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0장 10절
바울로가 내려가서 그 청년을 부둥켜 안고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마시오. 아직 살아 있소." 하고 말하였다. <사도행전 20장 10절, 공동번역>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도무지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을 것 같은, 아니 성경에 등장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오늘날 만약 교회에서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면 9시 뉴스 첫 소식과 신문 1면을 차지하며 세간의 비판이란 비판은 다 들었을만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바울의 강론을 듣고 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에서 떨어져 죽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사도행전 20장 9절, 새번역>
때는 주일 저녁, 내일이면 드로아를 떠나야 하는 바울 일행과 함께 떡을 떼기 위하여 모든 교인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 모습에 조금이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길어도 너무 긴 시간동안 강론이 계속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상하게 이 날 저녁 T.M.T(Too Much Talker)가 되어, T.M.I(Too Much Information)을 전하게 됩니다. 그는 짧은 시간에 정확하고 간결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날 밤은 너무도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런 열정적인 바울의 강론을 듣고 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많이 켜져진 등불과 더불어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던 현장은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습니다. 저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길게 강론을 했는지 깨닫게 된 바울이 유두고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두고를 부둥켜 안았을 때 다시 유두고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저는 오늘 이 사건을 통하여 2021년 현재를 살고 있는 교회와 청년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오늘날의 교회 같았고, 유두고가 오늘날 교회의 청년의 모습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T.M.T가 되어 T.M.I를 전한 지 너무도 오래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 속한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죽어가고 있고 죽었습니다. 아마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공감하실 것입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청년들을 찾아볼 수 없다’, ‘꼰대 같은 교회에서 숨 쉴 수 없는 청년들 교회를 버리다’, ‘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가’ 등등 이런 머릿말을 가진 기사는 이젠 너무도 쉽게 접하게 되는 이야기들입니다. 정말 이 말들이 피부로 와 닿습니다. 그렇게 가득했던 청년들은 이제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든든히 서게 만들었던 40% 가까운 허리였던 청년들의 수는 이제 코로나와 맞물려 4%대로 급격하게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 성도들의 연령을 보면 이미 ‘고령화’가 시작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의 연령 피라미드가 ‘호리병’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좀 더 흐르면 확실한 역삼각형 형태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사도행전 20장에 등장하는 '바울과 유두고'의 이야기는 한 줄기 희망의 빛처럼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원인을 분석하고, 원인 분석을 위해 책을 읽기 급급했던 한국 교회에, 그저 청년들을 비난하며 손가락질하고 있던 한국 교회의 어른들에게, 오늘 바울이 하고 있는 행동은 무언가 돌파구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사도행전 저자였던 누가는 바울의 그 행동을 하나 하나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울이 내려가서, 그에게 엎드려, 끌어안고 말하기를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하였다. <사도행전 20장 10절, 새번역>
바울은 유두고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잠시도 지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위에 선 채로 교인들에게 어떠한 지시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당장 내려갔습니다. 직접 유두고에게 내려갔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당장, 직접, ‘내려가야’ 합니다. 높이 올라 있는 강단에서 내려가, 청년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너무 오랜 시간 지체했습니다. 여전히 강단 위에서만 지시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어른들이라고 불리는 목회자와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들을 포함한 분들이 강단 위에서만 지시할 것이 아니라 당장, 직접, 청년에게로 내려가야할 것입니다.
2021년을 살고 있는 청년들은 잘 아시는 것처럼 ‘N포세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삼포세대를 넘어,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하는 오포세대로 불리기 시작했고, 결국은 건강과 외모관리까지 포기한 칠포세대, 인간관계와 희망까지 포기한 구포세대, 꿈도 희망도 없는 삶에 비관하여 삶까지 포기한다는 십포세대 혹은 완포세대, 전포세대까지 와 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 취업, 내 집 마련, 건강, 외모관리, 인간관계, 희망, 삶...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세대가 바로 청년 세대라는 것입니다. 정말 매일을 죽어가는 것 같은 청년들이기에 교회와 교회 어른들은 더 늦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려가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행동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이 유두고에게 한 그대로, 교회가 청년들을 '부둥켜 안아주는 것'입니다. 내려가는 것까지는 했는데, 내려가서 더욱 거센 비난을 하거나, 잔소리를 할 거면 안 내려가니만 못합니다. 내려갔다면, 이제는 청년들을 따뜻하게 '부둥켜 안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유두고에게 간 후 유두고를 감싸 안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공동번역이 참 멋지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울로가 내려가서 그 청년을 부둥켜 안고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마시오. 아직 살아 있소." 하고 말하였다. <사도행전 20장 10절, 공동번역>
‘부둥켜 안고’ 아무리 들어도, 계속 곱씹어 보아도 이 구절은 정말 좋은 구절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요즘 교회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든 구절입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더 이상 교회는 부둥켜 안아주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어느새 세상 논리가 침투하여 서로 비난하기 바쁘고, 헐뜯기 바쁘고,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와 다르다고 하면 거부하기 바쁜 공동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힘들 때도, 외로울 때도, 어려울 때도,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축하할 일이 있을 때도, 거의 모든 상황에서 부둥켜 안아주던 교회가 있었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유두고를 부둥켜 안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성경에서 이 ‘부둥켜 안고’의 현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하여 언제나 극적인 만남과 화해와 용서가 있었던 눈물 바다였던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에서가 달려와 야곱을 맞았습니다. 그는 야곱을 부둥켜안으며 두 팔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추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울었습니다. <창세기 33장 4절, 우리말성경>
그리고 나서 요셉은 친동생 베냐민의 목을 부둥켜 안고 울었다. 베냐민도 그의 목에 매달려 울었다. <창세기 45장 14절, 공동번역>
요셉이 형들과도 하나하나 다 입을 맞추고,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제야 요셉의 형들이 요셉과 말을 주고받았다. <창세기 45장 15절, 새번역>
요셉이 병거를 갖추어서 고센으로 가서 자기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이했습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만나자 목을 부둥켜안고 한참 동안 울었습니다. <창세기 46장 29절, 우리말성경>
이 말씀들처럼 교회와 청년 사이에 부둥켜 안는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의 어른들이 청년들을 부둥켜 안아 주며 눈물로 화해하는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겨누었던 비판의 칼날을 내려놓고 용서와 화해의 현장이 되도록 서로 부둥켜 안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 첫 발걸음을 교회가, 교회의 어른들이 먼저 내딛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무조건 잘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년들도 분명히 달라지고 성숙해져야 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교회와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청년들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부둥켜 안아줌’ 없이 진행되는 조언은 그저 잔소리일뿐이고, 꼰대가 들려주는 말로만 받아들일 뿐입니다. 진정 서로의 언어가 진심 그대로 오고 가기 위해서는, 세대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교류가 생기기 위해서는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만남의 현장, ‘부둥켜 안아주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려가서 청년들을 부둥켜 안아 주십시오.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이해하고,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며, 다시 하나가 되도록 먼저 행동해 주십시오. 청년들의 마음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그들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청년,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라고 희망을 선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믿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다시 살아난 청년들을 통하여 온 교회가 위로받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사도행전 20장 12절, 새번역>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 간절한 소망으로 기도를 부탁 드려봅니다. 한 주간 이 땅의 청년들을 위해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의 어른들이 오늘 바울처럼 행동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분이 있으시다면 지금 내가 만날 수 있는 청년에게 내려가, 부둥켜 안아주심을 실천해 주시길 바래봅니다. 청년들은 분명히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믿습니다.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Pray For Christian Youth', 청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우리 다함께 기도합시다!
https://www.youtube.com/watch?v=cE9JhJSkAfo
https://www.youtube.com/watch?v=FbxLLg0ja2A
https://www.youtube.com/watch?v=PIv216OPOBw
https://www.youtube.com/watch?v=QCTtOp4AL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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