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상 수기
1. 길랑바레 증후군
팔순 기념으로 책을 내고 싶었다. 야심차게 전자책을 발간했다. 파주 출판문화단지 전자책협회를 방문 해 전자책 제작방법을 습득하고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여 e-book을 발간했다. 심혈을 기우려 전자책을 냈으나 아직도 전자책 인구가 저조해 읽는 이가 많지 않았다. 다시 종이 책을 발간했다.
지인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주소록을 작성하고 봉투에 담아 하루 종일 책상위에 앉아 배송작업을 했다. 원인도 모르게 손발이 부어오른다. 전신이 저리고 아파온다. 팔 다리가 마비되더니 걷지를 못 하겠다. 자식들에 의해 분당 서울대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정확한 병명을 알기위해 M R I. 척추. 심장. 폐. 등 3일 동안 온갖 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받는 동안 치료는 안되기에 병세는 더 악화되었다. 전신이 마비되고 저리고 고통스럽다. 길랑바레증후군이라는 병으로 나타났다. 감기에 걸리거나 기타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바이라스가 침투하여 말초신경에 염증을 발생하는 신종 병이라는 것이다.
보험 혜택도 없고 주사로 치료를 하는데 5일분이 2백만 원에 해당 된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살펴보니 10만 명에 1명꼴로 발생한다며 치료방법이 채혈과 주사로 치료 두 가지 방법이 있다한다. 질병을 일으키는 비정상 자기항체와 맞서 싸우는 항체를 감마 글로불린을 주사치료로 선택했다. 10일간 치료를 받고 기적 같이 치유되어 걸어서 퇴원했다. 걸음 거리가 부자연스럽지만 집에서 걷기 운동도 하며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퇴원하여 5일 째 되는 날이다. 화장실에 갔다 갑작이 일어서지를 못 하겠다. 기어서 나와 의자를 짚고 서려니 설수가 없다. 몸 다리는 아프고 저려온다. 다시 분당 서울대 응급실에 실려 왔다. 3일 동안 다시 검사를 받기 시작했다. 길랑바레 병으로 치료를 받았으나 재 발 했기 때문에 다른 병명을 찾기 위해 다시 검사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검사를 받는 동안 치료는 않기에 고통은 더 해 갔다.
몸 전체가 마비되고 통증과 저림으로 고통을 받았다. 가슴 아래 부분은 마비되어 하반신은 감각이 없으며 침상에 앉아 있어도 풍선위에 앉아 있는것 같고 일어 설수가 없다.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는 아들들이 휠체어에 태워 가보기도 했으나 그 도 여의치 않아 기저귀를 차고 집사람이 대 소변을 받아 냈다. 하반신이 마비되니 항문과 요도에 힘을 쓸 수 없어 배설을 못한다. 좌약과 관장을 해 봐도 효과가 없다. 배설을 못하고 몸 전체에 밀려오는 통증은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오직 괴로우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린 노대통령이 생각났다. 지금 부엉이 바위가 있다면 나도 뛰어 내리고 싶다. 이 고통과 가족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러나 병실은 완전 차단되어 있다.
이러한 고통이 한 달 여 지속 되었다. 주치의 박경석 교수는 첫 번째 병이 재발 했을 때, 급성 길랑바레 증후군과 만성 길랑바레 두 가지 방향으로 처방을 하며 열심히 치료 해 주셨다. 박 교수는 서울대 병원에서 이 분야에 제일가는 교수이다. 매일 같이 회진을 하며 살펴주고 상담하며 열심히 치료 해 주었다.
집사람은 열심히 기도하며, 주말이면 지하 성당에 나를 휠체어 태워 밀고 가 미사를 들였다. 이승범 신부님은 가끔 병실에 오셔서 안수 기도를 해 주시고 수녀님과 성당 신자들도 찾아와 기도 해 주셨다.
성당 형제자매님들이 찾아오고 고향친구, 전직 동료, 문 인회, 노인회, 동장 등 여기저기서 소문을 듣고 친지들이 찾아온다. 걷지도 못하고 아프고 고통스러워 병문을 사양했다. 그러나 걱정되어 삼복더위에 멀리 광주에서 금길 친구도 찾아 왔다. 심장 시술을 하고 자기도 아픈데 두 번이나 병문 온 용진 친구도 고맙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다.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손끝이 저림이 조금씩 없어진다. 그리고 매일 같이 몸 다리가 통증과 저림이 해소되기 시작한다. 휠체어에도 혼자 옮길 수 있다. 침상에서 휠췌어에 옮기는 연습을 수없이 하며 혼자서 30미터나 떨어서진 장애인 화장실을 가는데 성공했다. 그 후 보조 대를 집고 걷는 연습을 했다. 한발 두발 설수 있다. 옆에서 보고 있는 간병인들이 스텐드했다며 박수를 친다. 그러면서 걸음마 턱을 내라한다. 걷지도 못한 병신이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80노인이 세 살 아이처럼 이제 거름마를 하게 되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내 삶에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재생의 삶을 이은 것처럼 기뻤다. 다시는 걷지 못 할 것 같은 실망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집사람은 일어섰다고 기뻐서 빵을 사와 돌린다. 팔십 나이에 거름 마를 했다고 돌떡 돌리듯 빵을 돌렸다. 나는 10여 일 동안 재활 선생님의 깍듯한 지도로 매일 재활치료를 받았고, 병원4층 공원이나 실내에서 복도에서 열심히 걷는 연습을 했다.
드디어 입원 53일 째 되는 날 박경석 교수님이 퇴원을 명했다. 추석 3일 전에 퇴원하여 가족과 같이 명절을 보내게 되었다. 고통을 딛고 이겨낸 기쁨은 그 고통을 겪이지 않은 사람은 잘 알 수 없다. 삶을 다시 찾은 듯 기뻤다. 온갖 고생을 감수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간병을 해 준 집사람과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2. 병실은 삶과 주검의 정거장
응급실에 실려 온 대부분 환자들은 검사를 받으며 일단 2인실로 들어간다. 2인실에 들어가니 창 측에 있는 환자가 별나다. 묻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하는 전화로 그분의 신상이 다 들어난다. 대구 사람이이고 서울 시청에 근무 한 전직 공무원 같다. 나이는 76세인데 노태우 집엘 갔는데 차 한 얻어먹고 왔느니 노태우는 목에 구멍을 뚫고 영양을 공급하고 있느니 별 소리를 다한다.
그런데 내가 5인실로 왔을 때는 내가 창 측이고 그분이 안쪽에 또 만났다. 그 사람 참 못 되었다 생각되었다. 뇌경색으로 들어 왔기에 거동이 불편하다. 70대 중반 몸이 아픈 연약한 부인을 퍽도 괴롭힌다. 밤중에도 목욕을 시키라며 대소변을 가라내고 옷을 바뀌어 입히는 등 온갖 시중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남편에게 이기주의자니 푸념을 하며 몸이 아파 더 이상 간병을 못 하겠다며 다른 간병인을 구하고, 결국은 재활 치료실로 옮겨갔다.
다음에 그 병실에 들어 온 환자는 또 별났다. 친근하게 접근해, 어디서 왔으나 물었더니 이천에서 왔단다. 그런데 이 사람은 원래 부친이 부산사람인데 중국에 이사가 심양에 살며 중국 국적으로 중국에도 집이 있고 이천에도 집이 있단다. 한국에서 날일로 하루에 10만원씩 번다는 것이다. 부인이 간병을 들고 있는 데 중국 동포들이 병문 올 때는 자질구레한 가정사 일 까지 떠드는지 얄밉기도 했다. 한국에 살면서 장가계 관광을 갔다 왔느니 떠드는 모습이 가광이이였다. 옆 환자들은 아랑곳없다. 밤이면 몸이 괴롭다고 간호사를 부르며 자기 의향 데로 안 된다고 밤중에 긴 의자를 끌고 행패를 부린다. 결국은 재활치료실로 옮겨 갔다. 처음에는 중국에 사는 교포로 동정심이 갔으나 오히려 중국 국적을 가진 교포로 우월감을 가진 듯 행패를 부리는 모습이 얄밉기만 했다.
앞쪽 3번 병실에 뇌경색 환자가 또 들어 왔다. 멀쩡하다. 안성에서 소를 900마리나 키우고 농사도 많이 짓는 낙농업인 이다. 그런데 X ray검사를 거부한다. 아무 소용없는 검사만 자꾸하여 비용만 낸다고 병원을 불신한다. 결국은 2,3일 있다 퇴원한다.
4번 병실은 뇌 관리 집중 실에서 한 달여 치료를 받고 들어온 뇌경색 환자다. 67세의 노인이다 여주에서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인데 부부금술이 좋았던 모양이다. 간병인을 구했으나 매일 같이 할머니와 아들딸이 들이 찾아와 애타게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코에는 호흡기를 꽂고 가래를 걸러내고 대소변을 받아낸다. 농사지 며 사연도 많은지……. 남편 이름을 부르며 당신은 무쇄 팔뚝 장사지 않아! 경운기타고 커피도 마시며 수완보도 가야지……. 빨리 일어나…….라고 애원을 한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다. 결국은 소생하지 못하고 집 근처 요양원으로 이송했다.
3번 2번 병실도 똑 같은 뇌경색 환자가 들어 왔다. 의식은 없고 모두 집중 치료실에서 장기간 치료 받다 5인실로 내려 왔다. 코에는 흡입기를 꽂고 가래를 걸러내고 대 소변을 받아 낸다. 세 환자가 기계로 가래를 걸러내고 대 소변을 받아 낼 때는 마치 방직공장이 돌아가듯 소음이 심하다. 아침저녁 시도 때도 없다. 병실이 아니라 공장 같다.
내 옆 2번 병실에는 스트레스로 쓰러진 40대 중반, 90키로가 넘는 젊은이가 들어 왔다. 고등학교 다니는 두 남매가 가끔 찾아온다. 젊은 사람이 안 되었다 생각 들었다. 의식 없이 지내다가 가망이 없는지 결국은 집 근처 용양원으로 이송해 갔다.
다음에 들어 온 환자다. 31세다. 염색체 하나가 부족하다는 정신 질환자다. 어느 대학에서 부학생장도 하고 해병대 970 몇 기로 제대한 청년이다. 평소에는 조용한다. 그러나 발작이 이러나면 걷잡지 못한다. 어머니를 욕설을 하고 때린다. 폭력을 휘두르고 완력을 쓴다. 고송을 지르고 광란한다. 내 침대로 뛰어 들것만 같다.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한다. 그럴 때면 보안 요원이 달려와서 완력으로 제압하고 간호사가 안정제를 주어 진압한다. 전쟁터다. 3일 동안 이런 일이 계속되었다.
5인실 환자는 대부분 뇌경색 환자로 안정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환자 간병인 모두가 불안 하다. 나는 수간호사에게 항의를 했다. 어떻게 병실 관리를 이렇게 하느냐? 안정을 기해야 할 다른 환자들이 공포와 불안에 참을 수 없다. 항의 했다. 결국 이 환자는 정신 병동으로 이관했다.
병원에서는 병실 관리를 응급실이나 2인실에서 희망하는 순서대로 5인실로 옮겨주고 있으나 가급적이면 같은 종류의 환자들끼리 같이 입원 시키는 배려가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입원실은 삶과 죽음의 정거장이다. 내가 입원한 병동은 신경과다. 뇌경색, 뇌졸중 환자가 제일 많다. 뇌경색 초기 환자는 간단히 원인을 치유하고 3일 만에 퇴원한다. 그러나 장기치료로 더 이상 입원이 불가할 때는 집근처 용양 원으로 이송하기도 하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길로 가기도 한다.
3. 53일간 의 병상
나는 입원 한지 53일 만에 퇴원을 했다. 나와 다른 환자는 모두가 뇌질환 환자이기에 고통을 못 느끼지만 나는 말초 신경 증 환자로 정신은 멀쩡하다. 그러기에 더 고통스러웠다.
병원에 있는 동안 많은 인생 공부를 했다. 살아온 지난날이 불행했을 때 어떻게 다가오는지 느껴보기도 했다. 멀리 사는 친구도 찾아와 걱정을 해 주고, 자주 찾아오며 우정을 같이 해 주는 친구가 있는 가하면, 장기간 입원하니 늙어 다 산사람 모양 외면하는 친구도 있다. 친구 이웃 형제간의 정을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이 불행 했을 때 걱정해 주고 배려 해 주는 것이 인간 사회에 얼마나 소중 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병실에 있으면서 평소에 느끼지 못한 경험을 많이 했다. 병원에서 새로운 직업세계가 있음을 알았다. 간병인이다. 나이 많은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신종 직업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당 기본이 7만원에 대소변 받아냄에 따라 10만원까지 받고 있었다. 간병원의 직업이 경쟁속이였다. 의료 복지가 발전하고 그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신종 작업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담당 교수의 신중하고. 치밀한 처방과 간호사들의 친절하고 빈틈없는 보살핌이 정말 고마웠다. 24시간을 3교대하며 투약 혈압 당료 기타 환자를 보살핌이 전산화되어 빈 틈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환자가 고통을 겪으면 즉시 달려와 처방을 한다. 환자가 아무리 짜증을 내도 웃음으로 대한다. 백의천사란 말이 그래서 나왔나 싶다.
두 달 가까이 병원신세를 지면서 밤새 고생하는 간호사들을 위해 집사람은 간식거리를 간호사실에 갖다 놓으면, 슬며시 가져와 우리 병원은 그런 것 받지 않습니다. 호의만 고맙게 받습니다. 하고 돌려준다. 한 치도 빈틈없이 환자들을 친절하게 보살피는 간호사들의 면면이 너무도 고맙게 기억된다.
나는 근 두달간 입원실에 있으며 새삼 집사람 은혜로 재생의 삶을이었다 생각 들었다. 7년 전 뇌출혈로 분당 서울대 병원에 한 달여 입원했을 때도 의식불명인 나를 위해 간병인 없이 온갖 희생을 감수했다. 이번에도 그 어려운 병실에서 교대 해 주는 사람 없이, 식사는 물론 목욕, 대소변, 온갖 시중을 다 들어 주었다. 몸살과 근육통을 느끼며 감수했다. 두 번이나 나를 살리는데 기여했다. 고맙고 감사하다.
자식들은 직장에도 바쁜데 시간만 나면 찾아와 살펴주고 화장실도 업어 나르며 고생했다. 세 며느리는 몸 도 불편하고 거리도 먼데 반찬과 보양식을 해 나르느라 고생했다.
모두가 고맙다. 80의 인생에 새 삶을 또 찾았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편한 하게 맞이하고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갈수 있을까 제일 큰 고민이다. 건강을 되찾으니 주치 교수와 간호사가 고맙고 찾아준 친구들이 한없이 고맙다. 나머지 인생, 가족과 친지들에 피해가 되지 않은 삶이 되도록 노력 하며 살련다. 시간 나면 친구들과 식사라도 하며 즐기리라.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2014.9.15.)
첫댓글 이제는 건강 관리 잘하시면 만수무강 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