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肇慶壇參拜(조경단 참배)
46세손 佳林 李重敎
盛開大祭沛城天(성개대제패성천) 조경단 대제가 전주에서 성황리에 열리니
遠近皆孫參拜先(원근개손참배선) 멀고 가까운데서 온 모든 자손들이 먼저 참배하네
民事司空徐伐屬(민사사공서벌속) 민사담당 사공공은 신라 조정의 소속이요
宗人始祖德津緣(종인시조덕진연) 전주이씨 시조 한은 전주 덕진구와 인연했네
焚香獻爵精誠盡(분향헌작정성진) 단상에서 분향하고 헌작한데 정성을 다하고
吹笛彈琴敬意宣(취적탄금경의선) 단하에서 취적하며 탄금한데 경의를 폈도다
聖域設壇王氣址(성역설단왕기지) 묘단을 성역화로 설치하여 왕기가 서린 터이니
每春肇慶奉行虔(매춘조경봉행건) 조경단 대제는 매년 봄 경건하게 봉행하고 있네
2005. 4, 10 전주 덕진구 조경단에서
조경단 대제가 전주에서 성황리에 열리니
멀고 가까운데서 온 모든 자손들이 먼저 참배하네
민사담당 사공공은 신라 조정의 소속이요
전주이씨 시조 한은 전주 덕진구와 인연했네
단상에서 분향하고 헌작한데 정성을 다하고
단하에서 취적하며 탄금한데 경의를 폈도다
묘단을 성역화로 설치하여 왕기가 서린 터이니
조경단 대제는 매년 봄 경건하게 봉행하고 있네
* 전주이씨 시조 휘 한(翰)은 사공공(司空公) 이니,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군윤(軍尹)김은의의 따님과 결혼하여 후손들이 높은 벼슬에 오르는 등 당시에 벌족하였다. 전주시내 경기전 전의와 읍지에 의하면 전주 북쪽 10리에 건지산 왕자봉 끝자락에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 하였다. 태조께서 조선을 창업한 후 건지산을 봉표(封標)하여 수호하도록 했고, 영조 때는 감독관과 산직을 두어 경계 정해 금양(禁養)했고, 정조 때는 설단한 후 단 둘레에 담을 쌓아 ‘조경’이란 이름을 정해주고 한 해에 한번 제사토록 명하였다. 조경(肇慶) 이란 ‘기쁨이 시작 된다’ 는 뜻으로 전주이씨 시조 휘 한(翰) 할아버님 단역(壇域)의 이름으로만 쓰이니 10만평 규모에 9천평 둘레로 담을 쌓아 성역으로 정화 했다. * 묘역은 맞는데 묘혈을 못 찾아 둔덕 아래에 단을 설치하고 낮은 담을 쌓았다고 한다.
宗廟大祭有感(종묘대제 유감)
佳林 李重敎
貴客參觀大祭成(귀객참관대제성) 국내외 귀한 손님 참관한 대제를 이뤘으니
文財宗廟典儀明(문재종묘전의명) 세계 무형 문화재인 종묘의 의전행사는 밝네
上香佾舞招魂夢(상향일무초혼몽) 삼상향에 일무 춤으로 혼령 초청 생각하고
灌地鬱鬯侍魄情(관지울창시백정) 관지에 울창주 부으며 혼백 모시는 정이네
德帝保平稱頌貌(덕재보평칭송모) 황제의 덕을 보태평 악으로 칭송한 모습이요
功朝定業讚揚聲(공조정업찬양성) 조정의 공덕을 정대업 가무로 찬양한 소리같네
弘恩列聖雍安感(홍은열성옹안감) 열성대왕의 큰 은혜 베풂으로 옹안을 절감한데
海晏河淸我國亨(해안하청아국형) 태평한 세상에서 우리나라는 형통하여 지리라.
2016. 5, 1 서울 종로구 종묘에서
국내외 귀한 손님 참관한 대제를 이뤘으니
세계 무형 문화재인 종묘의 의전행사는 밝네
삼상향에 일무 춤으로 혼령 초청 생각하고
관지에 울창주 부으며 혼백 모시는 정이네
황제의 덕을 보태평 악으로 칭송한 모습이요
조정의 공덕을 정대업 가무로 찬양한 소리같네
열성대왕의 큰 은혜 베풂으로 옹안을 절감한데
태평한 세상에서 우리나라는 형통하여 지리라.
* 종묘는 서울 종로 3가에 있으며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 그리고 재궁으로 크게 세 군데다. 정전은 태조 고황제부터 순종대왕까지이며 영녕전은 추존왕 4대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 주지 못한 역대 제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매년 양력 5월 첫째 일요일과 11월 7일에 봉행하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봉행하다가 종묘, 사직단, 각 능제는 2005년부터 문화제청 주관으로 봉행하되 전주이씨 대동 종약원 일가 분들을 동원하여 봉행하고 있다. 또 종묘 안에는 역대 제왕을 보필한데 공이 큰 83위의 공신당과 일상생활과 관련 있는 7신을 모신 칠사당도 있어 종묘제례 때 함께 제향하고 있다. 그밖에 고려 공민왕의 유묘도 종묘 정문 동쪽에 두고 종묘 관리팀이 관리하고 있다. 태조고황제는 전주이씨 시조 한의 22세이며, 중종대왕은 28세, 덕흥대원군은 29세, 가림 중교는 46세이다.
社稷壇大祭參班(사직단대제 참반)
佳林 李重敎
社壇大祭奉行年(사단대제봉행년) 사직 대제가 엄숙하게 봉행하는 이 해에
內外人參石砌前(내외인참석체전) 국내외서 온 참반인들 섬돌 앞에 서서 참여했네
五土原臺坤鬼伴(오토원대곤귀반) 오색토 원리로 단대에 깔아 사방 토신과 짝했고
三才理坧穀神緣(삼재리척곡신연) 천지인 삼재 이치로 쌓은 토대는 곡신과 인연했네
進餐執事雍安裏(진찬집사옹안리) 천조 봉조관은 옹안 악 연주 속에 제수올리고
獻爵初官烈舞邊(헌주초관열무변) 황세손 초관은 열문지 무에 맞춰 예주 올리네
雨順豐農祈願切(우순풍농기원절) 우순풍조로 농사 풍년 비는 마음 간절한 속에
自然惠澤我邦連(자연혜택아방연) 자연신의 은혜와 덕택이 우리나라에 이어지리라.
2016. 9, 25 서울 종로구 사직단에서
사직 대제가 엄숙하게 봉행하는 이 해에
국내외서 온 참반인들 섬돌 앞에 서서 참여했네
오색토 원리로 단대에 깔아 사방 토신과 짝했고
천지인 삼재 이치로 쌓은 토대는 곡신과 인연했네
천조 봉조관은 옹안 악 연주 속에 제수올리고
황세손 초관은 열문지 무에 맞춰 예주 올리네
우순풍조로 농사 풍년 비는 마음 간절한 속에
자연신의 은혜와 덕택이 우리나라에 이어지리라.
* ‘사직단’은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단으로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으로 되어 있다. 종묘 사당 제실과 달리 실외에 설치된 점이 다르다. 각 단에 5색토를 깔아놓았다]는 뜻이다. 방향별 색깔은 동(靑), 서(白), 남(赤), 북(黑), 이고, 중앙(黃)은 사방 토지 신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데, 높이3, 계단3, 디딤돌 3 등 천지인 3재의 뜻도 있다고 한다. 사직대제는 사신과 직신에 제를 올려 우순풍조를 기원하여 풍년 되기를 바라는 국가적인 제향이다. 양력 9월 26일 봉행하며 문화제청에서 주관하는데 전주이씨 종친들을 동원하여 제향을 모시고 있다. 사직단 서쪽 언덕 접경지점이 덕흥대원군의 사저였으며 선조대왕이 태어났던 도정궁이 있던 사직동이며 이 곳에 본채와 별채 사랑채 가묘가 있었던 곳이다.
467週忌靖陵忌辰祭參班(467주기 정릉기신제 참반)
佳林 李重敎
靖陵忌祭奉行年(정릉기제봉행년) 정릉에서 12월 9일 기신제를 봉행한 해에
丁閣參班拜肅然(정각참반배숙연) 정자각 아래 참반원 숙연히 국궁 4배하네
戀配中宗思北域(연배중종사북역) 왕비 그리워한 중종대왕 북쪽 릉 생각하고
從夫王后望南天(종부왕후망남천) 대왕 모셨던 3왕후들 강남구 정릉 바라보네
維新改革登朝後(유신개혁등조후) 연산군 폐위 후 등극해 새롭게 개혁 통치하셨고
往古安全執政前(왕고안전집정전) 정사 집행하기 전 옛적은 안전하게 살으셨네
遠近諸孫追慕裏(원근제손추모리) 원근의 많은 자손들이 추모의 정 떠 올린가운데
顯功偉業世長傳(현공위업세장전) 드러난 위대한 업적 대대로 오래 전해지리라
2011. 12, 9 서울 강남구 선정릉에서
정릉에서 12월 9일 기신제를 봉행한 해에
정자각 아래 참반원 숙연히 국궁 4배하네
왕비 그리워한 중종대왕 북쪽 릉 생각하고
대왕 모셨던 3왕후들 강남구 정릉 바라보네
연산군 폐위 후 등극해 새롭게 개혁 통치하셨고
정사 집행하기 전 옛적은 안전하게 살으셨네
원근의 많은 자손들이 추모의 정 떠 올린가운데
드러난 위대한 업적 대대로 오래 전해지리라
* ‘정릉’은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에 있는 왕릉으로 처음에 문정왕후와 함께 왕릉을 조성하려 하였으나 재실까지 강물이 차오르자 할 수없이 문정왕후는 태릉으로 정하고 중종대왕만 단릉으로 조성한 것이다. 중종은1488년 2월 5일 성종대왕의 둘째로 태어나 진성대군에 봉해진 후 연산주의 처남인 신수근의 따님과 결혼 사저로 나가 살았다. 1506년 중종반정에 조선 11대 중종대왕으로 등극하였고 1515년 사림파 조광조 등을 등용 도학정치 숭유억불 개혁정치를 시행하였다. 왕후로는 단경왕후신씨(무자식) 장경왕후(인종) 문정왕후(명종) 그밖에 후궁 소생으로 복성군 해안군 금원군 영양군 덕양군 봉성군 덕흥대원군 등 7남과 5공주와 6옹주가 있다. 중종의 왕자와 군은 9명이었으나 장경왕후(인종)과 문정왕후(명종)의 소생이 왕위에 오르자 7왕자군만 중종왕자파를 형성 7개파 후손들이 매년 양력 12월 9일을 기신제로 모셔오다가 2005년부터 문화재청에서 주관하여 제향을 모시고 있지만 제관과 집사들은 전주이씨 중종왕자파 후손들이 동원되어 모시고 있다.
追慕昌嬪安氏462週忌(창빈안씨462주기 추모)
佳林 李重敎
昌嬪忌日慕先佳(창빈기일모선가) 창빈안씨 기일에(음10.18) 조상 사모 아름다워
德廟雲仍滿九街(덕묘운잉만구가) 덕흥대원군 후손들은 九가(넓은 거리)에 가득 하구나
王后寵任留待極(왕후총임유대극) 문정왕후 총애를 받아 궁 안의 대우 극진했고
大妃眷愛特加階(대비권애특가계) 정현대비 돌보심에 특별히 빈에 배수되었네
義方敎子千年夢(의방교자천년몽) 자녀 가르침은 의방에 품은 지 오랜 꿈이었고
澤矣生孫百里懷(택의생손백리회) 궁중의 혜택 받아 성손 낳을 마음 멀리 품었네
難忘遺音常在耳(난망유음상재이) 끼치신 음성 항상 귀에 머물러 잊기 어려우니
親疎宗族致誠偕(친소종족치성해) 가깝고 먼 일가들이 지극한 정성 함께 하리라
2011, 음 11, 18 서울 동작구 흑석동 국림현충원 묘에서
창빈안씨 기일에(음10.18) 조상 사모 아름다워
덕흥대원군 후손들은 九가(넓은 거리)에 가득 하구나
문정왕후 총애를 받아 궁 안의 대우 극진했고
정현대비 돌보심에 특별히 빈에 배수되었네
자녀 가르침은 의방에 품은 지 오랜 꿈이었고
궁중의 혜택 받아 성손 낳을 마음 멀리 품었네
끼치신 음성 항상 귀에 머물러 잊기 어려우니
가깝고 먼 일가들이 지극한 정성 함께 하리라
* 창빈안씨(1499, 7, 9~1549,10, 18)는 중종의 모후 정현대비의 사랑을 받아 중종의 빈으로 추봉되었으며 궁중에서 상하 동료들 간에 예의범절 대인관계로 칭송이 높았는데 특히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측근으로 많은 배려와 사랑을 받은 은덕으로 사후에 3째 손자 하성군은 명종이 후사가 없자 대를 이어 조선 14대 선조대왕으로 등극하게 한 음덕을 베푸신 것이다. 이어 전주이씨 덕흥대원군 파시조의 생모로써 뒤에 덕흥대원군이 황해도 장단, 남양주 수락산 일대와 노들 평야, 현 국립현충원 부지 약 45만평 등 사패지 혜택을 받았으며 항상 몸가짐이 엄숙하고 조심스러을 뿐 아니라 말씨나 행동이 곱고 점잖은데다 사물을 감정하고 식별한 능력이 뛰어나 누구에게나 환심을 얻었으며, 4덕을 두루 갖추었다고 한다. 슬하에 2남 1녀를 사랑과 의방으로 키우신 후 51세로 서거하셨다.
追慕 德興大院君(추모 덕흥대원군)
17대손 佳林 李重敎
德陵祭享奉行成(덕릉제향봉행성) 5월 9일 덕능 제향 봉행이 이뤄지니
序立群孫敬慕情(서립군손경모정) 늘어선 여러 손들 경모한 정이 나오네
積德恒時身上潔(적덕항시신상결) 항시 덕을 쌓아 신상을 깨끗이 하였고
崇仁每事族中明(숭인매사족중명) 매사엔 인을 숭상하여 족친에 밝게 했네
中宗孝子生前業(중종효자생전업) 중종대왕의 효자로서 생전엔 왕실 업을 쌓았고
宣廟嚴親死後名(선묘엄친사후명) 선조대왕의 생부로서 사후에는 명성을 떨쳤네
大院追尊何有忘(대원추존하유망) 조선 처음 대원군 추존을 어찌 잊을 수 있을가
聖恩如海總歡聲(성은여해총환성) 바다와 같은 임금의 은혜에 모두 기뻐한 소리 내네
2010, 5, 9(음) 경기도 남양주시 덕송리 덕릉 재실에서
5월 9일 덕능 제향 봉행이 이뤄지니
늘어선 여러 손들 경모한 정이 나오네
항시 덕을 쌓아 신상을 깨끗이 하였고
매사엔 인을 숭상하여 족친에 밝게 했네
중종대왕의 효자로서 생전엔 왕실 업을 쌓았고
선조대왕의 생부로서 사후에는 명성을 떨쳤네
조선 처음 대원군 추존을 어찌 잊을 수 있을가
바다와 같은 임금의 은혜에 모두 기뻐한 소리 내네
* 덕흥대원군(1530, 3, 5~ 1559, 5, 9)은 조선 중종대왕의 9남이며, 선조대왕의 생부시고, 덕흥대원군 파시조이시다. 생전엔 서울 종로구 사직동 도정궁에 사셨는데 도정궁은 선조대왕이 태어나신 곳이기 때문에 도정궁으로 불리어졌다. 대원군은 영명 다재하여 학문과 덕을 쌓아 남다른 예지와 경륜을 갖추셨다. 선조2년(1569, 11) 조선왕조 최초로 대원군으로 추존되신 분이다.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9남이지만 인종과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중종의 7남인 덕흥군이 된 것이다. 대원군은 세자보다 높은 품계로 처음엔 종로구 사직동에 약 3천평의 대지를 갖고 있었으나 대를 이은 후손들은 해방 이듬해까지 겨우 본채와 제실 사랑채만을 유지하다 지금은 선조대왕의 후손이며 국회의장을 지내셨던 고 이재형의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사직동 큰길가엔 도정궁 길이란 패말이 새겨져 있다.
追慕 397周忌 嘉德大夫 益城君(추모 397주기 가덕대부 익성군)
15대손 佳林 李重敎
至望瑩前列立東(지망영전열립동) 11월 15일 묘 앞에 늘어선 자손들이
致誠時祭古今同(치성시제고금동) 정성을 다해 시제 모심은 고금이 같네
益城孝道膺恩寵(익성효도응은총) 익성군은 효도로 많은 은총을 받으셨고
宣廟加資嚫德風(선묘가자친덕풍) 선조대왕의 가자는 덕풍을 베프심이었네
不幸被誣哀惜裏(불행피무애석리) 불행이 무고 당함 슬프고 가여운 일인데
謫居當殞感傷中(적거당운감상중) 귀양지 거제에서 돌아가심 마음에 느껴 슬퍼지네
一家摠集龍山里(일가총집용산리) 일가들 모두 논산 은진 용산리에 모였으니
參拜雲仍敬慕窮(참배운잉경모궁) 참배한 먼 후손들 공경하고 사모한 정 다 했도다
2011, 11, 15(양) 충남 논산시 은진면 용산 1리 묘역에서
11월 15일 묘 앞에 늘어선 자손들이
정성을 다해 시제 모심은 고금이 같네
익성군은 효도로 많은 은총을 받으셨고
선조대왕의 가자는 덕풍을 베프심이었네
불행이 무고 당함 슬프고 가여운 일인데
귀양지 거제에서 돌아가심 마음에 느껴 슬퍼지네
일가들 모두 논산 은진 용산리에 모였으니
참배한 먼 후손들 공경하고 사모한 정 다 했도다
* 가덕대부익성군(1565, 3, 24~ 1614, 7, 1)은 덕흥대원군의 장자 하원군의 둘째이며, 선조대왕의 둘째 조카이다. 가덕대부는 품계가 종친부 종1품이며 효성이 지극하고 의기가 호탕한데다 풍류가 활발하여 선조대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광해 4년 공의 3째 아들 진릉군 태경을 역신들이 왕으로 추대하려한다는 간신 이이첨 등의 조작 사건으로 진릉군은 제주도 귀양길에 해남에서 사사되었고, 익성군은 거제도로, 1자부터 4자까지는 다 귀양 갔었는데 익성군은 귀양 3년만에 병환으로 별세하였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랴!, 하원군의 아드님은 당은군, 익성군, 장림도정, 연성수, 진산군, 진성군, 진양군 등 7명인데, 이 7개파가 덕흥대원군 대종회를 구성하고 있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1623년 인조대왕의 특명으로 4 아드님과 함께 복권되어 충남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 사방 10리를 사패지로 받았으며, 용산리에 있던 향교 터를 익성군 묘역으로 정하여 지금까지 충남 지방문화재 86호로 지정 관리하고 매년 양력 11월 15일 제향을 모시고 있다.
追慕 中義大夫 晉陵君(추모 중의대부 진릉군)
14대손 佳林 李重敎
晉陵追慕不勝情(진릉추모불승정) 진릉군을 추모하는 정 견딜 수 없는데
後裔瑩前俎豆成(후예영전조두성) 후손들 묘 앞에서 시제 올림 이루어지네
遷葬埋安鄕裏合(천장매안향리합) 남양주 별내에서 묘 옮겨 논산 선산에 화합하니
伸冤衛正世間明(신원위정세간명) 원한을 풀어내 올바름 지킨 일 세간에 밝아졌네
遺傳小石無非重(유전소석무비중) 작은 돌에 사연 새기란 전해 온 말 중하지 않음 없고
幾度君言有敢輕(기도군언유감경) 진릉군 부탁 말씀 몇 번 들어도 가벼울 것 감히 있겠는가
仁廟蒙恩名譽復(인묘몽은명예복) 조선 인조대왕 때 입은 은혜로 명예가 회복 되었으니
敦宗睦族保家聲(돈종목족보가성) 전주이씨 진릉군 종족의 돈목으로 집안 보호한 소리 내네
2011, 11, 15(양) 충남 논산시 은진면 용산 1리 묘역에서
진릉군을 추모하는 정 견딜 수 없는데
후손들 묘 앞에서 시제 올림 이루어지네
남양주 별내에서 묘 옮겨 논산 선산에 화합하니
원한을 풀어내 올바름 지킨 일 세간에 밝아졌네
작은 돌에 사연 새기란 전해 온 말 중하지 않음 없고
진릉군 부탁 말씀 몇 번 들어도 가벼울 것 감히 있겠는가
조선 인조대왕 때 입은 은혜로 명예가 회복 되었으니
전주이씨 진릉군 종족의 돈목으로 집안 보호한 소리 내네
* 중의대부 진릉군(1594, 6, 23~ 1612, 11, 7) 태경은 덕흥대원군의 둘째 증손자 익성군의 3자로 태어나 진릉부정으로 품계를 받았다. 1609년 중의대부 진릉군으로 품계가 올라 출계하여 선조대왕의 6자 순화군의 양자가 되었다. 건장하고 영특하여 학문 탁마에 힘써 장래가 촉망되어 소문이 자자하였음으로 광해가 시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1612년 어보와 관인을 위조하여 군역을 피하려고 했던 김정립을 황해도군수 신율이 체포하여 조사한 과정에서 이호민 윤안성 송상인 등이 날짜를 정하여 서울을 침범한 뒤 진릉군 태경을 역신들이 왕으로 추대하고 이이첨 등 대북파를 제거하려는 모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간신 이이첨 등의 조작 사건으로 진릉군은 제주도 귀양길에 해남에서 사사되었고, 그 자리에서 ‘나의 억울한 사연을 작은 돌에 새겨 전하라’는 말을 남겼다. 친형 진천군이 시신을 수습하여 남양주 별내면에 장사지냈고 1623년 인조대왕 특명으로 복권되었다. 1975년 진릉 후손의 주선으로 논산 은진면 용산 1리 선산으로 이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德興大院君派晉陵君系金塘時祭有感(덕흥대원군파 진릉군계 금당시제유감)
佳林 李重敎
金塘時祭奉行天(금당시제봉행천) 금당 가학리 시제를 봉행한 날에
參拜雲仍感慕先(참배운잉감모선) 참배한 먼 자손 감회와 사모의 정 앞서네
栢老仁風明後史(백노인풍명후사) 6세조 백헌 할아버님 인풍은 뒷 역사에 밝혀졌고
湖翁孝行啓前緣(호옹효행계전연) 8세조 성돈 할아버님 효행은 앞 인연에 열렸었네
舊恩烈祖齊家篤(구은열조제가독) 여러 조상님 옛적 은혜로 돈독히 재가했고
遺愛連孫繼世全(유애연손계세전) 대이은 자손들 조상 사랑에 온전히 세상 이었네
和集晋陵齋駕鶴(화집진릉재가학) 진릉 후손은 가학리 재실에 화목하게 모여
恭伸俎豆萬年傳(공신조두만년전) 공경 다해 제사 올림 만년토록 전하리라
2015, 5, 3 금당 가학리 재실에서
금당 가학리 시제를 봉행한 날에
참배한 먼 자손 감회와 사모의 정 앞서네
6세조 백헌 할아버님 인풍은 뒷 역사에 밝혀졌고
8세조 성돈 할아버님 효행은 앞 인연에 열렸었네
여러 조상님 옛적 은혜로 돈독히 재가했고
대이은 자손들 조상 사랑에 온전히 세상 이었네
진릉 후손은 가학리 재실에 화목하게 모여
공경 다해 제사 올림 만년토록 전하리라
* 전주이씨 덕흥대원군파 익성군소종 진릉군계 시제 유감이란 금당면 가학리 제실에는 6세조 백헌 휘 기영 할아버님과 7세조 휘 희경 할아버님, 8세조이신 입도조 휘 성돈 할아버님 이하 여러 조상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양력 4월 3째 토요일 11시에 시제를 올립니다. 경향 각지의 일가 분들과 금당도에 거주한 일가들이 모여 공경을 다해 정성껏 제수를 마련 엄숙하게 시제를 모십니다. 진릉군(1594, 6, 23~1612, 11, 7)은 사사된 후, 익성군 장자 진산군의 3자 오성군을 양자로 세웠으니, 뒤를 이은 휘 기영은 도양읍 상촌 산불이에 정착하였고, 휘 희경은 찰방으로, 입도조 휘 성돈은 어머니 신안주씨를 모시고 금당 가학리에 정착 대를 이어 후손이 번창 하였다. 익성군의 아드님은 진산군, 진천군, 진릉군, 진평부정,진계부정 등 진주소씨 소생이며(논산은진), 측실에서 양산수(김포) 등 6개파가 익성군 파를 형성하고 있다.