다.
양달사는 우리의 행복, 대한민국 호국영웅!
양달사가 없었다면 영암도 없었을 것이다. '약무양달사 시무영암(若無梁達泗 是無靈巖)' 그의 공적에 대한 시사점, 두고두고 의미를 값지게 여겨볼 일이지 않는가한다.
영암성을 지켜냈던 조선최초 의병장 양달사 의병장에 대해 그의 이름 석 자를 빌어 축약해본다.
梁達泗
梁名揚名也 世上平和來
達成達聖也 人間香氣咲
泗達四達也 功績價値有
양달사
양명(梁明)에 양명(揚名)하니 세상(世上)이 평화(平和)가 오도다
달성(達成)에 달성(達聖)하니 인간(人間)이 향기(香氣)가 피도다
사달(泗達)에 사달(四澾)하니 공적(功績)이 가치(價値)가 있도다
양(Y).달(D).사(S)
Youthfully-팔팔한 참참 청년답게(活靑)
Dramatics-인상적인 극적상황의(印劇)
Smartness-기민함의 맹렬함으로(機猛)
양달사 의병장 가치와 중요성을 깊이 새기며 영암인의 자존의식을 더 한층 드높일 것 같다.
1518년생, 전남 영암 도포 봉호정 출생, 전라좌우우후.진해현감.해남현감.의병장, 향년 40세, 호국영웅 남양 양달사 의병장에게 역사적인 발자취를 정리.구성해 이 글을 남양정(南巖亭)에 바쳐본다.
작성 2021.2월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