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도솔암 수행일기
수도암주지 원덕스님
(7)요중공부擾中工夫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던 쇠꼬챙이가 밖에 나가지 않고도 도솔암까지 운반됐으니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런 감상에만 젖어있을때가 아니었다.
장마는 점점 가까워지고 우선 빨리 계획한대로 축대를 쌓아야만했다.
돌을 운반하기위해서는 적어도 200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가져와야하는데,
하루 공양 두 끼 먹고 하루 종일 돌을 운반한일은 너무나 힘이 들었다.
손수레라도 있으면 좀 나을 텐데 맨손으로 돌을 나르는 일은 너무나 비경제적이었다.
큰 돌을 나를 때는 양손으로 번쩍 들어서 배위에다 밀착시키고 운반했는데,
돌을 운반하면서 두 번 죽을 뻔했다.
큰 돌을 나르는데 는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힘을 적게 들이려면 손으로 돌을 들고 있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될 수 있으면 빠른 걸음으로 운반했는데,
돌을 들고가다가 어쩌다 이끼긴 돌을 밟았는데 큰 돌을 안고 그대로 뒤로 <쭐덕!>미끄러졌는데,
그 순간 나는 “이젠 죽었구나!”. 생각을 했다.
큰 돌을 안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으니 장파열 이나 허리가 부러질 줄 알았는데,
순간적으로 보니 큰 돌이 배위에 있지 않고,
왼쪽 갈비뼈 옆의 땅을 <쿵!>하고 찧었다.
또 한 번 역시 커다란 돌을 운반하다가 뒤로 돌을 안고 넘어졌는데 이번에는 오른쪽 옆구리 바로옆 땅을 찧었다.
처음에는 신발을 예비군들이 신는 국방색 농구화를 신고 작업을 했는데 며칠못가서 신발이 모두 떨어져서, 장화를 신고 일을 했는데 장화 밑굽이 맨들맨들하게 모두 닳아서 너무나 미끄러웠다.
축대를 쌓기 위해서 무너진 축대 앞에 돌을 운반해 놓고 축대를 쌓기 시작했는데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발밑은 낭떠러지라서 두발을 좁은 철판위에다 의지하고 커다란 돌을 위에서 끌어다 밑에다 내려놓는 작업은 너무나 위험하고 힘이 들었다.
무슨 일이고 간에 두 명 이상이 일을 해야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작은 돌 하나만 필요해도 다람쥐처럼 위, 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자니 체력소모가 너무 컸다.
축대위에 한사람만 더 있다면 위에서 돌을 건네주면 밑에서 돌을 받아서 작업하면 훨씬 쉬울 텐데 혼자서 작업을 하다 보니 너무나 힘이 들어 코피가 터졌다.
잠깐위로 올라가 지혈을 시켰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코피가 났다.
설상가상으로, 쇠기둥에다가 철사를 감아서 묶고나서는, 펜치(뻰찌)로 철사를 <딱!>끊었는데 둥글게 감겼던 철사가 반동으로 <휙!>돌더니 나의 왼쪽 눈을 찍어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일을 멈추고 간신히 기어 올라가서 거울를 보니 사정없이 눈에서 피가 흐르는데,
자세히 보니 왼쪽 눈 검은 눈동자 바로 옆에 검붉은 구멍이 나 있었다.
눈동자를 다쳤다면 실명 했을 텐데 다행히 눈동자 바로 옆에 철사가 찍혔기 때문에 실명은 모면 했지만 통증이 너무나 심했다.
눈 위에다 수건을 대고 한참을 마루에 누어서 있었는데, 병원을 가기는 가야되는데 공부가 성취 되기 전에는 산중 문을 나가지 않기로 했으니 나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식하게 눈을 다쳤는데 병원에 않갈수도 없었다,
<사람의 몸이 만 냥이면 눈이 구천 냥>이라고, 그만큼 눈이 중요한데 참으로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화두를 놓지 않고 계속 정신을 차렸다.
이왕에 불보살님을 믿고 뛰어든 공부이니 죽고 사는 것은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하산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두 시간 정도 마루에 누어 있다가 다시 밑으로 내려가서 축대를 쌓기 시작했다.
눈은 다쳐서 퉁퉁 부었고 코에서는 코피가 나와 숨쉬기가 무척 곤란했다.
더욱이 무거운 돌을 다루다보니 큰 돌을 가지고 축대를 쌓다가 이리저리 부딪치니 손에서 피가 나와 장갑을 두 켤레 꼈는데도 장갑이 피로 빨갛게 물이 들었다.
이러한 힘든 일을 위험한 낭떠러지 위에서 하다 보니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난생 처음 혹독한 고생을 해봤다,
그런데 이때에 갑자기마음이 요동치더니 밖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아주 강하게 일어났다.
그동안 정중에서 조용하게 정진할 때는 모든 욕망이 끊어진 듯 했는데,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니 밖에 나가서 실컷 돌아다녀 보기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맘대로 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하산해서 만행이라도 떠나고 싶었다.
그때 나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평소에 정중에서 조용히 공부 한때는 아주 여여(如如) 하게 정진이 잘되고 망상 잡념이 없는 듯 했으나 아주 극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니 본인의 업습(業習)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이럴 때 인욕하고 참으며 정신을 차리어 화두를 든다면 한꺼번에 몇 경계씩 공부의 진척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나는 대로 그대로 업습에 끄달여 행동에 옮기면 업이 녹지 않는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이기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요중공부인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참선을 앉아서만 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않다.
참선을 오래한 스님들도 고정관념에 쌓여서 이 공부 경계에서 많이들 방황한다고 들었다.
물론 공부를 정법으로 옳바르게 하여 열심히 수행 했을 경우에만 요중공부가 필요한것이다.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반드시 요중공부를 거쳐야 성불할 수 있는 것이다.
마조도일 선사는 중국 당나라 때 스님으로 사천의 한주(漢州)출신으로 남악회양 선사를 만나 크게 깨치고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하루는 회양선사가 물었다.
“좌선은 무엇하려하는가?” “성불하려고 합니다.”
마조의 대답에 회양선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기와 장을 하나 집어 들고 바위에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이상히 여겨 물었다. “스님, 기와 장을 왜 갈고 계십니까?” “응, 이 기와 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마조는 무슨 뜻인지 몰라 또 물었다. “ 기와 장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이에 회양선사가 마조를 보며 말했다.
“기와 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듯이 좌선만 해서는 성불할 수가 없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소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에 채찍질을 해야 되느냐? 소에 채찍질을 해야 되느냐?” 마조가 말을 못하고 서있자 회양선사는 준엄하게 꾸짖었다.
“좌선한다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부처를 흉내 내는 것이니 그것은 부처를 죽이는 일이다. 또 선은 앉거나 누워서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이란 영원한 것이어서 어떠한 형태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니라.”
마조는 여기에서 크게 깨닫고 회양 선사를 10년간 모시다가 강서(江西)로 가서 방장이 됐다.
티베트의 성자 ‘밀라레빠’는 스승 ‘마루빠’ 에게 공부를 배울 때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돌로 탑을 세우라고 해놓고 다 쌓으면 트집을 잡아서 잘못 쌓았다고 무너뜨리고 다시 쌓기를 수없이 반복하다 탈진하여 쓰러지기도 하고,
스승한테 “스승님의 법은 무엇인데 공부법은 일러주지 않고 만날 일만 시키냐고 물었다가, 스승인 ”마루빠“가 몽둥이로 때리자 창 너머로 도망을 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스승을 믿고 끝까지 공부를 했다한다.
동굴에서 혼자 생활할 때는 식량이 없어서 풀씨를 죽을 쒀 먹기도 했다.
몇 년을 풀씨로 죽을 쒀먹은 탓에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초록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다른 성자들은 여러 생을 수행을 하면서 최고의 성취를 얻은 것과는 달리 단 한생을 통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밀라레빠’는 가장 최악의 조건과 환경에서 해탈하여 깨달은 성자이시다.
우리 불자님들은 불, 보살님이나 역대 조사들이 자비스러운 것만을 생각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역행보살(逆行菩薩)이 계신데 그 보살님은 공부하는이를 수행시키기 위해서 혹독한 시련을 주고,
보통사람이 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행奇行을 하는 보살을 말한다.
‘밀라레빠’의 스승 ‘마루빠’도 그렇고,
가마솥을 9번이나 고쳐 걸게 했다는 "구정스님"의 스승도 역행보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호에 계속--
첫댓글 수행하시는 분들은 거의 다 애기같거나,
20년 젊게 보여서 실수 한답니다.
원래 나이보다 미소년이거나, 옆 집 할아버지 내지는 아저씨같은 ...
이런저런 사람이다 라는 느낌이 들지 않거나(어떤사람인지 파악이 되지 않는...)
특정한 상(당사자의 생각에 따라 보여지는 얼굴내지는 생각)이 없어 보이시기도 하더군요..
저의 주관적인 생각엔 ...
현재 원덕스님은 연세가 좀 있으시나 실제 법체를 뵈오면 한 15
이 수행일기 끝나면 직접 도솔암 찾아 갈 계획 세워 봅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