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냉장상태로 유통되는 유정란으로 병아리를 부화할 수 있을까? 답은 Yes 입니다. 아들 형민이에게 생명 탄생의 신비를 보여주고자 시작한 병아리 부화, 그 과정을 지금 공개합니다.
1. 부화기 제작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하는 부화기를 살까 하다가 한 번에 3개밖에 부화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구입을 포기하고 직접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준비물은 스티로폼 박스, 자동온도조절기, 백열 소켓, 연결선, 백열 전구, 막대 온도계 등입니다. 스티로폼 박스는 재활용 분리수거하는 날에 아파트 앞에 가면 많이 나와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깨끗한 것으로 하나 가져오면 됩니다. 크기는 부화시키고자 하는 수에 따라 선택하면 됩니다. 저는 30cm * 40cm 크기의 박스를 사용했습니다. 자동온도조절기와 백열 소켓, 연결선 등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부화기용 온도조절기'를 검색하여 구입하시면 됩니다. 1만 8천원 가량합니다. 백열등은 열이 발생해야 하므로 막대형보다는 옛날식 백열등(60w)을 마트에서 따로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부화 이후에 병아리집의 온도를 높여 주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너무 밝지 않은 불투명 전구로 선택했습니다.
모든 재료를 연결해서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전구는 '창문' 반대쪽 벽에 구멍을 뚫어서 소켓을 먼저 끼운 다음 안쪽에서 전구를 끼워 고정했습니다. 온도 감지 센서는 박스 안쪽 가운데쯤에 떠 있도록 했습니다. 자동온도조절기를 전원과 연결하였더니 백열전구에 불이 들어와 부화기 안의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참, 부화기 내부의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백열전구 아래쪽에 물을 담아 두었습니다.
2. 유정란 입식
이제 유정란을 넣으면 됩니다. 유정란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마트에서 파는 유정란으로 해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L마트에서 구입한 10개 들이 유정란은 유통이 된 지 5일이 지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냉장실에 있었다는 것이어서 부화율이 떨어질 것이라 판단되어 W마트에서 10개 들이 유정란을 다시 사왔습니다. 이번 것은 유통이 시작된 지 하루 지난 것이어서 쓸 만했습니다.
처음 계획은 일곱 마리만 부화하는 것이어서, W마트에서 구입한 유정란 6개와 L마트에서 구입한 유정란 1개를 부화기에 넣었습니다. 냉장고에 오래 있었던 것도 부화가 되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 오래된 유정란도 하나 넣었습니다. 다음날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부화율이 높지 않을 것 같아서 오래된 유정란 세 개를 더 넣어 10개를 맞추었습니다. 즉, 신선한 유정란 6개와 덜 신선한 유정란 4개로 부화를 시작했으며, 3개는 하루 늦게 넣었습니다. 늦둥이라고 적어 두어 구별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형민이가 각각의 유정란에 미리 이름을 지어 적어뒀습니다. 샐리, 브라우니, 문, 코니.....그리고 늦둥이1,2,3.
뚜껑을 자주 안 열고도 내부를 관찰할 수 있도록 창문도 만들었습니다. 안쪽에 투명 아크릴을 덧대어서 찬 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제 온도조절기를 적절한 온도에 맞추어야 합니다. 병아리 부화 온도는 36~37도씨를 유지해야 하죠. 그러나, 자동온도조절기의 온도를 그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막대 온도계를 따로 설치했습니다. 자동온도조절기를 최대온도에 맞춰놓고 막대온도계를 주시하다가 36도씨에 이르면 자동온도조절기의 조절 다이얼을 천천히 돌려 온도를 낮춥니다. 그러다가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전구의 불이 꺼지면 멈춥니다. 자동온도조절기상으로는 약 42~44도씨가 되더군요.
3. 전란과 검란
어미 닭이 알을 품으면 매일 여러 번씩 부리로 알을 굴려 줍니다. 그것을 전란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6시간 간격으로 하루 네 번 굴려 줘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8시간 간격으로 3번씩 굴리기로 했습니다. 아침 8시, 오후 4시, 밤 12시. 표를 만들어서 빼먹지 않고 체크를 해가며 전란을 했습니다. 전란은 부화 4~5일 전까지만 합니다.
부화 시작한 지 11일차부터 추석연휴라 고향에 다녀오느라고 만 하룻동안 전란을 못해 주어서 걱정이 많이 되더군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유정란 안에서 생명이 자라고 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검란이라는 걸 하게 됩니다. 검란은 주위를 캄캄하게 한 다음, 유정란에 전등을 비추어 내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어느 분께서 올린 글을 보고 저도 휴대폰 플래시와 시디를 이용해서 검란을 했습니다.
검란 하는 방법
ㄱ.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불빛이 위를 향하게 놓는다.
ㄴ. 시디 2장을 겹쳐서 시디의 가운데 구멍과 핸드폰 플래시를 맞춰 포갠다.
ㄷ. 검정 색종이에 시디 구멍정도의 구멍을 내고 시디위에 맞춰 포갠다.
ㄹ. 검란할 유정란을 시디 구멍에 세우고 주위의 빛을 차단한다.
검란은 보통 7일째부터 실시합니다. 위 사진은 10일째 실시한 검란 사진입니다. 핏줄이 선명하게 보이고, 작은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검란을 너무 자주 하는 것도 병아리에게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5일에 한 번이나 7일에 한 번 정도가 적당하다고 합니다.
7일째와 10일째 검란을 해본 결과 한 개를 제외한 모든 알에서 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21일째까지 속이 훤히 비치는 그대로였습니다. 아마도 수탉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암탉이 낳은 알(무정란)이었을 것입니다.
4. 줄탁동시
아이와 함께 부화 진행표에 하루하루 체크를 해가며 손꼽아 기다린 끝에 21일째 아침이 되었습니다. 이제 노랗고 귀여운 병아리들을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줄탁동시.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시기가 되면 안에서 병아리가 울음소리를 내며 쪼고, 밖에서 어미 닭이 부리로 두드려서 함께 껍질을 깨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21일째 아침이 되니 알이 흔들흔들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삐약삐약' 병아리 울음소리가 들리더군요. 안에서의 '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탁'으로 호응해 줄 어미 닭이 없네요.
아이가 학교에 가고 점심 무렵에 부화기 안을 들여다보니 작은 구멍으로 병아리의 부리가 들락날락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두세 시간이 지나자 구멍이 약간 커지긴 했지만, 껍질을 깨뜨리기가 그렇게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어미 닭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제가 어미 닭이 되어주기로 했습니다. 젓가락으로 알 껍질을 조금씩 두드려 깨뜨리기 시작했고, 마치 삶은 계란의 껍질을 벗기듯 껍질 조각을 조금씩 조금씩 떼어냈습니다. 그러나, 이 어쭙잖은 의붓아비의 판단은 옳지 못했습니다. 병아리는 아직 알을 깨고 나올 준비가 덜 된 것이었습니다.
갓 깨어난 병아리들에게 불빛이 너무 자극적일 것 같아 종이로 불빛을 막아놓다.
아이가 학교와 미술학원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 되어서 저 상태로 둔 채로 아이를 데리러 갔다 왔더니, 첫째 병아리가 삐약삐약하며 부화기 안을 돌아다니고 있더군요.
그러고는 또 오랜 기다림.....
새벽 1시경에 두 번째 병아리가 깨어났습니다. 새벽 3시경 세 번째 병아리가 깨어나는 순간은 운이 좋게도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22일째 되던 날에 세 마리가 더 깨어났고, 늦둥이 중에 한 마리가 23일째 되던 날에 깨어나서 모두 일곱 마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는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에서 먼저 나온 병아리들에게 많이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반쯤 나온 상태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결국 이 병아리는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지어준 이름, 바로 '샐리'였습니다. 형민이가 그러더군요.
"아빠, 아빠도 얘 샐리한테 관심이 더 많이 가지?"
왼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샐리
나머지 늦둥이 두 마리와 무정란 하나는 부화에 실패했죠. 부화율을 따져보니, 무정란이 섞여 있었던 것 외에는 W마트에서 산 신선한 유정란은 100% 부화가 되었고, L마트에서 산 5일 냉장 유정란은 50%만 부화가 되었네요. 오랫동안 냉장 상태에서 보관되었던 유정란은 부화율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육추와 이별
부화가 마무리 되자, 커다란 종이 박스에 병아리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온도조절기와 백열전구도 옮겨와서 내부를 따뜻하게 유지해 주었습니다. 먹이는 앵무새용으로 나온 조, 수수 등이 혼합된 것을 사 와서 주었더니 잘 먹더군요.
태어난 지 11일째
바닥에 목공방에서 얻어온 대팻밥을 깔아주었더니 냄새가 덜 나서 좋더군요. 다리가 불편한 샐리는 다른 병아리들처럼 일어나 걷지를 못하고 한 자리에서 계속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다른 병아리에게 밟히기까지 해서 왼쪽 작은 상자에 따로 집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병아리들이 조금씩 커 가면서 더 이상은 거실에 둘 수가 없을 만큼 냄새가 심해지더군요. 그래서 어쩔수없이 베란다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23일째. 횃대에도 올라 앉을 수 있게 되었다.
3주차가 지나자 발육에서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암수의 구별이 육안으로 가능하게 되더군요. 횃대를 걸어주었더니 냉큼 올라 앉습니다. 조금만 더 자라면 집으로 쓰는 종이박스도 날아서 넘을 것 같습니다.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많이 아픈 샐리
토요일 아침에 모이를 주려고 베란다에 나갔다가 샐리가 차가운 타일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날개를 살짝 움직이는 것을 봤거든요. 높이가 낮은 종이 상자에 넣어두었는데, 그걸 넘어와서 밤새 추위에 떨었던 것입니다. 샐리를 다시 살리려고 아들과 함께 여러 궁리를 했습니다. 우선 따뜻하게 해줘야해서 다시 부화기를 조립하여 그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인큐베이트 같았죠.
다시 살아난 샐리
아들 형민이에게 자전거를 가르치러 밖에 나갔다가 1시간쯤 뒤에 들어와 봤더니, 샐리가 눈을 뜨고 날개를 파닥거리네요. 형민이 기분이 어땠을지 짐작하시겠죠. 이렇게 해서 다시 원기를 회복한 샐리는 당분간 거실에 두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4주차를 앞두고 있던 월요일 아침. 다리가 불편하던 샐리가 죽고 말았습니다. 일어서 보려고 밤새 바스락거리더니......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나 걸어 보려고 애를 쓰지만,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해 항상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답니다.
아이가 알면 마음 아파할 것 같아, 아침에는 말하지 않고 학교에 보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하얀 손수건에 싼 샐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경비실에서 삽을 빌려와 아파트 옆에 묻어 주었습니다. 형민이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얘가 혹시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도 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아이 엄마에게서 형민이가 잠자리에 들어서 많이 울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안심도 되고, 또 한편으로 마음 아파할 아이 걱정도 되더군요. 그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샐리 묻은 곳에 다시 가서 금잔화 한 송이 놓아 주고 왔답니다. 동생처럼 생각했던 샐리가 죽어서 너무 슬프답니다.
이제 남은 여섯 마리도 이별할 때가 되어갑니다. 시골집 닭장으로 옮겨야 할 만큼 자랐거든요. 이번 주중에 데려다 놓고 와야겠습니다. 아이와 함께 직접 부화시킨 병아리들이라 더욱 애틋하네요.
6. 에필로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병아리들이 큰 닭으로 자라면 결국 삼계탕이나 백숙이 될 운명이라는 것을.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이 죽는 순간까지 고통 없이, 학대 없이 살다 가도록 하는 일은 이들을 이 세상에 내 놓은 형민이와 저의 의무입니다.
이번 병아리 부화 경험을 통해 형민이가 생명의 소중함을 체득하고, 이별의 아픔을 받아들일 줄도 아는 아이로 조금이라도 성장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