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제 13장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 - 11:19-30예서 언급되었던 안디옥 교회가 새로
운 이야기의 장소적 배경으로 언급되고있다. 그리고 여기서 여러 명의 교사와 선지자
들이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안디옥 교회는 11:19에 언급될 당시보다 많은 성장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언급된 선지자들과 교사듸은 설립된 지 얼마되지 않은 안디
옥 교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직분자들로 보인다. 한편 11:27에서 안디옥 교회에 선지
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음이 언급되어 있으므로 본절에 언급된 선지자들에 예루살렘
에서온 선지자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여기서 언급된 선지자들은 아가
보와 같이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기능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목회적 직
분을 지녔으므로 예루살렘예서 왔던 선지자듸을 제외한 본래 안디옥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선지자들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Lenski). 그러나 이 주장을 취할 경우 선지자
들이 함께 언급되는 '교사들'(* , 디다스칼로이)과 엄격하게 구분
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허비(A.C. Hervey)는, 선지자들을 당시 교회의 정규 전도요원
으로 생각하여 가르치는, 기능이 강조된 교사들과 구분시키고있다. 그리고 아사노 중
이찌는 선지자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은사를 구비한 사람으로 이해하여
지적인 입장에서 신앙을 변증하며 성도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구분하기도 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고전 12:28, 29와 엡 4:11에서 함께 언급되어 별 구분없이 비슷한 기
능을 가지고 교회 사역을 담당한 자들로 생각될수 있으나 선지자란 표현 자체가 예언
과 대언(代言)의 은사를 받은 자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으므로 그 둘은 서로 구분되
어야 한다. 한편 누가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그룹 즉 신지자들과 교사들의 명단을
언급하면서 바나바를 맨 처음에 언급하고 사울을 맨 나중에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안
디옥 교회에 있어서 중심 서열 내지 신앙의 연륜에 따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
서 바나바를 비롯하여 시므온, 루기오는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 오기 이전부터 직분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11:20). 그러나 누가 선지자인지 누가교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따라서 혹자의 주장처럼 바나바와 시므온 그리고 루기오는 선지자로,
마나엔과 사울은 교사로 보는것은(Meyer, Longenecker, Hervey) 분명하지 않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 니게르라는 말이 검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때 시므온은 아
프리카 출신으로 볼 수 있다(Alford, Longenecker, 아사노 중이찌). 그렇다면 이 사람
은 예수의 십자기를 졌던 구레네 시몬(눅 23:26)과 동일인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
나 만일 동일인이었다면 루기오를 구레네 사람으로 언급하면서 구레네 사람으로 더 잘
알려진 시몬을 굳이 니케레네 사람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동일인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 '젓동생'이란 같은 젖을 먹고 자란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
면 친한 친구를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 표현이 헤롯과 마나엔이 서로 매
우 친밀한 사이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13:2
주를 섬겨 금식해때 - 27:9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금식(禁食)절기를 정해 놓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를 섬겨'라는 단서를 달아 유대교적인 금식과 구별하고 있다. 여
기서 '섬기다'는 봉사한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행위를 뜻하기도 한
다. 본절예서는 예배행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에'라고 번역했다.
성령이 가라사대 - 성령의 지시가 기도하는 무리들에게 임하였는데 성령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앞절에서 언급한 바나바 외에 4명이다. 성령의 지시는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선교를 위한 사역자들로 구별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 교회는 이
방 선교를 위한 중심지가 되며 성령의 지시로 인해 사울은 사도로서 그 권위를 인정받
게 된다.
따로 세우라 - 름 1:1; 갈 1:15에서는 이 표현이 바울의 소명(召命)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특별히 사울이 이방인을 위한사도로 임명받은 것을 강조해 주고
있다.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 여기서 언급되는 금식 기도가 2절에서 시작되었던 금식
기도와 동일한 것인지(Lenski) 아니면 2절의 금식기도가 끌난 다음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하기 위하여 일종의 임명 예배를 다시 했다는 것인지(Alford, Haenchen, Hervey)
분명하지 않다. 두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특별히 정해진 예배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 따라서 2절과 3절의 진술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안수하여 보내니라 - 바나바와 사울에게 안수(按手)를 베풀고 선교사로 파송한 주
체가 누구인지 본절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마 1절에 언급된 시므온과 루기오 그리
고 마나엔 이 세 사람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것이다. 그 세 사람이 그들에게 안수했다
고해서 안수받은 두사람보다 직책상 높은위치에 있었다고는 말할수 없다. 다만 그들은
성령의 지시로 두 사람을 안디옥 교회의 대표자로 혹은 사도로 인정하는 의식을 집행
했을 따름일 것이다.
=====13:4
실루기아에 내려가 - 바나바와 사울의 일행이 실루기아(Seleucia)로 내려간 것은
배를타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안디옥은 내륙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실루기아를
외항(外港)으로 삼아야 했다. 실루기아는 안디옥 서쪽 약 26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
고 있다. 이 도시는 B.C. 300년경 셀류시드(Seleucid) 왕조의 첫 왕 셀류쿠스
(Seleucus) 1세 니카토르(Nicator)에 의해 개항되었다.
구브로에 가서 - 이곳은 사울과 동행한 바나바의 고향이고(4:36) 안디옥 교회구성
원의 일부가 이곳 출신의 사람들이었다(11:20). 따라서 첫 선교지로 구브로(Cyprus)가
선택된 것은 바나바와 구브로 출신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3:5
살라미 - 구브로섬 동쪽에 위치한 해안도시이다. B.C. 58년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
으며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으로 인해 상업 도시로 커갔다. 그러나 A.D. 116년 트라
야누스(Trajanus) 황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유대인의 여러회당에서 전할새 - 살라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회당도 여
러 곳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있는 기회
를 포착했다. 비록 그들은 이방인들의 사도로 전도 여행을 떠났지만 실제적으로 전도
는 주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유대인들도 그들의 전도 대상
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요한을 수종자로 - 요한은 12:25에서 언급된 마가 요한을 가리킨다. 그는 아마 두
사람을 대신해서 세례를 베푸는 일을 도왔을 가눙성이 있다(Alford). 왜냐하면 바울은
전도 여행시 몇 사람에게만 직접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고전 1:14-17). 또한 요한
은 두사람의 여행 경비를 관리하는 등 전도 여행 중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도왔을
것이다.
=====13: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 바나바와 사울의 일행은 살라미의 반대편 즉 구브
로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인 바보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살라미로부터 약 180여
km의 거리에 있다. 본래 바보(Paphos)는 두 군데가 있었다. 즉 한 군데는 옛 베니게의
도시이고 여기서 언급된 바보는 이곳으로부터 서북쪽 약 11km의 거리에 있는 로마령
의 도시를 가리킨다.
바예수(* , 바르예수스) - '예수의 아들' 혹은 '여호수아의 아
들'이라는 뜻을 가진 유대식이름이다. 바예수는 총독 관저에서 일하는 유대인으로 그
의 신분은 '거짓 선지자 박수'였다. 박수(* , 마고스)는 당시 마술적 또는
주술적 치료 행위릍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여기에 거짓 선지자라고 덧불여진 점으
로 보아 자칭 하늘의 계시자로 행세하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인 그가 그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활동을 지속
했다는 사실은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그의 행동에 미혹되었거나 아니면 총독이
그쁠 보호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를 율법에 따라(레
20:6) 처벌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13:7
총독 서기오 바울 - 서기오 바울(* , 세르기오스 파울로
스)에 대해서 성경의 다른 곳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 더이상 알 수 없다. 그가 글라우
디오 황제 때 티베르강 관리자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F.F. Bruce)도 있지만 정확한
인물 고증(考證)이 어렵다. 다만 누가의 묘사로 보아 지혜있고 유력한 통치자로 추측
할 수 있다.
지혜있는 사람 - '지혜있다'(* , 쉬네토스)는 맡은 본래 신중하고 지
성적이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이 말은 총독의 통치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아마 누가는 총독으로서 서기오 바울이 공명 정대하
면서 분별력이 있는 정치를 한 것을 이 한단어로 묘사향것 같다.
=====13:8
엘루마 - 아람어 또는 아랍어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어는 6절에서 언급된
박수와 동의어다. 본래의 뜻은 요술장이 또는 마법사로 통한다. 그는 총독과 바나바
일행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반(反)기독교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에 따라 총독
서기오 바울의 지혜는 더욱 돋보이게 된다. 즉 측근의 블경건한 술수를 물리치고 바나
바와 사울 일행을 만남으로써 지혜있다는 누가의 묘사가 증명되는 셈이다.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 처음으로 바울(Paul)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후로는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된다.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바울이라는 이
름으로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서 사울이 회계한 이후부터 새사람된 표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있으나(Bengel, Olshausen, Meyer) 이는 주관적추측에 불과하
다. 오히려 바울이라는 이름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는데 서기오 바울을 만난 이후부터
저자가 사울을 로마식 이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Zahn, Lightfoot,
Ramsay, Knowling, Vincent).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식 이름 외에 로마식 이름을
동시에 갖고있는 사람들이 있는데(1:23;12:25;13:1) 특히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
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므로(22:28) 로마식 이름을 가졌을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바울이라는 사울의 로마식 이름을 이제야 언급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제 비로소 사울이 이방선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이방 지역에서는 로마식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여질 것이고 설교에
도 도음이 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성령이 충만하여 - 여기서 누가가 의도하는 바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
다. (1) 모든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로 이끄는 것은 성령의 역사임을 말한다. (2) 거
짓 선지자와 대결하는, 성령이 충만한 바울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제까지 앞세웠던 바나
바로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바울로 옮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10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 - 바울은 엘루마에 대한 일차적인 공격으로서 엘루
마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궤계'에 해당하는 혤라어 '돌로스'(*
)는 '미끼로 잡다'의 '델로'(* )에서 유래된 단어로 '교활', '간교', 또
는 '올무', '미끼' 등의뜻으로 사용된다. 한마디로 사기꾼이라는 말이될 수 있다. 6절
에서 '거짓 선지자'라고 언급된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악행'이
라는 말은 본래 경솔하거나 무절제한 행위를 의미한다(Robertson). 여기서는 부주의하
고 반(反)신앙적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하여금 실족케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귀의 지식 - 이와 같은 저주는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의 저주와 같은 형식을 취하
고 있다(요 8:44). 이 말은 엘루마에 대한 저주이면서 그의 악한 행실에 대한 폭로이
다.
주의 바른깊을 굽게 하기를 - 엘루마의 행위가 '주님의 길을 훼방'(공동 번역)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총독 서기오 바울과 바나바와 바울 일행의 만남이 주님의 뜻
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13:11
주의 손...소경이 되어 - 저주 또는 축복에 대한 묘사로 주의 손이 본서에서 언급
되는데(11:21) 여기서는 성령의 일을 거스른 죄에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을 의미한
다. 진노가 임한 결과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형
태의 징벌은 구약성경에서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묘사되었다(신 28:28,
29).
안개와 어두움 - 눈이 멀어진 상태를 점층적 표현으로 묘사한 듯 하다. 즉 엘루마
의 눈은 안개처럼 희미하다가 어두움처럼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 엘루마가 완전히 실명(失明)하여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는 자칭 선지자라 하여 다
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갈길을 지시해 주는 일을 했지만 지금은 혼자서 걸을 수
도 없어 인도자를 찾는 엘루마의 모습은 거짓 선지자의 상징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13:12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 본 구절은 총독 바울이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결정적
인동기에 대한 설명이다. 엘루마가 소경된 사건이 총독 바울의 회심(回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렇다고 회심을 유발시킨 전체 동기는 아니다. 즉 기적적인 사건이 총
독 바울의 회심에 영향을 크게 준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여기에만 강조점을 둘 수 없
다. 왜냐하면 그가 엘루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바울 일행을 만나고자 했다는점은 바
울의 가르침이나 그에 관한 이야기에 이미 호의적인 입장에서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엘루마가 소경된 사건은 그가 회심하는 데 외형적
동기 부여의 기능을 갖고 있다.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 여기서 '주의 가르치심'은 총독 바울이 엘루마
의 저주를 목격하면서 받은 교훈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의 일을 훼방하고 사기
와 악행을 일삼아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의 비참한 말로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함과 눙력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 - 박수 엘루마의 사건 이후 누가는 여기서부터 바울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누가의 관점에서, 바울이 엘루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총독 서기오 바울을 기독교인으로 회심시킴으로써 선교 사역에 있
어서 지도자격으로 부상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 - 구브로 섬을 떠나 바울 일행이 두번째로 찾은 밤빌리아는
지중해 북단에 있는 소아시아의 남쯤 해안에 접한 지역이다. 해안의 길이가 120km이며
내륙쪽으로 폭이 48km 정도의 이 지역은 동편에는 길리기아, 서쪽에는 루기아, 북쪽에
는 비시디아가 인접해 있다. 그리고 버가는 밤빌리아의 중심 도시로 해안에서 내륙쪽
으로 13km정도에 위치해 있다.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이곳을 들르게 된다
(14:25). 이곳에서의 바울 일행의 선교 행적에 관한 언급은 없다. 아마 별다른 성과가
없었을 것이다.
요한은...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 예루살렘에서부터 바울과 바나바를 동행하여
(12:25) 그들을 도우며 따라왔던(5절) 마가 요한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만 누가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이 떠난 이유에 대해서 학자에
따라 다음과 같이 추측이 다양하다. (1) 사전에 구브로까지만 동행하기로 함. (2) 사
촌 바나바를 따라왔다가 바울이 선교의 주도권을 잡고 바나바가 소외된 데 대한 불만
(Alexander), (3) 향수병, (4) 용기 부족으로 여행을 포기함(Lenski), (5) 바울이 풍
토병에 걸려(고후12:7;갈 4:13, 14) 겁을 먹었음(Ramsay). 그러나 모두 다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쨌든 나중에 요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되는 점으로 보아 바
울은 요한의 귀향으로 크게 실망하고 상심한 듯하다(15:37-39).
=====13:14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 이곳은 안디옥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과 구별되는
곳으로(11:27) 해발 약 100m에 달하는 고원지대이다. 오늘날의 터키 중남부 지방의 얄
바크(Yalvach) 근처의 폐허 지역을 말하며 당시에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바울은3
차전도 여행때에도 이곳을 들르게 된다(18:23).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 셀류쿠스 왕조 때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했으므로 유
대인들을 위한 회당이있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구브로나 이곳에서도 바울 일행이 회당올 먼저 찾은것은 이방
땅에서 동족에 대한 친밀감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방 선교 이전에 유대인에 대한 방문이 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 - 회당의 예배 순서 중 한 부분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율법서는 모세 오경을 가리키며 선지자의 글은 예언서를 말한다. 1세기경의 회
당 예배는 쉐마(신 6:4-9) 기도, 율법서와 예언서 낭독, 그리고 설교나 권면의 말씀과
축복의 순서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성경이 회당에서 낭독되었던 전통은 바벧론 포로
기 이후에 시작되었으며 B.C. 163년부터는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율법서 낭독을 금지하여 예언서만 낭독되었으나 마카비 혁명 때에 다시
율법서가 낭독되었다. 회당에서 성경은 히브리어로 낭독된 다음 다시 아람어나 코이네
헬라어로 통역되었다(Robertson).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 예배순서상 권면의 말씀을 할 차례가 되었는데 회당장
은 바울에게 사람을 보내어 설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당시 예배 중에
설교 또는 권면의 말씀을 담당할 대상을 회당장이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랍비나 방문자에게 설교를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당장은 예배 전에 설교자를 선
정해야지 예배 도중에는 할 수 없었다(Haenchen, Robertson). 그러나 여기서는 예외로
회당장이 예배 도중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게 되는데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예배 시작과 더불어 회당에 들어왔기 때문에 미리 설교를 부탁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
측할수 있다. 이를 통해서 블 때 회당장에 바울 일행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듣고, 그들
에 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할말이 있거든 말하라 -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는 본문의 어투는 '만일'(* ,
에이)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조건적 제안으로서 상대방에게 공손하게 요청하는 말이
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최대한 살려 "두 분께서 혹 격려할 말씀이
있거든 이 회중에 한 말씀 해주셨으며 좋겠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 회당장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바울은 곧바로 일어나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본래 회당 안에서의 설교는 관습적으로 앉아서 하는데(눅
4:20) 바울은 일어서서 손짓까지 하면서 설교를 한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열정적인
웅변가로 보여지게 된다. 아마 누가는 바울을 헬라적인 연설가로 묘사하려 했을지도
모른다(Haenchen). 어쨌든 이러한 형태의 설교는 유대 회당의 전통과는 다른것이었음
에 틀림없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 여기서부터 바울의 설교가 시작된
다. 서두에서 누가는 설교를 듣는 청중이 누구인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해 학자에 따라 다음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이스라엘로 언급된 사람들은 유
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란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이다(Lenski, Robertson). (2)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생에 의한 유대인 및 유
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10:2의 '경건
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
인을 가리킨다(Haenchen, Bruce, Neil).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자들은 이스라엘 벡
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이스라엘 사람에 포함된다. 따라서 (2)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13:17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 여기서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요
약으로 신앙 고백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7장에서 소개된 스데반의
설교와 그형식이 비슷하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는 스데반보다는 간략하다. 바울이 이
스라엘을 구원시킨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방인 청중을 의식하여 언급한 듯하다(Lenski). 즉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출애굽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형태의 호칭은 당시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며 70인역(LXX)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어투였다(Laenchen).
우리 조상들을...백성을 높여 - 본절에서 '조상들'과 '그 백성'이 같은 의미로 사
용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
은 시문학에서는 병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해서 그 구절의 의미를 강조하거나
명확하게 하곤 했다. 만일 본절이 그러한 형식을 취했다면 두 용어는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두 용어가 다른 의미로 쓰여 역사적인 흐름을 차례로 설명하고
있다면 '조상들'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아들을 칭하는 의미이며
'족장들'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 내용과 본절의 바울 설교를 비교해
볼 때 '족장들'로 해석하는 편이 무난하다.
큰 권능으로 - 에굽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능력에 대
한 표현인 '큰 권능'은 70인역(LXX)역에서 영향받은 어투로(Robertson) 출 6:1, 6;신
5:15;시 136:12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13:18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 본 구절은 광야 40년간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
를 함축하고 있다. '참으시고'로 번역된 혤라어 본문은 사본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1) '에트로포포레센'(* ):공동번역 및 많은 영역
성경이 이 용어를 따라 '참으시고'로 번역했다. 이 용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 많은 잘못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참으신 사실을 부각시켜
준다. (2) '에트로포포레센'(* ):영역 성경 중 리빙 바이블
(Living Bible)이 번역을 취하며 몇몇 대문자 사본 및 소문자 사본, 그리고 번역본들
이 이 용어를 선택한다. 이는 '돌보다'는 의미로 신 1:31의 70인역(LXX)에 따른 것이
다. 몇몇 학자들이 (해석을 지지하지만(Holtzmann, Zahn, Bruce)어떤 학자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Haenchen, Marshall, 아사노 중이찌). 사본
상으로 '참으시고'가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있으나 의미상으로는 '돌보시고'가 더 어울
리기에 어느 하나를 강조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신 1:31의 히브리어 본문은 70인
역의 '돌보시다'란 의미보다 '참으시다'의 의미에 더 가깝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는7
'에트로포포래센'(* )이 더 적합하다.
=====13: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정착하게
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약한 본문은 신 7:1과 연관이 있다. 신 7:1에서 그 일곱 족
속이 헷,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로 언급되어 있다.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 '기업으로 주다'에 사용된 동사 '카타클레로노메오'(*
)는 70인역(LXX)에서는 종종 나타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본절에서만 언급된다. 그 뜻은 '몫을 따라 분배하다'란 의미로 유산 상속과도 관계가
있다. 본절에서 이 동사는 각 지파가 받을 분깃에 따라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것에 대
해 적용되었다.
약 사백 오십 년간 - 여기서 450년이라는 기간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계산한 것
인지 이해하기가 매우 모호하다. 특히 사본에 따라 본 구절의 위치가 다르다. (1) 개
역성경처럼 20절에 언급되는 '그후'란 표현 앞에 본구절을둔다(* ,A,B,C). 이 경우450
년은 사사 시대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2) 20절의 '그후' 다음에 450년을 둘 때 애굽
에서 탈출한 후 광야생활부터 사사 시대까지 포함하여 450년이 된다. 첫번째 견해를
취할 경우 애굽에서400년, 광야에서 40년, 가나안 정복 기간 10년을합친 450년을 뜻한
다(Bauernfeind, Lenski, Bruce, Knowling, Weiss, 아사노 중이찌). 그러나 실제로
광야 40년과 사사 시대는 사무엘 이전까지 약 370여 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사무엘
이 사사로 앉으면서 활동한 기간이 다윗왕까지 이어지는 70여 년간으로 계산할 경우
450여년이 된다. 그런데 본문에서 450여 년은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정착하여 왕을 세우기까지의 기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므로 (2)를 따르는 편이
무난하다.
=====13:20
그 후에 - 앞절이 가나안 정복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므로 '그 후'란 가나안 정복 이
후 사사 시대를 뜻한다.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후 이스라엘을 이끌어 갔
던 지도자들을 요약하여 언급하고있다. 가나안 정복 후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렸
다. 이 기간은 가나안 정복 전쟁(B.C. 1405)에서부터 사무엘이 그의 사역을 마치기까
지(B.C. 1017) 약 400여 년이다.
=====13: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 사사 시대가 끌나고 왕정 국가 시대가 언급되고
있다. 왕정 국가의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사무엘이 너무 늙
었다는 이유와 함께 다른 열방들의 왕권 통치에 대한 부러움예서 시작되었다(삼상
8:5). 사실 이러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거부하는 것이
며 신정 시대(神政時代)를 폐지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 백성들의 요구를 하나님은 들어주셨으나 호 13:11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이 분노하여 왕권을 허락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즉 왕권에 대한 요
구는 부당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사울의 통치는 40년간(B.C. 1050-1010) 계속 되
었는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함과 동시에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음으로써 그의 통치
는 끝나게 된다(삼상 31:1-6). 본 구절에서 언급되는 사울의통치 기간 40년은 성경 어
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으므로 다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추측에 의존
한 것으로 보인다(Haenchen, Lenski).
=====13:22
폐(廢)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 바울은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등극을 하나
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사울왕을 '폐하시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표현(호 13:11)임을 보여준다. 이는 왕정국가가 성립되었어도 하나님 개
입이 계속 되었음을 말해 준다. 아마도 바울은 18절의 표현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
순종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참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려는 듯하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 삼상 13:14과 시 89:20을 인
용한 것으로 보이는 본문은 이스라엘의 왕정(王政)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점은 왕가(王家)
의 정통성을 신적인 권위로 세우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열망을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음에 합한'이라는 표현은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구속사에
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인물임을 부각시킨다.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 다윗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는 23절에서 언급되는 메
시야탄생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결국 다윗 선택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
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속한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
엘 역사 속에 나타난 구속사를 이스라엘 백성이 대망하던 메시야에게로 초점을 맞추어
진행시키고 있다.
=====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은 삼하 7:12에서 볼 수 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언약을 맺는 형식을(창 15:1-21) 취하지 않고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주어졌다. 그렇지만 언약 맺음에 있어서 수반되는 축복과 저주, 충성과
복종의 조항이 언급되므로 삼하 7장을 '다윗 언약의 장'이라 부른다. 아무튼 바울은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면서 다윗 언약을 상기시켜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왕통을 이어받았음을 증명하였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 이 말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
님의 언약이 예수안에서 성취되었음에 대한 표현이다. 그런데 본 구절은 약간의 오해
가 발생될 수 있다. 즉 본절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온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
서 예수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소
명자로서의 바울과도 모순되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이스
라엘의 전통적인 메시야 사상에 입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유대인들은, 다윗에
게 약속한 메시야는 다윗 왕국을 강건하게 복원시키는 정치적 인물임을 믿었다(삼하
7:12-16).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메시야에 대해 다앙한 예언이 있다. 즉 수난의 '종'
(사 42:1-7;49:1-7;50:4-9;52:13-53)또는 '인자'(단 7:13), '왕'으로서의 메시야와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슥 4:11-14) 등이 나타난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한 메시야
에게 다양한 상(像)이 복합적으로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으나 유대인들은 굳이 일부분
만을 취하여 메시야를 정치적인 즉 이스라엘에 국한된 메시야로 한정시켜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이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말한 것은 유대
인들의 배타적인 메시야 사상을 말하기보다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예언
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구주임을 권위있게 증언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
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국한시키는 말로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
다.
=====13:24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 바울은 예수의 메시야됨에 대한 권위를 강조하기 위
해 세례 요한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세례 요한을 예수의 권위를 보증하는 데 이용
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었으며 이러한 세례 요한의 회개
의 세례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18:25;눅 3:7-15). 따라서 바울은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증거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청중들에게 이러한 세례 요한의
활동을 회상시켜 그의 말에서 예수의 권위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그는 이 사실이
예수의 권위를 높이는 데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13:25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 이 말은 딤후 4:7에서도 나오는데 헬라적 어투로서 바
울의 독특한 어법이다(Haenchen). 본 구절은 요한이 예수에 대한 증거 사역을 다하였
을 때를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바울이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언급한 의도는 이 표현 속
에 함축되어 있다. 즉 요한 자신이 메시야임을 직접적으로 거부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본문은 눅 3:15, 16과 요 1:19-27의 내용으로 당시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믿었던 유대
인들이 많았음을 반증함과 동시에 요한이 대중들로부터 대단한 신뢰와 인기를 얻었음
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신뢰하는 요한이 직접 자신이 메시야가 아
니라 예수가 참 메시야이며 따라서 세례 요한 자신은 그 증언을 위한 사명자에 불과함
을 분명히 밝혔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를 메시야로 확증하고자 한다.
=====13:26
형제들 - 청중들을 부르는 이 말은 회당 안에 모인 유대인들과 개종한 이방인들 및
회당 예배에 참석한 이방인들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청중을
다시 부름으로써 주위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의 설교를 본론으로 이끌었다.
아브라함의 후예 - 이 말은 혈통적인 유대인들을 제한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도 의미한다. 이 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6절 주
석을 참조하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 본 구절은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들로 이해된다. 이에 대해서도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 본 구절을 헬라어 본문에 따라 직역하면
'이 구원의 말쏨이 우리에개 보내졌거늘'이란 의미가 된다. 개역성경은 주어를 하나님
으로 전제해서 보내신 주체(主體)인 하나님을 강조했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구원의 말
씀'이 강조되었다. 본절부터가 바울의 설교에 있어서' 본론 부분에 해당하므로 당연히
'구원의 말씀이 강조되어야 한다. 한편 '우리에게'란 표현은 어떤 사본에서는 '너희에
게'로 언급되어 있다. 본절의 구원의 말쏨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없이 주어
졌음을 볼 때 '우리에게'가 무난하다.
=====13: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 - 바울은 예수를 처형했던 주범을 언급하고있
는데 이것은 누가의 견해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를 처형
한 장본인들이 이스라엘 종교.정치 지도자들임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눅
23:1-25).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 15절에서 언급
한 바 있듯이 그들은 예배때마다 예언서를 읽지만 예언서의 올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
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구셰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 같은 바울의 지적은 유대 지도
자들의 무지함을 강조하며 또한 예수의 처형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응하게 하였도다 - 결국 예수의 불법적인 처형도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이미 제시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밝히는 바울의 설교는 3:18에서 언급되는 베드로의 설교와 일치
되고있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와 바울은 신학적으로 동일성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지만 이 두 설교가 누가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누가 자신의 신학이라고 보
아도 무방할 것이다(Haenchen).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나 바울의 설교에서 같은 내
용을 언급하여 초대 교회 시대에 있어서 케리그마가 어느 지역에서나 동일했음을 보여
준다.
=====13:28
죽일 죄를 하나도 채지 못하였으나 - 본 구절은 예수의 무죄함을 강조한다. 이는
눅 23:14, 15에서 언급된 빌라도의 무죄 선언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의
무죄 선언과 눅 23:14, 15에서의 무죄 선언의 주체를 구분하고있다(Haenchen). 즉 그
는 눅 23:14, 15에서는 빌라도가 무죄를 선언한 것이고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무죄함을 입증한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죄가 없으신 예수에 대한 무죄 선언은 재판
과정에서나 신학적으로나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13:29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 바울은 예수의 재판과 처형을 이미 성경에 예언된
바의 성취로 이해하며 예수 사건을 전체 구속사의 핵심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재확인하면서 부
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즉 장사지내고 무덤에 돌어갔다는 점이 예수의 죽음을 분
명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바울은 믿는 듯하다. 여기서 '십자가'라는 말 대신 '나
무'라고 언급한 것은 신 21:23에서 언급된 예언과 일치시키려는 바울의 의도로 보여진
다. 한편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복음서처럼 자세하게 설명하지않았다. 이는 바울의 관
심이 예수의 완전한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구속사적 의의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데 있
음을 보여준다.
=====13:30
하나님이...저를 살리신지라 - 부활신앙에 대한 고백은 초대 교회에서 이미 공통된
교리로 고정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15;4:10). 그리고 예수를 부활하
게 한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정죄와 처형을 하나님께서
불법적이고 부당한 것으로 보증하셨음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예수의 말과 행동이 하나
님에게 정당한 것으로 용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13: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 - 본 구절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동행했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복
음서에서도 증언하는 부활 목격자는 매우 다양하다. 즉 마태는 예수의 부활 현현(顯
現)의 장소를 갈릴리로 제한시켜 언급하고 있으며(마 28:7, 10, 16) 마가 역시 마태와
동일하다. 요한은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각각 부활 현현이 있었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
다(요 20장;21:2, 14). 또한 누가는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가 예수의 부활 현현을
목격했으며(눅 24:18) 예루살렘에 있던 열 한사도와 그 외의 추종자들도 목격했다고
기록했다(눅 24:33). 이와 같이 각 복음서마다 부활 현현의 장소와 대상이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도 고전 15:6에서는 열 두사도와 500명이 넘는 사람
들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 전반에 걸친 부활 현현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할 때 본문의 의미는 불특정한 같릴리 출신인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10:39-41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처럼 사도들을 지칭하는 것
으로 이해할 수 있다(Haenchen, Bruce).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다메섹 경험
을(9:1-8)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고전 15:6에서 언급한 500명의 목격에 관한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본문의 내용은 저자인 누가의 관점에서 묘사된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이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서 언급된 바처럼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출신의 예수 추종자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러 날 - 여기서 언급한 부활 현현의 기간은 1:3에서 언급된 400일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Haenchen, Robertson, Beyer).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사람들이 부활의 산증인임을 언
급하는데 바울 자신이 그 증언자에 포함되는 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
나 32절에서 본절의 증인들과 구분하여 '우리도'라고 바울 자신과 바나바를 언급한 점
으로 보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목격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10:39-41).
=====13:32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 - 이 약속은 23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한다. 바
울은 롬 4:13과 갈 3:16에서도 같은 형태의 진술을 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오셔서 사역했음을 밝혔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이단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믿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이 성취된 소식임을 강조
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와 무지를 벗겨주고자
노력했다.
=====13:33
우리 자녀들에게 - 몇몇 사본들에는(* ,A,B,C,D 등) 약속이 성취된 세대가 '우리
의자녀들'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본에서는(C,E,P 등) '그들의 자녀된 우리에
게'로 언급되었다. 본절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세대에 대한 것이므로 '우리 자녀
들에게'란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바울은 지금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대의 세대를 지
칭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대부분의 영역처럼 '그들의 자녀된 우리에게'로 해석
되는 것이 무난하다.
너는 내 아들이라 - 시 2:7을 인용한 본문은 본래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대관식
(戴冠式)때 사용되던 시로서 이스라엘 왕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 왕이 하나님으로부
터 다시 태어나 하나님과 부자(父子)의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이 시편의말
씀을 예수에게 적용시킨 것은 바울의 독특한 인용이 아니다. 사실 복음서에서도(막
1:11; 눅 3:22) 예수가 메시야로서 성령의 능력을 받을때 본문과 갈은 내용을 인용하
고있다(Bruce).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시 2:7을 예수에 대해 적용시켜 인용하였다(히
1:5). 이는 시 2:7이 비록 왕의 대관식에서 많이 사용된 구절일지라도 유대인의 전통
에서 그 구절을 메시야와 연관시켰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예수께서 다윗
의 가문에서 나온 왕권적인 권리를 가진 메시야로서 하나님께 세움을 받았다고 믿었던
것이다.
=====13:34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 - 바울은 예수가 죽어서 썩지 않고 부활할 것이라는
구약적 근거를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다윗의 가문에서 부활할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는
구약적 증거로 칠십인(LXX)역의 이사야 55:3을 들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의도는 베드
로의 설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2:27). 여기서 바울은 기독교를 유대교 전통과 분리된
이단이 아니라 유대교가 필연적으로 가야 할 길임을 강변하고있다. 즉 본절은 당시 전
통적인 유대교 앞에 소수종교로서 기독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바울의 끈질긴 설
득이다.
=====13:35
또 다른 편에 - 이 말은 33절에서 언급한 들째 편(시 2:7)과 구분되는 시편을 뜻한
다. 여기서 바울은 시 16:10 근거로 구약적인 부활 사상을 다시 언급하여 예수의 부활
에 대한 증거를 더욱 심도있게 진술하고 있다.
=====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 바울은 22절에서 언급했던 다윗을
다시 언급하여 예수의 부활과 다윗의 죽음을 대조시켜 예수의 부활 사건을 강조했다.
먼저 바울은 육대인들이 갖고 있는 다윗에 대한 인상을 재확인하고있다. 즉 22절에서
는 다윗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세움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에게 용납된 자로서 하
나님의 뜻을 이루어 낼 사람으로 언급하였는데 여기서도 역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인물임을 말하여 다윗을 높이고있다. 그렇지만 바울은 곧이어 다윗의 죽
움과 썩어짐을 예수의 부활과 대조시켜 썩지 않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유효
했음을 강조한다. 한편 '섬기다'란 동사의 목적어로 사용된 '하나님의 뜻을 좇아'란
구절은 전치사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본 구절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라고 번역될 수 있다(Robertson, Alford, Haenchen). 이 해석을 취할 경우 본 구절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윗이 그 시대에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수행했던 사
람'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다윗의 업적과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음
을 22절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비록 다윗
은 하나님으로부터 썩음을당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하나님에의해 맡겨진 사
명을 잘 수행했을지라도 죽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주어진 약속은 성취의 여지를 남겨
두고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예수와 연관지어 35절에 이어 다시 한번 더 언급함으로써
예수가 구약에 약속된대로 부활하셨음을 강조했다.
=====13:37
하나님의 살리신 이 - 부활하신 예수를 가리키는 본 구절은 죽음으로부터 예수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다윗의 유한한 생명과 예수의
영원한 생명을 대조시켜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 예수를 통해서 성취됨을 주장한다.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으나 - 이 말은 36절의 '썩음을 당하였으되'라는 말과 반대
되는 표현으로 다윗과 예수를 극명하게 구분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 전통에 붙
잡혀 있는 유대인들에게 다윗보다 예수가 위대함을 논증해 보임으로써 예수에 대한 유
대인들의 선입관이나 잘못된 의식을 바꾸고자 했던 것같다.
=====13:38
이 사람을 힘 입어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를 의미하여 어떤
결과의 유래(由來)를 나타낸다. 그것은 '죄사함의 선언'을 한 이가 예수임을 의미한
다.
죄사함 -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죄사함'과 곧바로 연결시킨 것은 약간 논리의 비
약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의 부활이 어떻게 해서 죄사함의 근거가 되
는 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것 같
다. 한편 바울이 '죄사함'을 복음의 핵심으로 선포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
죄'의 문제가 신앙의 억압적 요소로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유대인들은 장
로들의 유전(遺傳)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했으며 그 중 하나라도 범하게
되면 죄인으로 판명되므로 죄문제로 인해 항상 억압당하는 신앙 생활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예수에 의한 죄사함의 선포는 바리새인이었던 자신이 예수를 만남으로
써 체험했던 사실에 대한 것임과 동시에 초대교회의 교리의 핵심이었다.
=====13:39
모세의 율법으로...의롭다 하심을 - 본 구절은 바울 서신과 일치된 사상을 전달하
고 있으므로 본장에 언급된 바울의 설교를 본서의 저자인 누가의 작품으로 평가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본 설교가 누가의 필치에 의해 다듬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
으나 '부활'과 '의의선포'같은 내용은 바울의 독특한 신학을 형성하는 골격이 되므로
전체적인 내용은 분명히 설교자 바울의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의롭게 되는일에 온
갖 정성을 다 바쳤던 유대인듸의 삶을 지적하면서 의롭게 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설교에는 (1) 사람이 율법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
과 (2) 예수를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13:40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마무리 지으면서 마지막 경고를
주기위해 41절에서 합 1:5를 인용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삼가라'는 말은 41절의 인용
구절 중'멸시하는'과 연관되어 '멸시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를 지니
고 있는지 아니면 '놀라고 망하라'는 표현과 연관되어 '놀라고 망할까 조심하라'는 의
미로 해석되어야 할지 확정할 수 없다.
=====13:41
일렀으되 -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했듯이 '선지자들'이 한 말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으로 예언서에서 발췌된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인용되는 구절은 합 1:5
로서 70인역을 약간 변형시켜 사용되었다. 히브리 본문에서 이 구절은 갈대아 사람의
등장에 대한 예언과 관련되어 있다(Haenchen). 그러나 바울은 이문구를 인용하여 유대
인들이 배타적으로 우월감에 빠진 선민의식(選民意識)으로 인해 버림받고 오히려 이방
인들이 구원의 길로 인도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13:42
저희가 나갈새 - 본 구절은 바울이 설교를 마치고 회당에서 퇴장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다. 문맥상 바울과 바나바가 설교 후 곧바로 퇴장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예배
도중에 바울과 바나바가 퇴장했을 가능성은 희밖하다.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교 전통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예배를 마치기 전, 즉 자신의 설교만 마치고
퇴장한 것(Meyer, Knowling)이 아니라 예배를 마친 다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퇴장했으
나 누가가 그 과정을 생략하고 간결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Haenchen).
사람들이 청하되 -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 47절부터
시작되는 다음 안식일의 설교가 있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 (2) 바울의 설교가
유대인들로부터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얻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유대교인들 중에서 기
독교로의 개종이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13:43
폐회한 후에 - 예배의 종료(終了)를 알리는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폐회의 암시와
부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즉 앞절에서 이미 예배의 종료가 함축적으로 언급되었다
면 또다시언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퇴장할 때
가 예배 도중이었을것으로 추측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도중에 퇴장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에서(42절 주석) 본절은 예배 종료를 알리는 말이라기보다는
본절에서 언급되는 사건이 예배가 패회된 이후에 있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
다.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 16절주석 참조.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 본 구절은 42절에서 언급된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기로
간청한 것과 맞물려 이방 지역의 유대인 공둥체에서 기독교의 새로은 공동체가 발생하
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3:44
온 성이 거의 다...모이니 - 이 같은 묘사는 바울의 설교가 성공적이었음을 강조하
기위한 극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당시 온 성의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일 수 있을 정도
의 회당이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Bauernfeind). 누가가 이처럼 과장
법을 사용한 것은 바울을 성공적인 설교가로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Haenchen). 하여튼 본절에서 누가가 진술하고자 하는 요지는 바울의 설교가 성공적이
어서 비시디아 안디옥 온 성이 떠들썩했으며 더욱 많은 무리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
해 회당으로 몰려왔다는 사실이다.
=====13:45
유대인들이 - 이들은 회당의 구성원들로 바리새파의 유전을 철저히 추종하는 유대
인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회당의 핵심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가 자기
공동체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에 바울의 설교에 대해 무조건 비방하는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시기와 비방은 새로이 형성되는 기독교 공
동체가 유대교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있다.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 유대인들의 비방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가 응답함
에 있어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진술을 권위있게 묘사하기 위해 '담대히 말하여'라
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이 말의 헬라어 '파르레시아사메노이(*
)는 '자유릅게 말하다' 또는 '숨김없이 확신을 가지고 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대답이 매우 확신에 찬 것으로 청중을 설득
하는 호소력이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 이 말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
음을 의미한다. 이는 유대인들 자신이 자처(自處)한 것이므로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하
는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언급은 바울 자신도 유대인에게 복
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비방하는 자들이 자신을 반(反) 유대적인 교리를 전파하는 자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랬
을 것이다.
=====13:47
주께서...명하시되 - 바울은 다시 자신의 이방 선교의 정당성을 구약성경을 인용하
여 주장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여 그
사역의 신적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선포하는 내용도 인간의 지혜나 마
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토록 섬기던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
므로 자신을 비방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내가...구원하게 하리라 - 이 인용구는 사 42:6;49:6에서 발췌된 것이다. 이 이사
야서의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바울과 바나바예게
하신 말씀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예언하신 내용과
연관지어 볼 때(9:15) 이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에게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하겠다. 즉 바울은 사 42:6;49:6에 예언된 내용을 전파하는 자로 자신들이 선
택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 구절을 인용했을 것이다.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 여기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들은 이방인들
의 기쁨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45절에서 언급된 유대인들의 반응과는 매
우 대조되고있다. 본절은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정된 자 - '작정(作定)된'으로 번역된 '테탁메노이'(* )는 완
료 수동태 분사로서 '작정'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왜
냐하면 과거 완료는 과거를 시점으로 어떤 사건이 그 과거 이전에 완료되어 그 시점까
지 영향을 미칠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작정은 과거의 한 사건으
로 끝나버리지않고 모든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13:49
주위 말씀이 퍼지니라 - '퍼지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페레토'(*
)는 미완료 과거로 '게속 퍼지고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주의 말씀이 점점
널리 퍼져가는것을 묘사한다. 그런데 누가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믿게 된 자들의 부
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않고 있다. 아마 이 부류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
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13:50
경건한 귀부인들 -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 일행의 설교가 육대교 회당 중심의
공동체에 위협을 주고 았다고 판단되자 그들을 추방하기 위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영
향력있는 인물들을 이용했다. 여기서 언급된 귀부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
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 여인들로서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
로 짐작된다.
그 성내 유력자들 - 이들은 앞에 언급된 '경건한 귀부인들'의 남편(William Neil)
일 수 있으며 아니면 단순히 그 성읍에서 지도적인 인물로서 육대인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13:51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 추방당하는 바울과 바나바는 제자들에게 명령했던 예수
의말씀(마 10:14)을 그대로 실천했다. 이러한 풍속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위로서 이방인들의 지역으로부터 나올 때 행한다.
이고니온 -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부터 추방당하여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120km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이고니온(Iconium)으로 떠나게 된다. 이 곳 역시 B.C. 25
년경 갈라디아가 로마의 한 도(道)로 복속될 때 로마에 합병되었다(F.F. Bruce).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
도로 기독교인이 된 비시디아 안디옥의 거주자들을 가리킨다. 누가는 그들에게 '기쁨
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말로서 그 지역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과 동일한 성령을 받
았음을 보여줌과 동시에(2:4;4:31;10:44) 기독교 공동체가 융성해 갔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