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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지음/ 강남순‧박노자‧한흥구‧김웅교 대담, 『권력과 교회』, 창비, 2018
<김진호>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이 초기 기독교와 바울을 다시 탐색하는 일의 출발점에는 오늘날 기독교가 가장 배타적인 종교라는 문제의식, 그런데 그 종교가 가장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유럽과 북미의 정신적 기저가 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종교의 뿌리는 배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민중해방적이기까지 했다는 것을 얘기함으로써, 기독교를 반자본주의적 동맹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의도가 그들의 호출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대사학자인 모지스 핀리(Moses Finley)가 이야기하듯 고대가회의 지중해에서도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일정한 형태의 세계화(globalization)된 자본주의가 확산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 과정에서 유민과 난민이 수없이 발생했지요. 이때 성적‧계급적‧신분적‧종족적 갈등이 가장 현저했던 곳이 바로 바울이 활동한 도시들이었어요. 특히 고린도(Korinthos)나 데살로니가(Thesalenica) 같은 도시는 고대 지중해 메트로폴리탄의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그 범위나 정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죠. 그 과정에서 길을 잃고 낙담한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은 고대 로마시대 세계화의 풍랑 속에서 성적‧계급적‧신분적‧종족적 배타성을 넘기 위해 활동한 바울을 주목하며, 바울의 종교성에 내포된 역동성을 읽어보려 하고 있습니다. (124쪽)
<박노자> 기독교의 메시지 가운데 바울 사도가 이야기한 것, 즉 희랍인도 없고 유대인도 없고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하나”(「갈라디아서」 3장 28절)아록 한 말이 저에게 상당히 와 닿습니다. 정말 기독교가 무언가 쓸만한 사회적 역할을 하자면 ‘기독교인도 유럽인도 아랍인도 이슬람인도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보편적인 인격의 소유자이고 모든 인간이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124쪽)
지금 같으면 유럽으로 넘어가려는 사람들이 바로 말씀하신 지중해에서 매년 수천명씩 수장당합니다. 아시겠지만 유럽은 하나의 배타적인 성채처럼 이민정책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하고 그 성채로 들어가려는 수많은 사람들은 바닷속에서 그냥 죽습니다. 렇게 매년 유럽인들의 배타성에 의해서 희생되는 사람들이 수천명에서 수만명인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유럽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대량학살의 공동정범이 되는 일이나 마찬가지죠. 기독교의 메시지를 통해 이 같은 살인적인 상황을 개선해나갈 수 있다면 엄청난 소득일 것입니다.(125
쪽)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이야기한 호모 사케르(Homor sacer), 사회의 희생물이 되어야 할 외부자에게 무조건 자비를 베푸는 것 말이에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125쪽)
부패한 개신교의 이름 ‘개독’
<김진호> 문학과 종교의 토대를 같게 본다고 하셨는데, 이런 생각에 깃든 신학에 대한 이해과 교회에 대한 이해, 도 ‘왜 문학가로서 교회에 개입하는가’에 대해 먼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응교>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고등종교도 모두 문자를 통해 전해졌지요. 그래서 모든 종교 텍스트, 즉 사상 텍스트는 문학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중략) 특히 성경은 여러 장르로 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문학 장르로 본다면 구약에는 역사서, 예언자들의 판타지 문학, 그리고 잠언이나 단편소설‧시 형태의 문서들이 있습니다. 또 신약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같은 단편소설과 사도 바울에 의한 서간체, 「요한계시록」이라는 판타지가 있죠.
저는 문학과 종교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은 그저 ‘사람을 보는 다른 시각’일 분이라 여겨집니다. 외부의 사건을 쓰기도 하지만, (Fyodor M. Dostoevsky)무의식이나 영성을 다루는 작가도 있거든요.
더욱이 세계사를 보면 언어와 종교의 법전이 중세를 지배했잖아요. 동아시아에서는 한자문명, 유교라는 종교체계, 진나라와 당나라의 법체계 등이 중세를 지배했죠. 인도에는 산스크리트어, 불교, 카스트제도라는 계급제도가 있었고요.중동에는 아랍어, 메소포타미아 제국 종교들, 우르남무 법전(Code of Ur-Nammu, 기원전 21세기)과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 기원전 18세기) 등 여러 법체계가, 유럽에는 라틴어와 기독교와 유스티아티누스 법전(Code of Justinianus Ⅰ 또는 Corpus Juris Civilis)이 있었어요. 중세는 ‘종교와 언어와 법전’이 하나의 권력을 형성한 시기였죠. 그 가운데 종교의 비중이 너무나 컸고, 이러한 중세 종교의 억압적 측변을 해체한 데에 문학이 크게 기여했습니다. 많은 종교 서적이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 언어로 번역되면서, 종교 경전을 넘어 인갖ㄴ에 관한 문학으로 재해석되기도 했어요.
개신교를 예로 들면, 종교개혁 때 문학적 실천이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중요한 문학적 행위죠. 종교개혁가인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일 때문에 유해가 파헤쳐져 불태워지기까지 했어요. 안 후스(Jan Hus)는 체코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고요.
문학과 경전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소설가이자 사상가였던 에라스믜스(Desiderius Erasmus)는 『우신예찬愚神禮讚』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햄릿』 등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에도 성경의 많은 상징과 표현이 나오죠. ᅟᅡᆫ편 제가 「아가서」에 관한 책을번역한 적이 있는데, 「아가서」에선 당시 중동의 문학 작품에 나오는 상징이 많이 들어있어요. “너는 연못의 샘이다”라고 한다든지, 남자를 보고 사과에 비유한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에요.
이렇듯 종교는 인문학의 모든 영역, 역사‧심리학‧문학‧ 철학 등에[ 스며 있지만 제 전공인 문학과는 특히 긴밀하여 떨여져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191~193쪽)
착한 양떼를 기르는 ‘복종’의 교회
<김진호> 교회 대중은 최근 증오의 종교로 변화하고 있는 교회에 동화되고 있다고 보시나요? 만약 동화되고 있다면 왜 그렇게 되엇을까요?
<김응교> 지금까지 한국 교회 신도들은 목회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처럼 받아들이는 ‘착한 신도’였어요. 단독자로서 자신을 성전으로 보는 깨우친 신도가 늘고는 있지만, ‘증오’를 강요하는 흐름에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신도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목회자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배경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한국인의 무의식에 흐르는 무속적 흐름과 주자학적 흐름이죠. 거기에 자본주적 요소가 더해져 세 가지 목사 유형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한국의 무의식에 샤머니즘이 있고, 샤머니즘을 배경으로 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연구가 있어요. 신과 내가 일대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굿과 샤먼을 통해서 만나는 거죠. 헌금도 마치 무당에게 주는 것처럼 이루어지고요. 다른 한편으로 장로교가 전 세계 중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이유는 우리나라의 유교, 특히 주자학의 사상구조가 칼뱅주의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계관이나 윤리관이 비슷해 유교적 관점을 토대로 그 위에 장로교가 그냥 들어올 수 있었다는 거죠. 요컨대 목사를 한국 오순절교회에서는 샤먼처럼 보고, 장로교회에서는 유교의 군자처럼 봤다고 할 수 있겠죠.
지금은 그걸 넘어 교회를 백화점으로 보는 구조가 있습니다. 이익관계를 통해 교회 시스템이 구축되고 목사는 그곳의 ‘대표’가 되는 거에요. 장로교회에서는 목사를 기업 회장처럼 ’당회장‘이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소망교회 앞, 주 찬양하는 뽀얀 아이들”로 시작하는 「불의 뷔페」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불의 소망 근처에서 / 불의 구린내를 빠는 똥파리의 / 윙윙 날개 바람.”(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1991) 오징어떼가 집어등에 모이듯 자본주의적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모인다는 이야기죠.
목회자를 무속적인 샤먼이나, 유교식 군주나, 기업 대표로 보는 시각이 변하지 않는 한 외부의 대상을 적으로 두고 안으로는 순종과 축복만을 강조하고 세습을 일삼는 관행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목회자든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교제할 수 있다고 보는 ’만인제사장설‘로 바로 서야 해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장 28절) 예수를 따르는 이들 누구나 일대일로 예수의 말씀을 대할 수 있어야 해요. 직분에 따라 역할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목사와 평신도에게 상하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211~213쪽)
<김진호>
우선 기복주의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어느 종교든 복을 베푸는 기능은 핵심이고, 그게 없다면 종교가 존재할 수 없어요. 단, 누구에게 복이 베풀어지느냐가 중요한 논점이죠. 가령 예수가 ‘굶주린 사람은 복이 있다. 배부르게 될 것이다. 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웃게 될 것이다.’(「누가복음」 6장 21절)라고 했을 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세계로부터 배척당해 결핍된 이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점이에요. 또 나단 언자가 다윗에게 간언할 때(「ㅏ무엘기하」 12장 1~15절), 그 요지는 넘치게 가진 자가 궁핍한 자의 하나 남은 소박한 것까지 빼앗은 것은 결코 신이 주려는 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오늘의 개신교는 많이 가진 자에게 더 많이 받으리라 축복 신앙을 강조해요. 게다가 그런 신앙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못하게 하고요. 왜 그렇게 됐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 흔히 샤머니즘의 잔재라고 쉽게 말하지만, 대부분의 셔머니즘 신앙은 없는 자들이 나누는 복에 초점이 있지, 풍요한 자가 남의 것을 빼앗는 데에 초점이 있지 않아요. 즉 샤머니즘은 기독교의 이런 잘못된 신앙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어요. 우리가, 우리 기독교가 하나님의 복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제도화한 결과인 거죠.
여기서 성서 해석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어요. 기독교는 경전 중의 경전, 슈퍼경전을 강조하는 신앙을 발전시켜왔어요. 하지만 유교나 불교에는 슈퍼경전이 없어요. 경전끼리 소통하고 견제하고 공존하는 전통을 갖고 있죠. 슈퍼경전 시스템은 성서 해석에 관산 독점적 지배가 불가피한 체계에요. 일반 사람이 끼어들 수 없게 봉쇄되어 있고요. 목사가 성서를 해석하면 신자들은 그 해석에 ‘아멘’ 해야 하지, 해석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거에요. 성서에 대한 신앙이 신자들에겐 순응의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죠.
교회는 성서 해석만이 아니라 여러 순응 장치들로 가득해요. 예컨대 예배당의 공간 구조가 그래요. 성직자의 공간이 따로 있고, 그 공간은 높은 단을 갖고 있죠. 그 단에는 목사만 올라갈 수 있고요. 설사 그 성직자가 어떤 신자 개인 혹은 집단과 담함하지 않을 수 없더라도, 심지어 누군가에게 꼭두각시처럼 조동될지라도, 목사의 입을 통해서 신의 메시지, 아니 권력이 장악한 교회의 메시지가 전달되지요. 해석을 독점한 이(들)의 입장에 지나지 않을 그 모든 것이 성지자를 경유해서 전달되는 거에요.
특히 최근 대형교회의 예배당은 그런 순응의 장치를 최적화하고 있어요. 예배당은 대개 부채꼴 모양인데, 부채꼴의 꼭지 부분에 단이 있어요. 그 단이 목사의 장소이고, 예배 때 모든 신자가 단상의 목사를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배당이 워낙 크다 보니 목사의 모습은 작은 막대기처럼 보이죠. 그래서 목사 위에 대형스크린을 걸고 카메라로 목사를 클로즈업해요. 실제 목사는 카메라를 보며 말하지만, 스크린의 목사는 모든 신자들 각각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여요. 신자들이 스크린을 바라보는 한, 신자들의 눈은 카메라 렌즈와 같은 시선이 되기 때문이에요. 이런 공간 구조는 신자들 각자로 하여금 목사가 마치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게 하죠. 결국 자기를 바라보는 목사의 그 눈길을 의식하면서 신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목사의 바람에 맞추려고 노력하게 돼요. 이것이 바로 교회 공간이 담고 있는 선응의 메카니즘입니다.(215~217쪽)
작은 교회 vs 큰 교회
<김진호> 한국 개신교 교히 중 대형교회는 대력 900개쯤 됩니다. 2004년 기준으로 1.7퍼센트 정도에요 .98.3퍼센터의 교회는 대형교회가 아닌 거죠. 그러나 98.3퍼센트 가운데 대형교회를 꿈꾸지 않는 교회가 몇이나 될까요? 단언컨대 극소수의 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가 대형교회를 지향할 겁니다. 메시지, 프로그램, 비전, 일상화된 말에서 성장지상주의적인 것을 빼면 남는 게 거의 없을 만큼 절대다수의 교회가 성장주의에 경도되어 있어요. 그런 점에서 대형교회는 아니지만 대형교회가 되기를 꿈꾸며 성장지상주의적 요소들로 점ㅂ철된 교회를 저는 ‘딱퉁대형교회’라고 불러요. 즉 교회들 가운데 절대다수는 대형교회와 짝퉁대형혀괴라는 얘기에요.(217쪽)
일반 교회는 외부에 쓰는 돈이 교회 유지비의 10퍼센트 정도 되더라고요. 그에 비해 청파감리교회는 50퍼센트 정도입니다. 김기석 목사의 청파감리교회는 더 커질 수 있는데도 건물에 돈을 쓰지 않아요. 예배당 안이 삐걱대도 절대 교회 건물에 투자를 한 합니다. 장로들도 거기에 동의하고요. 그 대신 힘없는 시골 교회를 돕는 일에 크게 힘을 보탭니다.
<김응교> 이제는 교회에 가지 않고도 인터넷으로 예배할 수 있는 시대잖아요. 일요일만이 주일이 아니라, 축도하고 주기도문을 외우고 난 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가 진짜 주일이죠. 일상이 성소이자 예배라는 개념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는 좋은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220쪽)
<김응교>
존재론이 관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확장될 단초를 예수 그리스도가 고안해냈는데,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을 도리어 노예화하죠. 노예도 쉬고 당나귀도 쉬라고 한 일요일(안식일)에 밤늦게까지 교회에서 봉사하고, 이미 지친 상태로 월요일 아침 출근하는 식이에요. 이런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해요. 가나안 성도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평일에도 교회를 신도 외의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등 사회 안으로 교회가 적극 개입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227쪽)
<김응교>
니체(Friedrich W. Nietzsche)는 “구제가 구걸을 키운다”고 했죠. 기독교적 구제가 구걸을 키운다는 말이 정확한 것 같아요.(227쪽)
한국은 구호개발형 선교 기금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걷히는 나라예요. 어느 연예인은 수십몀 이상의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학비나 생활비 등을 보내주고 있어요.(229쪽)
<김진호> 성직자는 기부하는 일에 대해 축복을 주지만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해요. 이 성직자는 교회가 돈세탁하는 역할을 하듯 부패를 종교적으로 세탁해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에요.(230쪽)
<김응교> 방금 말씀하신 해석이 정말 좋네요. 도움을 준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도움을 받은 이가 구원자가 된다는 게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인 것 같아요.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 에필로그에서도 라스꼴리티꼬프가 소냐 덕분에 자유와 사랑을 깨았다고 하죠. 강도 만난 이가 사마리아인을 구원하고, 쏘냐가 라스꼴리티꼬프를 구원한다는 생각을 실천적으로 성찰하고 연구했으면 합니다.
돕는다는 생각, 돕는 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생각은 위험한 것 같아요. 물론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활동, 돌봄이 필요한 아동을 후원한다든지 연탄을 나른다든지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구제가 죄를 세탁하는 기능을 하면 안 되겠지요. 나누면서 나눔의 구조도 늘 성찰해야 합니다.(235~236쪽)
이 책의 마무리 글.
<김진호> 우리가 권력을 비판하고 권력이 잘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질문을 던질 때, 그 질문 속에는 그러한 쇄신의 철저성까지 포함돼야 해요. 그것이 바로 사회적 영성 수행법이라는 것이지요.(236~23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