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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군 전체 소식 스크랩 " 전국영적현장르포(25)/ 덕유산 주변 지역(전북 무주, 경남 거창) "
가을날의 동화 추천 0 조회 31 07.12.02 22: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전국영적현장르포(25)/ 덕유산 주변 지역(전북 무주, 경남 거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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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자연 ‘무주구천동’, 수많은 종교인들의 은둔지로 이용돼

◇ 덕유산 칠연계곡 입구에 자리한 용추폭포

완연한 봄이 넘실거리는 덕유산의 5월, 자연 피조물에도 생명을 공급하는 빛이 필요했다. 나뭇잎 사이로 투영되는 빛의 푸르른 눈부심에도, 원색의 화려함을 뽐내는 철쭉의 자태에도, 미끄러지듯 내리꽂혀 에머랄드 빛을 담아내는 폭포에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창조의 빛이 찬연했다. 자연 피조물 하나 하나에도 늘 신선한 빛이 필요하듯 인간에게도 창세기 3장 죄와 저주 사단의 고통에서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빛이 충만하게 비춰질 때 비로소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할 수 있으리라.
이번 영적 현장 르포에서는 한반도의 삼도, 충청·전라·경상도에 걸쳐 위치하고 있는 덕유산 일대를 돌아보며 무주, 거창 지역의 영적인 배경을 살펴보았다.
현장르포를 매회 진행하며 백두대간의 지역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는 몇가지 안타까움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나라 국토의 70%는 산지로 형성되어 있어 인구의 1/4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 인구들이 지역의 도시에 분포한다. 이러한 결과 복음을 전하는 전도제자의 분포 또한 도시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 전도 전략상 황금어장을 공략하는 것이 당연지사이지만 구석구석마다 천혜의 자연환경이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우리나라의 깊은 골짜기와 시골에는 복음전하는 교회도, 전도제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박했다.

■ ‘무진장’ 아름다운 자연환경 가진 무주군
전라북도 동북쪽에 위치한 무주군과 진안군, 장수군의 머릿글자를 따서 ‘무진장’으로 부른다. 그 가운데 무주군은 무진장 지역 중에서도 가장 산이 많고 지형이 험한 곳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전라북도의 다른 어느 군보다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무주 구천동 때문이다.
덕유산의 정상인 향적봉을 기점으로 칠연계곡 등 8개의 길고 큰 계곡이 발달해 있는데 그 가운데 백련사에서 발원해 북쪽의 무주로 흘러 금강의 지류인 남대천에 합류하는 설천까지 약 28km(70리)에 달하는 계곡이 무주구천동이다. 13개의 대와 10개의 소, 그리고 여러개의 폭포들이 자리 잡고 있어 33개의 신비경을 이루고 있다.
무주구천동의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 조선조 선조 제위 시 이조판서를 지냈던 갈천 임훈(1500-1584)이 명종 7년(1552년)에 덕유산을 직접 등반하고 기술한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에 보면 ‘이곳은 이른바 구천둔(九天屯) 골짜기라고 한다’, ‘옛날 이 골짜기에 성불공자(宬彿功者) 구천인(九天人)이 있었던 까닭에 이름하였는데, 그 터가 있는 곳은 알지 못하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로는 산이 신비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전한다’는 등의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무주 구천동 일대가 다양하면서도 특이한 암석 지형을 이루게 된 까닭은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진 침식과 풍화에 의한 지질 변화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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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주읍 남쪽 적상산에 자리잡은 안국사 전경
2. 조선시대 사고가 있었던 적상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전경
3. 7개의 연(淵)을 만들며 떨어지는 칠연폭포
4. 덕유산 설천봉에 세워져 있는 상제루
5. 덕유산 정상 향적봉
6. 덕유산 중봉에서 부터 넓게 펼쳐져 있는 덕유평전
7. 신라와 백제를 이어준다는 나제통문
8. 구한말 송병선이 은거했다고 하는 수성대(일사대)
9. 고사목이 보이는 덕유산 정상부근 전경


■ 폐수와 무속 행위로 버려진 자연환경
르포팀이 무주지역에서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강선대(降仙臺)였다. 무주읍의 서남쪽 1.5㎞지점에 있는 산으로 그 모양이 마치 쌀가마를 쌓아 올린 것 같이 보인다고 하여 부미봉(富米峯)이라고도 하고 비선대라고도 부른다. 산 중턱 아래는 모두 암석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밑으로는 남대천 하류가 흐른다. 옛날 달밤이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기던 곳이라 하여 강선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대천 하류에는 하수도 폐수가 흘러 내려와 강은 오염되어 있었고, 강선대 바위 틈새에는 초들이 숨겨져 있어 무속인들의 기도처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조선시대 ‘사고(史庫)’가 있었던 적상산지
적상산(赤裳山, 1,029)은 무주읍에서 남쪽으로 10㎞쯤 떨어져 솟은 산이다. 산을 이루고 있는 암석이 적색역암, 적색셰일, 응회암으로 형성되어 있어 이 특유의 적색계층 퇴적암이 산의 중턱에 400m 안팎의 폭으로 절벽을 이루며 띠처럼 둘러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붉은 치마를 두른 듯하다 하여 적상산 또는 상산(裳山)으로 불려왔다. 적상산은 특히 평탄하고 물이 풍부하여 산의 허리가 깎아지른 절벽이라 적상산은 천혜의 요새라 말할 만하다. 때문에 예로부터 이곳에서 백성들이 난을 피하거나 산성을 수축하자는 논의가 빈번했던 듯하다.
이로인해 적상산성은 최영의 요구에 따라 1374년에 축조되었다고 하는데 실제 이 산성의 쓰임은 군사적 목적과는 좀 달랐다고 한다. 주로 역대의 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안전하게 보전하는 역할이 이 산성의 주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광해군 6년(1614)년에 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실록전(實錄殿)이 세워짐을 시작으로 선원각, 군기고 따위가 차례로 들어서 적상산 사고가 설치됐으며 이곳은 조선시대까지 사고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병탄 후 조선왕조 실록 등이 서울의 규장각으로 옮겨지면서 사고는 황폐화 되었고 사고가 있던 본래 자리도 1992년(양수발전소상부)댐 축조로 물에 잠기게 되어 1997년 선원각 복원을 시작으로 1998년 실록각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한편 옛날 적상산성에는 여러 절이 있었다고 한다. 산성 안에는 8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는데 현재는 안국사 하나만이 남아있다. 무주읍지 ‘적성지’에 실린 ‘적상산안국사기’에 의하면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 월인 스님이 창건했으며,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가 고쳐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적상산에 사고가 들어선 다음부터 안국사는 호국사와 더불어 사고를 지키는 수호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안국사 경내에는 각 나라의 불상들을 모아놓은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이 있었고 그 안에는 인도, 동남아 지역에서 가져온 각종 우상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대웅전 우측에는 괘불 탱화가 붙어 있었는데 길이 10.75m 폭7.01m에 이르며 한 가운데 화면이 꽉 차도록 석가여래를 입상으로 그리고, 다보여래·문수보살·보현보살 등을 가장 자리에 그린 대형 걸개그림이다. 특히 안국사 괘불은 가뭄이 들었을때 내다걸고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하여 영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 괘불 뒷면에는 기우축원문 수십장이 현재도 붙어 있다고 한다.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고민했던 석가, 7살 때 어머니를 여윈 그는 영적문제로 방황했지만 전 세계에 우상의 문화를 퍼뜨리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석가처럼 인생의 해답을 찾기 위해 헤매는 영혼들이 우리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

■ 구천동, 유불선 향유자들의 자궁과 같은 곳
33경을 품에 안고 25㎞나 이어지는 구천동의 끝에 백련사가 있다. 매표소를 지나서도 시오리를 걸어야 겨우 백련사의 일주문에 닿는다. 그럼에도 먼길이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길 한켠으로 구천동 계곡이 새록새록 모습을 펼치고 있으며 계곡에 무수히 박힌 바위와 그 사이를 흘러내리는 물, 온갖 나무와 풀과 바람 따위를 벗삼아 갈 수 있다.
이 백련사는 고려시대에 불교계에서 손꼽힐 만한 서산대사를 있게한 부용영관(1485-1615)으로 이 사람은 13세에 집을 나와 덕유산으로 출가했으며, 9년동안이나 산 밖을 나가지 않은채 도를 닦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불교의 최고봉으로 서산대사 휴정(休靜)을 꼽고 있는데 고려시대부터 서산까지 이어지는 법맥은 이렇게 이어진다고 한다. 태고보우(太古普愚) → 환암혼수(幻菴混修) → 귀곡각운(龜谷覺蕓) → 벽계정심(碧溪淨心) → 벽송지엄(碧松智嚴) → 부용영관(莩蓉靈觀) → 청허휴정(淸虛休靜).
이 부용영관에게서 두명의 제자가 나왔는데 한 명이 서산대사이고 한명은 부휴선수(溥休善修, 1543-1615)이다. 두 사람은 당대 불교를 이끌어간 쌍벽이었을뿐 아니라 조계종의 계보를 추적하다 보면 이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 부휴선수가 임진왜란 때 이곳 덕유산에 머물고 있으면서 그 뒤에도 구천동에 다시 들어와 수행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덕유산은 초기 조선의 불교 문화를 열게 했던 지역인 것이다.
백련사의 계곡과 함께 무주군 안성리에서 덕유산의 동엽령으로 이어지는 용추계곡에는 용추 폭포와 칠연폭포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용추폭포는 안성면 공정리 용추마을 위쪽에 있는 폭포로 높이 5m, 폭포수가 넓이 약 1,200㎡ 정도의 소에 떨어지는 모습은 신비스럽기조차 하다. 가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곳에서 덕유산 쪽으로 1㎞ 지점에는 칠연 폭포가 비단결처럼 흘러 7번의 연(淵)을 이루며 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 칠연폭포의 경치는 금강산 꼭 대기의 팔담에 비할만큼 절경으로 꼽힌다.
천혜의 자연을 자랑하는 무주 구천동, 도시의 바쁜 시름이 벗겨지고 신선한 공기와 자연의 색감이 육체와 눈을 이완시키며 평안함과 여유로움 속으로 초대하는 듯 했지만 이곳에는 복음을 가로막는, 종교로 위장한 사악한 사단의 세력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 정감록의 십승지 중의 하나, 많은 종교인들의 은둔지 돼
덕유산 권역은 전북 무주군 및 장수군과 경남 거창군 및 함양군, 그리고 충북 영동군 등 3개도 5개군에 걸쳐 있다. 덕유산의 지명 유래에 관하여 전해지는 말로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이 전화를 피해 이곳에 들어왔는데, 신기하게도 왜병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짙은 안개가 드리어 산속에 숨었던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전설이 있으니 덕유산은 겨레를 살리는 신령스런 산으로 존중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덕유산에는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은거하였고, 덕유산 지역은 전란이 미치지 않는 십승지(十勝址)의 하나로 불려지고 있기도 하다.
덕유산은 남한에서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곳으로 해발 1,614m의 향적봉을 주봉으로 삼고 있다.
덕유산은 무풍면의 삼봉산에서 시작하여 수령봉, 대봉, 지봉, 거봉, 덕유평전, 중봉을 넘어 향정복에 올랐다가 다시 중봉, 덕유평전을 거쳐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에 이르기 까지 줄기차게 달리는 100리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덕유산의 북쪽인 설천봉에서 심곡리 일대 아래까지는 스키장인 무주리조트가 지난 1997년 동계유니버시아드 개최를 위해 1988년부터 시작된 스키장, 골프장 등을 포함하는 무주리조트 개발로 인해 자연 및 생태계를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해발 850m-960m 부근에 골프장이, 그리고 향적봉 바로 아래인 설천봉 부근 1480m가지 스키 슬로프가 건설되었다. 산자락을 헐어내고 산정까지 파헤치며 관광곤돌라를 만들어 많은 동식물들이 서식처를 빼앗기고 쫓겨갔으며, 건설 현장 주변의 많은 주목과 구상나무들이 말라죽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르포팀은 당초 무주리조트의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서 향적봉을 거쳐 주능선을 따라 등반할 계획이었느나 무주리조트 측에서 등산로 닦아 놓은 길을 이용하여 설천봉까지 올랐는데 우측의 가족호텔인 솔마을 부근에서부터 시작하여 한선봉(1,215m)에 올라 곤돌라가 도착하는 설천봉(1,520m)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곤돌라가 도달하는 설천봉에는 무주리조트의 건설로 인해 고사가 되어버린 주목 나무들이 메마르게 서 있었고, 관광객들을 위한 레스토랑과 커피숍들이 그 정상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현대식 건물과 걸맞지 않게 8곳의 방향으로 바람이 통하는 목제 건물인 상제루(上帝樓)가 설립되어 있는데 상제루는 옥황상제를 모시고 있다는 뜻이다. 상제(上帝)라는 명칭은 대순진리회와 증산도 신도들이 가장 높은 대우주 통치자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인데, 이들은 증산 강일순(姜一淳)은 하나님 즉 상제가 사람의 몸으로 이땅에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상제는 증산교를 창시한 강일순을 지칭한다.
이러한 관광지에 상제루를 누가 세웠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최근 현 정권은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주민 80%의 동의를 받아야 건립할 수 있다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추진 중이라고 하는데 다른 타종교의 건물들은 버젓이 곳곳에 세워지고 있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현장이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어졌던 행13장 안디옥교회와 같은 복음운동이 회복되어져야 할 것이다.
설천봉에서 향적봉까지는 20분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향적봉 정상에도 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빌며 세운 돌 탑들이 단단하게 세워져 있었다. 향적봉에서 중봉(1,594m)에 도달하면 철쭉꽃의 집산지인 덕유평전(1,480m)이 활짝 펼져진다. 르포팀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철쭉꽃이 만발하지 않아 철쭉의 화려한 잔치를 볼 수 없었다.
중봉에서 송계삼거리까지 도달하여 우리팀은 다시 중봉으로 돌아와서 오수자 굴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오수자 굴(吳秀子 窟)은 16세기 문인 갈천 임훈의 향적봉기(香積峰記)에 계조굴(戒祖窟)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오수자라는 중이 이곳에서 득도했다는 전설이 있어 오수자 굴이라고 불린다. 오수자 굴은 도불선의 학자들의 은거지였던 것을 증명하는 곳으로 이처럼 덕유산은 길을 찾아 헤매는 종교인들의 은둔지였던 것이다. 유환, 임훈, 정온, 신권, 송준길, 임수준, 임여남, 조상식, 신재서 등 수많은 선비들이 덕유산에서 은거하며 덕을 수행하였다. 그밖에 조선시대에 은거한 선비로서 정온(1569-1641)과 신권, 송준길 등이 있다.
르포팀들은 오수자 굴에서 다시 향적봉으로 올라 곤돌라도 운행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무주리조트의 스키장 길을 두시간 동안 내려와야 했다. 십승지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이 지역도 동학전쟁과 사상대립으로 많은 민중들의 피를 앗아갔던 빨치산의 내전은 피해갈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 나제통문에서 문지기와 만남의 축복
무주구천동 33경 가운데 제1경인 나제통문은 이곳을 경계로 서쪽의 백제와 동쪽의 신라가 각축을 별였던 곳이다. 이 고갯마루를 경계로 동쪽의 무풍은 신라 무산 땅이었으며, 서쪽의 설천과 적상면은 백제 적천땅이었다. 지금도 이 굴문을 사이로 무풍과 적천 땅은 같은 소천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풍속이 판이하고 서로 통혼도 하지 않는다 한다.
혹자들은 이 굴이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한데, 일제 당시 우마차의 통행을 위해 석견산 자락을 뚫어 지금의 굴이 생겨난 것이다. 나제 통문은 높이 5-6m, 너비 4-5m, 길이 30-40m 쯤 되는 굴문으로 차가 한대밖에 지나 갈 수 없는 외길이다. 그래서 2차선으로 뚫려있는 양 방향에서 나제통문을 통과하려면 잠시 기다렸다가 반대 방향의 차량이 먼저 통과하고 지나가야 한다. 그래서 나제통문에는 이러한 차량을 정리해주는 문지기가 항상 지키고 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문지기 김상수 씨를 만나 복음을 전해 영접을 했는데 르포팀이 기념촬영을 하자고 제의하자 부끄럽게 한 컷을 허용했다.
나제통문을 뒤로 한 채 구천동 3경이며 구한말 송병선이 나라의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조정의 중신자리를 마다하고 은거했다는 수성대에 당도했다. 송병선은 이곳에 서벽정을 짓고 우국의 정을 달래면서 스스로 동방 일사라 칭하고 고고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이곳을 일명 일사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 빼어난 절경, 거북신화 남아 있는 수승대
무주 무풍면에서 거창으로 들어서는 길목, 신풍고개라고도 하며 빼재라고 일컫는다. 이 날에는 날씨가 화창하여 빼재에서 거창면이 환하게 내려다 보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는 경찰관에게 길을 물어보며 복음을 전했는데 모태신앙이었던 전성호 순경과 동행한 전경대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빼재에서 남쪽으로 30분 정도 거창군 쪽으로 내려오면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와 강천리에 걸쳐있는 수승대를 볼 수 있다.
사실 우리 팀들은 수승대(搜勝臺)에 도달하기 전까지 길가 변에 관광지처럼 꾸며놓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현장 뒤에는 수려한 경관이 펼쳐져 있었다. 거창 사람들에게 숨구멍 같은 쉼터가 되고 있다고 한다. 수승대는 무주 구천동 계곡을 떠올리게 할 만큼 산수가 뛰어났다. 위천이 남실남실 흘러내리는 원학계곡 한 구비에 수승대가 자리잡고 있다.
거창지방이 백제 땅이었을 무렵, 나라가 자꾸 기울던 백제와는 반대로 날로 세력이 강성해져가는 신라로 백제의 사신은 온갖 수모를 겪는 일은 예사였고,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백제에서는 신라로 가는 사신을 위해 위로의 잔치를 베풀고 근심으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잔치를 베풀던 곳이 이곳이다. 근심으로 사신을 떠나 보냈다하여 여기를 ‘수송대(愁送臺)’라 불렀고 이 자리에 구연서원을 세워놓았다.
수승대 중심에는 커다란 거북이 형상의 커다란 바위 ‘암구대(岩龜臺)’라 이름짓고 그 위에 단(壇)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를 만들어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구연서원에서 이곳을 관리하고 있던 70대 쯤으로 보이는 최현영씨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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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수자라는 중이 도를 닦으며 살았다는 오수자 동굴
2. 백제의 사신을 신라로 보낼 때 잔치를 벌였다고 하는 수승대
3. 가섭암 가기 전에 놓여있는 문바위
5. 거창군 북상면에 송길준이 은거하던 사선대
4, 6. 거창군 금원산 자연휴양림내에 있는 가섭암터 뒤쪽 자연석굴입구, 석굴 벽면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상
7. 거창군 위촌에서 만난 임문열, 임해영 남매가 영접하고 있는 모습
8. 1950년대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된 거창군 신원면에 조성된 묘지


■ 기암절벽 마다 우상 새겨, 거짓 종교성 짙어
가섭암터는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에 위치한 금원산 자연휴양림 공원안에 위치해 있었다. 잡목이 우거진 숲, 쉼없이 흘러내리는 물 속의 잔자갈에는 이끼조차 앉지 않을 만큼 맑았다.
가섭암터를 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가 놓여있는데 높이가 14m 정도되는 문바위가 세워져 있다. 이 바위는 입구에도 동굴이 있는데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자신을 빌며 기도한 흔적이 있었다. 문바위를 돌아들면 가섭암터이다. 관리소 건물을 비껴 층계를 오르다 보면 거대한 바위 두개의 윗부분이 맞닿아 동굴처럼 형성된 바위굴에 이른다. 굴이라고 하지만 아주 큰 바위들이 겹쳐지면서 저절로 만들어진 열평 남짓의 공간이다. 커다란 바위 면의 위쪽에 삿갓 모양으로 지붕을 씌우듯 길게 홈을 파서 물기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한 뒤 그 아래 쪽에 불상 셋을 나란히 새겼다. 불상의 높이는 3m 이상이고 양쪽의 보살상 들은 2m가 살짝 넘는다.
우리는 이 거대한 돌 우상을 뒤로 한 채 내려오다가 문바위를 다시 돌아보았는데 14m 정도의 문바위 꼭대기에는 또 다른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인간의 갈급한 종교성에 오히려 애착이 생길 정도로 가슴이 저며왔다.

■ 우상문화에 죽어가는 렘넌트, 전도제자 곳곳에 일어나야
금원산 자연휴양림을 나와 다시 거창군으로 들어서다가 위천면 부근에서 한 청소년이 우리의 차를 세웠다. 위촌중학교 1학년에 재학중인 임문열 학생은 당산마을인 자신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3시간 이나 기다려야 했기에 빠른 길을 선택해 과감히 달리는 차를 세웠다. 임 형제는 교회를 다녀보았지만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 자신도 교회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며 복음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다. 임 형제는 복음메시지를 듣고 영접을 했고, 당산 마을에 도착하여 임 형제의 누나 임해영 자매(위촌중학교 3년)에게도 복음을 전해 영접을 했다.
해영이도 교회를 다녔었지만 그만 다녔다고 하며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우리는 해영이가 써놓은 시를 읽게 되었는데 해영의 마음과 영적인 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시의 제목은 ‘학교가기 싫어요’였다. ‘…난 비장한 표정으로 / 끝이 보이지 않는 지뢰밭 골짜기를 넘고 / 무서운 시체들을 피하고 / 수차례의 폭격을 피하고서야 / 구세주를 만날 수 있었다. / 근데 그것도 잠시 / 곧 전쟁터로 다시 버려져 / 그곳에서의 힘든 싸움 끝에 / 다리가 잘리고 손이 잘리고 / 친구를 죽인후에야 / 난 비로소 나일 수 있었다. / 에효~지긋지긋한 나의 삶’
이렇듯 청소년들의 심령은 갈급해 있었으며 이들은 아무 대책없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여 이 시골에까지 MP3 문화도 스며들어 있었다. TV를 시청하고 있던 해영이, 무엇인가 골똘이 생각하는 문열이, 그들과 짧은 시간을 교제했지만 물가에 내놓은 듯 우리의 청소년들이 너무도 방치되어 있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천혜의 자연 속에 렘넌트 공동체 훈련장 세워야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는 송준길이 은거하여 송기 또는 송대라고 불렸던 사선대가 있다. 1905년 고종의 5남인 강(堈)이 전 승지였던 정태균을 찾아와 머물면서 북상, 위천 지방의 우국 청년들과 만나 이곳 일대를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하였던 곳이라 하여 왕실의 선원을 뜻한 이름으로 사선대(四璿臺)라 명명하였던 것을 바위가 4층으로 포개어져 있고 돌위에서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에 의해 사선대(四仙臺)라고 부른다.
구석구석 절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작은 한반도 땅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천혜의 자연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선물이다. 이러한 곳에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렘넌트들의 공동체 훈련장이 세워진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 사상우상 비극, 분열 일으키는 사단 전략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0일과 11일에 걸쳐, 지리산 일대에서 인민군과 빨치산을 토벌하던 국군 제 11사단 9연대가 적과 내통한 ‘통비분자’라는 혐의로 무고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 거창양민학살사건이다.
한국전쟁 초기 남한지역을 휩쓸던 인민군은 지리산 일대의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는데 그 숫자는 대략 4만 정도로 추산되었다. 이에 빨치산 토벌을 위해 창설된 군대가 제 11사단이었는데 빨치산 토벌은 쉽지 않았다. 국군의 공격으로 이곳에서는 초토화 작전이 벌어졌고, 빨치산들이 철수 된뒤 ‘통비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아래 신원면 뿐만 아니라 대현리, 중유리, 과정리, 와룡리의 주민들 집결시켜 거의 몰살을 시켰다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학살 피해자는 모두 719명이라고 한다. 1954년 유족과 주민들이 이들의 유골을 남·여·어린이로 나누어 과정리 합동묘소에 안치했다.

◆ 우리나라 국토의 99%가 사단에게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문화, 사상, 제도, 역사의 베이스에는 복음 아닌 귀신과 종교 문화가 깔려 있었다.
덕유산 일대는 마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자연의 품속에 둥지를 틀게 할 만큼 싱그러운 자연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적막한 곳,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보다는 사단의 문화권 아래 놓여있었다.
사단은 도시의 빠른 변화를 이용해 인간의 영혼을 제도권 안에 묶어놓아버렸고, 시골에서는 모든 시간이 정체된 듯 삶을 포기하고 무기력함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를 모른채 많은 이들이 각자 제 갈길로 가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그러나 안타까운 영적 현장. 우리는 이 현장을 돌면서 현장 살릴 제자를 부르시는 주님의 간절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덕유산 주변 영적 르포 현장=김경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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